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6화 (6/24)

6장 클로타르의 방문

그날 마리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스터는 해가 질 때까지 얌전히 책을 읽었고, 마리안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미치겠네.’

차라리 방 밖으로 나가 다른 공간에서 지낼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중정 산책이나 서재에 다녀오는 일 따위는 이미 다 해치워 버린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주방장을 괴롭힐 수도 없었다. 곧 저녁 시간인데 또 찾아간다면 사람 좋은 주방장도 기분이 언짢아질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마리안은 고민 끝에 바느질감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 와서는 바느질을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소매나 옷의 밑단이 터지면 그걸 꿰매거나 단추를 다시 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뭔가를 바느질하기에는 남아도는 옷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마리안은 날이 더워지면서 칼멘이 가져다준 여름옷을 한 벌 꺼내 멀쩡한 단추를 모두 뜯어내고 다시 새로 다는 일을 시작했다. 정말로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신경을 분산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단추를 다는 동안에도 그녀의 모든 신경은 아스터를 향해 쏠려있었다. 그가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낼 때마다 마리안은 새끼 고양이처럼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운 채 그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아스터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나 봐. 밤에 하자고 하다니.’

이미 엎지른 물이었으니 주워 담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막상 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괜찮은 걸까.’

클로타르와 칼멘은 그녀가 아스터를 잘 모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분명 이런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내게 그런 걸 요구한 거지? 나를 이용해서 아스터를 길들이려고 하는 걸까.’

마리안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그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스터를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의 마음이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아스터를 길들일 수 있을 리도 없잖아.’

마리안은 방금 단 단추의 실을 툭 끊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아스터는 흉포한 수감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 전체를 뒤져봐도 그처럼 얌전한 수감자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마음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건 마리안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마리안과 함께 지내는 동안 아스터는 바깥세상에 일체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고, 갇혀있는 자신의 신세를 원망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찾아오는 다른 불온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이 탑 밖에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러니 아스터는 아마도 이 탑에서 계속 지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죽은 뒤에조차 성채 밖으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리안의 손이 멎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아스터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딘가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주변의 초라한 풍경을 제외한다면 저런 모습이야말로 우아한 왕족 본연의 자태라 할 만했다.

갑자기 마리안은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스터가 영원히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스터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되는 걸까.

마리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살풍경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리안이 들어오면서 방 안에는 조금씩 물건이 늘어났다. 이제 이곳은 그녀와 아스터에게 허락된 두 사람만의 공간이라 할 만했다.

물론 마리안은 이 방에서 나가 중정에도 갈 수 있었고, 성채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허락만 받는다면 오늘처럼 다시 성채 밖으로 잠시 나가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생 이런 곳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

루켄은 그녀가 어느 정도 일하다 보면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일도 가능할 거라고 했었다. 칼멘이 그 말을 확인해 준 적은 없지만 그도 평생 마리안에게 이곳에서 갇혀 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언니는 꼭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리아나가 엄마를 보살펴 드려야 해. 알았지?’

집을 떠나며 동생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채 지났을 뿐인데 체감상 2년쯤 지난 기분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아무도 몰랐던 왕가의 비밀을 알게 된 그녀가 과연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긴 할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마리안은 불안해서 들고 있던 옷을 두 손으로 비틀어 짰다.

아스터를 몹시 좋아했지만 그를 위해 평생 이런 탑 안에 갇혀 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이곳을 단순히 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스터를 돌보는 일은 대우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이곳에서 마리안은 늦은 시간까지 눈을 혹사하며 바느질을 할 필요도 없었고, 혼자서 끝없는 돌바닥을 쓸고 닦을 필요도 없었다.

감시하는 눈은 있었지만 그녀를 귀족 출신의 하녀 혹은 보모라며 구경거리 삼아 놀리고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다.

식사는 양질이었고 잠자리도 따뜻하고 좋았다. 돌봐야 하는 사람은 얌전했고, 심지어 외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게 문제라면 문제일 정도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리안은 아스터가 좋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스터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스터와 함께 늙어 죽을 때까지 이 탑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면 과연 자신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이 탑 속에서 아스터만 바라보며 살 수 있을까?’

이제 와서 단호하게 아스터를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마리안은 아스터를 너무나 좋아했다.

사실 아스터가 강제로 그녀를 원했다면 마리안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강제로 범해져 비명을 질러도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마리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루켄에게 돈을 받고 자신을 팔았을 때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그녀의 의사를 물었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신사적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마리안이 아스터를 그저 돌봐줘야 하는 상대로만 인식한다고 해도 클로타르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었다. 더 이상 가문의 후광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를 없애는 데 클로타르는 일말의 주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미치겠다…….’

마리안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다시 바늘에 실을 꿰었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아래층에서 하인이 음식을 날라 왔다. 자그마한 탁자 위에 음식을 늘어놓는 하인을 지켜보고 있던 아스터가 갑자기 말했다.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욕조와 뜨거운 물을 준비해 줘.”

“…아, 네. 알겠습니다.”

“물은 많을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하인은 깜짝 놀란 듯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안이 탑에 들어온 이래 아스터가 다른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아스터는 필요한 모든 것을 마리안에게 이야기했고, 마리안이 하인에게 전했으니 말이다.

마리안이 이곳에 없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아스터가 그들과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하인은 눈에 띄게 당황한 듯싶었다.

하인뿐만이 아니라 마리안도 동요했다. 목욕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뺨이 달아올랐다. 다행히 이미 해가 진 뒤라 방 안은 어둑어둑해서 그녀의 뺨이 붉어진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리안은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하인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은 식사가 끝나고 하인들이 뜨거운 물을 가져다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를 두 개씩 짊어지고 올라온 남자들에게 인사했다. 모두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곳은 동쪽 탑의 꼭대기 층인 만큼 저 아래에서 물을 데워서 가져오려면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다. 하지만 하인들은 그저 공손히 고개만 숙여 보이고 떠나갔다. 아스터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까딱했을 뿐이다.

그 모습에 마리안은 문득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탑 속에 갇혀 학대를 받는 몸이라고는 해도 역시 그는 왕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

마리안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본 아스터가 이름을 불렀다. 마리안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당황했다.

하인들이 방 한구석에 준비해 준 커다란 목욕용 나무 욕조에 아스터가 마저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마리안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할게요.”

“무겁잖아.”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이런 건 남자가 해야지.”

그는 마리안에게 끝까지 물 양동이를 건네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붓고는 옷을 훌훌 벗었다.

마리안은 그 모습에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사실 목욕 시중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아스터의 시중을 드는 사람은 마리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벗은 몸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혔고, 비록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그의 나신도 이미 여러 차례 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망설임 없이 옷을 벗는 아스터의 모습은 감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단순히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리도 함께 하자.”

“저, 저는 괜찮아요. 먼저 하세요.”

“내가 먼저 씻고 난 다음에 마리 혼자 씻는 상황도 굉장히 어색할 것 같은데.”

“…….”

마리안은 말문이 막혀서 뭐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아래층에 내려가서 홀로 몸을 씻고 오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스터가 반대할 게 뻔했다.

“일단 제가 머리를 감겨드릴게요.”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든 상황을 얼버무렸다. 말뿐만이 아니라 머리를 감는 데 쓰는 비누를 집어 들어 거품을 잔뜩 냈다.

아스터는 벌겋게 달아오른 마리안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띠며 욕조 속에 들어가 가만히 물속에 앉아있었다. 표정만 보면 마치 악동 같았다.

마리안은 태연하면서도 장난기를 가득 띠고 있는 그 얼굴이 얄미워져서 거품을 잔뜩 얹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조금 센 힘으로 박박 감겼다.

하지만 손끝에 감기는 짙은 금색 머리카락의 감촉이 너무나 부드럽고 황홀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스터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마리안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마리안의 입가에도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평화롭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다 감았을 무렵 아스터가 손을 뻗어 마리안을 끌어당기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꽤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있는 탓에 아스터의 입술은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마리안은 상반신이 젖는 것에도 상관없이 아스터에게 달라붙은 채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남자의 젖은 뜨거운 손이 거침없이 허리를 감아오더니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리안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따끈따끈하고 부들부들한 아스터의 손이 그녀의 맨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과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 휘감아서 마리안은 눈을 감고 그에게 입술을 맡긴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물기에 상반신이 젖어 들면서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윤곽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가슴을 모아 쥔 그가 물에 젖은 옷감 사이로 도드라진 유두를 가만히 문질렀다.

“아!”

순간 마리안은 작게 신음했다. 등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알 수 없는 전율에 저도 모르게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반응하는 것을 깨닫자 아스터는 손끝으로 몇 번이고 유두를 간질이고 살살 비틀었다. 마리안이 입술을 깨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아스터는 마리안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뺨은 홍조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언제나 총명하게 반짝이는 두 눈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마리안 자신도 아직 자각하지 못한 욕망으로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아스터는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그 푸른 눈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마리안의 눈을 계속 보았다. 그녀의 가슴을 두 손으로 그러모아 쥔 채 그녀의 유두에 입을 맞췄다. 아주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입술만으로 유두를 살짝 물었다.

“앗!”

그리고 깊이 빨아들이자 마리안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터는 함께 숨을 삼키며 물었다.

“대답해 봐, 마리. 느껴져?”

“…네.”

마리안이 한참 만에야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터가 가슴을 어루만지는 동안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몸 안쪽이 저릿저릿한 것 같으면서도 안달이 났다.

“작고 앙증맞은 게 너무 귀여워서 하루 종일이라도 물고 빨 수 있을 것 같아.”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

아스터는 정색했다.

“진심이야. 마리만 허락한다면 내일 해볼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냐는 항의는 아스터가 왼쪽 유두를 손끝으로 비틀고, 오른쪽 유두를 이 끝으로 깨무는 바람에 이어지지 못했다. 따끔하고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것조차 몸 안에 타오를 듯 말 듯 지펴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어느덧 숨을 헐떡였다. 덕분에 물에 젖은 채 희롱당하던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젖은 천 사이로 그대로 드러난 가슴의 윤곽과 도드라진 정점은 더할 나위 없이 탐스러웠고, 무척 선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스터는 그 광경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처음으로 만져보고 맛을 보는 여체가 너무나 달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안의 손가락 한 개부터 시작해서 그녀를 전부 씹어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식욕이 동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입 안에 자꾸만 침이 고였다.

본래 아스터는 식탐도 없었고, 인생에서 무언가를 크게 원해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환경 자체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하거나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갖고 싶은 존재가 생겼다. 아스터는 당장 손을 뻗어 마리안의 가슴을 만지고 맛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마리안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옷 위로 드러난 탐스러운 과실을 베어 물었다.

“흣…….”

마리안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만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스터의 뜨거운 입술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김이 닿은 살갗도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몇 번이나 쪼듯이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마치 커다란 과일이라도 베어 물듯 한입 가득 그녀의 가슴을 물어 맛을 보기를 반복하는 아스터 때문에 마리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참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가까이에 바짝 붙은 신체 접촉 때문에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아스터의 성기가 마리안의 허벅지에 계속 문질러지고 있었다.

마리안은 그쪽으로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 그의 옷을 갈아입힐 때 민망해하며 봤을 때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발기한 채 꺼떡거리는 그의 성기는 두려움이 일 정도로 거대했다.

마리안은 평민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거나 마당을 쓸면서 간밤에 자신이 남자와 어떤 정사를 벌였는지, 남편이나 남자친구의 성기 크기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따위로 시시덕거리며 음담패설을 하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

‘아유, 남자는 그저 커야지. 크고 강해야 사내답지.’

‘맞아, 그냥 확 갈라서고 싶다가도 그간 쌓은 정을 생각해서 참는 거지.’

‘밤에 쌓은 정 때문에 말이지?’

‘당연하지. 불끈 일어선 우리 그이 걸 보고 있으면 당장 헤어지고 싶다가도 조금은 예뻐 보이니 어쩌겠어?’

여인들은 힘든 노동을 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고는 했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야말로 이런 걸 잘 알아야 한다며 마리안을 자기네 무리에 끼워 넣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래서 마리안 역시 남자의 큰 성기가 미덕이라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벅지에 비벼지는 아스터의 것을 보면 이쪽은 아무래도 겸손이라는 게 필요해 보였다.

더욱이 어느 틈에 혈관이 잔뜩 도드라진 채 미끈거리는 선액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그것은 결코 친근감을 느끼거나 예뻐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저런 게 정말로 사람 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마리?”

그때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닿았는지 깨달은 아스터가 눈가를 초승달처럼 휘며 물었다.

마리안이 화들짝 놀라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릴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걸 보고 있었어?”

아스터는 마리안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훑었다.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 간신히 잡히는 성기가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반응을 보며 웃었다.

“난 마리의 것을 보고 싶은데.”

“…….”

“만져봐도 돼?”

그 말에 잠시 당황해서 한발 물러서는 마리안을 보며 아스터가 꽃처럼 웃었다.

“마리는 내 건 이미 다 봤잖아.”

은근한 채근과 압박에 마리안이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러자 아스터는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치맛자락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손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 감각이 너무 기묘해서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도망가지 마. 이쪽으로 가까이 와주겠어?”

거절할 수 없는 다정하고도 정중한 부탁에 마리안은 망설이다가 한 걸음 더 욕조로 다가갔다.

허벅지 안쪽을 더듬은 손길이 다시 허벅지를 타고 엉덩이께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잘록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아 그녀를 끌어당긴 아스터가 마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는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거지. 잘못 만지면 내 손에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나.”

아닌 게 아니라 아스터의 눈에 마리안은 너무나 연약해 보여서 조금이라도 잘못 만지면 망가질까 봐 겁이 났다.

덕분에 마리안은 자신의 몸을 만지는 아스터의 손길이 너무 조심스럽고 다정해서 그를 밀어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조심스럽던 손길은 조금씩 대담하게 변해갔다. 허리에서 엉덩이의 곡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다시금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이 안쪽의 가장 깊숙한 곳을 스쳤다. 속옷이 젖어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젖었어?”

평이한 어조의 질문이었지만 두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마리안은 몸을 굳혔다.

아스터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그녀의 옷차림은 평민들이 입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늘 보는 사람만 보는 데다, 그녀의 처지란 하녀와 그리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마리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귀족 여성이라면 좀 더 많은 속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활동하기 편하다는 이유에서 얇디얇은 속치마 하나와 짧은 속바지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스터의 손은 아무런 방해물 없이 마리안의 밀부에 닿았다.

미끈거리는 액으로 이미 젖어 속옷이 달라붙어 있는 부드러운 살결 위를 남자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갔다. 마리안은 숨을 삼키며 허리를 비틀어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마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가락이 집요하게 파고들어 밀부의 가장 예민한 중심을 문지르는 바람에 마리안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몸에서 힘 빼.”

그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 아스터가 웃으며 말했지만 마리안은 좀처럼 몸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스터가 그녀를 좀 더 끌어당겼다.

“입 벌려봐, 마리.”

마리안이 순순히 입을 벌리자 아스터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얼른 혀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는 바람에 마리안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스터의 손은 다시금 밀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속옷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이 피부 위를 어루만졌을 때는 마리안이 키스 중인데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아스터의 혀를 깨물 뻔했다.

하지만 아스터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널 만지고 싶다고 했잖아.”

“하, 하지만…….”

숨이 가빠진 마리안이 항의하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아스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난 이걸 너에게 넣을 거야.”

그는 자신의 성기를 쥐어 보이며 마리안에게 말했다.

“…….”

그 말에 마리안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아스터가 속삭였다.

“무서운 거야?”

“…조금은요.”

머뭇거리던 마리안이 한참 만에야 대답을 했다.

“정말로 조금?”

“사실은 많이 무서워요. 티가 나나요?”

“방금 얼굴색이 변했거든. 하지만 나도 무서워.”

의외의 대답에 마리안이 바라보자 아스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상처 입고 도망갈까 봐.”

“이 정도로 상처 입지는 않아요.”

마리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라 좀 걱정되고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그러자 아스터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이야?”

“네. 제가 하녀처럼 일했다고 해서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안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져 있었다.

하녀로 일하는 여자들 중에는 남자를 모르는 경우가 적었다. 평민들이 귀족에 비해 자유롭게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해야 하는 비율도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젊은 하녀는 주인이나 주인의 남자 가족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래서 젊은 하녀를 편견을 섞어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리안은 아스터도 바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이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하녀처럼 일했다는 말을 듣고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대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여긴 거야?”

그 말에 마리안은 눈을 잠시 깜빡였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익숙하게 그녀의 몸을 더듬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세간의 상식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나한테 왜 사과를 해. 난 단지 마리 같은 여자를 다른 남자들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전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아닌걸요.”

마리안이 그제야 쓴웃음을 짓자 아스터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무슨 소리야? 내 눈에는 마리가 정말로 멋져.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고마워요.”

마리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리도 처음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다행이야. 잘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잘할 수 없다니요?”

마리안은 미소를 짓던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그의 키스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만큼 능란했는데 처음이라 잘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다는 말에 대체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처음이니까 천천히 해보자.”

아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안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마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쥐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바짝 들이댔다. 잔뜩 발기한 그의 성기가 피부에 닿자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옷 위로 비벼질 때와 다른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에 그녀는 얼어붙었다.

“마리가 너무 긴장하고 있으니까 나까지 긴장되잖아. 몸에서 힘을 좀 빼봐.”

말뿐만이 아니라 그가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아스터의 성기가 마리안의 맞닿은 양쪽 허벅지 사이에 쑥 밀려 들어왔다. 선액으로 젖어있는 선단 끝이 이미 잔뜩 젖어있는 속옷 위로 그대로 와닿는 느낌에 마리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아직 그녀의 밀부 안으로 진입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마리안의 허리만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천천히 자신의 허리를 움직였다. 밀부에 맞닿은 허벅지 안쪽 사이로 남자의 성기가 진퇴를 거듭했다.

마리안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비벼지는 낯선 감촉과 점점 거칠어져 가는 아스터의 숨소리를 들으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몸 안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밀부를 압박하듯 문질러오는 것만으로 쾌감에 몸이 달아오르면서 숨이 막혔다.

속옷이 한층 더 젖어 들었다. 그녀 자신의 체액으로 젖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아스터 때문에 그런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젖은 속옷에 대고 문지르는 작은 소리와 두 사람의 한층 가빠진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읏!”

마리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밀부에 가해진 자극에 쾌감과 함께 안달이 나서 몸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더욱이 점점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아스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허리를 좀 더 빨리 움직였다. 마리안이 숨을 죽인 채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아스터의 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거의 동시에 속옷이 한층 더 뜨거운 체액으로 젖어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은밀하고 야릇했다.

마리안은 가쁘게 숨을 쉬며 마찬가지로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는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그의 상기된 두 뺨을 만져보고는 아스터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도 마리안의 가슴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리안은 그제야 진심으로 그 이상의 것을 빨리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시선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아스터가 다시금 마리안에게 키스했다. 한층 더 뜨겁고 녹진녹진해진 키스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손가락이 젖어있는 속옷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흐읏.”

검지가 밀부의 정점을 문지르자 마리안은 작게 신음을 토해냈다. 전에 없는 쾌감에 마리안은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변을 맴돌던 아스터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정점의 아래쪽으로 작게 벌어진 구멍에 닿자 마리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스터는 새빨갛게 상기된 마리안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뜨겁게 젖어있는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마리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아서, 아스터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에 사정했던 아랫배가 순식간에 묵직해지고 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마리안의 치맛자락을 옆으로 밀치며 아스터는 다시 한번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흡!”

마리안이 짧게 숨을 토해내는 것을 보며 아스터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다시 겹쳤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진하고 깊은 키스를 나누는 동안 공기는 한층 더 후끈 달아올랐다.

아스터의 손가락이 점점 더 빠르게 안쪽을 드나들면서 이물감을 넘어선 쾌감에 마리안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터도 그리고 마리안도 순간 들려온 소리에 딱딱하게 굳어져 창문을 바라보았다.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마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하게 질렸다. 아스터마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아스터…….”

마리안은 겁에 질린 얼굴로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품에서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횃불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타르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서 마리안은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볼 뿐 잠시 동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클로타르는 순식간에 성채 안으로 들이닥쳤다.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갑옷을 입은 기사 두세 명의 철컥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욕조 주변은 온통 물바다였고, 그녀의 옷도 절반 이상 젖어있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마리안이 대충 옷을 정리하고 손에 닿는 대로 커다란 수건으로 아스터의 벌거벗은 몸을 덮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왕세자 클로타르와 칼멘 그리고 세 명의 기사들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리안과 아스터를 본 클로타르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이런, 내가 한창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보군.”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그 웃음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레 한기가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클로타르는 단지 생긋 웃고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서 명백한 비웃음과 경멸 그리고 온갖 악감정이 느껴졌다. 사실 그는 악의와 멸시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마리안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단추를 채우긴 했지만 옷은 엉망인 데다 잔뜩 젖어있었다. 도드라진 유두가 훤히 비치고 치마도 멋대로 구겨져 있어서 누가 봐도 한창 정사를 벌이던 현장을 들킨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클로타르와 칼멘을 비롯해 기사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스러움을 느꼈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스터가 황급히 자신의 몸을 덮은 수건으로 마리안의 몸을 감쌌다. 그 바람에 아스터의 나신이 사람들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클로타르는 이미 물이 식어버린 욕조 속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커다란 수건으로 마리안의 몸을 가리는 아스터를 보며 입꼬리를 더욱 끌어 올렸다.

“네놈도 여자를 안을 줄 알게 된 건가. 주제에 그래도 수컷이란 말이지.”

때마침 창밖에는 만월의 형태를 거의 갖춘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다. 덕분에 탑의 꼭대기 층에는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과 일렁이는 등불 아래 말랐지만 탄탄한 아스터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관이 다녀간 덕분에 그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서, 드러난 나신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스터의 알몸을 찬찬히 살피는 클로타르의 눈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뱀처럼 차갑고 독살스럽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마치 자신의 알몸을 살펴보는 것 같은 수치심과 공포를 느꼈다.

클로타르가 저런 눈으로 아스터를 더 이상 보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어떻게든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칼멘이 다가와 아스터의 몸에 다른 수건을 둘러주었다.

“마리안을 이쪽으로 보내십시오.”

칼멘은 여전히 마리안을 끌어안고 있는 아스터에게 조용히 말했다. 칼멘의 얼굴은 지극히 냉정하고 담담했다.

마리안은 그녀의 어깨와 팔을 붙잡고 있는 아스터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아스터의 손이 마리안에게서 떨어졌다.

칼멘은 수건으로 감싸져 있는 채로 마리안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리안은 차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곁눈질로 아스터를 살폈다. 그는 언제나의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타르와 칼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아스터의 형형한 눈빛을 통해 그가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안이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 내딛자,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던 칼멘이 손에 힘을 주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는 마리안에게 칼멘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서지 마라.’

그는 눈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칼멘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놀랄 정도로 강한 힘으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마리안이 칼멘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시선조차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때 클로타르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니 꽤 재밌군. 역시 수컷이란 놈들은 여자를 붙여놓으면 변하기 마련인가 보지?”

조소와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 클로타르가 웃어 보였다. 곧 그의 얼굴은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뜨겁게 불타고 있던 연인 사이를 방해해서 좀 미안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해야 할 건 해야지, 안 그래? 데려가.”

고개를 까딱하는 것과 동시에 시립해 있던 기사 중 두 사람이 아스터에게 다가가 양옆에서 그를 욕조 밖으로 끌어냈다.

칼멘이 둘러준 수건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아스터는 알몸으로 욕조 밖으로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클로타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눈빛만으로도 클로타르를 태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안이 처음 아스터를 무서워하며 살벌하다고 생각했던 눈빛은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움찔거리기는커녕 그런 아스터를 코끝으로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기사들은 아스터에게 옷을 입을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를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는 갑주의 철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아스터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클로타르는 그제야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리안의 얼굴은 백짓장보다도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아스터가 끌려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느꼈는지 클로타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멘마저 마리안의 얼굴에서 안쓰러움을 느꼈을 정도였지만 클로타르는 그저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멸시와 악의가 가득해 보였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클로타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스터와 똑같은 생김새의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달빛을 등지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리안에게 전에 없이 추악해 보였다.

‘아스터는 저렇게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고 비열하게 웃지 않아.’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스터는 저렇게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아.’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있어도 아스터는 한 번도 사람을 저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와 그에게 모욕을 주고 학대를 하는 자신의 형제에게조차 그저 무심한 눈빛을 주었을 뿐, 저런 눈으로 노려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외형의 그릇이 아름다워도 내면이 비틀어져 있으면 추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리안은 아스터와 클로타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클로타르가 여전히 칼멘이 팔을 꽉 붙잡고 있는 마리안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려 떨고 있으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 마리안을 그는 한참 살폈다.

“저 짐승과 몇 번이나 정을 통했지?”

불쑥 던져진 질문에 마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무나 저열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어서 시정잡배도 아닌 왕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마리안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클로타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쫘악!

그 순간 뺨을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코에서 뜨거운 게 쏟아져 내렸다.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클로타르가 그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던지 코피가 터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리안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쏟아져 내리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클로타르를 바라보았다.

순탄한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골적인 폭력 앞에 노출되어 본 적이 없는 마리안이었다. 그래서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멍해진 그녀의 앞에서 클로타르는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묻고 있잖아, 마리.”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찌나 부드러운 음성인지 마리안의 전신에는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저 짐승과 몇 번이나 교미했냐고. 대답을 해야지?”

다시 한번 방긋 웃어 보이는 클로타르를 보며 마리안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혐오감으로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 아직은…….”

“아직 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천박하고 너저분한 몰골을 한 주제에?”

물에 젖은 옷 사이로 유두가 도드라져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클로타르의 손짓에 마리안은 황급히 아스터가 몸에 둘러줬던 수건으로 좀 더 가슴을 가렸다.

수치스러웠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은 섬뜩함만을 느꼈을 뿐이다.

“…아직은 없어요.”

마리안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네게서 냄새가 풀풀 나는데.”

마리안이 상상도 못했던 말을 내뱉은 클로타르는 대뜸 장갑을 낀 손을 뻗어 마리안의 치마를 들쳐 올렸다. 얇은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을 낀 손이 단번에 마리안의 밀부를 파고들었다.

“시, 싫어! 하지 마!”

경악한 마리안이 발작하듯 몸을 빼내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도망가지 못했다. 칼멘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따귀를 좀 더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 네 얼굴도 저 짐승 새끼의 등짝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줄까?”

“…….”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클로타르의 목소리에 마리안의 움직임이 멎었다.

“흑.”

그녀는 겁에 질려 밀부의 안쪽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클로타르를 보고 있었다. 공포로 마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부드럽게 안쪽을 문지르며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던 아스터와 달리 클로타르의 손가락은 일체의 배려 없이 그녀의 밀부를 휘저었다.

“가랑이 사이에 더러운 정액을 잔뜩 묻힌 채로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

장갑을 낀 손가락에 묻어난 희뿌연 액체를 정말로 더러운 것을 대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클로타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저, 정말로 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싫어! 하지 마!”

마리안은 공포와 수치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섭고, 끔찍했다. 클로타르의 손길이 몸에 잠시 닿은 것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넌 뭔가 착각하고 있군.”

하지만 클로타르는 마리안에게서 이미 손을 떼고는 조소하듯 웃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내가 너 같은 것에게 시중을 받을 리 없다고. 마찬가지로 너 같은 것을 안을 생각도 없어. 짐승 새끼의 체액이나 묻히고 있는 역겨운 계집을 내가 왜?”

클로타르는 정말로 불쾌하다는 듯 장갑을 벗더니 그것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아직 장갑을 끼고 있는 다른 손을 뻗어 마리안의 턱을 움켜잡고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마리, 내가 허락할 테니 앞으로는 저 짐승이랑 되도록 자주 붙어먹도록 해.”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턱에서 손을 떼고 장갑을 낀 손으로 마리안의 평평한 아랫배를 만졌다.

“난 가능하면 빨리 네가 저 짐승의 새끼를 뱄으면 좋겠거든.”

마리안의 눈이 정말로 크게 떠졌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클로타르를 바라보았다.

“짐승의 새끼지만 낳는다면 그 외양은 나를 쏙 빼닮겠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새끼를 낳아줬으면 좋겠어, 마리. 그러면 지금의 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안겨줄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마리안의 눈이 공포로 질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넌 이 나라 왕세손의 생모가 되는 거야. 물론 네가 평생 그 아이에게 어미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걱정할 건 없어. 그 아이는 왕가의 핏줄로 자라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난 내 자식이 될 새끼를 낳은 여자를 무자비하게 대할 생각이 없거든.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도는 잘 알아. 그러니 그 공로는 인정해 줘야지.”

클로타르는 이제 마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너랑 네 가족이 평생 호사를 부리며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허락해 주지. 무엇보다 네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숨 쉬고 있으면 제대로 새끼조차 낳지 못한 내 비는 평생을 반성하며 몸조심을 할 테니까.”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빨리 새끼를 배도록 해, 마리. 네가 임신을 하면 그때는 이곳에서 바로 빼내줄게. 너도 이런 지저분한 돌탑에서 지내는 건 지긋지긋하겠지?”

대답을 구하는 클로타르를 보며 마리안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물었다.

“왜,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왜 하필 저인 거죠?”

그러자 클로타르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쥐고 아프게 잡아당겼다.

“왜냐니, 마리. 어떻게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할 수가 있어. 너는 돈이 필요하잖아. 안 그래?”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을 보며 클로타르가 미소했다.

“나는 나를 닮은 아이가 필요해. 그러니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귀족답게 살아봐야지, 마리. 안 그래? 네가 잘해낸다면 알리체 남작가를 부흥시켜 줄게. 원한다면 네 발치에 기꺼이 무릎을 꿇을 괜찮은 종마도 구해줄 거야.”

클로타르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말만 해, 마리.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대신에 하루라도 빨리 저 짐승의 새끼를 배도록 해. 난 계집아이든 사내놈이든 상관없으니까.”

마리안은 여전히 몸을 떨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제, 제가 아이를 낳으면, 그러면 아스터는요? 아스터 님은 어떻게 되죠?”

클로타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터? 아스터가 뭐지?”

그는 잠시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곧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래. 짐승 새끼의 이름이 그런 거였지.”

그의 표정이 다시 싸늘하게 차가워졌다.

“짐승은 짐승답게 우리에 가둬야지. 그러다 쓸모가 없어지면 처분하는 거고. 그런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마리?”

마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공포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마련이야. 나는 정말이지 쓸데없는 생각이나 질문을 하는 사람이 너무 싫어. 내게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면 현명하게 굴도록 해. 자, 내가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 이제 네 대답을 들려줘야지?”

마리안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떨고 있기만 하자 클로타르가 다시 한번 거칠게 마리안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오늘의 너는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걸까. 난 두 번 묻는 것을 무척 싫어해. 대답은, 마리?”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프게 아래턱을 힘껏 움켜쥔 것과 달리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나긋나긋해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마리안은 떨면서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턱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클로타르의 눈가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짐승과 밤낮없이 붙어먹는 건 좋은데 앞으로 달이 찰 무렵에는 내가 불쑥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을 해줬으면 좋겠어. 낮에는 아무 때나 올 수도 있으니까 조심을 좀 해주고. 내가 발정 난 짐승의 교미를 지켜보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겠지?”

“…며,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클로타르는 아주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자, 그럼 나는 짐승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 마리, 내 말 명심하도록 해. 아, 그리고 네가 앞으로 반년 이내로 새끼를 배지 못한다면 네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대체품을 찾아볼 거야. 물론 그때는 내가 널 지금처럼 잘 돌봐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칼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칼멘에게 말하도록 해. 내가 너를 여기에 데려온 이유를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필요한 건 그가 다 준비해 줄 테니까. 그럼 난 짐승을 귀여워 해주러 가야겠어. 다음에 또 봐, 마리.”

칼멘이 클로타르의 말에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클로타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저 남아있던 왼손의 장갑을 벗더니 역시나 아주 더러운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바닥에 팽개쳤다. 그러고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남아있던 마지막 기사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아래층에 있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마리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2권에서 계속#키쿠절갠

탑에 갇힌 왕자님 2권#키쿠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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