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11화 (11/24)

11장 첫 휴가#키쿠절갠

아스터와 사랑을 나눴지만 마리안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아스터와 함께 보냈지만 정해진 시간에는 꼬박꼬박 중정과 서재를 산책하고 이따금 주방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중정과 서재를 산책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의 변화가 있었다.

“마리안, 서재에 마법이나 신성력에 대해 언급하는 책이 있으면 찾아봐 줄 수 있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아스터였다. 그는 서재에 있는 책을 상당히 많이 읽었지만, 그가 읽은 것은 어디까지나 클로타르와 칼멘이 허락한 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마법과 신성력에 대한 내용이면 어떤 거라도 좋나요?”

“가능하면 마나의 운용이나 신성력을 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이 탑에는 없겠지.”

아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탑에서 나가야겠다는 목표가 생긴 이상 그는 자신의 힘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탑 안에 갇힌 채 단시간 내에 다수의 기사와 병사들을 상대할 검술이나 체술을 익힐 수는 없으니 그는 신성력을 좀 더 잘 활용하게 되거나, 최소한의 방어 마법이라도 배우길 소망했다.

하지만 이 탑의 그 누구도 아스터가 마나를 쌓거나 신성력을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한 아스터였다.

그는 그저 타고난 신성력을 자신의 상처 치유에 사용한 게 전부였고,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야말로 살기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클로타르가 데려오는 마법사에 의해 자신이 가진 힘을 클로타르에게 전해주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번 찾아볼게요. 당장 운용 기술에 대한 책 같은 게 없어도 원리를 설명한 책 정도는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아스터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원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

그래서 마리안은 서재에 들어갈 수 없는 아스터를 대신해서 모든 책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짐작했던 대로 서재에서는 마법이나 신성력에 대한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역사나 문학, 신학 그리고 정치와 군사학에 대한 책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는 전에 마리안이 찾아낸 것 같은 실용 서적들 몇 권이 전부였다.

그러나 마리안은 실망하지 않고 책들을 살폈다.

라베인 왕가의 신성력이 신화의 전승이나 저주와 연관되어 있다면, 역사와 신학을 다룬 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 판단은 옳아서 마리안은 제법 많은 책을 찾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책들은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한 편 쓰는 데는 적절할지 몰라도 당장 탑을 탈출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다섯 번째로 모든 책장을 샅샅이 살펴본 마리안은 서재에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서재 안에서는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찾기를 포기하고, 라베인 왕가의 역사를 위주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멘 후작이 집에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때 찾아볼게요. 당장은 감시의 눈이 번득일 테니 쉽지 않겠지만 몇 번에 걸쳐 집에 다녀오면 바라보는 시선들도 좀 줄어들겠죠.”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에 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약속해 줘. 절대로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리안은 그런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물론이에요. 약속할게요. 저도 눈에 띄는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마리안은 진심이었다. 그녀 자신과 아스터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포기하고 고전소설을 찾아 서재에 내려갔던 날, 마리안은 책이 꽂혀있던 안쪽에 얇은 소책자가 하나 더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본 적 없는 건데.”

이제 서재 안의 책을 모두 다 알고 있는 마리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 예전에 책을 보던 누군가가 실수로 책장에 잘못 꽂았거나 아니면 숨겨둔 것 같았다.

책이 매우 얇았기 때문에 마리안은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숨을 삼켰다.

“이건!”

그녀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작 2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에는 마나의 기원과 운용을 익히는 법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리안으로서는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아스터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서재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며 황급히 책을 옷 속에 숨겼다. 그녀는 원래 읽으려고 했던 고전소설을 품에 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재에서 나왔다.

병사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지켜보고 있어서 마리안은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도 고개만 까닥할 뿐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있는 방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다독이며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꼭대기 층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숨을 한번 고른 뒤 방문을 열었다.

“아스터!”

그리고 마리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침대에 앉아있는 아스터의 주변에 칼멘 후작이 의사 베르트와 함께 서있었다. 마침 베르트는 아스터의 몸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

“아스터 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마리안이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서있자 칼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후작님, 의사 선생님.”

마리안은 얌전히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서재가 성채의 서편에 있어서 동편의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마차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마리안은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품 안의 고전소설을 꼭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옷 안에 밀어 넣은 소책자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주의하면서 마리안은 얼른 칼멘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처가 나은 건 다행이지만 체력이 좀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약을 새로 지어드릴 테니 일주일만 복용하십시오. 주방에 일러둘 테니 식사도 좀 더 영양가 있는 것으로 양을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베르트는 아스터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칼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칼멘이 승인해야 시행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태도였다.

마리안은 그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칼멘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트는 다시 아스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스터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마리안은 아스터를 바라보는 베르트의 얼굴이 평소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료가 거의 끝난 것 같으니 나와 잠깐 이야기를 하지.”

그러나 마리안의 상념은 길지 않았다. 칼멘이 그녀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네, 후작님. 잠시 서재에서 가져온 책만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마리안은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해서 탁자 위에 책을 내려놓으면서 품 안에서 몰래 소책자를 꺼내 고전소설 아래 숨겼다. 워낙 얇은 책이라 칼멘이 있는 위치에서는 고전소설 아래 다른 책이 깔려있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칼멘은 마리안의 생각대로 책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칼멘이 아스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가자 마리안 역시 아스터와 베르트에게 묵례를 하고 그 뒤를 급히 따랐다.

칼멘은 마리안을 데리고 중정까지 내려갔다.

“잠깐 걷지.”

10분 정도 걸으면 끝이 날 작은 산책로였지만 칼멘은 그렇게 말했다.

마리안은 잠자코 그 뒤를 따르기만 했다.

“클로타르 저하와 네 문제를 논의했다. 저하께서는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라 하셨다. 한 달에 한 번 2박 3일의 휴가와 함께 금화 열 개를 지급하겠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칼멘이 가능할 거라고 했기 때문에 클로타르가 딱히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허가가 나올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은 클로타르 저하의 관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니 그 사실을 항상 가슴에 깊이 새기도록. 저하께서는 네가 저하께 충성을 바치고 그분의 뜻을 시행해 준다면 절대로 너를 잊지 않고 우대하실 거라고 다시 한번 말씀해 주셨다.”

마리안은 이번에는 한 걸음 물러나 궁정 예법대로 칼멘을 향해 절했다.

“저하의 하해와 같으신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절대로 저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칼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나와 함께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하지만 그 말에는 마리안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집에 가도 된다고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마리안은 바닥을 보는 척하며 얼른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만일 다음으로 미루거나 거절한다면 진의를 의심받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벌써 두 달째 이 탑 안에서 유폐된 왕자와 감금되어 생활했다. 칼멘과 왕세자는 그녀가 너무나 지겹고 괴로운 나머지 왕세자의 편이 되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믿는 게 분명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마리안은 환한 얼굴로 함박웃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 바로 집에 가서 2박 3일간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건가요?”

“그 전에 의상실에 잠시 들렀으면 한다.”

“의상실에요?”

마리안이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서 묻자 칼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아스터 님을 돌보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알리체가의 영애로 훗날 왕세손의 모친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클로타르 저하께서도 너의 품위와 체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셨다. 그래서 저하께서는 너와 네 가족의 차림새와 생활에 지원을 하실 생각이다.”

“아…….”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집요함에 소름이 끼쳤지만 웃어 보였다.

“절 위해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 부인과 네 동생에게는 이미 저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도착했을 것이다. 저하께서는 앞으로 알리체가의 집안일을 돌볼 사람들도 보내주셨다.”

“감사합니다.”

결국 감시역을 마리안의 집에 둔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리안이 해야 하는 일은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칼멘이 흡족해할 만큼 기쁨을 표현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스터 님께 제가 집에 잠시 다녀오게 되었다고 직접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니 제가 직접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까 내가 말씀드리긴 했지만 네가 다시 한번 인사드리는 것도 좋겠지.”

칼멘은 마리안과 아스터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까닭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런데 제가 집에 가있는 동안 아스터 님의 시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실 마리안은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지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베르트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전하를 보살피게 될 것이다.”

“아……. 그렇군요.”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중정에서 좀 더 머물다가 마차로 갈 테니 너도 빨리 채비를 하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마리안은 나는 듯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마침 방에 들어서자 베르트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마리?”

아스터가 의아한 얼굴로 마리안을 맞이했다.

“칼멘 후작과 함께 집에 가게 될 거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신에게 직접 말을 하고 가야죠.”

마리안은 즉시 아스터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아스터는 잠시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내 마리안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칼멘 후작과 클로타르를 설득하다니 정말 대단해, 마리.”

마리안은 이미 아스터에게 칼멘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전부 말했었다.

“저도 이렇게 바로 허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일단 집에 다녀올게요, 아스터.”

아스터는 마리안이 단 며칠이라도 자신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급격히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그의 마음을 알고 까치발을 해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리고 가기 전에 말해야 할 일이 있어요.”

마리안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아까 서재에서 가져온 소책자를 아스터에게 내보였다.

“이건…….”

아스터가 책을 넘겨보고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마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고전소설 뒤편에 숨겨져 있었어요. 누군가가 숨겨뒀거나 아니면 실수로 그곳에 들어간 것 같은데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져왔어요.”

마리안은 아스터가 보는 앞에서 그 책을 침대 아래 숨겼다.

“혹시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래.”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없는 동안 이 책을 연구해 보고 있을게.”

“저도 다른 찾을 만한 자료가 없는지 확인해 볼게요.”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지 마.”

“그럴 생각 없어요.”

그때 밖에서 마차 소리가 났다. 마리안은 창밖으로 칼멘의 마차가 정문 앞에 대기 중인 것을 보고 아스터를 바라봤다.

“키스해 주세요.”

아스터는 망설이지 않고 마리안의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과 다정하게 마리안의 아랫입술을 물고 혀를 얽어오는 그의 열정적인 키스를 느끼며 마리안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아스터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 * *

칼멘은 마차에 앉아 마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협조자가 되겠다는 마리안의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마리안의 눈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마리안이 창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마차의 덧창을 닫아버렸다.

마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칼멘과 좁은 마차 안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거북했다.

그러나 칼멘은 그녀를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여러 가지를 지시하거나 주의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마리안은 오히려 의외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안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놓은 채 시선을 손에 떨궜다. 그녀는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덧창을 닫은 시간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마차가 왕성에 들어서자 칼멘은 덧창을 열어 마리안이 밖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알리체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있었다.

“모레 낮에 오겠다.”

칼멘은 짧게 말하고는 정문 앞에 마리안을 내려주고 바로 가버렸다.

마리안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옷상자 두 개와 커다란 가방 하나가 들려있었다.

칼멘이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의상실에 들러 마련하게 한 것들이었다.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는지, 의상실에서는 마리안이 입을 만한 옷을 만들어놓은 상태였고, 간단한 가봉을 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수선해서 완성된 옷을 마리안에게 안겨주었다.

“생각보다 굉장하네…….”

마리안은 옷상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몸매가 드러나야 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드레스나 야회복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바로 옷을 만들어 보낸 클로타르의 행동력은 굉장했다.

마리안이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겠다고 말한 것에 그 말대로 행동하면 부귀영화를 안겨주겠다고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클로타르가 마리안의 의견 같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꽤 절박하거나 후계자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언니? 언니야? 어머니, 언니가 왔어요!”

동생 리아나가 마리안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마리안은 옷상자를 내려놓고 얼른 리아나를 안아 들었다.

“리아나, 잘 있었어?”

고작 두 달 넘게 못 본 사이에 리아나는 키가 훌쩍 자라있었다.

“언니, 언니. 언니가 정말 보고 싶었어.”

리아나가 품에 안겨 와서 마리안은 어린 동생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잠시 후, 작은 소란과 함께 알리체 남작 부인도 달려 나왔다.

마리안이 어머니가 집 안에서 뛰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남작 부인이 마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마리안, 드디어 내 딸이 집에 왔구나.”

마리안은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 때문에 속상하고 힘든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머니였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남작 부인의 행동에 마리안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감동은 곧바로 사라졌다.

“어서 오십시오, 마리안 아가씨.”

남작 부인의 뒤편에는 마리안이 처음 보는 여자가 서있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단단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키가 크고 마른 중년 여성이었다.

마리안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남작 부인이 웃으며 소개해 주었다.

“칼멘 후작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란다. 집안일을 담당해주고 있는 트레샤나 부인이지.”

마리안은 이 상황을 각오하고 있긴 했지만 얼굴이 와락 구겨질 뻔한 것을 억지로 참고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트레샤나 부인.”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안 트레샤나입니다. 칼멘 후작님의 소개로 당분간 알리체가의 집안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트레샤나 부인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트레샤나 부인.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리안은 우아하게 인사했다.

트레샤나 부인을 통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칼멘 후작과 클로타르 왕세자에게 보고될 게 뻔했다. 마리안은 절대로 트레샤나 부인에게 얕잡혀 보여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인 혼자 도와주고 계신 건가요?”

“아닙니다. 하녀 두 명과 하인 하나가 일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하인은 심부름을 간 상태이고, 하녀 아이 둘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따가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제가 짐이 좀 있어서, 이걸 부탁드리고 싶군요. 칼멘 후작님께서 마련해 주신 옷이거든요.”

마리안의 말에 트레샤나 부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리안은 그녀에게 짐을 맡긴 뒤, 가족들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칼멘이 미리 마리안이 집에 온다고 알려준 덕분에 마리안은 가족들과 간만에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건 칼멘 후작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리아나가 너무나 즐거워하고 남작 부인이 큰 소리로 웃는 모습을 보면서 마리안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알리체 남작 부인은 그동안 하녀를 한 명만 고용해서 살고 있었는데, 칼멘이 트레샤나 부인과 두 명의 고용인을 더 보내주면서 집안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고 했다.

마리안이 보기에도 대저택은 예전보다는 훨씬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엉망으로 자라난 정원이 전부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잔디는 깨끗하게 깎여있었고, 깨진 창문처럼 눈에 띄게 흉해 보이는 곳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용하는 공간에 한정해서는 청소도 깨끗하게 되어있었다.

저녁 식탁만 해도 여느 귀족가의 저녁 만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마리안이 홀로 저녁을 준비하던 시절에 비하면 깜짝 놀랄 만큼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의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육류와 계란, 제철을 맞은 채소와 과일들을 적절하게 활용한 저녁 식사는 상당히 훌륭했다.

그러나 마리안은 식사가 끝나고, 리아나가 먼저 자러 간 뒤 남작 부인과 대화를 하는 동안 위화감을 느꼈다.

“후작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셨을 때만 해도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그분이 널 이토록 생각해 주셔서 정말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단다. 네가 그동안 어찌 지낼지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이 참 잘되어서 다행이야.”

마리안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남작 부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가 루켄을 따라갈 때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칼멘 후작님 같은 분이 보살펴 주시게 되어서…….”

마리안은 기가 막혔다. 어머니가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멘이 자신의 어머니에게까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귀찮은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남작 부인은 그녀가 루켄에게서 칼멘에게로 팔려 갔다고 오해하는 것이리라.

‘미치겠네…….’

마리안은 머리가 아팠다.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화가 났다. 딸이 어딘가 위험한 곳으로 팔려 갔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다가 칼멘 후작 같은 사람과 함께 나타나니 안도한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칼멘은 한눈에 보기에도 노인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정말로 딸이 팔려 간 거라고 믿으며, 이렇게 칼멘이 주는 것들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마리안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대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안 돼. 지금은 가만히 있자.’

이미 마리안의 집에는 트레샤나 부인이라는 감시역이 들어와 있었다. 분명 트레샤나 부인은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마리안이 칼멘의 정부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리체 남작 부인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마리안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두고 보려는 것이리라.

‘진정해, 마리.’

마리안은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진실을 밝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스터의 일을 알게 되면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칼멘의 경제적 후원에 어머니가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편히 지내도록 하는 편이 마리안에게도 신경이 덜 쓰이고 좋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꾹 주면서도 얼굴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가가 떨렸지만 어머니는 아마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더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마리안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흠칫 놀랐다.

“어머, 벌써 주무시러 가시는 길인가요? 아가씨와 마님께서 좀 더 대화를 하실 거라 여겨서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만.”

방문을 열자마자 트레샤나 부인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있었다. 마리안은 순간 표정이 굳어질 뻔한 것을 억지로 이겨냈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어머니께는 차를 가져다드리세요. 저는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알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고마워요, 트레샤나 부인.”

마리안은 억지로 다시 웃어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하필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트레샤나 부인을 생각하니 불안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트레샤나 부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안은 2층으로 올라가 바로 자신의 방에 가고 싶었지만 먼저 동생의 방에 들렀다. 리아나는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

리아나는 마리안이 찾아온 게 기쁘다는 듯 마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언니, 엄마랑 이야기는 다 했어?”

“응, 언니는 졸려서 먼저 올라왔어. 그래도 자기 전에 우리 리아나는 보고 자야지.”

“나도 막 자려고 했어. 언니, 리아나랑 같이 자면 안 돼?”

마리안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 만큼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동생의 간절한 눈동자를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니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올게.”

“응! 안 자고 기다릴 거니까 빨리 와.”

리아나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며 마리안은 웃어 보였다.

마리안은 일단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삼스럽다는 듯이 방 안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방 안은 여전히 마리안이 집을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인 데다 매우 깨끗했다.

루켄을 따라 집을 떠날 때만 해도 적어도 몇 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빨리 돌아왔다. 비록, 그사이에 마리안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말이다.

마리안은 트레샤나 부인이 하녀를 시켜 자신의 방에 옷상자를 가져와 정리해 놓은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둘러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세수를 하고 얼른 머리를 빗은 뒤, 리아나의 방으로 가기 위해 촛불을 끄려다 멈칫했다.

우연히 눈길을 준 창밖으로, 정원 너머에 수상한 작은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불빛은 금방 꺼졌지만 정원 한구석에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

마리안은 소름이 끼쳐서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 저들도 클로타르가 보낸 감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마리안이나 알리체 가문에 원한을 품고 해치려 들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알리체 가문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왕성에서도 매우 유명해서 강도가 들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강도라면 저렇게 순식간에 어둠 속에 몸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안이 수상한 사람을 보게 된 것도 우연이었던 데다,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마리안은 창가를 내다보는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촛불의 불을 껐다.

창밖으로 아직 불빛이 전부 꺼지지 않은 왕성의 하늘 위에 별들이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별들은 성채의 탑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수도 적어 보였고 훨씬 흐릿했다.

문득 마리안은 아스터를 생각했다.

‘아스터는 잘 지내고 있겠지.’

이제 그와 헤어진 지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아스터가 그리웠고, 그의 안부가 염려스러웠다. 항상 함께 지내고 있을 때는 잠시만이라도 아스터에게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웠는데, 막상 아스터와 떨어지자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마리안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졸린 눈을 하고 있던 동생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마리안은 리아나를 통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마리안은 발길을 조금 서둘러서 리아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리아나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마리안은 리아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리아나는 천진난만하게 마리안이 루켄과 함께 알리체가를 떠난 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칼멘 후작님이 오셨어. 후작님이 내게 인형도 하나 선물해 주셨어. 귀엽지, 언니?”

리아나가 곰돌이 인형을 가리켜서 마리안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그 뒤로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거구나.”

“응, 엄마가 무척 기뻐하셨어. 언니가 후작님같이 좋은 분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셨어.”

마리안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이미 방 안의 불을 끈 뒤라 어차피 리아나는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생의 앞에서는 얼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 있지…….”

갑자기 리아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후작님은 좋은 분이긴 하지만…….”

리아나가 우물쭈물하자 마리안은 동생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래? 말해봐.”

“언니가 화낼 것 같아서…….”

“화내지 않아. 그러니 말해도 괜찮아, 리아나.”

“응, 있지…….”

리아나는 그래도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후작님은 너무 나이가 많지 않아?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으신 거 같은데…….”

마리안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어린 리아나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어머니가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게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다.

“괜찮아, 리아나. 언니는 후작님이랑 그런 사이가 아니야.”

“정말?”

리아나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떠서 마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언니가 후작님의 일을 도와드리기로 해서 언니의 편의를 봐주시는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야.”

눈에 띄게 안심하는 동생을 보며 마리안은 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보다 리아나,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줘. 친구들이랑은 사이좋게 잘 지냈어?”

“아, 그게 있지. 언니가 공부를 가르쳐줬던 칼스랑 많이 친해졌어. 가끔 칼스네 집에 놀러가. 그런데 엄마랑 트레샤나 부인은 칼스가 평민인 데다 남자애라고 못 놀게 해. 하지만 그 집엔 칼스만 있는 게 아니야. 칼스의 동생인 스엘라가 정말 귀여워.”

“칼스랑 친해졌구나.”

마리안은 조금 뜻밖이라는 듯이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칼스는 알리체 남작가에서 도보로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매우 작은 집에 사는 평민 소년이었다. 칼스의 아버지는 아이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인근에서 빨래를 모아 세탁을 하는 세탁부였다.

마리안은 칼스를 비롯한 평민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쳤고, 어머니들 대신 그 아이들을 보살펴 주며 돈을 벌었다. 가끔은 칼스의 어머니를 따라가 함께 세탁 일을 하거나 삯바느질을 해서 푼돈을 더 벌기도 했다.

알리체 남작 부인은 마리안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남작 부인에게 최대한 무슨 일을 하는지 숨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작 부인의 눈을 모두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안은 문득 남작 부인이 리아나가 칼스와 노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남작 부인으로서는 마리안이 그 집안과 얽혀 돈을 벌었다는 사실 자체를 떠올리기 싫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덕분에 마리안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내일 언니와 함께 칼스네 집에 가볼까?”

그 말에 반쯤 잠에 빠져들고 있던 리아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

“언니가 언제 거짓말한 적이 있니? 아주머니께도 인사하고 오랜만에 칼스랑 스엘라도 봐야겠어.”

“응! 꼭이야, 언니. 약속했어!”

리아나가 새끼손가락까지 내보여서 마리안은 웃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리아나가 칼스를 언급한 순간 마리안에게는 갑자기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리아나는 그 뒤로도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떠들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마리안은 잠들어 버린 동생이 새근새근하고 내는 숨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덕분에 마리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마리안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방을 빠져나온 마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책상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그녀는 간밤에 늦게까지 생각했던 문구를 단번에 써 내려갔다. 어차피 구구절절한 설명을 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편지는 매우 짧고 간결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밀봉한 마리안은 옷을 갈아입은 뒤 그 편지를 품속에 감췄다. 이 편지를 절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마리안은 적당한 때를 봐서 리아나와 함께 외출했다. 다행스럽게도 남작 부인은 오랜만에 만난 자매가 함께 놀러 간다는 말에 어딜 가냐고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리아나의 손을 잡고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성채와 달리 왕성은 이제 여름이었지만 아직 오전 중이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전에는 힘들게 일을 하고 늘 지쳐서 걸어 다니던 길이었는데, 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여유 있게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며 걸으려니 기분이 새로웠다.

칼스의 집은 알리체가의 저택에서 언덕을 막 넘으면 시작되는 거리의 입구에 있었다. 작은 벽돌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거리였다. 길 사이의 간격도 좁고, 쓰레기도 여기저기 버려져 있어서 쾌적한 환경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마리안에게는 한결같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작년 여름 이맘때에도 마리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까지 걸어와서 짐마차를 타고 왕성에서도 그런대로 사는 평민 가정을 돌며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다 왔다, 언니.”

모퉁이를 돌아 허름한 붉은 벽돌집 앞에 다다르자 리아나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치며 먼저 달려갔다.

마리안은 동생이 먼저 뛰어가 벽돌집의 문고리를 두들기는 모습을 말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리아나와 또래의 밝은 금발의 더벅머리 소년이 나타났다. 칼스는 리아나와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리아나가 뒤를 돌아보며 가리키는 마리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리 누나!”

칼스는 바로 달려와 마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칼스. 잘 지냈어?”

“리아나가 마리 누나 얘기를 계속했었는데, 오늘 누나를 만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어.”

아이는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있었다.

“칼스, 스엘라는?”

“스엘라는 2층에서 자기 방을 청소하고 있을 거야. 같이 들어가자. 누나도 들어갈 거지?”

“응, 그런데 칼스. 어머니는 집에 계셔?”

지금 시간이면 칼스의 어머니 몰리아가 새벽부터 시작한 세탁을 마치고 돌아와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응, 어머니는 부엌에서 쉬고 계셔. 들어와, 누나.”

“고마워, 칼스.”

어린 소년이 의젓하게 문을 열고 기다려주기까지 해서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햇볕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시간인데도 칼스의 집은 빛이 들지 않아 꽤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집 안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도 청결하고 아늑했다.

마리안은 창가에 놓여있는 깨진 화분에서 활짝 피어난 금잔화를 보고 미소 지었다. 분명 몰리아가 정성을 들여 가꾸고 있는 꽃임에 틀림없었다.

싱싱하게 피어난 진한 노란 꽃을 보자 마리안의 머릿속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아스터의 황금빛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금안이 떠올랐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현관 앞에서 칼스와 리아나가 꽤 소란스럽게 떠들었는데도 몰리아가 창가의 흔들의자에 기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몰리아는 통통한 체구에 늘 불그스름해 보이는 뺨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덕분에 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였다.

세탁부 일을 하는 바람에 몰리아의 두 손은 늘 거칠게 부르터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의 마음은 비단결보다 곱다고 자화자찬을 할 만큼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정직하고 화통한 데다 잔정이 많은 이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귀족 영애이면서 허드렛일을 하는 마리안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웃었을 때, 몰리아만큼은 마리안에게 다가와 망설이지 않고 일감을 던져주었다.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간 뒤로 2층이 왁자지껄해진 사이, 마리안은 부엌에 들어서서 잠들어 있는 몰리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상당히 피곤했는지 아이들의 소란에도 가볍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그런 몰리아를 깨우기가 조금 미안해져서 마리안은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응?”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몰리아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아직 졸음이 가득해서 몽롱하던 푸른 눈이 마리안을 발견하고 급속도로 커졌다.

“어머, 마리안!”

몰리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뻗어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이게 어쩐 일이야? 괜찮은 거니? 네가 그 빌어먹을 루켄 새끼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코까지 훌쩍이며 한참이나 말을 쏟아내던 몰리아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둥그렇던 푸른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녀가 포옹한 팔을 풀고 자신을 위아래로 살펴보는 모습에 마리안은 웃음을 삼켰다. 몰리아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몰리아는 세탁부라서 옷을 보면 얼마짜리 옷인지 바로 알아봤다. 그리고 지금 마리안은 칼멘 덕분에 새로 얻게 된 여름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치맛단이 무릎까지 오는 제법 짧은 길이에 디자인도 단순했지만 이전의 마리안의 형편으로는 살 수 없는 옷이었다.

“마리안, 너 설마?”

몰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여자가 팔려 가서 비싼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뻔했다. 인기 있는 매춘부가 되거나, 부자 남자의 후처가 되거나 첩이 되거나 정부가 된 경우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아니에요, 몰리아.”

그래서 마리안은 웃으며 몰리아를 진정시켰다.

“빌어먹게도 저는 귀족 출신이잖아요. 그 덕을 좀 봤어요.”

“아아, 그래. 그랬지.”

몰리아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잘 알지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정말로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제야 몰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그런 일을 견딜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어쨌거나 옷을 보니 당장 형편은 좀 좋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괜찮은 거니? 그동안 고생 많았지?”

“네, 여러 가지로 일이 많긴 했지만 그런대로 잘 버텼어요.”

“다행이야. 네가 무사하고 건강하면 된 거지. 차라도 한잔 마실래?”

“물론이에요.”

“그럼 이리 와서 식탁 앞에 앉아있어.”

마리안은 몰리아가 재빠르게 물을 끓이고 찻잎을 주전자에 넣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런 평민 가정에서 비싼 찻잎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몰리아가 끓여주는 차는 라카인과 허브를 적당한 비율로 조합해서 만든 차였다.

잠시 후, 몰리아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에 아침에 인근의 농장에서 사 온 염소젖을 부어주었다.

마리안은 감사히 찻잔을 받으며 한 모금 마셨다. 더운 날씨에는 그리 어울리는 음료가 아니었지만 맛있었다. 몰리아가 만들어주는 차는 항상 고소하고 향긋했다.

마리안이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자 몰리아가 재촉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리아나가 네가 그 망할 루켄을 따라갔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루켄이 갑자기 원금까지 갚으라고 쳐들어왔거든요. 그때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일을 다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몰리아,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넌 내가 빨래하느라 바쁘고 힘들 때 우리 집 애들을 봐준 은인이잖아.”

“은인이라뇨. 서로 도운 거죠.”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아침에 작성한 편지를 꺼냈다.

“이걸 좀 전해주셨으면 해요. 제 외숙부님 앞으로 가는 편지예요.”

몰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직접 전달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미인 것을 깨닫고 마리안이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어쩌다 보니 귀족들의 정치질에 끼어들게 됐어요.”

“세상에, 마리안. 그거 위험한 거 아니니?”

“조금 과장을 하자면 제가 앞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이 편지에 달려있어요, 몰리아.”

마리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몰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위험해지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몰리아라면 의심받지 않을 거라서 부탁한 거예요. 저희 집 소식을 들으셨죠? 갑자기 일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사실 전부 저와 제 가족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에요.”

몰리아가 그 말에 얼굴을 더욱 구겼다.

“대체 무슨 일에 얽힌 거니?”

“집안 상속 싸움이요.”

“빌어먹을. 제일 질이 나쁜 거네.”

“그러게요.”

마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흔하잖아요. 그 사람들한테는.”

“넌 가끔 자신이 귀족이 아닌 것처럼 말하더라.”

그 말에 마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는 제가 귀족처럼 행동하는 거 본 적 있으세요?”

“하긴 뭐…….”

몰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이 근방에서 워낙 유명했다. 알리체가가 몰락하면서 대저택의 고용인들마저 전부 해고했을 때, 인근의 사람들은 그 집의 큰딸이 어떤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될지를 놓고 한참 떠들어댔다.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지방의 늙은 귀족과 혼담이 오간다거나, 왕성의 부유한 평민이 첩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집이 망한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리안은 허름한 옷을 입고 마을에 나타나서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몰리아는 그때야말로 마리안에게서 범상치 않은 위엄을 느꼈다.

마리안은 고작 열일곱이었는데, 몰리아는 귀족 아가씨들이 그 나이 때 얼마나 예민하고 제멋대로 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안은 동정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뭐든 좋으니까 일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경험은 없어요.’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때 몰리아가 먼저 나섰다.

‘아가씨는 가정교사로 일할 수 있겠지? 우리 집 애들을 봐줄 수 있어? 하루에 1크라운을 줄 수 있어.’

귀족 아가씨에게는 돈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만큼 푼돈이었지만 근방에서 아이를 봐주는 시세대로 몰리아가 제안하자 마리안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자신 있어요.’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었다.

그 뒤로 마리안이 어린아이들을 꽤 잘 돌보는 데다 글도 가르쳐주기 시작하자 근방에서는 너도나도 아이를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안에게 아이를 맡긴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다. 마리안은 늘 씩씩하고 다정했고, 평민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귀족들과는 행동거지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지금 몰리아는 마리안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걱정이 되었다.

“정말 괜찮은 거니?”

그녀의 질문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위험한 상속 분쟁에 끼어든 것은 물론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평민들과 친하게 지내온 마리안이 귀족들 사이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몰리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리안은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밥은 잘 먹고 다녀서 좋아요. 빚 독촉도 안 받으니 살 것 같고요.”

몰리아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넌 똑똑하고 야무진 애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편지만 전하면 되는 거지?”

“네, 그리고 답장을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마 외숙부가 당장 답장을 주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희 집이 망할 때 어머니랑 외숙부가 인연을 끊어서…….”

마리안은 말끝을 흐렸지만 딱히 슬프거나 괴로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외숙부도 보통 고집불통의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서요. 그래도 제 편지를 보면 반응을 좀 보이지 않을까 싶긴 해요. 나중에라도 답장을 하고 싶어지면 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한 뒤에 제가 찾아왔을 때 전해주시면 되는데…….”

마리안은 말끝을 흐리다가 몰리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물었다.

“가능할까요?”

몰리아는 그런 마리안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그사이에 꽤 능글맞아졌네. 물론이야. 답장 정도는 받아줄 수 있어. 그럼 넌 다음엔 언제 우리 집에 올 거니?”

“확실하게 날짜는 말할 수 없지만 한 달쯤 뒤가 될 거예요.”

“좋아. 편지를 전한 뒤에 답장이 오면 잘 보관하고 있을게.”

“정말 중요한 편지니까 잘 부탁드릴게요.”

“그런 말은 굳이 입 아프게 할 거 없어.”

마리안은 무뚝뚝한 몰리아의 대답에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게 몰리아답다는 생각에서였다.

“번거로운 일을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그리고 이건 부탁드리는 비용으로…….”

마리안이 품 안에서 돈을 꺼내자 몰리아가 인상을 썼다.

“편지 하나 전해주는데 무슨 돈이야. 그동안 돈 좀 생겼으면 저축이나 잘해둬, 이것아.”

“그래도…….”

“아, 됐어. 그보다 형편이 펴서 집에 고용인도 둘 수 있게 되었으면 알리체가의 빨래나 우리 집으로 좀 보내.”

계속된 몰리아의 거부에 마리안은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트레샤나 부인에게 말해둘게요.”

“그 사람이 새로 온 고용인이야?”

“네, 책임자예요. 그런데 트레샤나 부인이 바로…….”

몰리아는 알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널 감시하는 사람이라는 거지?”

“바로 그거예요.”

“재수 없는 사람이네.”

거침없는 몰리아의 말에 마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랑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았어요.”

“쥐새끼 같은 인간이었군.”

“지켜보니 일은 참 잘하는 분 같긴 해요. 제 편이 아닐 뿐인 거죠.”

그러자 몰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네 편이 아닌 사람은 내 적이야. 난 그렇게만 기억하련다.”

마리안은 그만 웃고 말았다.

“정말 고마워요, 몰리아. 당신밖에 없어요.”

몰리아와의 대화를 끝낸 뒤 마리안은 몰리아가 다시 일하러 나가자 리아나와 칼스, 그리고 스엘라를 데리고 한동안 놀아주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칼스에게 동생과 맛있는 걸 사 먹고 어머니에게 과일이라도 사다 드리라며 동전을 쥐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리안은 집에 돌아와 트레샤나 부인에게 몰리아에게 세탁을 맡기라고 지시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왕립도서관에도 가보고 싶었고, 도서관 주변의 서점가를 돌며 아스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서적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감시가 따라붙은 상황에서는 그 모든 행동들이 너무 위험했다.

마리안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몰리아에게 편지를 맡겼으니, 어쨌든 그동안 계획하고 생각하던 것의 첫 번째 단추는 끼운 셈이었다.

‘외숙부가 답장을 보내긴 할까.’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고집불통인 외숙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의 편지를 무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푹 쉬기로 했다.

마리안은 정말로 칼멘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리아나와 놀아주는 것을 제외하면 누워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 때문에 트레샤나 부인은 제법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마리안은 몰리아에게 세탁을 맡기라고 한 것을 제외하면 트레샤나 부인의 일 처리 방식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트레샤나 부인이 최대한 마리안을 쉽게 생각하고 방심하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아도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겠지.’

어머니는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니 자신까지 나서지 않아도 트레샤나 부인의 일은 많을 터였다. 칼멘이 클로타르의 명령으로 데려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사실 트레샤나 부인은 일을 매우 잘했다. 마리안은 굳이 그녀에게 트집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마리안의 첫 휴가는 별 탈 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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