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7화 (7/24)

7장 고통스러운 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마리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더는 서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소름 끼치고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마리안은 처음 알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있었다.

“마리안 알리체.”

아직 방 안에 남아있던 칼멘이 마리안을 불렀지만 마리안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숨만 몰아쉬었을 뿐이다.

“마리안 알리체.”

마리안은 칼멘이 인내심을 가지고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 뒤에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가?”

칼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안은 고개를 들어 칼멘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서있어서 칼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뇨. 괜찮지 않은 거 같아요.”

마리안은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당한 폭행과 모욕 그리고 폭언은 평생 겪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아스터가 아래층으로 끌려갔다. 아마 그는 또 무차별적인 채찍질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마리안은 주저앉은 채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겁에 질린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취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추울 리가 없는 계절인데도 그녀는 몹시 한기를 느꼈다.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스터가 매번 피투성이가 되었던 광경이 눈앞에서 떠올랐다. 분명 클로타르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스터에게 채찍질을 할 것이다.

입술을 깨문 채 마리안은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너무나 두려운 가운데 혼란스럽기만 했다.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그것이 칼멘의 한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멘은 클로타르의 사람이니 이런 일로 울고 있는 마리안이 귀찮고 번거로울 것이다. 하지만 마리안은 도저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발소리와 함께 칼멘이 마리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그는 무릎을 굽혀 주저앉아 있는 마리안의 앞에 앉았다.

“알리체 영애, 이걸 받거라. 자, 어서.”

마리안은 별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칼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마리안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칼멘이 내민 것은 그의 손수건이었다.

“얼굴이 엉망이야. 손수건으로 닦는 게 좋겠어.”

마리안은 칼멘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았다. 눈물과 함께 코피가 묻어났다. 그녀는 새하얀 비단 손수건에 묻은 붉은 피를 보며 얼어붙었다.

자신의 피를 봤기 때문은 아니었다.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은 클로타르가 다녀간 뒤 마리안이 늘 아스터의 상처를 닦고 정리했던 피 묻은 수건을 떠올리게 했다.

마리안은 손이 다시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마리안을 지켜보고 있던 칼멘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하의 행동이 두렵고 혼란스럽겠지만 너에게 나쁘기만 한 조건은 아니다. 저래 봬도 저하께서는 자신의 말을 신의로 지키는 분이니까.”

“신의? 신의라고요?”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칼멘의 말을 비웃는 어조로 따라 말하고 말았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신의를 기대하다니.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마리안은 어린 나이에 퍽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돈을 벌어야 했던 그녀는 고귀한 귀족 영애였다면 절대로 보지 못했을 사람들의 진면목을 많이 보았다. 개중에는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나쁜 사람은 그보다 좀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리안이 만나본 나쁜 사람들은 방금 전 클로타르 왕세자가 보여준 모습에 비하면 감히 악인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너무나 비열하게 느꼈던 루켄조차 클로타르에 비하면 인간적이었다.

마리안은 그녀를 벌레만도 못하게 바라보는 클로타르의 눈동자에서, 그의 입술이 그려내는 경멸이 가득한 미소에서 끝없는 악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클로타르에게서 신의를 기대한다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칼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가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어쨌든 저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세자이시다. 그분의 말씀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어.”

“왜 저예요?”

마리안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불쑥 물었다.

“아니면 제가 처음이 아닌 건가요?”

칼멘은 잠시 말없이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처음이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내 말은 안 믿어도 아스터 님이 널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

“…….”

마리안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스터가 시중드는 여자는커녕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마리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안이 어느 정도 납득했다고 생각했는지 칼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의 말씀대로 그분께 필요한 것은 후계가 될 왕손이다. 그러니 아무 여자나 데려올 수는 없었지.”

마리안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런 일에 하녀로 부릴 만한 적절한 나이의 젊은 귀족 여자를 찾기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왕세자비 저하와도 용모가 닮아야 하니까.”

마리안은 그제야 이 나라의 왕세자비가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왕세자와 동갑인 왕세자비가 얼마나 아름답고 왕세자와 금실이 좋은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는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그토록 금실이 좋다는 이 나라의 왕세자 부부는 성년식을 올린 해에 바로 결혼해서 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후손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왕세자 부부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평범한 백성들은 왕손의 탄생을 바라 마지않으면서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설마 클로타르 저하께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건가요?”

마리안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칼멘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마리안은 새삼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째서 비 저하가 아니라 저하께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참 만에야 칼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야…….”

마리안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 저하께 문제가 있었다면 그분을 바꾸셨겠죠.”

너 같은 것에게 내 시중을 들게 할 리 없잖아, 하고 나긋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며 마리안은 몸서리를 쳤다.

마리안에게 직접 손을 대는 것도 싫어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쥐어 협박하고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장갑을 패대기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왕세자비에게 문제가 있는데도 그녀를 사랑해서 곁에 두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클로타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네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숨 쉬고 있으면 제대로 새끼조차 낳지 못한 내 비는 평생을 반성하며 몸조심을 할 테니까.’

그 말은 왕세자비를 경계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 숨겨둔 형제의 아이를 몰래 낳게 해 입양할 생각을 하면서도 왕세자비에게는 절대로 권력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마리안은 왕세자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백성들 앞에서 모습을 내보이는 왕실의 의전 행사 때 멀찍이서 몇 번이나 구경한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온화하고 봄날의 햇볕처럼 따스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왕세자비는 저 유명한 에베르토 공작가의 적녀였고, 고작 열 살이 되던 해에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어 왕세자와 함께 왕궁에서 자라났다.

두 사람은 마치 친남매처럼 늘 함께 붙어 다니며 자랐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왕세자가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그 어떤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도 눈길 한번 돌린 적 없이 왕세자비만을 사랑한다고 했다.

“소문은 다 거짓이었군요. 왕세자 저하가 비 저하를 누구보다도 아낀다는 소문 말이에요.”

마리안이 불쑥 내뱉듯이 말하자 칼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부 다 거짓은 아니야. 저하께서는 비 저하를 무척 아끼시지.”

그 말에 마리안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한 것을 보며 칼멘이 조용히 덧붙였다.

“비 저하께서는 저하의 말씀에 복종하시니까.”

“자기 뜻대로 움직일 인형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마리안 알리체, 네가 지금 어떤 존귀한 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이다.”

칼멘이 전에 없이 엄한 목소리로 책망했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클로타르는 자신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아내를 닮은 귀족 여자를 찾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마침 자신이 거기에 해당했다.

왕국에는 금발에 푸른 눈만큼은 아니어도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귀족 출신에 나이까지 따지다 보면 적절한 대체품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손을 낳으라니…….’

생각할수록 너무 엄청난 소리였다.

마리안은 이제 스물두 살이었다. 르샤베 왕국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스무 살에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바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여자들이 흔했다. 때문에 당장 임신을 해도 어색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지금껏 한 번도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성년이 되던 해에 사교계 파티에조차 나가지 못했던 마리안이었다.

루켄에게 팔려 갈 때부터 각오하기는 했었다. 늙은 귀족이나 평민 졸부의 애첩으로 팔려 갔어도 이런 일을 강요받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들은 왕세자가 자신의 아이로 위장할 왕손을 낳으라고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이윽고 마리안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접었다.

“아스터는…….”

그녀는 아래층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아스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길로 클로타르를 노려보다가 끌려가던 아스터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칼멘이 조용히 말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다.”

“이런 짓을 하고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칼멘을 향해 외쳤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 알면 가만히 계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미 두 분은 알고 계신다. 그리고 묵인하셨지.”

“…….”

마리안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어, 어떻게 그런…….”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아스터도 두 분의 아드님 아닌가요? 아스터도 왕자님이잖아요. 아닌가요?”

“…부정하지 않겠다.”

마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째서 아스터가 이런 일을 겪도록 내버려 둔다는 거죠? 왜요? 아스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설령 잘못했다고 해도 그에게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감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자식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다른 자식을 위해 종마 취급을 한단 말인가.

마리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칼멘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

마리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칼멘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칼멘을 노려보던 마리안은 결국 질려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다들 미쳤어.”

정말로 미쳤다. 이 사람들은 미친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례한 말은 오늘까지만 받아주겠다, 마리안 알리체.”

다시 한번 칼멘이 경고했지만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칼멘이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께서는 너에게 필요한 것을 물으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필요한 것을 말해라. 가능한 선에서는 들어주지.”

“…….”

마리안은 가만히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필요한 것은 잔뜩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에 그런 사소한 게 생각날 리가 없었다.

칼멘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차분하게 말할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너는 그동안 흥분을 가라앉히고, 곧 아스터 님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그는 그 말만 하고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마리안은 칼멘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문이 닫히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아스터가 끌려 나가면서 바닥에 튄 물이 여전히 남아있는 식어버린 욕조와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감옥 같은 탑 안의 방.

다시 손발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스터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팔려 온 신세였고, 아스터는 이곳에 갇힌 죄수였다. 그리고 그는 오늘 밤 다시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마리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칼멘의 말이 맞았다. 곧 아스터가 되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밤새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간호해야 할 터였다.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통증과 함께 비릿한 맛이 올라왔다. 마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만져보았다. 피가 조금 묻어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도로 주저앉는 대신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욕조를 비우고, 바닥을 쓸고, 흘러내린 물을 닦았다.

볼품없는 침대의 시트를 정리했다. 아스터가 되돌아와서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침대를 꾸몄다.

그리고 코피를 흘려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을 닦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에는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불렀다. 비워낸 욕조의 물을 가져다 버리게 하고 뜨거운 물을 끓여서 가져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약병을 점검했다. 의사도 함께 올 테니 모자란 약이 있다면 미리 받아놔야 했다.

그 모든 게 끝났는데도 아스터가 돌아오지 않아서 마리안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클로타르가 아스터를 고문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더 길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다.’

마리안은 칼멘의 말을 떠올렸다.

당연히 그렇겠지.

대체 왜 채찍질을 하는지는 몰라도 마법사까지 동원해서 그렇게 학대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타르는 아스터와 마리안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를 원했다.

마리안은 등을 똑바로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왕손을 낳을 수 없는 왕세자.’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라서 그녀는 가만히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리고 왕과 왕비에게서 버려진 왕자.’

그 누구도 분명하게 확인해 주지 않았지만 아스터는 클로타르의 쌍둥이 형제였다.

쌍둥이는 흔하지는 않아도 드물지도 않았다. 마리안이 기억하기로 그녀의 먼 친척 중에도 쌍둥이 자매를 둔 집안이 있었고, 어려서 알고 지냈던 가문 중에도 쌍둥이 자녀가 있는 집들이 간혹 있었다.

귀족보다 자녀의 수가 훨씬 많은 평민 집안에는 쌍둥이가 좀 더 많았다. 마리안은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돌보면서 일란성 쌍둥이뿐만이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도 본 적이 있었다.

단지 쌍둥이를 가지면 아무래도 한꺼번에 둘 이상의 아이가 태어나는 까닭에 모체에게도 부담이 큰 데다 양육하는 데도 두 배 이상의 힘이 들어가서 두 팔 벌려 반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거나 어머니가 몸이 약해 출산할 때 매우 위험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부모들은 한 번에 두 아기가 찾아왔다며 쌍둥이의 탄생을 기뻐했다.

더욱이 사람들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쌍둥이를 낳은 집안에서 또 쌍둥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기가 부모의 외양과 성격을 닮고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왕비가 쌍둥이를 출산했다고 해서 흠결이 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르샤베 왕국에는 왕가의 직계 후손이 귀했다. 하나뿐인 공주가 이웃 나라 왕자와 결혼해서 떠나버린 뒤로 국왕의 직계 혈육은 왕세자 클로타르가 유일했다.

“정말로 후계 문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마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였다. 전전대 국왕이 혈육을 죽인 끝에 왕위 계승에 승리했다고는 해도 쌍둥이 형제와의 싸움 때문은 아니었다.

클로타르와 아스터의 아버지인 현 국왕에게는 남자 형제가 셋이었고 여동생과 누나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왕위 계승은 장자인 현재의 국왕에게 평화롭게 이어졌다.

국왕의 손아래 동생인 공작 하나가 몇 년 전에 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국왕은 형제들과도 사이가 꽤 좋았다.

만약 지금의 국왕 역시 골육상잔 끝에 왕관을 거머쥐었다면 갑작스레 쌍둥이 아들이 태어나면서 후계 문제를 걱정했다고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불행한 역사도 없었다.

“왜지…….”

마리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제대로 사교계 데뷔조차 하지 못한 몰락한 귀족 영애라고는 해도 나라와 왕실의 역사에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스터는 한참 뒤에나 기사들에게 이끌려 돌아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이 없었고, 평소보다 더 지독하게 채찍질을 당한 것 같았다.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의사의 표정이 매우 굳어있는 것을 보면 그의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은 듯싶었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침대 위에 눕혀진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를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애정을 고백하던 그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기사들이 나가자 의사가 바쁘게 움직였다. 평소라면 마리안에게 이것저것 시키며 아스터를 내버려 두던 의사가 오늘은 마리안을 제지한 채 직접 상처를 소독하고 돌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요?”

마리안은 한참 만에야 질문할 수 있었다.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의사는 여전히 굳어있는 얼굴로 마리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죠?”

마리안이 불안한 얼굴로 묻자 의사는 그제야 마리안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안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중간에 몇 번 약을 먹이고 상처를 돌봤으니 괜찮을 겁니다.”

마리안은 그 말에서 의사가 오늘은 채찍질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몇 번이나 방 안으로 불려갔음을 깨달았다.

“지난번에 쓰고 남은 약 말고 오늘은 이걸 쓰도록 하세요.”

의사는 왕진 가방 안에서 마리안에게 새 약을 꺼내주었다.

“오늘은 바로 돌아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아침 일찍 다시 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십시오. 설렁줄만 당기면 하인이 내게 바로 와서 보고할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마리안은 평소와 다른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해서 물었다.

“…괜찮아야지요.”

그러자 의사는 입술을 깨문 채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내 목숨도 멀쩡하려면 아스터 님께서 괜찮아지셔야지요.”

“…….”

“그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의사는 마리안이 붙잡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황급히 사라져버렸다.

마리안은 멍하니 의사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의사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감정은 참담함과 두려움이었다.

‘아마 클로타르가 거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아스터를 채찍질해 놓고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의사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했겠지.’

마리안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의사는 칼멘 후작만큼이나 이 모든 미친 짓을 방관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의사도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는 협력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리안은 의사가 느끼는 공포와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리안은 아스터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의식이 없는 그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서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의사가 새로 감아놓은 붕대 위로 핏물이 배어 올라오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를 닦은 수건과 붕대들이 주변에 가득 쌓여있는 탓에 공기 중에는 이미 피 냄새가 섞여있었다.

마리안은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쌍둥이 형제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마리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그리고 그녀는 작게 구역질했다. 피 냄새와 피로 얼룩진 수건 따위를 보면서, 갑자기 치밀어 오른 혐오의 감정이 너무 강해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정말로 토할 수라도 있다면 차라리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스터의 처지가 비참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는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마리안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스터의 곁에서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의사가 이미 모든 처치를 하고 간 까닭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아스터가 의식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손을 붙잡고만 있었다. 아스터에게 그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저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마리안은 고통으로 진땀을 흘리면서도 앓는 소리 한번 마음껏 내뱉지 못하는 그의 곁에서 땀을 닦아주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는지 아스터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억제하지 못한 약한 신음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그는 엉망으로 터진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어떻게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클로타르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소리를 내지 말라고 매질을 당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가슴이 미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리안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면서 계속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스터의 의식이 잠깐이나마 돌아온 것은 해가 뜬 직후였다.

마리안은 붙잡고 있는 그의 오른 손가락이 조금 움직인 것을 보고 자리에서 뛸 듯이 일어났다.

“아스터, 정신이 들어요?”

그는 초점이 없는 멍한 눈으로 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늘 태양처럼 선명하게 빛나던 황금빛 눈이 흐리멍덩한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마리안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아스터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물을 좀 드릴까요? 목이 마르죠?”

아스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물수건으로 먼저 그의 입가를 조심조심 닦은 다음, 너무 차갑지 않은 물을 담아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물을 머금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춰 마시게 해주었다. 천천히, 사레가 들리지 않도록 마리안은 주의 깊게 그에게 물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마리안의 노력에도 입술을 축일 정도 이상으로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 무언가를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마리안은 너무나 속상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다.

“괴롭겠지만 약을 먹어야 해요, 아스터. 지금 열이 무척 심해요. 약을 먹어야 열이 내리고 통증도 줄어들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아스터, 조금만 더 마셔봐요.”

한참이나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 끝에 마리안은 의사가 주고 간 강한 진통제가 담긴 물약을 아스터에게 먹이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어쩐지 맥이 빠져서 아스터의 침대 옆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스터의 얼굴은 침대 시트만큼이나 하얗기만 했다. 그는 흐릿한 시선으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다가 힘겹게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세요?”

그 미세한 반응을 깨달은 마리안이 얼른 아스터에게 물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을 살펴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느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굴…, 어째서…….”

“아…….”

그제야 마리안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더듬었다.

클로타르가 그녀의 뺨을 후려치는 바람에 하얀 뺨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코피가 나긴 했지만 다행히 입술이 터지지는 않아서 아스터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듯이 아픈 와중에도 마리안의 얼굴이 부어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어젯밤에 허둥대다 부딪혔어요.”

마리안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녀의 뺨이 조금 부은 건 아스터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상태가 위중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터였다. 그에게 클로타르가 한 짓을 알려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클로타르…인가…….”

그러나 마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스터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클로타르의 이름을 말해서 마리안은 얼른 아스터를 달랬다.

“전 괜찮아요, 아스터. 정말로 어제 허둥대다 부딪혀서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끌려가 버려서, 그래서 조금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의 말에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의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든 아스터가 자신 때문에 더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마리안은 애가 탔다.

“아스터…….”

마리안이 손을 뻗어 잔뜩 찌푸려진 아스터의 미간 주름을 매만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아스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몹시 괴롭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리…….”

아스터가 쉰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끌려 내려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별거 아니었어요.”

마리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리자 아스터가 다시 물었다.

“그럴…리가 없어. 마리, 부탁…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발 말해줘.”

마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녀는 클로타르가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를 아스터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어조였다.

“마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말씀하세요. 다 듣고 있어요.”

마리안은 아스터의 손을 꼭 잡고 그의 말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스터가 마리안이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그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마리안은 그 모습에 너무나 애가 타서 천천히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끌어안고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등 전체가 너덜너덜해져 있으니 끌어안을 수조차 없었다.

“마리. 여기서 도망…쳐.”

그런데 아스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도망…치라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마리안을 보며 아스터는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클로타르가… 한 말……. 나는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어.”

아스터는 힘겨운 듯 느릿느릿 말했다.

“네가… 클로타르…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말도 안 돼요. 제가 도망치면 당신은 어쩌라고요?”

마리안이 경악하며 말하자 아스터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너도 알잖아. 클로타르는 나를 죽이지 못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마리안은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도 없지만, 제가 도망을 치면 당신은 그 화풀이 대상이 될 거라고요.”

그 말에 아스터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는 못하니까.”

“죽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두 번 다시 저랑 만날 수 없게 되어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요?”

마리안은 말하면서도 너무 유치한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발끈한 나머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순간 아스터의 얼굴이 아득해졌다.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마리안을 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그러한 반응에도 화가 났다. 자신을 생각해서 도망가라고 말해주는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내던진 말인지는 몰랐다.

“평생 이 탑 속에서 갇혀 살면서 저 말고 제 대체품이 될 다른 여자가 오면 그 여자에게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인가요?”

화를 낼 번지수가 틀렸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마리안은 결국 쏘아붙이고 말았다.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마리안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았다.

부끄럽고 화가 났다.

이런 일로 결국 울어버리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무력한 자신과 대책 없이 도망가라는 말부터 하는 아스터에게 화가 났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마리안은 처음으로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스터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서 마리안은 기가 막혔다.

적어도 마리안은 사지육신이 멀쩡했다. 하지만 아스터는 달랐다. 등은 시뻘건 살점이 다 드러난 채 물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면서 자기 걱정이나 할 것이지 지금 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단 말인가.

도망갈 방법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도망을 가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주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다음은?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탑에서 도망친 자신을 클로타르가 살려두려 할 리 없었다.

설령 하늘이 도와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그게 전부였다. 아스터는 두 번 다시 마리안을 볼 수 없게 된다. 그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일까?

“…나는.”

아스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그는 아주 느리게 말했다.

“자식을 낳을 생각도 없고, 내 아이를 클로타르가 이용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어. 그리고 네가 클로타르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

그는 점점 힘이 드는지 잠시 숨을 고르다 마저 말했다.

“마리, 너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진다면 무척 슬플 거야. 상상만으로도 그건 너무 괴로워. 하지만 네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점점 더 불행해지는 걸 보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

마리안은 그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스터가 얼마나 그녀를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인 말을 듣고 끌려가서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아스터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마리안에게 도망치라고 말했던 것일까.

채찍질을 당해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어디까지나 마리안을 걱정하고 생각해서 도망가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마리안을 생각해서 한 소리였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생각이 짧다며 화를 내고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심지어 질투까지 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 다른 여자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상해 버리고 그 여자가 아스터를 돌보다 그와 정이 들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화를 냈다.

생각이 짧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기적이기까지 한 건 대체 어느 쪽이었을까.

“화내서 미안해요.”

마리안은 울면서 사과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울음을 터트리자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힘겹게 울지 말라고 속삭였다.

“미안해요. 자꾸 눈물이 나와서. 조금 전에는 당신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어요.”

마리안은 아직도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 말했다.

“괜찮아, 마리. 나는 마리가 이곳을 벗어났으면 좋겠어. 마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그래. 진심으로 마리가 여기서 떠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

아스터는 여전히 힘겨워하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고는 더는 견딜 수 없었던지 앓는 소리를 작게 내더니 다시 의식을 잃었다.

“…….”

마리안은 그 옆에서 한참이나 더 울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아스터는 진심으로 마리안을 생각해서 도망가라고 말한 것이다.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가 클로타르의 뜻대로 이용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리안은 의식을 잃은 아스터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칼멘은 저래 보여도 클로타르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 말했다.

“그런 남자에게 신의…….”

마리안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용 가치가 있으니 마리안을 살려두겠다는 클로타르의 말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언젠가 이용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클로타르는 가차 없이 마리안을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먼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스터의 말이 옳았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마리안은 즉시 이곳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망쳐야만 했다.

도망갈 방법도 없고, 도망가서도 생활을 영위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긴 했다.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야만 했다.

클로타르는 반년의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 반년 동안 클로타르는 매번 찾아와 아스터에게 채찍질을 하고, 마리안에게 모욕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나날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동시에 그 모든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마리안은 아스터의 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상처를 돌보던 환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지내면서 아스터에게 너무나 정이 들어버렸다. 사실 마리안이 아스터와 함께 보낸 시간은 지난 몇 년간 가족과 보낸 시간보다도 길었다.

아스터는 과묵했지만 조금씩 마리안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마리안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늘 세상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던 마리안에게 항상 곁에 있는 아스터는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간호하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마리안은 아스터의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스터를 돌보는 건 마리안이었지만, 마리안 역시 어느 틈엔가 조금씩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탑 안에서의 생활은 힘든 노동을 할 때보다 편안했고, 아스터는 아름답고 다정하며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기뻤다. 무심코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서 클로타르가 아이를 낳으라는 말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건 어지간한 악인보다 더 악랄하고 자기중심적인 클로타르에게 질렸기 때문이었다. 아스터의 아이를 낳으라는 이야기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아스터가 그녀에게 떠나라고 말했을 때 느꼈던 절망감이 더 클 지경이었다. 아스터가 도망치라고 말한 그 찰나의 순간, 마리안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오갔다.

마리안이 아스터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주면서 그저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졌을 뿐이다.

처음에는 아스터를 대하기 힘들었지만 점차 그가 보여주는 다정한 눈빛과 건네는 말들, 그리고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접촉들에 익숙해져 버렸다.

아스터의 손을 잡고 그와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좋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 달콤했기 때문에 클로타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목욕 시중을 들면서 마리안은 이번에야말로 아스터와 끝까지 갈 거라는 각오와 기대를 모두 하고 있었다. 아스터가 원하는 것이 바로 마리안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클로타르가 나타났을 때, 마리안은 갖은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와 수치심 이외에도 다양한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자신 이전에도 아스터를 돌보던 여자가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마리안은 아스터의 하얀 얼굴을 보면서 생각을 곱씹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자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스터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를 독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 이전에 시중을 들던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나마 칼멘의 대답으로 바로 의혹을 털어낼 수는 있었지만,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가라는 아스터의 말에는 분노부터 솟구쳤다.

그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자신을 도망치게 하면 그가 클로타르에게서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자신을 그렇게 금방 포기해 버리는 아스터에게 화가 났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마리안은 식은땀에 젖은 아스터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기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아스터가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해서 지켜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힘으로는 아스터를 구해줄 수도 없고, 함께 도망을 칠 수도 없다. 마리안은 그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리고 이렇게 괴로운데도 아스터에게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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