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9화 (9/24)

9장 뜻밖의 진실

마리안은 눈꺼풀이 열리고 그의 보석처럼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나타나는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볼수록 빠져들 것만 같은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 말 진심이야?”

아스터는 힘겨운 듯 띄엄띄엄 물었다.

“네. 진심이에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물론 저도 제 힘이 보잘것없다는 건 알아요. 제가 당신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웃지 않았다. 그는 통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당신을 지킬 거예요. 당신 곁에서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마리.”

마리안의 이름을 부르는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따스함과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아스터가 손을 뻗자 마리안은 얼른 그 손을 잡아주었다.

“마리.”

아스터는 마리안의 손을 붙잡은 채 말했다.

“널 좋아해.”

순간 마리안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야. 아마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아스터…….”

마리안은 환히 웃었다.

“고마워요. 저도 당신이 정말 좋아요. 저도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아스터만큼이나 마리안도 사랑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속의 이 따스하면서도 뜨거운 감정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긴 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아스터의 부탁에 마리안은 그에게 좀 더 몸을 기울였다. 서로 시선을 마주한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했다.

아스터가 살며시 마리안의 아랫입술을 물고 웃었다.

마리안도 그만 웃고 말았다. 전처럼 깊고 진한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할 만큼 달고 행복했다. 하지만 키스를 하느라 억지로 몸을 일으킨 아스터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자 마리안의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염려와 걱정을 읽은 아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마리.”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요. 그렇게 혼자서 억지로 참지 말아요.”

마리안의 목소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섞여있었다. 아스터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클로타르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였다.

그런 마리안의 감정을 읽은 아스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리, 내가 일어나서 앉을 수 있도록 좀 도와주겠어?”

“괜찮겠어요?”

지금 아스터는 앉아있을 힘도 없어 보였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유령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마리에게 알려줘야 할 게 있어. 지금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러나 아스터는 영문을 모를 소리를 했다.

마리안은 잠시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그가 앉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자칫 잘못해서 등의 상처에 닿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등이 직접 닿지 않아도 아스터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으로도 신음했다. 온몸의 신경이 등에만 몰려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움직임에조차 통증이 밀려와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애써 자리에 앉았다.

마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아스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그만큼 통증이 심했다. 그는 애써 호흡을 가라앉히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스터는 좀 더 선명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보고 있었다.

“얼굴…….”

“아, 이거요.”

마리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클로타르가 후려쳤던 뺨에는 멍이 약간 남아있었다.

클로타르가 있는 힘껏 그녀를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마리안의 피부가 유달리 하얗고 약해서 멍 자국이 남아버렸다.

“그래도 거의 다 나아가는 중이에요.”

푸르스름하게 멍 자국이 올라왔던 곳은 이제 노란색으로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터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잠시 분노로 활활 불타는 금안으로 마리안을 바라봤다. 아스터는 몇 번이나 심호흡하더니 마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서 침대에 앉아, 마리.”

마리안은 아스터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순순히 그가 부르는 대로 그의 곁에 앉았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손을 잡고는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마리안은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스터를 지켜보았다. 그저 손등에 키스하느라 입술을 대고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을 생각하는 아스터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마리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다 이제 간신히 정신이 든 아스터가 너무나 조심스럽고 소중하다는 듯 자신의 손등에 키스해 주고 있어서,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에게 손찌검을 한 클로타르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스터가 워낙 부드러운 말로 속삭이듯 말해서, 마리안은 처음에는 아스터가 클로타르를 언급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소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아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너에게까지 손을 댄 건 용서할 수 없어.”

“괜찮아요. 별로 큰일도 아니었는걸요.”

마리안이 억지로 미소를 짓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너무나 큰일이야, 마리. 이쪽으로 고개를 좀 돌려봐.”

마리안이 그대로 따르자 아스터는 손을 뻗어 마리안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마리안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터가 뺨을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마치 햇볕을 쬐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히 아스터의 몸에 열이 남아있어서 느껴지는 온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바람에 시선을 돌린 마리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스터의 손에서 은은한 금빛 광채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광채는 마리안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고, 마리안은 거기서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스터가 손을 떼어내자 그 은은하던 금빛의 기운도 사라졌다.

“다 됐다.”

아스터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서 마리안은 놀란 얼굴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이러한 광경을 전에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바로 지난번에 신관이 아스터를 치유할 때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스터가 지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바로 깨달았다.

“당신은 신성력을 쓸 수 있군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리안은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았다. 얼굴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번지면서 이따금 느껴지던 얼얼한 통증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마리안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클로타르 저하는 당신처럼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거죠?”

아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서 당신을 그토록 미워하는 거군요.”

“그래.”

마리안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그간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클로타르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스터를 탑에 유폐하고 왕세자의 자리에 올라간 쌍둥이 왕자였지만, 정작 왕위 계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스터는 다시 한번 손에서 은은한 금색의 구슬을 만들었다. 그 금색 구슬은 아스터의 의지에 따라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작은 풍선만 하게 부풀었다.

희미한 햇빛처럼 빛나는 그 구슬은 점점 커지더니 아스터의 몸을 감쌌다. 아스터의 얼굴이 점차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종잇장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스터가 신성력으로 자신의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잠시 주저하다가 몸을 일으켜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만신창이가 되어 피고름이 묻은 붕대가 감겨있는 등 전체에 은은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 신성해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해서 마리안은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만 보았다.

등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무는 데는 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스터는 그의 등을 신관이 와서 깨끗하게 고쳐놓았을 때처럼 완치할 때까지 신성력을 쏟아붓지는 않았다. 그저 피와 진물이 배어나는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었을 때 그는 힘을 거둬들였다.

마리안은 잠시나마 편안해 보이던 아스터의 이마에 다시 식은땀이 배어나고 그의 호흡이 매우 거칠어졌음을 깨달았다.

“아스터, 괜찮아요?”

마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등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스터의 얼굴이 너무나 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괜찮아…….”

아스터는 힘겨운 듯 말하고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아주며 기다렸다.

“신성력을 쓰면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운가요?”

신성력이라고 해서 굉장히 성스러운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용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힘을 잘 다룰 줄 몰라.”

“힘을 다룰 줄 모른다니요?”

“신성력도 마나처럼 응용하는 기술을 익히면 훨씬 잘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아…….”

마리안은 기가 막혀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스터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클로타르에게 힘을 다 뺏겨서 아직 힘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어.”

“힘을 빼앗겨요? 그게 무슨 소리죠? 설마…….”

놀라서 외치던 마리안의 몸이 굳어졌다.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이해가 되었다. 지금까지 클로타르가 어째서 아스터를 꼬박꼬박 찾아왔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거군요?”

“그래. 힘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내가 직접 치료하는 걸 클로타르가 워낙 싫어하기도 해서 다들 바라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괜찮은 건가요?”

마리안이 걱정스럽게 묻자 아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베르트가 직접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거라고 권하더라고. 내 상태가 좀 안 좋긴 했나 봐.”

마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뇌리에 의사의 심각했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마리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스터는 훨씬 위중한 상태였던 듯싶었다.

마리안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오늘 종일 아스터를 내버려 두고 칼멘의 마차에 숨어있었던 자신에게 화가 치솟았다.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그렇게나 아픈 아스터를 홀로 내버려 뒀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픈 아스터를 내버려 두고 도망갈 생각을 했던 걸까. 칼멘과의 대화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아스터의 곁을 그렇게 오랜 시간 비웠던 걸까.

자기혐오와 자신을 향한 분노 다음으로는 클로타르를 향해서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전부터 왕세자가 너무나 악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마리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모습을 보며 아스터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는 마리안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스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마리에게 내 신성력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했었어. 마리가 어디까지 알아도 괜찮은지 알 수가 없어서…….”

베르트만 해도 마리안이 없는 사이에 상처를 돌보라고 말했었다.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리면 마리안이 위험해질까 봐 그게 두려웠다.

“여기서 제가 더 위험해질 게 뭐가 있겠어요.”

아스터의 말에 마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아스터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결심을 굳힌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는 아라크와 하스젠의 이야기를 알지?”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아스터가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그녀는 물론 아라크와 하스젠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르샤베 왕국이 있는 오슬라 대륙에서는 세 살 난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신화였다.

이 세상을 만들어낸 하늘의 신이자 신들의 왕 소그트는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그는 수많은 여신과 요정, 정령들과 사랑을 나눴는데, 아름다운 인간의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소그트가 진심으로 사랑해서 인간의 왕에게서 빼앗아 온 여자가 왕비 이리오였다고 한다. 이리오는 소그트와의 사이에서 반신반인인 쌍둥이 아들, 선신 아라크와 악신 하스젠을 낳았다.

“아라크와 하스젠이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빛과 어둠처럼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상징하지.”

아스터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당신과 클로타르 왕세자가 그 신화와 관계있는 건가요?”

마리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신성력에 대해 설명하려는 아스터가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나 하려고 아라크와 하스젠의 신화를 말했을 리 없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샤베의 건국과 관련이 있어.”

“하지만 르샤베 왕국의 역사는 고작 400년이 넘은 정도잖아요. 아라크와 하스젠의 신화는 천 년도 전의 이야기 아니었나요?”

오슬라 대륙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신화라서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르샤베의 건국 시조인 루트윈 라베인이 스스로를 아라크의 후손이라고 내세웠지. 아무도 믿지는 않았지만, 왕이 되려면 그럴듯한 명분은 필요했을 테니까. 라베인 왕가는 그 후로 줄곧 자신들이 아라크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왔어.”

마리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자코 아스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루트윈 라베인이 뜬금없이 자신을 아라크의 후손이라고 내세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사실 루트윈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고 해.”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나도 몰라. 불과 400년 전의 기록이지만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분명한 것은 루트윈이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지.”

아스터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루트윈의 쌍둥이 형제는 죽으면서 자신이 가진 신성력을 모두 걸고 루트윈에게 저주를 남겼다고 해. 언젠가 라베인 왕실에 쌍둥이가 태어나면 그중 한 명의 손에 왕국이 멸망하게 될 거라고.”

“아…….”

갑자기 누군가가 심장을 손으로 꽉 움켜쥐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마리안은 자신의 가슴을 한 손으로 눌렀다.

“그, 그래서…….”

마리안이 차마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트윈은 자신의 쌍둥이 형제와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악신 하스젠의 후손이자 협력자들이라고 몰아서 죽였어. 그 뒤로 라베인 왕가는 쌍둥이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해. 어쩌면 나와 클로타르 이전에도 쌍둥이가 태어났을지도 몰라. 형제든 혹은 자매든, 그것도 아니면 남매든 간에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마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귀족과 평민 가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쌍둥이가 태어났고, 드물지만 신의 축복과 가호로 무사히 다둥이가 태어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왕실에는 지난 400여 년의 역사를 통틀어 쌍둥이가 태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라베인 왕가는 후손의 수가 적어 왕가의 혈통이 무척 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쌍둥이가 태어나면 아스터처럼 한쪽을 숨겨서 유폐했을 것이다.

어쩌면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한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사실 나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해. 지나가는 말로 클로타르나 칼멘 후작이 이야기해 준 정도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마 귀족 중에서도 왕가와 혈연관계가 있는 극소수의 귀족만 알았을 거야. 왕가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이니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겠지.”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서 유폐당했겠군요.”

“그런 거 같아. 아마 아무런 힘도 없었다면 이미 죽였을지도 모르지.”

아스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리안은 라베인 왕가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음을 느끼며 물었다.

“클로타르는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가 왕세자가 된 거죠?”

“어려서는 조금은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고 해. 아마 그래서 구별이 안 갔겠지. 하지만 지금은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당신에게서 힘을 빼앗아서 자신의 힘처럼 쓰고 있다는 건가요?”

마리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왕세자 클로타르 리엘 라베인에 얽힌 무수한 미담이 떠올랐다. 마리안을 비롯해서 르샤베 왕국의 백성들은 클로타르가 어려서부터 신성력을 사용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실제로 왕세자는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거나, 가뭄이 들 때 비를 내리게 하는 등의 기적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그런데 그 힘이 거짓이었다니. 마리안은 기가 막혔다.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마리안의 얼굴에 아스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리, 신성력이 어떤 힘인지 알고 있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힘이라고만 들었어요.”

신성력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힘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법을 익혀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과 달리, 신성력은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 그래서 신이 부여한 힘이라고 해서 신성력이라 불렸다.

르샤베 왕국뿐만이 아니라 오슬라 대륙의 여러 나라는 다신교 국가로 선과 정의를 관장하는 아라크를 가장 많이 믿었다. 그중에서도 르샤베 왕국은 초대 왕이 직접 아라크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나라였다.

실제로 라베인 왕가의 직계 혈족은 금발과 금안이라는 특징적인 외모와 함께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켜 자신이 가진 신성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 때문에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왕가의 직계 사이에서는 왕위를 놓고 치열한 골육상잔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니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클로타르가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맞아. 그래서 신성력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가 없다고 해. 대신에 남에게 전해줄 수는 있어.”

“신성력을 전해줄 수 있다고요?”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힘을 가진 사람이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만 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어.”

이것도 마리안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리도 들어봤을 거야. 하스젠이 악신이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이 가진 모든 신성력을 아라크에게 주고 어둠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 속의 악신 하스젠이 처음부터 악한 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쌍둥이 형제인 아라크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라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그를 몇 번이나 구해냈다.

두 쌍둥이는 거대한 어둠과 맞서 싸웠는데, 결국 하스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아라크에게 주고 어둠으로 떨어져 악신이 되었다.

“그래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은 극한의 위기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타인에게 줄 수 있어. 물론 여러 가지 마법적인 조력이 필요하지만.”

마리안의 머릿속에 클로타르가 찾아올 때마다 함께 왔던 마법사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들이 아스터를 끌고 간 방 안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 그리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당해야 했던 아스터…….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가 처음부터 당신을 왕세자로 내세웠으면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국왕도 왕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저주의 말 한마디 때문에 자기 자식을 유폐시킨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애초에 신성력도 얼마 없는 아이를 택하고 다른 아이에게 이런 고통을 지속적으로 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글쎄…….”

아스터는 한숨을 쉬었다. 그도 왜 자신이 아니라 클로타르가 선택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스터도 인간인 만큼 자신이 왕세자의 삶을 살고 클로타르가 대신 탑 속에 유폐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폐되어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사는 삶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부모가 자기 대신 다른 형제를 유폐시킨 채 눈을 감고 방관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 속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스터에게 그런 건 부모가 아니었다. 그런 부모는 필요 없었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 나를 이곳에 가뒀든 간에 부모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아스터의 그 말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마리안은 부모님에 대해 그리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마리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알리체 가문이 사실상 파산했을 때 결국 떠나야 했던 유모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마리안을 ‘나의 마리’라고 불러주었지만 쇠락해 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느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병으로 몸져누운 뒤로는 주위에서 어린 마리안이 아버지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데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라 마리안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린 마리안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했다.

‘마리안 아가씨, 어머니는 몸이 안 좋으셔서 어머니를 귀찮게 하면 안 돼요.’

유모는 입이 닳도록 어머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어려서는 자신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귀찮은 아이는 아닌 걸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마리안은 그나마 유모의 손에 자라났지만, 더는 유모나 하녀를 고용할 수 없게 되면서 어머니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되어갔다. 아직 어린 리아나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어머니는 마리안을 살펴줄 여유가 없었다.

마리안은 그런 어머니의 상황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마리안 역시 아직 어린아이였다. 아무리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해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부모님의 헌신적이고 따뜻한 사랑 같은 것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자신의 부모님을 사랑했고, 그녀의 사정은 아스터에 비하면 훨씬 좋았다.

어쨌거나 마리안은 부모님이 자신과 동생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서툰 부모였지만, 그래도 형편이 좀 더 좋았다면 훨씬 많은 애정을 줄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식 하나를 사람들의 눈에서 숨겨 유폐해 놓고, 다른 자식이 학대해도 방치하는 이 나라의 왕과 왕비에 비하면 그래도 마리안의 부모는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마리안은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아스터의 손만 잡고 있었다. 아스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마리안은 눈을 감았다. 섣부른 위로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스터에게 그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만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마리안의 마음은 통했는지 아스터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마리안의 손을 마주 다독여 주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마리. 난 괜찮아.”

저 사람의 괜찮다는 말속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이 담겨있는 걸까. 마리안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커다란 눈 속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입가를 살짝 끌어 올렸다. 잔잔한 미소였지만 묘하게도 클로타르와 무척 닮아 보였다. 아스터도, 마리안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마리안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프지 않아요?”

마리안의 질문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제는 아프지 않아.”

“아까 보니까 등 전체가 여전히 불그스름하게 보이기는 해요. 정말 괜찮나요? 얼굴도 아직 창백해요.”

아스터의 얼굴이 아까보다 좀 더 창백해진 것 같아서 마리안은 불안해졌다.

“신성력을 쓰면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그래.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응, 정말로 괜찮아. 힘도 적당히 썼고, 상처도 더는 아프지 않아. 상처도 며칠 뒤에 신성력을 한 번 더 쓰면 흔적 없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을 거야.”

“다행이다.”

마리안은 다시 한번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스터가 이번 상처로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받을지 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쉬는 정도로는 절대로 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어내리던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등에 몸을 기댄 채 아스터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너무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맺혀있었다.

동시에 아스터는 등허리가 조금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리안이 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아스터에게 전달되는 것은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축축한 물기뿐이었다.

아스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리안이 어째서 울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바라보기 힘들어했으니 안도의 눈물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를 동정해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왜 우는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마리안이 자신을 위해서 울고 있다는 사실이 아스터에게는 소중했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서 아스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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