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마리안의 결심
아스터가 잠깐 정신이 든 것은 오전 8시 무렵이었다.
“마리…….”
그는 마리안이 곁에 있는 것을 보자 순간 안도했지만, 여전히 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부탁이야. 여기서 도망쳐.”
“아스터…….”
“칼멘 후작이 아마 오늘 다시 찾아올 거야. 성채의 문이 그때 열릴 테니 어떻게든 탈출을 해봐.”
“전 당신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아스터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무언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떠나, 마리.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쳐.”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마리안의 눈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통증이 심해지는지 아스터의 의식이 다시 흐릿해져 갔다. 마리안은 식사도 거른 채 그런 그의 곁에서 아스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의사는 아침 식사 전에 찾아왔다.
마리안은 밝은 햇빛 아래에서 의사가 아스터의 상처를 처치하는 것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걸로 세 번째로 보는 상처였지만, 유달리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등에는 피부가 거의 다 벗겨져서 시뻘건 살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피와 진물이 올라오고 있는 상처가 너무 끔찍해서 마리안은 창백하게 질렸다.
의사 역시 얼굴을 찌푸린 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는 꽤 능숙한 손길로 처치를 끝내고는 의식이 없는 아스터에게 직접 약을 먹이기까지 했다.
“오늘내일은 계속 탑에 머물며 직접 처치를 할 생각입니다.”
심지어 그는 마리안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가 첫 번째 치료 후에는 마리안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방치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아스터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리였다.
마리안은 창백한 얼굴로 피로 얼룩진 붕대와 천 그리고 아스터의 옷을 바구니에 모았다.
“이걸 치우고 올게요.”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의사가 아스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방문을 열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나선형 계단의 맨 아래쪽에서 기사들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감시가 삼엄하지는 않았다. 클로타르가 다녀가면서 아스터가 저렇게 사경을 헤맬 정도로 채찍질을 당한 뒤에는 항상 그랬다.
애초에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감시하는 대상은 아스터였기 때문이다.
기사와 병사들은 마리안이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하인을 불러 치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스터를 보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직접 바구니를 들고 방을 나선 참이었다.
절반쯤 넋이 나가있던 마리안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쯤 실수로 한 칸을 헛디디고 말았다.
“앗!”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걸 느낀 순간 어떻게든 뭐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빨래 바구니를 들고 있던 탓에 계단의 난간을 잡는 것도 한발 늦고 말았다. 마리안은 그대로 넘어져 돌계단을 대여섯 개쯤 굴러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단을 거의 다 내려온 상태였고, 뜻밖에도 바구니가 완충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바구니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아스터의 피가 묻은 붕대와 천 조각들이 그대로 쏟아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마리안은 자신이 피 묻은 붕대의 일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넘어지면서 돌계단에 부딪힌 곳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녀는 발작적으로 자신의 몸에 쏟아진 붕대 뭉치를 치웠다.
코끝에 진한 피 냄새가 닿았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있는 힘껏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아스터의 상처가 뇌리에 떠올랐다. 피부가 다 벗겨진 처참했던 상처, 그리고 웃으면서 채찍질을 했을 클로타르가 떠올랐다.
‘가능하면 빨리 네가 저 짐승의 새끼를 뱄으면 좋겠거든.’
‘그러면 지금의 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안겨줄게.’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위장 안쪽에서 밀려왔다.
마리안은 바구니와 붕대 따위를 더 신경 쓰지 못한 채 내달렸다. 그녀가 정신없이 뛰는 모습에 깜짝 놀란 기사 하나와 병사 셋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마리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간 마리안은 중정의 구석진 곳으로 가서 주저앉아 위장 안에 들어있는 것을 게워냈다. 하지만 전날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아침도 먹지 않아서 나오는 것은 위액밖에 없었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따라 나왔던 기사 하나가 흠칫 놀라 더는 다가오지 못할 정도였다.
마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아팠다.
“괜찮습니까?”
결국 기사가 다가왔지만 마리안은 창백한 얼굴로 잠깐 쉬면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는 손만 내저었다.
제발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머뭇거리던 기사는 마리안의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지 구석으로 사라졌다.
마리안은 기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마리……. 여기서 도망…쳐.’
갑자기 아스터의 말이 현실감을 가지고 그녀를 짓눌렀다.
아스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아스터를 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만은 마리안의 진심이었다.
‘네가 감당할 수 있어?’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그 목소리의 존재를 깨닫자 목소리는 끊임없이 마리안에게 속삭였다. 이 상황을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냐고.
아스터는 매달 채찍질을 당하고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고통받을 것이고, 클로타르는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교배해 아이를 낳아줄 암컷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6개월의 시간을 주겠다고 한 그는 내내 집요하게 마리안을 괴롭히며 압박을 가할 것이다.
아스터의 말대로 애정과 사랑만으로 남아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임신하면 클로타르는 그녀를 아스터에게서 떼어내 어딘가 다른 곳에 감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신하지 않으면 분명 그녀를 대체할 사람을 구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마리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할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달콤한 사랑 따위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아스터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리안의 앞에 펼쳐져 있는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스터가 마리안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도망가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했다.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마리안은 주저앉은 채 두 팔에 머리를 묻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도망갈 생각을 해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지?’
그동안 성채의 구조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기사와 병사들이 따로 그녀의 행동을 감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탈출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성채는 높은 돌과 벽돌담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출입문은 경계가 삼엄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터였다.
마침 아스터의 상태가 위중한 걸 아는 성채의 기사와 병사들은 평소보다 더 느슨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의사는 간밤에 성채에서 나가지 않았고, 칼멘은 성채에서 머문 게 아니라면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마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괜찮습니까? 부축해 드릴까요?”
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 보이는 자리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마리안은 몸집이 커다란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제법 더운 날씨에 갑주를 전부 차려입은 기사의 눈은 마리안처럼 새파란 색이었다. 그의 어조는 무뚝뚝했지만 눈빛만큼은 친절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태연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자, 기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리안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아직 계단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빨래 바구니와 피 묻은 붕대 뭉치를 수거해 주방과 세탁실이 있는 지하로 천천히 내려갔다.
마리안이 지금까지 주방을 찾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녀두길 잘했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성채 안 곳곳을 돌아다니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마리안은 좀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마리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아스터의 곁을 지키던 의사, 베르트였다.
처음에는 마리안이 금방 돌아오지 않아도 의사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녀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베르트 역시 처음부터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랭스 자작가의 삼남으로 왕궁에서 왕족들을 돌보는 주치의가 되기 위해 의술을 배웠다.
르샤베 왕국은 치유 마법, 치유의 신성력이 공존하는 것치고는 의술이 상당히 발전한 나라였다.
치유 마법과 신성력이 위대한 힘이기는 했지만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한계가 명확했다. 그 때문에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의술이 크게 발전했고, 의사들은 세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베르트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비록 작위를 이을 수 없어 시작한 의학 공부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소명 의식도 있었고 자부심도 있었다.
베르트 랭스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수재였고, 처음 의술을 배울 때만 해도 신분에 관계없이 아픈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과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왕궁 주치의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시기에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내려졌다. 왕실이 비밀리에 숨겨둔 왕자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었다.
베르트가 아스터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으로 당시 아스터는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왕세자와 똑같이 생긴 숨겨진 왕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베르트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더욱이 그에게 주어진 일은 너무나 무겁고 막중한 것이었다. 왕실의 비밀을 엄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왕자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뒷감당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왕세자가 매달 왕자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르면 베르트는 혹시라도 왕자가 죽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의 상처를 돌봤다.
왕실과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왕세자를 위해서도 탑에 유폐된 왕자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왕세자가 가혹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하아.”
그는 약 기운에 잠들어 있는 왕자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눈앞의 왕자는 열여섯이 되었을 때부터 매달 도망 노예처럼 채찍으로 매질을 당했다.
그러나 정작 르샤베 왕국에는 노예가 없었다. 이 땅의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태어나게 하지 않았지만, 신분이 높고 고귀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어떤 비천한 자도 왕자처럼 채찍질을 당하지는 않았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반역을 저지른 사람들이라 해도 그렇게 매달 등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매질을 당하지는 않았다.
베르트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일을 마리안이 받아들이기 쉬울 리 없었다.
아스터의 등에 감은 붕대에 핏물이 배어드는 것을 보며 베르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이번 상처는 유독 심했다.
클로타르는 아스터를 싫어했지만, 적정한 선을 유지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달랐다. 거의 등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매질을 했다. 클로타르 자신이 탈진할 정도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상처가 너무 처참해서 베르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 왕세자가 이런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형제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대체 저하는 언제까지 이렇게 하실 건지…….’
열여섯 살이 된 해부터 10년도 넘게 매달 채찍질을 당한 아스터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아스터는 깡마른 체구에다 햇빛도 거의 보지 못해 늘 창백했지만 타고난 체력만큼은 상당히 좋았다. 게다가 그의 몸에 감돌고 있는 힘은 그의 생명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마리안은 처음 탑에 왔을 때 베르트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왕자를 방치한다고 생각했지만, 베르트는 한 번도 왕자를 방치한 적이 없었다. 그로서는 감히 왕자를 방치할 수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을지언정 상대는 왕자였고, 만에 하나라도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베르트는 살아남기 힘들 테니 말이다. 단지 그동안은 왕자의 체력과 회복력이 어느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안에게 맡겨놓고 여유를 부렸을 뿐이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문득 베르트는 아스터가 간신히 눈을 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도 힘겨운 듯,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베르트……?”
“네, 접니다. 좀 어떠십니까?”
“…….”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도로 감는 아스터를 보며 베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렸습니다만, 상처가 매우 심해서 아물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습니다. 신관은 당분간 오지 않습니다. 이번만큼은 직접 치료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너무 클 테니까요.”
베르트의 말에 아스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리…….”
“마리안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아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안에게 도망가라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베르트를 통해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아스터를 보며 베르트는 방금 전에 했던 말을 한 번 더 꺼냈다.
“마리안이 없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돌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리야. 몽롱해서 아무런 힘도 없어…….”
한참 만에야 아스터가 대답했다. 정말로 힘겨운 듯 몇 번이나 끊어서 말해서 베르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진통제를 좀 더 강한 것으로 드리겠습니다. 마리안이 신경 쓰이시겠지만 이번 상처는 정말로 위중합니다. 힘이 돌아오는 대로 조금이라도 좋으니 치료를 하도록 하십시오.”
아스터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는 것을 보며 베르트는 왕진 가방에서 진한 녹색 유리병에 담겨있는 약을 꺼냈다.
그러나 약을 먹여 아스터를 다시 재운 뒤에도 마리안이 돌아오지 않았다.
“…….”
베르트는 정오가 되도록 마리안이 돌아오지 않자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스터의 침상 옆에 놓아둔 의자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곧 하인이 탑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왔다.
“알리체 영애는 어디에 있지?”
“알리체 영애 말씀입니까? 함께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베르트는 미간을 찡그린 채 대답했다.
“자네 눈에는 이 방에 나와 아스터 님밖에 없는 게 보이지 않는 건가?”
“아…….”
하인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짓자 베르트는 오늘 들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내려갔었는데 중정이나 서재 같은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군. 찾아보고 방으로 돌아오라고 일러주게.”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하인이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도 한참 시간이 흘렀다.
베르트는 다시 한번 설렁줄을 당겼다.
이미 시간은 오후에 접어 든 지 오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마리안이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베르트는 간밤에 마리안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테니 어딘가에서 울다가 지쳐 잠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랬다면 하인이 마리안을 찾아내 그녀를 깨워 데려오거나, 적어도 그녀가 어디에서 잠들어 있는지를 자신에게 알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안을 찾으러 보낸 하인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설렁줄을 아무리 당겨도 반응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을 때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둔탁한 소리였기 때문에 베르트는 문을 열어젖혔다.
계단을 올라오던 사람은 칼멘이었다.
베르트는 당황해하며 얼른 칼멘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후작님.”
“무슨 일이 있는가?”
“알리체 영애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인에게 찾아보라 명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멘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베르트의 뒤편으로 보이는 아스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떠신가?”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신관님이 오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아직도 저하의 성정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베르트가 얼른 꼬리를 내리자 칼멘은 혀를 찼다.
“많이 안 좋으신가?”
“이번에는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의술만으로는 회복하는 데 전에 없이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칼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르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새벽녘에 흥분할 대로 흥분한 데다 지쳐서 탈진한 클로타르에게 안정제와 강장제를 처방했던 베르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칼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 돌아가 쉬고 계시네. 왕실 주치의가 저하를 모시고 있으니 자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베르트는 그 말에 얼른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지난 세월 동안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가 아무리 클로타르의 건강에 신경을 써도 클로타르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칼멘은 지금처럼 선을 긋고는 했었다.
베르트 역시 자신이 왕실 주치의가 될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칼멘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아스터 님을 잘 보살펴 드리도록 하게. 나는 알리체 영애를 찾아봐야겠군.”
“너무…….”
칼멘이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려 했을 때, 베르트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퍽 의외였던지 칼멘은 돌아보았다.
“자네, 방금 무슨 말을 하려 한 건가?”
베르트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이 말했다.
“너무 몰아세우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칼멘은 조금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네가 그런 말을 다 하는 건 처음 보는군.”
그 말에 베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린 아가씨이지 않습니까.”
“글쎄, 세상에는 빨리 철이 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베르트는 그 말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칼멘은 베르트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말없이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그의 뒤를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칼멘이 따로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성채에서 마리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베르트만큼이나 칼멘도 마리안이 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 어제의 일이 꽤 충격이긴 했을 테니 어딘가 구석진 자리에서 울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칼멘을 호위해 왔던 병사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알리체 영애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채 안 어디에서도 안 보입니다.”
“뭐라고?”
성채의 빈방에 앉아 병사들이 마리안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칼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채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건가?”
“그것이…….”
병사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성채의 문이 열린 것은 후작님께서 성채를 방문하셨을 때뿐이라고 합니다.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성채 안에서 일하는 자들도 전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다. 당장 병사들을 동원해서 찾아보도록 해.”
클로타르가 다녀간 다음 날이면 항상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성채 안이 시끄러워졌다. 병사와 기사들이 지하부터 꼭대기 층에 이르기까지 성채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마리안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창 너머로 해가 서쪽으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칼멘은 초조해졌다.
마리안이 도망쳤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도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불안해졌다. 마리안 알리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왕세자가 얼마나 분노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도 마리안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칼멘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채 밖으로 병사들을 일부 내보내어 알리체 영애를 찾아보게 한다. 설령 운 좋게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네가 책임지고 여자를 잡아 오게.”
그는 결국 마리안이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아래 병사의 일부를 성채 밖으로 내보냈다. 마지막 말은 성채 수비대의 대장을 향한 것이었다.
수비 대장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반드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있겠다. 나는 일단 왕성으로 돌아갈 테니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칼멘은 당장 내일 아침 일찍 왕궁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왕성에서도 한참 떨어진 이곳 성채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호위 병사들이 재빨리 칼멘을 둘러싸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채의 기사와 병사들을 헤치고 자신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중정의 뒤편, 마구간과 이어지는 곳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칼멘의 검은 마차가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어서 마부가 등불을 켜놓고 마부석에 매달아 놓고 있었다.
“먼저 돌아간다.”
칼멘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앉자마자 마차 문을 닫은 칼멘이 정면을 바라본 순간,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움찔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마리안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너, 너…….”
너무 놀란 나머지 칼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마리안의 이름조차 바로 부르지 못하고 잠시 동안 숨을 골랐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후작님께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어제 왕세자 저하께서 제 부탁은 들어주라고 하셨잖아요.”
마리안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칼멘은 마리안이 흉기 같은 것을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자, 창문을 두드려 서서히 성채를 빠져나가려는 마차를 일단 멈춰 세웠다.
“잠시 대기하도록.”
의아해하는 마부에게 큰 소리로 명령한 칼멘은 마리안을 노려보았다.
“주제넘은 짓을 하는군.”
백발이 성성한 칼멘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주제 넘는다, 라……. 그럴지도 모르죠.”
마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한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만 안겨주셨는데 이 정도 반항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은 도망가고 싶었는걸요.”
마리안은 솔직하게 칼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용기를 쥐어짜 낸 적은 없었다.
사실 마리안은 충동적이나마 잠시 동안 정말로 도망갈 생각을 했다.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스터를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녀는 이 성채 안에서, 동쪽 탑의 꼭대기 층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스터와 함께 있는 것에 숨이 막혔다.
비밀리에 유폐된 왕자와 달마다 찾아와서 제 쌍둥이 형제를 학대하는 왕세자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꽉 막히는데, 어제는 심지어 왕세자의 후손을 대신 낳으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마리안은 정말로 도망갈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그동안 성채 안의 곳곳을 누비고 다녀서 이곳의 지리를 빠삭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병사와 기사들이 어디서 감시를 하고 어디서 그녀를 지켜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비된 성채에서 몰래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바로 칼멘의 마차였다.
이곳을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칼멘의 마차까지 철저하게 수색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리안은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마차에 숨어들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성채 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모습에 병사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후작의 마차 안쪽까지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안은 칼멘의 조력 없이 마차 안에 몰래 숨어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칼멘은 절대로 그녀를 밖으로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칼멘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안 그래도 전날 클로타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칼멘에게 말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게 부탁이 되게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지?”
“아무리 봐도 도망가기 쉽지는 않아 보여서요. 저는 무모한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 말에 칼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마리안 알리체가 예상보다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칼멘은 평생을 르샤베 왕국의 정치판에서 구른 사람이었다. 그는 신사다운 용모의 백발이 성성한 노귀족으로 보였지만 르샤베 왕국의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능구렁이였다.
그런 칼멘도 마리안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어린 계집아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이 쇠락하여 갖은 고생을 다 한 명문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지만 고작해야 스물두 살이었다. 스물두 살짜리 여자가 알면 뭘 알겠는가. 그래서 다루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마리안의 눈을 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 싶어졌다. 칼멘의 눈을 저렇게 똑바로 보고 제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나를 기다린 건가?”
“네.”
“그래, 그럼 나에게 대체 뭘 원해서 이런 짓을 한 거지?”
칼멘은 일단 마리안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망갈 수 없다는 말을 쏙 빼고 일부러 도망가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호기를 부리는 이 어린 아가씨의 말을 어디 들어나 보자는 기분이 들었다.
“클로타르 저하께서 저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후작님께 말씀드리라 하셨지요. 저는 후작님께 묻고 싶은 게 있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다면 굳이 이런 좁고 어두운 마차에서 기다렸다가 말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오늘 나는 바로 저하의 뜻에 따라 널 만나러 찾아왔으니 말이다.”
칼멘이 차갑게 말했지만 마리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마리안은 사뭇 태연해 보였다.
“어디서 대화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환기되기도 하니까요.”
마리안은 칼멘에게 질질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눈살을 찌푸리는 칼멘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제가 클로타르 저하의 뜻대로 왕손을 출산하면 아스터 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칼멘은 그 질문에 입가를 살짝 끌어 올렸다. 당돌한 면이 있긴 했지만 역시 어린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누구라도 첫정을 준 상대라면 그 뒤의 처우가 고민되긴 했을 것이다.
“아스터 님의 처우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분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저하께서는 아스터 님을 해치지 않아.”
“숨이 넘어갈 정도로 채찍질을 하는 게 해치지 않는 건가요?”
“…어제도 말했지만 알리체 영애, 자네는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어.”
“제가 무례한 질문을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삼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부분 아닐까요?”
마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칼멘은 불쾌하다는 듯 한동안 마리안을 노려봤지만 결국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클로타르 님도 원해서 아스터 님에게 그런 일을 하시는 건 아니다.”
칼멘은 마리안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본 클로타르는 아스터를 채찍질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을 하는 양 신나게 웃고 있었으니까.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클로타르는 아스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후계자가 될 왕손이 태어나도 아스터 님의 신변에는 지장이 없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군요. 하지만 아스터 님은 계속 이 탑에 갇혀 지내시는 거고요.”
“필요에 따라 장소는 얼마든지 옮길 수도 있겠지.”
그 말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얼마든지 그를 더 깊숙한 곳으로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아스터 님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그분의 신변에는 그 어떤 위해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이라면 신 앞에서 맹세할 수 있다.”
마리안은 그 대답에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꺼냈다.
“대체 어째서 아스터 님을 이곳에 숨겨둔 것이죠?”
칼멘이 마리안을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저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리? 권리라고?”
칼멘이 훨씬 사납게 마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는 비록 돈에 팔려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는 제 의지로 이 탑에 남을 겁니다. 그래서 클로타르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제게 그럴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아스터 님과 저의 아이를 낳아 저하께 바칠 생각입니다.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저도 남은 인생은 좀 더 편하고 귀족답게 살고 싶으니까요.”
마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칼멘은 잠시 마리안의 속내를 가늠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마리안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저하와 후작님께서 저에 대한 대우를 좀 바꿔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하녀 취급이 아니라, 후계자가 될 왕손을 얻기 위한 협조자로 저를 대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오늘 후작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이야기였습니다.”
“…….”
칼멘이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마리안을 보다가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협조자라고?”
“아니면 공모자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저하와 후작님이 저를 아스터 님의 방에 밀어 넣은 것은 제가 그분을 위로하고 그분의 마음을 사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리고 너는 제법 잘해냈지.”
“그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으니까요. 저는 아스터 님이 좋습니다. 하지만 클로타르 저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죠. 그러니 앞으로는 하녀 취급 대신에 같은 목적을 가진 협조자로 절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벌써부터 귀족으로 대우받고 싶다는 건가?”
칼멘이 미간을 찌푸리자 마리안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전 원래부터 귀족입니다.”
그녀의 당당한 말에 칼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건방진 소리였지만 귀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 꽤 마음에 들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클로타르 저하께 말씀드려 보도록 하지.”
“그 말씀은 아스터 님을 이곳에 숨겨둔 이유는 제게 아직 알려주실 수 없다는 뜻인가요?”
칼멘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저하께 말씀을 드려보고 그분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때 말해주겠다. 섣불리 말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닐뿐더러, 너도 오히려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마리안이 침착하게 물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뜻인가요?”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무 많은 걸 알면 오래 살 수 없는 법이지.”
마리안은 한숨을 쉬고 일단 여기서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질문에 대답을 듣는 것은 일단 제가 양보하죠. 언젠가 말씀해 주실 날이 올 거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너에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조만간 말해주게 될 거다.”
칼멘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후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말해보게.”
마리안은 잠시 칼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은 2~3일이라도 좋으니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미래에 저를 귀족답게 살게 해주겠다고 하셨으니, 적어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마리안이 이 성채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마리안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귀족으로 살게 해주려면 평판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옳았다.
“그 부분은 클로타르 전하께서도 아마 허락하시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앞으로는 집에 갈 때마다 품위 유지를 위해 금화를 지급하도록 하겠다.”
“관대한 처우에 감사드립니다.”
마리안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또 있는 건가?”
칼멘이 조금 질렸다는 얼굴을 하자 마리안은 생긋 웃었다.
“클로타르 저하께서 저에게 반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제처럼 아스터 님을 빈사 상태로 만드신다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저하께서는 아스터 님을 반드시 매달 찾아오셔야 하는 것인지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멘이 단호하게 말해서 마리안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매우 난감한 일이지만, 후작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고귀한 혈통의 자손일수록 그리 쉽게 부모를 찾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 말에 칼멘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원한다고 해서 임신이 되었다면 왕세자가 마리안을 이 탑까지 데려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매달 아스터 님에게 가혹한 일을 하시면서 반년의 시간을 주시는 것은 너무 촉박합니다. 좀 더 시간을 주시든가, 아니면 신관이라도 빨리 찾아오게 해서 상처의 빠른 회복을 돕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칼멘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또한 저하께 말씀드려 보겠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저의 용건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칼멘은 새삼스럽다는 듯 마리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음부터는 숨바꼭질을 하느라 성채를 뒤엎는 일 없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바로 전했으면 좋겠군.”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멘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지만 곧 마차의 문을 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차에서 먼저 내려 마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뜻밖의 행동에 마리안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칼멘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운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영애의 행동과 말들은 꽤 인상 깊었어. 마음에 들었네. 저하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최대한 영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보지. 적극적인 협조자라면 환영하는 바니까.”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한 번 더 우아하게 인사했지만 칼멘은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기억하도록. 선을 넘을 생각은 하지 말게. 더불어 영애 스스로 저하의 편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저하에게서 돌아선다면 그때는 영애 혼자만이 아니라 그나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알리체 남작가 전체가 파멸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명백한 협박이었지만 마리안은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아.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방까지는 같이 올라가도록 하지.”
칼멘은 정말로 그 이상으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마리안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동쪽 탑의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까지 새빨갛게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베르트에게 마리안의 잠적이 약간의 오해였다고 둘러댄 뒤, 그녀를 잘 도와주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칼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베르트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길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저 후작님과 이야기를 좀 나눴을 뿐이에요.”
마리안은 얼버무리듯 그렇게만 대답했다.
“아스터 님의 상태는 어떤가요?”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입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종일 힘드셨을 텐데 이제부터는 제가 아스터 님을 돌보겠습니다.”
“하아, 그래요. 오늘은 여러 가지로 피곤했으니 영애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르트는 거절하지 않았다. 실제로 베르트는 정말로 피곤했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스터의 상태를 살핀 것으로도 모자라서, 돌아오지 않는 마리안을 기다리며 탑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소동에 귀를 기울였던 탓이다.
어쨌거나 그는 마리안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일 오전 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아스터 님이 통증을 호소하면 이 약을 드리세요. 좀 더 강하게 새로 만든 약이라 효과가 좋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드려서는 안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의사가 알려주는 적정량을 머릿속에 새기며 마리안은 대답했다.
베르트는 마리안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마리안이 아스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사실 그는 마리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아스터를 돌보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운명 공동체가 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베르트는 마리안을 잘 알지 못했고, 그녀를 신뢰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안 역시 베르트가 어떻게 의사가 되었으며, 왜 하필 왕세자의 눈에 띄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대체 어떤 이유에서 무슨 목적으로 아스터를 치료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스터는 힘겨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잠이 든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보였다.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리안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심한 고열은 아니었다. 그래도 종일 의사가 달라붙어 있었던 덕분에 상태가 조금은 호전된 게 아닐까 싶었다.
마리안은 꼿꼿하게 앉아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다정한,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베갯잇만큼이나 얼굴이 하얗게 보이는 것이 가슴 아파서 마리안은 아스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 칼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저는 비록 돈에 팔려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는 제 의지로 이 탑에 남을 겁니다. 그래서 클로타르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제게 그럴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아스터 님과 저의 아이를 낳아 저하께 바칠 생각입니다.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저도 남은 인생은 좀 더 편하고 귀족답게 살고 싶으니까요.’
마리안은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웠다. 칼멘에게 한 말에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전 이곳에 제 의지로 남을 거예요, 아스터.”
그녀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아스터의 곁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진실을 속삭였다.
“제가 여기 온 건 아마도 우연이었겠지만, 앞으로는 제 의지로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마리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앞으로는 제가 당신을 지킬 거예요.”
어째서 이 남자를 지키겠다는 엄청난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아스터가 더 이상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아스터가 이렇게 다치지는 않도록 막고 싶었다. 그래야 이 탑 안에서 클로타르의 명령을 들으며 아스터를 돌보고, 감시해 오면서 방치했던 사람들과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다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스터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