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왕립도서관
마리안이 다시 알리체가의 저택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대략 열흘이 흐른 뒤였다.
날개 다친 하얀 새를 구조해서 날려 보낸 날, 예고도 없이 클로타르가 들이닥쳤다. 작은 새 덕분에 잠시 클로타르를 잊고 있었는데, 클로타르는 마치 마리안이 방심한 걸 비웃기라도 하듯 찾아온 것이다.
그 뒤의 상황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마리안은 수면 부족으로 눈 밑이 시커멓게 되어 알리체가에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신의 방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클로타르에게 신성력을 모두 뺏기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아스터를 간병하느라 마리안도 극심한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더욱이 지난 열흘 동안 열에 들떠 괴로워하는 아스터를 보면서 마리안이 느껴야 했던 심적 고통은 매우 컸다.
칼멘이 집에 가라고 했을 때, 마리안은 이번만큼은 도망치듯 그의 뒤를 따라 귀가했다. 아스터가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지만, 마리안 자신이 너무 힘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안이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새벽이었다.
아스터가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악몽에 마리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8월이 시작되면서 이제 본격적인 한여름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이라 방 안은 비교적 서늘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마리안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마리안은 비틀거리며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녀는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창문 앞에 앉아있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마리안의 방에서 르샤베 왕국 왕궁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곤 했었다. 조금씩 여명이 밝아오는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마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왕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기를 부수고 싶네…….’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반역자로 몰릴 만한 무시무시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마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직접 부술 수 없다면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어려서는 저곳을 동경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직 철없는 꼬마 아가씨였던 시절에는 멀어서 흐릿하게 보이는 왕궁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도 많았다.
주로 왕궁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왕자님과 춤을 춘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왕궁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멋진 공작님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통속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꿈꿨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리안은 무척 차가운 시선으로 왕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타르를 향한 혐오감 덕분에 왕가를 향한 존경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리, 네가 내 편이라니 나는 무척 기뻐. 든든한 아군을 얻었으니까 말이지.’
마리안은 뱀처럼 교활하게 웃는다는 말이 고전소설에서나 나오는 관용어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클로타르의 환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것은 바로 뱀처럼 교활하게 웃는다는 문구였다.
물론 그런 클로타르를 마주 보며 함께 미소 지었던 자신에게도 마리안은 구역질이 났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조만간 여배우에 도전해도 될 것 같아.’
감정을 숨기고 웃는 얼굴로 연기하는 것에 갈수록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마리안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이 아침부터 혐오스러운 클로타르에 대해 길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었다. 오늘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단장을 마친 마리안은 불을 켜지 않고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알리체가의 저택은 여전히 깊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덕분에 그녀를 감시하는 시선은 없었다. 트레샤나 부인도 이 시간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마리안은 부엌 옆의 작은 쪽문에 서서 정원을 유심히 살폈다. 정원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서 자라난 마리안에게는 정원의 구조물이 잘 보였다. 한참이나 주의 깊게 살핀 끝에 마리안은 정원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안은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전에 늘 이용하던 길을 통해 빠른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마을의 공동 빨래터였다. 이 시간이면 몰리아가 이미 빨래 바구니를 이고 공동 빨래터에 나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마리안은 용건을 해결하고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 속도를 높였다. 해가 뜨기 전의 서늘한 새벽바람이 기분 좋게 마리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리안이 공동 빨래터에 도착했을 때는 근방의 아낙들 서너 명이 모여 벌써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범한 주부가 아니라 세탁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마리안은 자신을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한구석에서 열심히 비누 거품을 내고 있는 몰리아에게 다가갔다.
“몰리아. 잘 지냈어요?”
“이게 누구야, 마리잖아.”
“일하는데 찾아와서 미안해요.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요.”
“아, 그래.”
몰리아는 이미 땀이 가득 맺힌 얼굴을 앞치마로 훔치며 마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부탁한 일은 잘 끝났어. 그리고 일주일 전에 편지가 왔어.”
그 말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아예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답장이 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무척 고무되었다.
“그 편지를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몰리아가 난감한 얼굴을 해서 마리안은 웃었다.
“알아요. 제가 집에 가지러 가도 될까요?”
“아아, 물론이야. 우리 집 탁자 옆에 선반 알지? 거기에 책들이 쌓여있는데 그 맨 아래에 보관해 뒀어.”
“정말 고마워요. 혹시 답장을 보내야 하면 새로 써서 몰리아가 보관해 둔 자리에 넣어둘 테니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답장을 보낼 게 있으면 오후에 전달해 둘게.”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안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자 몰리아가 눈을 찡긋거렸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래. 그보다 알리체가의 세탁 일을 내가 다 차지하게 됐어. 정말 고마워, 마리.”
“별말씀을요. 제가 더 고맙죠.”
“우리 집 열쇠는 제라늄 화분 아래에 두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마리안이 다가서며 포옹하려 하자 몰리아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괜히 예쁜 옷을 젖게 만들지 말고 빨리 가봐. 다음에는 내가 집에 있을 때 놀러 오고.”
“알았어요. 그럼 또 올게요.”
마리안은 몰리아의 무뚝뚝한 어조에 웃어 보이고는 즉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 근처의 제라늄 화분 밑에서 숨겨둔 열쇠를 찾아낸 마리안은 불이 모두 꺼져있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져있다고는 해도 이제는 꽤 밝아져서 집 안의 풍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칼스와 스엘라는 아직 자고 있었다.
마리안은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탁자로 다가가 편지 봉투를 찾았다. 그녀는 금세 외숙부, 블랑디르 백작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찾아냈다.
마리안은 긴장으로 손끝이 차갑게 식어감을 느끼며 창가로 다가갔다. 인장을 뜯어내고 희미한 햇빛에 의지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집중하느라 찌푸려졌던 표정은 편지를 다 읽었을 무렵에는 꽤 환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블랑디르 백작은 짧은 안부와 함께 회답을 보냈다. 마리안은 외숙부의 편지를 내려놓고 미리 가져온 편지지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잉크가 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분주하게 인장까지 찍은 마리안은 새 편지를 기존의 편지가 있던 곳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천으로 감싼 은화 한 개를 함께 넣어두었다.
몰리아는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마리안은 두 번이나 수고해 준 몰리아에게 성의를 표현하고 싶었다. 몰리아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전달한 편지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모든 일을 끝내자 마리안은 몰리아의 집에서 나와 문을 잠갔다. 주의 깊게 몇 번이나 주변의 기척을 살폈지만 여전히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클로타르와 칼멘은 집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마리안을 감시하는 것은 아직 마리안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서이지 마리안이 자신들을 배신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고작 20대에 불과한 몰락한 귀족가의 여식이 왕세자와 그가 총애하는 후작을 거역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비록 칼멘이 마리안이 제법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칼멘은 나이 어린 마리안을 다루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은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한 데다 권위에 순종했으며, 감히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마 마리안도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면 그런 순진무구한 귀족 영애로 성장했을 것이다.
“감시가 따라붙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했는데.”
언덕 사이의 지름길을 통해 저택으로 돌아온 마리안은 이제야 고용인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방에 돌아와 도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한번 외숙부의 편지를 살펴보았다.
블랑디르 백작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네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연락을 주면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즉시 사람을 보내겠다.’
아침 일찍 몰리아를 만나고 돌아온 마리안은 그날 점심때가 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트레샤나 부인이 방 앞에서 자꾸만 서성이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마리안은 그럭저럭 푹 쉴 수 있었다.
아스터를 돌보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그녀는 푹 자고 나자 한결 여유를 되찾았다. 이제는 마음도 제법 가벼워져 있었다.
그날 오후 내내 집안을 돌보고 동생과 놀아주느라 시간을 보낸 마리안은 휴가 셋째 날이 되자 드디어 저번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왕립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마침 이번에는 휴가 날짜를 하루 더 얻어서 좀 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마차를 준비해 줘요, 트레샤나 부인.”
“어디로 가실 건가요?”
“왕립도서관에 좀 가고 싶어요.”
아침 일찍 트레샤나 부인에게 행선지를 밝힌 마리안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책들이 어떤 건지 아세요?”
“유행하는 책 말씀입니까?”
조금 뜻밖이라는 얼굴을 해 보이는 트레샤나 부인을 보며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는 곳에서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다 본 거 같아서 도서관을 좀 둘러보려고요.”
“왕립도서관을 이용하시려면 미리 신청서를 작성하셔야 할 텐데요.”
“칼멘 후작님께 미리 부탁드려뒀어요. 하지만 왕립도서관의 대출은 엄격하다고 들어서 근처 서점가에서 책을 좀 사 오려고요. 요즘에는 어떤 책이 유행하는지 궁금하네요.”
트레샤나 부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시간을 조금 주시면 제가 아가씨를 위해 추천 도서의 목록을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부인.”
마리안은 트레샤나 부인이 유심히 자신을 살피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트레샤나 부인은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서 그녀는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꽤 긴 도서 목록을 마리안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이걸 보면 새로운 책을 구입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겠어요.”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마차가 준비되었는데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그래요. 더워지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마차를 타고 저택에서 출발하면서 마리안은 마차가 떠난 뒤로도 한동안 트레샤나 부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일 처리가 깔끔하고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마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와서 집안 곳곳을 살펴본 마리안은 트레샤나 부인이 그동안 무척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오랜 세월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엉망이었던 알리체가의 대저택이 그녀의 손길 아래 제법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쉬운데. 정말로 우리 가족을 위해 일해주시는 분이라면 좋았을 텐데.”
마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부인이 건네준 목록을 살펴보았다. 흥미가 가는 책 제목들이 상당수 있었다.
알리체가의 대저택에서 왕립도서관은 그리 멀지 않았다. 왕성의 번화가에 있는 도서관에 다다르자 마리안은 마부에게 오후에 데리러 오라고 말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왕립도서관은 처음인데.’
마리안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영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도서관에 와볼 기회가 없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사는 게 바빠서 와보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도서관으로 들어가 칼멘에게서 받은 추천장을 사서에게 내밀었다. 사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지 마리안이 바로 도서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서가를 돌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열심히 찾았다. 생각했던 대로 마법과 관련한 도서는 그녀가 대출할 수 없었지만, 희귀한 마법 도서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열람은 가능했다.
마리안은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고전소설들도 여러 권 가져와서 도서관 책상 한구석에 쌓아놓고는 빠르게 책을 읽으며 쓸모가 있어 보이는 내용을 가져온 종이에 필기했다.
마리안을 제외하고도 도서관에서는 책을 필사하는 사람이 제법 있어서 특별히 의심을 사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리안은 마법 도서를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곳에서도 칼멘 후작과 클로타르 왕세자의 눈과 귀가 되는 사람들이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작 반나절 필사를 하는 정도로 많은 내용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특히나 마리안 본인이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모를까, 마리안은 아무리 읽어도 마법 도서만큼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머리가 나쁜가 봐.’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고 고민했을 정도였다.
‘아스터가 직접 이곳에 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마리안은 서가마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도서관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아스터가 그리웠고, 그의 처지를 생각하자 불같이 화가 났다.
클로타르가 아스터에게 빼앗은 것은 아스터의 신성력만이 아니었다. 아스터는 자유와 함께 모든 교육의 기회도 잃어야 했다. 아마 신성력을 다루거나 마나의 원리를 이해하는 총명함 말고도 그에게는 또 다른 탁월한 재능들이 있을 것이다.
마리안은 그 모든 걸 빼앗은 클로타르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고 방치한 국왕과 왕비에게도 화가 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벽면 한구석에 걸려있는 시계에 눈길을 보낸 마리안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필사를 하다 보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서 벌써 오후가 되어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지만 마리안은 이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마리안은 도서관 밖으로 나가 주변의 서점가를 먼저 돌았다. 그녀는 아스터에게 줄 소설과 교양서 몇 권 외에 일부러 저렴한 통속소설을 가득 샀다. 그녀도 여느 아가씨들처럼 통속소설을 좋아했지만 이번에 구입한 책들은 어디까지나 트레샤나 부인을 위한 눈속임용이었다.
“책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입하신 책들은 어떻게 할까요? 마차를 가져오셨으면 마차가 있는 곳까지 옮겨다 드리고 그게 아니라면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마차가 아직 오지 않아서 배달을 부탁드릴게요. 이 책들을 전부 알리체가로 보내주세요.”
마리안은 서점 주인에게 책값과 주소를 건네고 간단한 식사를 하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인근의 카페를 목적지로 삼아 걷기 시작했다.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었더니 그녀는 제법 지쳐있었다.
왕립도서관 앞은 서점가와 카페, 식당들이 늘어선 번화가였다. 마리안은 천천히 길을 건넜다.
지난 석 달간 아스터와 거의 단둘이서만 지내온 마리안이었다. 기껏해야 병사들이나 의사 베르트 아니면 칼멘 후작과 잠깐씩 대화한 게 전부라 간만에 사람이 많은 번잡한 거리를 지나가려니 어쩐지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허둥대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좀 더 천천히 걸었다.
“위험해!”
그런데 그때 앞쪽에서 짤막한 외침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마리안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의 짐말 한 마리가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짐수레에 말을 묶으려던 마부가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 같았다. 말은 필사적으로 고삐를 움켜쥐고 달래려는 마부를 걷어차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마리안은 너무 놀라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곧 마리안은 말이 달려오는 방향이 자신의 앞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똑바로 달려가는 방향에는 마리안보다 앞서 걷고 있던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리아나를 생각나게 하는 소녀였다.
마리안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소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두 팔로 아이를 감싸 안으며 길바닥에 쓰러질 때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던 것 같다. 두두두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마리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말에 밟히는 엄청난 고통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돌과 벽돌로 갈아둔 바닥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가 쓰러진 탓에 부딪힌 부분에 통증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아픈지 마리안은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세상에나, 정말 괜찮아요?”
어떤 남자의 외침에 마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했고 아이도 무사한 듯싶었다. 그래도 아이의 뺨이 빨갛게 부은 것을 보니 넘어질 때 부딪히면서 멍이 든 것 같긴 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어?”
너무 놀란 나머지 아이는 얼른 대답을 못 한 채 멍하니 마리안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팔다리를 움직여 보렴. 혹시 부러지거나 금이 갔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는 마리안의 말에 자신의 몸을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그때 사람들이 달려왔다.
“맙소사, 아가씨.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가씨가 죽을 뻔했잖아.”
“그래도 이 아가씨가 꼬마 아가씨를 살렸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마부가 황급히 달려왔다. 마침 지나가던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 준 덕분에 간신히 말을 붙잡는 데 성공한 마부는 얼른 마리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죄송합니다. 정말 큰 일 나실 뻔했습니다.”
마리안은 허름한 차림의 마부를 보자 그에게 뭐라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금 전의 일이 찰나의 사고였다는 것은 마리안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난 괜찮아요. 그보다는 이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셔야죠.”
마리안이 소녀의 어깨를 짚으며 아이를 앞세우자 마부는 다시금 허리를 숙이고 상냥하게 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꼬마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이는 마리안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랐는지 아이의 작은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있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리안과 어린 소녀의 옷차림이 평범한 평민의 것이 아님을 본 마부가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굽신거려서 마리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괜찮으니 가보세요.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세요.”
마부는 그 이상 마리안이 문책을 하지 않는 것에 한동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다가, 얼른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떠나갔다.
마부가 떠나자 마리안은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 이름이 뭐니?”
“엘리자예요.”
“설마 혼자 길을 가던 중인 거야? 네 보호자는 어디 있지?”
“그게, 유모랑 같이 있었는데 제가 잠깐 딴생각을 하며 걷다가 유모를 놓쳤어요.”
엘리자는 어린아이치고는 말을 꽤 조리 있게 잘했다.
“그럼 유모를 만날 때까지 잠깐 같이 있어줄까? 너도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아이는 그 말에 눈에 띄게 밝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아까 유모랑 어디쯤에서 헤어졌니?”
“이 근방인 거 같아요. 집에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까 별문제는 아니지만요.”
마리안이 엘리자를 데리고 5분여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엘리자 아가씨.”
길 맞은편에서 동그란 얼굴에 나이가 많은 여인이 달려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머리까지 흐트러진 여인은 엘리자를 보자 바로 울 것 같이 되었다.
“아가씨, 대체 그렇게 사라지시면……. 아니, 얼굴은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말에 치일 뻔했어.”
아이의 담담한 말에 유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해서 엘리자가 얼른 덧붙였다.
“여기 이 언니가 구해주셨어. 말이 달려오는데 언니가 날 감싸고 옆으로 굴러서 무사할 수 있었어.”
“아…….”
여인은 그제야 마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리안은 겉보기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에 먼지가 묻어있는 데다 치맛자락도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저희 엘리자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여인이 숫제 울먹이려고 해서 마리안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엘리자 또래의 동생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마리안이 부드럽게 웃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가씨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리안은 그 말에 약간 곤란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리안 알리체예요.”
“알리체 아가씨군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엘리자가 보호자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럼 저는 이만 약속이 있어서 여기에서 헤어지도록 하죠.”
마리안이 웃으며 인사하자 엘리자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럼 잘 지내렴.”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여인이 계속 절을 할 기세라 마리안은 얼른 엘리자와 헤어져 길을 걸어갔다.
무릎과 허리가 좀 아픈 걸 보니 타박상을 입은 것 같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리안은 빠르게 걸었다.
드디어 원래 목적했던 카페를 찾아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자와 만나는 바람에 시간이 다소 지체되긴 했지만 아직 홀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카페에서는 구깃구깃해진 옷을 입은 마리안이 혼자 들어오자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그녀가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자리를 요구하자 얼른 테이블을 마련해 주었다.
마리안은 가벼운 식사를 한 뒤 그 뒤로는 차를 한 잔 마시며 약속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어제 몰리아의 집에서, 이곳에서 외숙부가 보낸다는 사람과 만나겠다고 답신을 써서 보냈었다.
“왜 안 오지…….”
그러나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자 마리안은 초조해졌다.
무턱대고 카페에 계속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안은 차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마리안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 5시가 되어 알리체가의 마차가 데리러 오자 마리안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마리안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외숙부가 알리체가에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약속 시간까지 잡아놓고 무시할 줄은 몰랐다.
마리안은 가게를 나서면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외숙부에게 조력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외가와 교류를 안 한 지는 벌써 10년이 되어가지만 그래도 어려서는 마리안을 귀여워해 줬던 외숙부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은 들어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하려는 일은 외숙부를 통한다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접근 방식이 문제였다.
외숙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마리안이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녀를 지켜보는 눈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마부가 마차를 세워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그녀의 발 위로 갑자기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마리안이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워낙 생각에 골몰하느라 반응이 늦어진 덕분이었다. 마리안은 숨을 삼키며 눈앞에 떨어진 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새?”
그리고 당황해서 얼른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새를 주웠다. 보는 순간 당근이 연상되는 주황빛의 털을 가진 비둘기만 한 새였다. 새는 눈을 꼭 감은 채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마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마침 길을 건너는 중이라 근처에는 새가 올라가 있을 만한 나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어쩌다 새가 떨어졌는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다친 새를 줍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생에 이런 새가 있었나…….”
야생에서 살아가는 새치고는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마리안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야생조를 이대로 데려가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고, 만일 야생조가 아니라면 주인이 있다는 소리이니 또한 함부로 새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새의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새 역시 머리를 쓰다듬고 등과 가슴을 만져주었지만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리안은 별수 없이 새를 안아 들고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