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하얀 새
칼멘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대화 없이 마리안을 성채까지 데리고 갔다. 물론 이번에도 왕성을 벗어나자마자 덧창을 닫아 마리안이 창밖의 풍경을 보지 못하게 했다.
마리안은 성채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칼멘과 대화를 할 것도 아니고, 책을 읽기에는 마차가 너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성채에 도착하고 칼멘이 마리안이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불쑥 물었다.
“저어, 다음에 집에 갈 때는 혹시 왕립도서관에 가볼 수 있을까요?”
칼멘이 당황해서 바라보자 마리안은 얼른 말을 이었다.
“성채의 서재 안에 있는 고전소설을 거의 다 읽어서요. 정치나 군사, 기술 같은 걸 언급한 책들은 어려워서 읽기도 힘들고 재미도 없더라고요. 아스터 님도 저와 함께 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시는데 안 될까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마리안은 그녀더러 능글맞아졌다고 말했던 몰리아를 떠올렸다. 아마 칼멘을 향해 최대한 웃으며 말하고 있는 마리안을 보면 몰리아는 소름 돋는다고 감상을 말했을 것이다.
갈수록 연기력이 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리안이 칼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클로타르 전하께 한번 여쭤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정말 친절하시군요.”
마리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마리안을 회유하려는 뻔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칼멘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녀의 편의를 봐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칼멘은 단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칼멘의 마차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를 한 뒤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켜보는 기사와 병사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서야 동쪽 탑의 나선형 계단을 나는 듯이 올라갔다.
지난번에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칼멘과 베르트가 아스터와 함께 있었던 것을 생각해서 마리안은 심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마리.”
그러나 이번에는 아스터가 홀로 환히 웃으며 마리안을 반겨주었다.
“아스터!”
마리안은 그대로 달려가 아스터를 끌어안았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터와는 그래 봐야 고작 두 달의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었다. 이번에 짧은 시간이나마 집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왔는데, 아스터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안정감이 느껴졌다.
사실 마리안은 알리체가의 자신의 방에서도 그다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침대보다 이곳 탑 꼭대기 층의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편하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아스터를 끌어안고 그의 체온을 느끼자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스…….”
그러나 마리안은 아스터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느끼는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스터의 입술이 곧장 마리안의 입술을 삼킬 듯이 파묻어 버렸다.
“흣!”
아스터의 입술은 늘 그렇듯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리안은 까치발을 하며 아스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목을 뒤로 젖혔다. 반짝이는 아스터의 금안을 잠시 눈에 담고 스르륵 눈을 감자,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마리안의 눈꺼풀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입꼬리를 올리자 아스터의 이마가 마리안의 이마에 닿았다.
“보고 싶었어, 마리.”
저도요, 라고 마리안이 대답할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은 다시 마리안의 입술을 덮쳤다. 다급하게 아랫입술을 물고 보채듯이 혀끝으로 입술을 문지르는 감각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마리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 못 이기는 척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툼한 혀가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마리안은 처음에는 반쯤 장난삼아 까치발을 했지만 어느덧 아스터에게 체중을 실은 채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아스터의 키스는 정말로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럽고 달았다. 그는 마치 마리안을 녹여 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아스터가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자신의 열기에 녹는 것인지 항상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응…….”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뺨이 달아오르고 체온도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무릎 아래로 힘이 빠져나가서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아스터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마리, 마리.”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리안은 침대 위에 누워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어느새 옷이 거의 다 벗겨져서 그녀는 거의 알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남아있는 것은 비단 스타킹과 허리춤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속치마 한 장뿐이었다.
차라리 이것마저 모두 벗겨주면 좋으련만 아스터는 급한지 침대 위에 올라와 그녀를 굽어보며 다시 키스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리안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숨을 헐떡였다. 목덜미와 쇄골을 따라 내려가는 폭풍우 같은 키스가 너무 뜨거워서 등허리 전체에 전율이 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 안쪽이 젖어 들고 있었다.
차라리 방 안이 조금만 더 어두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 7월에 접어들면서 한층 더 강렬해진 햇빛이 가감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탑 꼭대기의 방은 너무 밝았다. 그 밝은 햇살을 등지고 있는 아스터의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애가 닳는 것을 느꼈다.
손을 뻗어 열기가 잔뜩 느껴지는 뺨을 만지자 그의 반짝이는 금안이 마리안을 열정적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 일렁이는 욕망을 보고 마리안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아스터도 옷을 벗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성급한 손길이 가슴을 어루만지고 단번에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마리안 역시 조급해졌다.
자신의 숨결이 벌써 뜨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아스터의 손이 단번에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계곡 안쪽의 비밀스러운 입구를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꽃잎을 감질이 날 정도로 느릿하게 만져보던 그가 장미꽃에 입을 맞추듯 그곳에 입술을 대자 마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어서 아스터는 살짝 혀끝을 세워 꽃잎의 핵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
마리안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다정한 데다 너무 느릿해서 애가 탔다. 몇 번이고 쪼듯이 키스하는 대신 그곳을 좀 더 강하게 마찰해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 있게 이미 물기를 잔뜩 머금은 꽃잎에 몇 번이고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스…터.”
마리안이 괴로운 듯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아스터가 꽃잎을 가르고 연약한 속살 위를 혀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른 게 전부였다.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단전의 안쪽 깊숙한 곳이 저려와서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아아…….”
마리안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이 부드럽고 다정한 애무가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 왜 그래.”
짐짓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다정하게 속삭이는 아스터가 정말로 얄미웠다. 마리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노려보자 그는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아, 정말이지…….”
그런데 역광을 등진 그 얼굴이 또 가슴이 설레도록 아름다워서 마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얼굴 찡그리지 마.”
아스터가 즉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펴주자 마리안은 쏘듯이 내뱉었다.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말하다 보니 중간에 너무 부끄러워져서 뒷부분의 말은 작게 웅얼거리고 말았다.
그러자 아스터는 이미 넘치게 샘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밀부에 한 번 더 입술을 맞춘 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천천히 핥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줄까? 응? 마리, 어떻게 해주면 될까?”
“읏, 오늘따라 대체 왜…….”
오늘따라 대체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손가락 한 개가 작은 구멍 안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깜짝 놀라는 한편으로 안쪽을 자극하는 그 감각에 마리안은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가 좋은 거지? 좀 더 해줘?”
마리안이 입술을 깨문 채 달뜬 숨만 내쉬고 있자 아스터는 눈을 휘며 웃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해줄 거야.”
“아니, 읏! 아앗!”
손가락이 안쪽을 슬쩍 긁어내리자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어서, 마리. 어떻게 날 원하는지 말해줘.”
“읏, 흐읏!”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안쪽을 살살 긁어내리는 듯한 아스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허리를 비틀어도 그는 요령 좋게 그녀의 방해를 피해 가고 있었다.
마치 간지러움이 정도를 넘으면 통증처럼 느껴지듯이 더는 견딜 수 없어진 마리안이 눈을 질끈 감고 외치고 말았다.
“너, 넣어줘요.”
“뭘?”
“당신, 당신의 것.”
하지만 아스터는 여전히 그녀를 채근했다.
“내 것을 어떻게 해줘야 해?”
“넣고 휘저어 줘요.”
내뱉고 난 마리안은 두 손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심과 더불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외치고 났더니 차라리 그가 빨리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복잡했다.
“하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마리안의 귓가에 아스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폐부에서부터 깊이 새어 나오는 한숨이었다.
한숨 소리가 들린 것은 뜻밖이라 마리안이 손가락 틈새로 살짝 바라보자 아스터가 어째서인지 그녀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그가 다급하게 자신의 바지를 풀어 헤치고, 곧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보자 얼른 다시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 드디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 오늘 자제가 좀 안 될 것 같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아스터가 말했다. 어쩐지 그의 호흡이 벌써부터 거칠어져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그런 아스터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리안은 다시금 밀부 안쪽이 젖어 드는 감각에 목을 움츠렸다.
“혹시라도 힘들거나 아프면 말해, 마리.”
아스터의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이 마리안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마리안은 밝은 햇빛 아래에서 이렇게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당장 입구에 와 닿는 아스터의 존재감을 확인하자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기다렸다.
몇 번이나 부드럽게 입구를 문지르던 그의 성기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동안 몇 번이나 아스터와 몸을 겹쳤지만 매번 삽입의 순간만큼은 긴장되었다. 마리안은 몸의 힘을 빼려고 애쓰며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아스터를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스터가 삽입을 할 때마다 마리안은 그에게 꿰뚫려 꼼짝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스터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훨씬 충만하게 만들어줬다.
아스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그 거친 호흡이 아스터만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아스터가 전에 없이 깊이 파묻듯이 그녀에게 돌진하자 그때마다 마리안의 입에서는 억누르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여름의 오후였다. 이미 상당히 달아오른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리안의 몸은 땀투성이였고 아스터 역시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맺혀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불타오르는 듯이 온몸이 뜨거운데도 아스터의 넓은 품에 파묻혀 그의 체온을 느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리안은 두 팔로 아스터의 등을 끌어안고 양다리로 힘껏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조금 움직여 더 깊이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다리를 조이자 아스터의 입에서 허억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리…….”
그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마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그가 점점 더 빠르게 진퇴를 거듭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터가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마리안은 아스터가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서 그가 계속 자신에게 말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늘따라 침대가 삐그덕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아스터가 세게 짓찧듯 그녀를 몰아붙일 때마다 침대가 마리안을 대신해 소리를 내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리안은 자신이 아스터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에게 매달렸다.
“아아!”
작은 신음과 함께 절정에 달한 아스터가 그녀의 위로 무너져 내렸을 때 마리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온몸을 떨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심장만이 아니라 가슴에 맞닿은 아스터의 심장마저 너무나 빠르게 뛰고 있어서, 마리안은 그저 아스터를 끌어안고 입을 벌린 채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애를 썼다.
한동안 방 안에는 두 사람의 거친 호흡만이 울려 퍼졌다.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을 때는 아스터도, 그리고 마리안도 조금 이성을 되찾은 다음이었다.
“마리…….”
아스터가 여전히 마리안의 내부에 자신을 파묻은 채, 상반신만 조금 일으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땀에 젖어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아직도 상기된 뺨에, 이마에, 콧잔등과 눈꺼풀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아래쪽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끈적이면서도 미끈거리는 느낌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기분을 모르는지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천천히 그녀의 내부를 휘저었다.
그가 마침내 마리안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때 마리안은 안쪽 깊숙이 박혀있던 것이 쑥 빠져나가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꿀렁, 하는 느낌과 함께 희뿌연 정액이 함께 쏟아져 내리자 마리안은 다리를 오므려 가리려고 했다. 어쩐지 보여주는 것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아스터는 여전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채 마리안의 허벅지 안쪽 가장 살갗이 여린 곳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이번에도 화인처럼 그녀의 허벅지 위에 내리꽂혔다.
더욱이 아스터는 점점 더 입술을 올려 정액과 애액으로 잔뜩 젖은 꽃잎 위에도 입을 맞추고, 흥분으로 한껏 도드라진 꽃잎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아, 아앗!”
그 바람에 깜짝 놀란 마리안이 화들짝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을 부드럽게 내리눌렀다.
“가만히 있어, 마리. 깨끗하게 핥아줄게.”
“무, 무슨…….”
마리안은 당황해서 제지하려고 했지만 아스터의 혀가 꽃잎을 핥고 그가 빠져나간 뒤에도 아직 벌어져 있는 구멍 속을 파고들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진득하게 혀로 핥는 감촉에 허리 아래쪽으로 갑자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삽입하기 전에도 아스터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애무해 주었지만, 그때 느꼈던 쾌감은 삽입이 끝난 뒤 수없이 자극을 받아 전에 없이 예민해진 곳을 핥아 내리는 감각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발끝이 저절로 오므라들면서 다시금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에 마리안은 황급히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아스터의 입술은 점점 더 격렬하게 마리안의 꽃잎을 애무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꽃잎을 핥아대던 아스터는 이제 구멍을 파헤치듯 혀를 밀어 넣어 안쪽을 핥고 있었다.
안쪽의 내밀한 살점이 저절로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마리안은 시트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숨만 쌕쌕 몰아쉬었다.
“너는 어쩜 이렇게 다디단 걸까?”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한숨마저 담겨있었지만 마리안은 다시금 숨이 가빠져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달아. 전부 다 마셔버리고 싶을 만큼.”
말뿐만이 아니라 츱츱, 하고 흘러내리는 애액을 전부 빨아 마시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 퍼졌다.
견디기 힘들어진 마리안이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아스터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은 채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가만히 있어, 마리. 얼마 안 남았어.”
“흐, 흐윽. 그, 그만. 제발, 아스터.”
밀부에 가해지는 자극이 너무 커서 마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스터가 절정을 맞이할 때 마리안은 자신의 머릿속에도 불꽃이 터지는 것 같은 환각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타오르는 불꽃은 그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거셌다. 정수리 근처에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결국 마리안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뜨거워서 조금이라도 뺨의 열기를 식히고 싶어서였다. 이대로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으응! 하, 읏!”
하지만 열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고 아스터는 이제 혀뿐만이 아니라 손가락까지 밀어 넣어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리안은 폭죽처럼 터지는 머릿속의 불꽃이 하나둘 모여서 거대한 원을 만드는 환각을 보았다. 그 원이 뱅글뱅글 돈다고 생각한 순간, 문득 고개를 돌린 그녀는 아스터의 금안과 마주했다.
뜨겁게 불로 녹인 순도 높은 황금 같은 그 금안을 보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마치 둑이 터지듯 몸 안쪽이 젖어 드는 감각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너무나 강렬한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 같은 그 쾌감에 무서워져서 마리안은 두 팔을 벌렸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두 팔을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스터는 단단한 두 팔로 마리안을 끌어안아 주었다.
아직도 계속되는 쾌락에서 헤어나지 못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마리안은 포근하게 안아주는 아스터의 넓은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격렬한 쾌감에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아스터의 체온과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마리, 마리. 정말 사랑해.”
그때 아스터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은 입을 열어 자신도 아스터를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의식이 흐릿해지면서 모든 게 희미해졌다. 아스터의 목소리도, 그의 따스한 체온과 심장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극한의 쾌락에 지친 나머지 마리안은 지금 밀려드는 것이 잠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스터는 가늘게 떨리던 마리안의 몸에서 경련이 멎고 그녀에게서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쓴웃음을 지었다. 마리안에게 얼마든지 집에 다녀오라고 했던 주제에 그녀가 없는 2박 3일이 너무나 길고 외로웠던 나머지 조금 심술을 부렸다.
조금 전, 마리안이 방문을 열었을 때의 환희를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결코 말없이 떠날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마리안이 막상 곁에 없자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매일같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마리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방에 들어섰을 때, 아스터는 마리안을 향한 미칠 듯한 애정과 욕구를 동시에 느꼈다. 아스터로서는 순간 그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안.”
아스터는 마리안의 입술과 이마에 한 번씩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괴로움이 떠올랐다.
방금 전 마리안을 애무하면서 그의 성기는 다시 잔뜩 발기해 있는 상태였다. 마리안이 처음 보는 얼굴로 울며 자지러지는 바람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욱신거릴 정도로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안이 잠들어 버렸으니 그로서는 이 문제를 홀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식을 때까지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심하게 욱신거렸다.
별수 없이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훑어 내렸다.
지금까지는 여자를 안고 싶다는 욕구 따위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자위 같은 것을 별로 해보지 않았던 아스터였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욕을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했고, 홀로 해소한다 해도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잠이 든 마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상당히 절박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빠르게 자신의 성기를 훑어 내렸다. 잠든 그녀를 보며 이런 짓을 하려니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오히려 그 배덕감 때문에 그는 전에 없이 빠르게 손을 놀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새근새근 마리안이 숨을 내쉴 때마다 이불 사이로 그녀의 하얀 가슴이 오르내리는 자태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진 바람에 마리안의 피부는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어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등을 꽉 끌어안고 있던 두 팔과 사랑스럽게 울던 가느다란 목, 그리고 잘록한 허리와 그가 너무 세게 쥔 탓에 연하게 붉은 손자국이 남은 눈부신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마리안을 깨워 그녀의 안에 한 번 더 자신을 파묻고 싶은 욕망을 애써 잠재우며 아스터는 눈을 감았다.
다시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 그는 키스를 조르기 위해 기꺼이 벌어지던 마리안의 붉은 입술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던 열기를 띤 푸른 눈을 생각했다.
“하아, 하아.”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과 함께 아스터는 꽤 길게 사정했다. 정액이 튀어 잠들어 있는 마리안의 몸에 흘러내린 것에 이상할 정도로 만족감이 들었다.
얼굴은 물론 가슴과 등판까지 빨갛게 된 채 아스터는 숨을 몰아쉬며 손과 마리안의 몸에 묻은 정액을 닦아낸 뒤 그녀의 옆자리에 파고들어 몸을 뉘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열기를 품고 있는 마리안을 끌어안은 채 아스터는 사흘 만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 * *
탑에 돌아온 뒤로 마리안의 일상은 전과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녀는 온종일 아스터의 곁에 머물며 그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날그날의 일상이 거의 똑같았지만 놀랍게도 마리안에게도 그리고 아스터에게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함께 지내다 보니 새로운 것을 더욱 많이 발견하고 있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지난번에 마리안이 서재에서 발견한 소책자를 함께 연구하는 것으로도 매우 바빴다.
마리안이 집에 다녀오는 동안 아스터는 소책자의 내용을 모두 달달 외울 만큼 암기했지만, 마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이론만 안다고 해서 실제로 마나를 다룰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니까요.”
아스터가 실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마리안은 아스터를 다독였다.
마법과 관련한 책은 매우 드물고 희귀해서 이런 외딴 성채에서 책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마리안도 아스터도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얼마나 올바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다음번에는 왕립도서관에 가서 참고할 만한 책을 찾아볼게요.”
마법 서적은 국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칼멘의 도움을 받으면 열람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칼멘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놨으니 그가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줄 것이다.
마리안은 책을 열람할 수 있게 되면 중요한 내용을 필사해 올 계획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며칠에 걸쳐 아스터의 옆에서 소책자의 내용을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자료를 찾으려면 그래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야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스터의 반응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사실 저 책이 대략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가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래서 마리가 고생해서 책을 필사해 온다고 해도 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를 달랬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대략이나마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굉장한 성과가 아닐까요?”
“음, 그런 걸까?”
“저는 내용을 이미 달달 외울 만큼 봤는데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아스터가 그래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다른 자료를 좀 더 찾아보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단순한 위로는 아니었다. 마리안이 보기에도 아스터는 책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몸 안에서 흐르는 신성력 덕분에 마나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마리. 마리의 말이 옳아. 미안해, 내가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가 봐.”
“사과할 일이 아닌걸요. 그리고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도 알아요. 저도 그러니까요.”
마리안은 아스터가 한숨을 쉬자 그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우리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아요.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어요.”
“마리가 정말로 내 아이를 가져준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거야.”
갑자기 아스터가 불쑥 내뱉은 말에 마리안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도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하는 소리야. 불현듯 마리가 내 아이를 가져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스터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리와 나의 아이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난 그저 마리와 여기서 나가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전부였지.”
“아스터…….”
“그런데 내가 아직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나의 소중한 아이를 클로타르가 이용하려 든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심지어 마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때리기까지 했으니까.”
마리안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스터. 당신이야말로 클로타르에게 오랜 세월 동안 심한 취급을 받아왔잖아요. 저는 그걸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요.”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마리안은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슬슬 왕세자 클로타르가 찾아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리안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다시 아스터를 내어주고 그가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스터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마리안에게는 곧 찾아올 클로타르의 방문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아스터는 자신이 그의 형제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폭력에 익숙해져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스터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인지는 마리안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조금씩 달이 여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괴로워졌다. 아침에 해가 뜨면 혹시 오늘이 클로타르가 찾아오는 날은 아닌지 좌불안석이 되었다. 슬쩍 병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들도 클로타르가 정확히 언제 찾아올지는 알지 못했다.
“차라리 언제 오는지 정확한 날짜라도 알면 덜 불안할 텐데.”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덫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 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리라. 정말로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펼쳐놓은 덫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클로타르는 올 시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탑에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긴장으로 신경 줄이 끊어질 것 같던 마리안은 이런 초조한 기분을 아스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중정을 산책하는 시간을 좀 더 늘렸다.
어차피 돌아보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는 길이었지만, 마리안은 요즘 들어 햇볕이 뜨거운 시간을 피해 중정의 잡초를 뽑거나 웃자란 나뭇가지를 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사들은 마리가 중정을 가꾸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특별히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마 수비 대장인 토르튼의 귀에도 이야기가 전해지긴 했겠지만 그 또한 마리안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날도 마리안은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어서 견디지 못하고 중정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잔디밭 한가운데에 웃자란 잡초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무심히 잡초를 뽑던 마리안의 눈에 작은 흰색 물체가 들어왔다.
“뭐지?”
놀란 마리안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자 덤불이 자라난 한 귀퉁이에 하얀 새 한 마리가 죽은 듯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
마리안은 주춤했다.
알리체가의 대저택을 청소하다가 죽은 쥐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치워본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아직도 동물의 사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눈에 들어온 것을 못 본 척할 수도 없어서 마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하얀 새에게 다가갔다. 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채 두 다리를 쭉 뻗고 있었고 눈도 꼭 감은 상태였다.
“어떻게 하지. 죽은 걸까?”
성채의 중정은 네 방향으로 높은 벽을 쌓아 만든 감옥 같은 구조였다. 아마 작은 새가 잘못 날아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는 방향을 찾지 못해 벽을 머리로 들이받고 기력이 다해 쓰러져 죽은 것 같았다.
마리안은 작은 새의 사체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가련한 마음이 들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새를 안아 올렸다. 잘 묻어주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응?”
그런데 뜻밖에도 새는 아직 따뜻했다. 손가락으로 새의 가슴께를 살짝 짚어보자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뛰는 것도 느껴졌다.
“아, 다행이다. 죽지 않았구나.”
상처가 나으면 다시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리안은 얼른 새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새는 뭡니까?”
마리안이 급히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중정을 감시하던 병사 한 명이 마리안이 들고 있는 새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중정에 새가 떨어졌어요.”
“아, 그렇군요.”
병사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성벽이 높아서 그런지 가끔 잘못 들어온 새들이 그렇게 떨어질 때가 있죠. 이리 주시면 제가 묻어주겠습니다.”
“괜찮아요. 아직 살아있는걸요. 설탕물이라도 좀 먹여보려고요.”
그러자 병사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날개가 꺾인 것 같은데요. 이대로는 하늘을 날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으니까 제가 조금 더 살펴볼게요.”
병사는 마리안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더 만류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병사에게서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병사는 역시 여자란 마음이 약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새의 꺾여있는 날개를 보면서 아스터라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햇빛을 피해 그늘이 진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아스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뭐야, 마리?”
“새가 중정에 떨어져 있었어요. 잘못 날아 들어와서 다쳤나 봐요.”
여전히 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마리안이 탁자 위에 마른 수건을 깔고 새를 올려놓자 아스터가 책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아직 살아있어요. 날개를 좀 다치긴 했지만…….”
“그러네.”
아스터는 마치 태어나서 새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하얀 새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직 의식이 없는 새를 들어 올려 날개를 살폈다.
“여기에 출혈도 있어.”
“어머, 그렇네요. 가엾어라. 성벽에 날개를 부딪히면서 잘못 꺾였나 봐요.”
마리안은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설탕물을 좀 먹여봐야겠어요. 그러면 정신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마리안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찻잔에 설탕을 부어 설탕물을 만드는 동안 아스터는 유심히 새를 살펴보았다. 그는 멀쩡한 새의 왼쪽 날개를 펼쳐서 한 번 살펴본 뒤에 이번에는 다친 오른쪽의 날개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고는 마리안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 마리. 동물에게는 해본 적이 없지만 내가 어떻게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아.”
마리안은 설탕물이 담긴 찻잔을 들고 아스터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아스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새를 고쳐주겠다고 해줘서 마리안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늘 아스터의 그와 같은 다정함을 좋아했다.
아스터는 새에게 집중하느라 마리안의 따뜻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오른손을 펼치고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손에 은은한 금색의 빛 구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새의 크기가 작은 만큼 구슬도 아주 작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새의 다친 오른쪽 날개를 펼친 뒤 그 위로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아아.”
마리안은 그 광경을 보면서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신관이 아스터를 치료하거나 아스터가 직접 자신의 등을 치료할 때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잠깐 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스터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상처가 제대로 낫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 집중하느라 신성력이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힘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지금 작은 새를 위해 신성력을 불러일으킨 아스터는 은은한 빛을 뒤집어쓰고 있어 같은 인간이 아니라 마치 신처럼 느껴졌다.
새의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되었다.
“탈진한 것 같으니까 이제 설탕물을 줘보자.”
하지만 여전히 새가 눈을 뜨지 않자 아스터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리안에게 손짓했다. 마리안이 티스푼으로 설탕물을 살짝 새의 입가에 떨어뜨렸다.
문득 마리안은 클로타르에게 고문을 당한 뒤 괴로워하던 아스터에게 처음 입을 맞춰 약을 먹였던 날이 떠올랐다.
곁눈질하자 아스터가 아무런 말없이 새에게 설탕물을 먹이는 마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아스터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새의 부리 안쪽으로 설탕물을 밀어 넣고 몇 번이고 새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자, 잠시 후 새가 힘겹게 눈을 떴다. 하얀 새는 깜짝 놀란 듯이 마리안과 아스터를 바라보더니 곧 잔뜩 겁에 질려 날개를 모아 웅크렸다.
“쉬이,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스터가 새를 달래며 손을 뻗었지만 새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날개를 쫙 펼쳐서 날개로 아스터의 손을 후려쳤다.
“아!”
“아!”
그 순간 마리안과 아스터는 둘 다 동시에 탄식을 내뱉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멀쩡해졌나 보네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새가 있는 힘껏 아스터의 손을 후려쳐 공격한 곳이 바로 꺾여있던 오른쪽 날개였다. 상처가 깨끗이 나았기 때문에 그 날개로 아스터를 공격한 셈이다.
“얘를 잡아서 창밖으로 날아가게 해줘야겠어.”
“그래요.”
마리안은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나 그 직후, 두 사람은 작은 새를 붙잡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지만 아스터가 신성력을 쏟아 부어준 덕분에 힘이 넘쳤다. 작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방 안 곳곳을 푸드덕거리고 날아다니며 도망을 치는 바람에 아스터와 마리안은 하얀 새를 잡기 위해 한참이나 방 안을 뛰어다녀야 했다.
두 사람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끝에, 마리안이 기지를 발휘해 담요를 펼쳐 덮으면서 가까스로 새를 잡을 수 있었다. 아스터는 한참이나 뛰어다니느라 금빛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으로 작은 새를 다시 품에 안았다.
하얀 새는 잔뜩 겁에 질려 할딱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작은 가슴이 터질 듯이 요동치는 모습에 아스터는 새를 진정시키기 위해 새의 작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마리안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불그스름해진 노을이 내리쬐기 시작한 방 안에서 작은 새를 품에 안은 아스터는 한 폭의 그림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리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설령 이 탑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평온하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스터는 욕심이라는 게 없었고, 마리안 또한 별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스터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된 지금이라면 외딴곳에서 단둘이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새를 바라보던 아스터가 마리안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제 진정을 좀 한 것 같지?”
“그러네요.”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 덕분인지 작은 새는 이제 차분하게 아스터의 품속에 안겨있었다. 검은 눈을 또르륵 굴리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중정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여기서 이대로 내보내도 되겠지?”
“아까 날아다니는 걸 보니까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아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마리안이 보내주겠어?”
“아니에요. 제가 안으면 또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할지도 모르니까 이대로 아스터가 보내주는 게 좋겠어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마지막으로 하얀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 친구들이 기다릴 거야.”
그는 활짝 열린 창문가로 작은 새를 데려가서 놓아주었다.
하얀 새는 아스터의 손바닥 위에서 몇 번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탑의 꼭대기 층은 꽤 높았지만 하얀 새에게는 이 정도 높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싶었다. 새는 똑바로 서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마리안과 아스터는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아스터가 마리안의 손을 잡았다. 마리안은 고개만 돌려 아스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보는 대신 여전히 작은 새가 날아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저 새처럼 이곳을 떠나갈 수 있겠지?”
“그럼요.”
마리안은 길게 말하는 대신 맞잡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저렇게나 작은 새도 유유히 날아올라 떠나간 이곳을 아스터가 벗어나지 못할 리 없었다.
마리안은 굳게 마음을 먹어야겠다며 자신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