14장 마법사 시르안
“어서 오세요, 아가씨. 조금 전에 서점에서 아가씨가 주문하신 거라며 책을 배달하고 갔습니다만 아가씨께서 주문하신 게 맞는지요?”
집에 도착하자 트레샤나 부인이 단정한 모습으로 마리안을 맞이했다.
“네, 맞아요. 제 방에 좀 올려다 주실래요?”
“이미 그렇게 해뒀습니다. 그런데 그건 무엇인가요?”
“길에서 다친 새를 주웠어요.”
마리안이 들고 있는 주황색 새를 본 트레샤나 부인이 질색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친 새를 들고 오시다니, 무슨 병균이 묻어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가져오시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둬서 죽게 할 수는 없잖아요.”
“축 늘어진 것을 보면 이미 죽은 게 아닌가요?”
“아직 몸이 따뜻하고 심장도 뛰고 있어요. 탈진한 건지도 모르니까 설탕물을 먹여보고 상태를 좀 지켜보려고요. 내 방에 따뜻한 설탕물과 티스푼도 함께 올려 보내도록 해요, 트레샤나 부인. 그리고 이 새를 담을 만한 종이 상자도 필요해요.”
“설마 이걸 방에 두시겠다고요?”
“네, 내 방에서 돌볼 거예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트레샤나 부인.”
마리안이 정색을 하자 트레샤나 부인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분부대로 하지요. 곧 만찬이 준비될 예정이니 아가씨께서도 식당으로 내려오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트레샤나 부인.”
마리안은 적당히 트레샤나 부인을 돌려보내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쓰고 있던 모자를 내려놓은 뒤, 마리안은 수건을 한 장 깔고 새를 내려놓았다. 새는 이제 눈을 뜨고 있었는데 기운이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설탕물을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
트레샤나 부인이 그래도 빨리빨리 일을 해준 덕분에 마리안은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다친 새에게 설탕물을 먹일 수 있었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종이 상자를 놓고는 새를 그 안에 넣고 천으로 덮었다.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네가 먹을 만한 것을 챙겨서 가져올게.”
새는 설탕물을 먹고 난 뒤로 훨씬 생기가 넘치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마리안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새가 얌전히 상자 안에 앉아있는 데다, 지난번에 아스터와 함께 구조한 하얀 새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겁을 집어먹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은 늘 그렇듯 동생의 발랄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이제 알리체가의 저녁 식탁은 성대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귀족 가문의 만찬의 구색을 갖출 만한 수준은 되어있었다. 마리안은 무엇보다 동생이 마음껏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그 점이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 내일 다시 돌아가야겠구나.”
그때 들려온 남작 부인의 목소리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체 남작 부인은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가를 닦으면서 마리안이 오지 않는 동안 쓸쓸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그래도 칼멘 후작님께서 네가 오지 않을 때도 가끔 들르신단다.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지 몰라. 너도 그분께 늘 잘해드리렴.”
“…….”
마침 디저트로 나온 과일을 먹고 있던 마리안은 식욕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작 부인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남작 부인은 마리안이 불우한 처지에서 칼멘과 같이 신분이 높고 부유한 노신사를 만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일은 알리체가같이 몰락의 길을 겪지 않아도, 귀족 가문에서는 흔하게 일어났다. 나이가 어린 영애와 나이가 많은 귀족 남자의 정략결혼은 사교계에서도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마저 노귀족이 어린 아가씨와 재혼을 하면 뒤에서 쑥덕대며 비웃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 종일 나갔다가 왔더니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래,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는구나. 어서 올라가서 쉬렴.”
남작 부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말하고는 이제 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리안은 식당을 떠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딸을 넘겨야 했던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칼멘이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욱이 칼멘은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점잖고 신사적인 사람이니 그동안 마리안이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하던 남작 부인으로서는 안심이 됐을지도 모른다.
마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자꾸만 한숨이 늘어가는 것 같았다.
식사 전 마리안이 촛불을 한 개만 켜놓고 가서 방은 꽤 어둑어둑했다. 마리안은 탁자 위에 주방에 들러 직접 가져온 빵 한 덩어리와 과일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방 안의 불을 좀 더 밝히고 새를 넣어둔 상자에 덧씌웠던 천을 치웠다.
“잘 있었어?”
새는 잠을 자고 있었는지 눈이 부신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귀여워라.”
마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당근을 연상하게 하는 붉은 주황빛의 새가 검은 눈을 깜빡이며 약간 멍한 듯이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은 상당히 귀여웠다.
“배고프지 않아? 먹을 걸 좀 가져왔는데.”
마리안이 빵 조각을 떼어내서 상자 안에 넣어주자 새가 눈을 깜빡이더니 두 발로 통통 튀듯이 다가와서 조각을 낚아챘다.
“그래도 넌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네.”
마리안은 새가 잘 먹는 모습에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빵 조각을 뜯어내기 위해 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나이프로 빵을 얇게 썰어 잘게 조각을 낸 다음, 상자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하마터면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뻔했다.
“안녕, 네가 마리안 알리체 맞지?”
상자가 놓여있던 곳에서 가까운 그녀의 침대 위에, 주황빛 새털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나는 시르안이라고 해. 이봐, 진정해.”
마리안이 자기도 모르게 나이프를 꽉 쥐고 들어 올리자 시르안이 당황해서 외쳤다.
“난 블랑디르 백작의 부탁으로 널 만나러 왔어. 네 외삼촌 말이야.”
외숙부를 언급하는 바람에 마리안의 표정이 간신히 누그러졌다.
“그럼 외숙부님이 편지에 적어 보낸 사람이라는 게 당신이에요?”
“그래, 나야. 사실은 약속 시간에 널 바로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네 뒤를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시간에 가지 못했어. 몰랐어?”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따라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마리안은 전혀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들이 제가 외숙부에게 연락을 한 것도 알고 있을까요?”
문득 마리안은 몰리아의 집에서 편지를 두고 나왔던 게 걱정이 되었다. 몰리아가 블랑디르 백작가에 찾아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제 아침 일찍 몰리아의 집에 가는 길도 미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불안했다.
그러나 시르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너를 그냥 따라다니는 거지, 네가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거든. 처음부터 네가 누굴 만나러 거기에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어.”
마리안은 그 말에 안도했다.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마티아스에게 들은 바로는 네가 라베인 왕가의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고, 그게 알리체와 블랑디르 가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며?”
마리안은 시르안이 거리낌 없이 외숙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 시르안은 20대 청년이었고, 외숙부는 마리안이 기억하기로는 이제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장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 마법사들의 나이는 겉보기와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알리체 가문은 차치하고서라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블랑디르 가문은 제가 알고 있는 비밀로 예전처럼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흐음.”
시르안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아스가 넌 나이가 어리지만 허튼소리를 할 애는 아니라고 했어. 어쨌든 믿어보지. 그래서 그 비밀이 뭐야? 나한테 알려주면 내가 마티아스에게 전달해 줄 거야.”
“당신이 그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건가요?”
“내 이름은 시르안 울리에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마법사이고, 마법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가 가볍지 않다는 건 알겠지?”
그러자 마리안은 짙은 회색과 녹색이 뒤섞인 시르안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왕세자 클로타르 리엘 라베인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어요. 그는 외딴 성채에 유폐되어 있는 상태죠.”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지 시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중요한 건 그것만이 아니에요. 왕세자 클로타르는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해요. 그가 지금 내보이는 신성력은 모두 그의 쌍둥이 형제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힘이죠. 라베인 왕가는 이 사실을 알면서 쌍둥이 왕자를 유폐시키고 이 모든 것들을 비밀에 부쳤어요.”
“아니, 잠깐만.”
시르안이 마리안의 말을 중간에 막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네가 지금 얼마나 엄청난 소리를 한 줄 알아?”
시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까지 내저었다.
“클로타르 라베인이 신성력을 쓰지 못한단 말이야? 어쩐지, 그동안 그 녀석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이 그거였나…….”
시르안은 홀로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넌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저에 대해 이미 조사를 해보셨겠지만 저는 루켄 바사먼이라는 이름의 고리대금업자에게 팔려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칼멘 후작을 만나 클로타르 왕세자의 쌍둥이 형제가 유폐된 탑으로 가게 되었죠. 지난 3개월 동안 저는 그 탑에 갇힌 왕자님을 돌봤어요.”
시르안은 혀를 내둘렀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하지만 왕세자가 신성력을 가진 왕자에게서 힘을 뺏으려면 여러 가지로 복잡했을 텐데.”
“네, 고문과 학대를 자행하고 마법사의 도움을 얻어 힘을 빼앗았어요. 항상 푸른 마법진을 그린 곳에서 그 일을 하더군요.”
“10년쯤 전부터 왕실 마법사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도 그래서였나…….”
시르안은 여전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말해준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더 있다고?”
“네.”
마리안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왕세자는 생식 능력이 없어요. 본인의 입으로 말한 거예요. 그래서 왕세자비와 생김새가 비슷한 저를 자신의 쌍둥이 형제와 지내게 했어요. 왕세자는 제가 아이를 낳아준다면 그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저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겠다고 말했죠.”
“…와, 굉장하네.”
시르안은 순간 입을 벌리고 마리안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소감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넌 왜 그런 걸 마티아스에게 알리는 거지? 클로타르가 너에게 제안한 건, 사실 기분은 좀 나빴을지 몰라도 너한테는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텐데.”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욕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마리안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략결혼 또한 결혼 장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부귀영화를 보장받고 국왕이 될 왕세자의 비호를 받게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이득이 될 수 있었다.
마리안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제안이 마리안에게도 상당한 이득이 되기 때문에 클로타르와 칼멘이 비록 아직 마리안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녀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리안은 그래서 단호하게 내뱉었다.
“전 클로타르 그 자식이 너무 싫어요.”
“…….”
순간 시르안이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안은 힘줘서 덧붙였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 자식 면상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푸훗. 푸하하하!”
시르안이 폭소했다.
마리안은 그가 너무 큰 소리로 웃어서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지만 시르안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눈물이 날 때까지 마음껏 웃은 뒤 손을 휘저어 보였다.
“괜찮아. 밖에서는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을 거야. 네가 저녁을 먹으러 간 동안 방음 마법을 걸어놨어.”
마리안은 안도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가 자신의 방에 남몰래 마법을 걸었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앞으로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 중에는 이 마법사도 포함될 것이 뻔했다.
“아, 정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인데. 그래도 클로타르가 르샤베에서는 아가씨들한테 인기가 많은 줄 알았는데. 걔 예쁘잖아.”
“하나도 안 예뻐요. 그리고 예뻐도 성격이 그 모양인 건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클로타르에게 뺨도 맞아봤는걸요.”
“뭐라고? 클로타르 그 미친 자식이 널 때렸다고?”
갑자기 시르안이 버럭 소리를 질러서 마리안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네, 뺨을 후려쳐서 코피가 터졌었죠.”
“미친놈이잖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화를 내는 시르안을 보며 마리안은 덧붙였다.
“고마워요, 같이 욕해주셔서. 그날 이후로 분해서 며칠 못 잤거든요.”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런 일을 겪었다면 후려치고 싶어지겠지. 그래, 그렇다면 네가 클로타르의 말을 듣고 마티아스에게 함정을 판 건 아닌 것 같구나.”
“제가 함정을 판다고요?”
마리안이 깜짝 놀라 되묻자 시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국왕도, 클로타르 그 녀석도 마티아스를 눈엣가시로 여기잖아. 너도 그걸 아니까 마티아스에게 연락한 걸 거고.”
마리안은 침묵했다.
“네 할아버지 대에 있었던 일로 블랑디르도, 알리체도, 그리고 여러 가문들이 중앙 정계에 더 이상 발도 못 붙이게 되긴 했지만, 국왕이나 클로타르라면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겠지.”
마리안이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저 혼자 살겠다고 외숙부네 가문을 클로타르에게 팔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이 세상에는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 사람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으니 조심하는 것뿐이니까. 원래 부와 권력 앞에는 부모 형제도 없는 법이잖아.”
마리안은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부와 권력 앞에 부모 형제도 없다는 말에 바로 아스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블랑디르 가문을 망하게 할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어요. 어차피 알리체가는 망했어요. 조만간 작위마저 잃게 될 텐데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왕실은 알리체를 시작으로 나머지 가문들도 몰락시키고 싶어 하겠지.”
마리안은 이마를 찌푸렸다.
“전 다른 가문의 사정이 어떤지는 몰라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알리체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친척들과의 교류도 다 끊겼고, 다른 귀족 가문과 연락한 적도 거의 없으니까요.”
사실 마리안은 다른 가문들의 사정이 그렇게까지 나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중앙 귀족으로서 누렸던 달콤한 권력을 되찾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저는 블랑디르나 다른 가문을 팔아서 클로타르의 편에 붙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필요하다면 신 앞에서 맹세할 수 있어요.”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진심이라는 걸 알겠어. 그럼 네가 이런 일을 벌인 목적은 뭐지? 설마 마티아스를 끌어들여서 클로타르를 물 먹이고 싶은 게 전부라는 거야?”
마리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시르안이 더 말해보란 표정을 하자 마리안은 대답했다.
“탑에 유폐된 클로타르의 형제, 아스터 왕자를 구하고 싶어요. 그분은 왕세자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 하세요. 저는 그분의 신성력을 제 눈으로 확인했고, 그분이야말로 차기 국왕이 되어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
방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르안은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거둔 채 진지한 얼굴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아스터 왕자께서 왕세자의 자리에 오른다면 알리체가도 비로소 예전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겠죠. 그러니 저는 클로타르에게 빌붙기 위해 블랑디르 가문을 팔 필요가 없어요.”
마리안이 미소를 그려 보이자 시르안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넌 지금 네 외숙부에게 엄청나게 크고 심각한 문제를 던져줬어. 너도 잘 알고 있지?”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 몰래 숨겨둔 쌍둥이 왕자가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클로타르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그에게 망신을 주는 것과, 그 쌍둥이 왕자의 편을 들어 왕세자를 갈아치우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전자는 그나마 가볍게 치고 빠질 수 있었지만 후자는 멸문을 각오해야 했다.
“아스터 왕자님에게는 힘이 되어줄 분들이 필요합니다. 귀족연합이 그분의 편이 되어준다면 왕자님은 결코 그 일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마리안은 간결하게만 대답했다.
시르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갑자기 물었다.
“너, 그 아스터란 애를 좋아해?”
마리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타르와 아스터 왕자님을 두고 누가 국왕의 재목인지 묻는다면 전 단연코 아스터 왕자님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시르안은 그런 마리안의 얼굴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지만……. 뭐, 좋아. 네 이야기는 잘 알겠어. 그럼 넌 탑에 언제 돌아가는 거지?”
“내일 저녁에요.”
“그곳의 위치는?”
“몰라요.”
“모른다고?”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시르안을 보며 마리안은 대답했다.
“처음에는 눈을 가린 채 갔었고, 그 후로는 마차의 덧창을 닫게 해서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어요. 성채 안의 병사들은 그곳의 장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고요.”
마리안이 대략적으로 성채 밖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자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짐작 가는 곳이 없지만 좀 더 조사해 보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거야. 네 생각에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 같단 말이지?”
“전 게이트에 가본 적이 없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단지 이곳보다 훨씬 기온이 낮은 것을 보면 북쪽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차를 달려가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두 시간을 넘지 않더라고요.”
“흠, 알았어. 장소를 알아보는 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시르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리안이 서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마리안이 조금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서자 그는 마리안이 새에게 주려고 들고 올라왔던 빵 덩이와 작은 사과 한 개를 챙겨 품에 넣었다.
“저녁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일단 네 이야기는 잘 알았으니까 마티아스에게 전할게.”
마리안은 그가 팔을 쭉 뻗더니 이내 곧 작은 새로 변신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황색 새가 날아올라 창틀에 앉자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외숙부의 답변은 어떻게 전달받을 수 있는 거죠?”
시르안이 새의 모습을 한 채 노래하듯 대꾸했다.
“걱정 마. 네가 있는 곳으로 내가 찾아갈 테니까.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고는 마리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
마리안은 시르안이 훌쩍 날아올라 사라진 하늘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체 왜 새의 모습을 하고 자신의 앞에 뚝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 묻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가 그냥 무시하고 가버렸으면 어쩌려고 한 거지.’
마리안은 어쩐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들은 괴팍하다고들 하는데 시르안을 보니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과연 외숙부가 움직여 줄까.”
마리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외숙부 마티아스 블랑디르 백작은 굉장히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10년 전에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던 마리안의 부모님이 큰돈을 빌리고 되갚지 못하면서 알리체가와 블랑디르 백작가는 공식적으로 절연했다.
당시에 블랑디르 백작이 절연까지 하고 돌아선 배경에는 단순히 금전 문제만 걸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마리안의 아버지, 알리체 남작의 무능함과 남작 부인의 이기적인 처신이었다.
딸인 마리안도 자신의 부모님을 감쌀 수가 없을 정도로 부모님의 대처가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본래 알리체 남작가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마리안의 할아버지 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조부인 알리체 남작이 국왕의 눈 밖에 나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면서 알리체 남작가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고, 아버지 대에 와서는 그나마 풍족하던 재산마저 잃었다.
마리안의 할아버지가 중앙 정계에서 배제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스터와 클로타르의 조부뻘이 되는 당시 르샤베 왕국의 국왕은 인접한 이웃 국가 리카프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을 앞두고 알리체 남작가와 마리안의 외가인 블랑디르 백작가를 포함한 20여 개의 귀족 가문 연합이 전쟁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당시 르샤베 왕국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타국과 전쟁을 할 상태가 아니었던 데다, 병력이나 축적한 자원도 리카프와 비교해 우세한 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리카프와의 전쟁을 억지로 감행했고, 결론부터 말하면 르샤베 왕국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된 국왕은 성급했던 자신의 결정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지지했다면 결코 이러한 패전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들을 모두 중앙 정계에서 몰아냈다.
이 일은 마리안의 아버지가 블랑디르 백작가의 차녀였던 마리안의 어머니와 약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벌어진 것으로, 마리안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었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본래 이 귀족연합은 왕국에 셋밖에 없는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베이퍼스 공작가의 아래에 결속되어 있어 여전히 상당한 힘과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알리체가가 경제적인 위기를 겪으며 가장 먼저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아직도 이들 세력은 국왕조차 감히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아스터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왕세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이 귀족연합을 먼저 떠올렸다. 외숙부만 도와준다면 그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숙부가 외면한다면 이 일은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
마리안은 아스터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마리안은 그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었다. 그녀는 빚조차 갚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팔아야 했던 스물두 살의 여자에 불과했다.
과연 외숙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려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거절한다면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마리안은 그날 밤늦게까지 창밖을 바라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 번째 휴가의 마지막 날은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갔다. 마리안은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동생과 함께 거리에 나가 아스터에게 선물로 가져갈 파운드케이크와 쿠키를 몇 종류 구입했다.
그러고는 오후 늦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칼멘의 마차를 타고 성채까지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칼멘이 직접 마리안을 데리러 오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홀로 마차에 앉아 가는 길이 차라리 편해서 좋았다. 칼멘이 있든 없든 마부는 덧창을 모두 닫아버려 마리안이 밖을 볼 수 없게 했기 때문에 마리안은 마차 좌석에 편히 등을 기대고 잠을 청했다.
“마리안!”
3박 4일 만에 만나는 아스터는 정말로 반갑게 마리안을 반겨주었다. 마리안의 휴가가 두 번째라 그런지 그는 지난번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한 얼굴로 마리안을 맞았다.
“아스터,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당신을 매일 생각했어요.”
마리안은 아스터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마리안의 말은 진실이었다. 바쁘게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마리안은 단 하루도 아스터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마리.”
아스터는 조용히 웃으며 품 안에 안겨오는 마리안을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에 그리고 눈꺼풀과 콧잔등에 입을 맞춰줬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바쁘게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마리안과 달리, 그저 이 외로운 탑 안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아스터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묻어났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품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키스했다. 그 키스는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번에는 제법 성과가 있었어요.”
한참 만에 키스가 끝났을 때 마리안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아스터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매우 많았던 탓이다.
“성과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 마리가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알고 싶어.”
아스터가 마리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흐트러진 마리안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이번엔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있었어?”
마리안은 웃으며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그러고는 가져온 가방 속에서 필사해 온 종이와 몇 가지 책을 꺼냈다.
“이건 뭐지? 『까칠한 공작님의 은밀한 초대』?”
“아앗! 아녜요. 그건 어디까지나 위장용 책이란 말이에요.”
아스터가 집어 드는 책을 보고 기겁을 한 마리안이 얼른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통속소설이에요. 재미있긴 하지만 아스터가 봐야 할 책은 아니라고요.”
마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책들을 내밀었다.
“굉장히 재미있어 보이는데. 나는 읽으면 안 돼?”
아스터가 아쉬운 얼굴을 해서 마리안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고요. 왕립도서관에서 마나 운용에 대해 언급한 책을 필사해 온 거예요.”
마나 운용이라는 말에 아스터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잘 몰라서 제대로 정리를 해 온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어보면 아스터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 가져왔어요. 그리고 여기 책들은 신학과 마법에 대한 교양서적들인데 이쪽들도 읽어보면 좋을 거 같아서요.”
마리안이 내민 책들을 보며 아스터는 한동안 책장을 넘겨보았다.
“고마워.”
잠시 후 그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마리. 너에게 소중한 휴식 시간마저 날 위해 써줘서.”
“아…….”
마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전 늘 아스터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런 마리안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아스터는 그녀를 좀 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마리안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마리안이 웃으며 입술을 벌리자 아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혀에 자신의 것을 얽었다. 마치 그녀를 맛보고 음미하듯 농밀한 키스가 다시금 이어졌다.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면서 아스터가 자연스럽게 마리안의 옷을 풀어 헤치고, 마리안의 두 팔도 아스터의 허리에서 어느덧 그의 바지춤의 단추를 풀고 있을 때였다.
두 연인에게 결코 반갑지 않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과 아스터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마리안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신음하듯 속삭이자 아스터가 마리안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막 해가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조금씩 붉은색이 더해지는 수해의 하늘 아래,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클로타르야. 이 시간에 대체 어쩐 일이지?”
아스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해서 마리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섰다. 서둘러 옷매무새를 다듬고 필사한 종이와 책들을 전부 잘 정리해서 클로타르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겼다.
그 일이 끝나자 마리안은 불안한 얼굴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계절은 여름이건만 마치 한겨울처럼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아스터와 키스를 나누며 달아올랐던 몸도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왜 벌써 왔을까요?”
아스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도 마리안과 같이 의문투성이였다.
클로타르는 보통 한 달을 주기로 탑에 찾아왔는데 대체로 만월의 밤에 왔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2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해가 저물기도 전에 온 것이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곧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안녕, 마리. 집에 갔었다고 들었는데 잘 쉬고 왔어?”
클로타르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마리안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마리안은 마지못해 클로타르를 향해 절했다. 오늘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지 클로타르는 평소처럼 칼멘과 마법사만을 대동하지 않고 로브로 온몸을 꽁꽁 싸맨 여자 세 사람을 데리고 왔다.
마리안은 불안감으로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클로타르에게 절을 하느라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인사가 너무 소극적인데.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마리? 휴가도 내주고, 월급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금화도 지급하고, 칼멘 후작이 네 누더기 같은 옷을 어떻게 좀 해야겠다고 해서 옷도 사줬는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내가 섭섭하잖아.”
클로타르가 방긋 웃으며 마리안을 바라봐서 마리안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저하의 관대한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은 저하께서 오실 줄 몰라 당황하여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아. 애초에 촌뜨기 같은 너에게 세련된 예절을 기대하진 않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하도록 해. 칼멘이 널 후원하고 있는데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서는 안 되잖아, 안 그래?”
“…저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마리안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쥔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혐오감과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에 힘을 줘서 참아내고 있었다.
클로타르는 그제야 마리안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마리안이 돌아왔는데 내가 와서 실망했겠지? 밤새도록 저 아이와 짐승처럼 뒹굴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아스터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클로타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어서 별로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리안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아스터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스터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의연하게 무시할수록 클로타르가 더 약 올라 하고 분노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들이닥칠 마음은 없었는데 말이야. 한 달에 한 번 널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미는데 이번에는 두 번이나 봐야 하다니, 정말로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어.”
클로타르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시기에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해서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왕비의 여동생으로 클로타르와 아스터의 이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마리안은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지만 백작 부인이 왕비와 매우 사이가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좋아서 온 게 아니니까 날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해. 가족끼리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튀어나와서 너무나 뜻밖이었다. 과연 왕세자가 아스터나 카디아나 백작 부인을 가족으로 생각하기나 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자, 끌고 가.”
기사들이 다가와 아스터의 양팔을 낚아채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클로타르와 저 기사들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
마리안은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평생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클로타르만큼은 예외였다. 정말로 마리안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클로타르의 가슴에 칼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리안의 마음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클로타르는 끌려 나가는 아스터를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마리안에게 다시 다가왔다.
3권에서 계속#키쿠절갠
탑에 갇힌 왕자님 3권#키쿠절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