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누가 사탕과 라벤더
이제는 문 앞까지 와서 감시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그녀가 서재에 들어가거나 주방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하며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주방으로 내려가자 평소 그녀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던 하인과 한두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 주방장이 주방 한구석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주방장이 다소 긴장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마리안은 그에게 가능하면 호감이 가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며 물었다.
“휴식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저기, 혹시 주방을 잠깐 사용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주방장이 잠시 침묵했다.
“왜 그러시죠?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주방장은 살집이 있고 얼굴이 둥글둥글한 인상 좋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리안에게 꽤 친절하게 굴었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주방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마리안도 그 부분은 이해했다. 평범한 일반 가정에서도 낯선 사람이 주방을 쓰겠다고 하면 거절하는 게 당연한데, 그는 이 성채의 음식을 책임지고 있는 주방장이 아니던가.
“누가 사탕을 먹고 싶어서요.”
주방장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네? 뭐가 먹고 싶다고요?”
“누가 사탕이요. 머랭에 설탕 시럽을 넣어 만드는 말랑말랑한 사탕 말이에요.”
마리안이 설명하자 주방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 지금까지 그런 걸 만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요새로 썼던 성채의 주방을 책임진 요리사가 누가 사탕 따위를 만들어봤을 리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정중하게 말했다.
“설탕과 시럽 그리고 계란만 있으면 제가 만들 수 있어요. 주방을 쓰는 데는 길어봐야 한 시간 정도면 될 거예요.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
주방장의 얼굴에 곤란함과 짜증스러움이 잠시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거절할 말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마리안의 부탁이 너무나 사소한 데다, 주방마저 한가로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 그는 결국 허락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드는 건지 제게 보여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주방장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당할 거라 예상했던 마리안은 뜻밖의 허락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곧 주방장과 하인들이 그녀가 필요로 하는 재료를 가져다주었다. 마리안은 아무거라도 좋으니 말린 과일과 견과류도 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견과류를 오븐에 가볍게 굽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 뒤에는 설탕을 졸여 시럽을 만들었다.
“준비된 시럽에 머랭을 섞으면 끝나요.”
마리안은 계란 흰자에 설탕을 넣고 열심히 젓기 시작했다. 그녀가 맹렬하게 계란 흰자를 젓는 모습을 본 주방장이 자기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바람에 머랭을 만드는 일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마리안은 시럽과 설탕, 머랭을 섞은 반죽에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넣고 준비한 틀에 부었다.
“이게 끝이에요. 이대로 말랑말랑하게 굳어지면 잘라서 먹으면 돼요.”
“정말로 간단하군요.”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설탕을 졸이고 머랭을 젓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이지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네, 어렸을 때 유모가 몇 번 만들어줬거든요. 그래서 가끔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이에요.”
마리안은 아직 틀에서 굳지 않은 누가 사탕 한 개를 주방장에게 건넸다.
“이건 드릴게요. 저는 한 개면 되니까요. 주방을 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만에 음식을 만들어서 정말로 즐거웠어요.”
주방장은 마리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고 마리안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재밌는 걸 배웠네요. 다음에도 뭔가 만들고 싶은 게 있다면 또 주방에 오세요. 간단한 거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리안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미소를 짓고는 누가 사탕이 담긴 틀을 하나 들고 동쪽 탑으로 올라갔다.
아까는 한낮이었는데 사탕을 만드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었는지 방에 돌아갈 무렵에는 슬슬 해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탑 꼭대기는 한창 더울 시간이었다. 마리안은 너무 더우면 아스터를 아래층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문을 연 덕분에 아스터는 마리안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채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참이 지나도록 책장이 넘어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쾌활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공기가 꽤 뜨거워졌는데 덥지 않으세요?”
마리안의 질문에 아스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를 갔었지?”
“서재에서 우연히 요리책을 발견해서 주방에 잠시 다녀왔어요. 만들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마리안은 틀에 담긴 누가 사탕을 보여주었다.
“이런 거 드셔본 적 있으세요?”
그러자 마리안이 내민 것을 바라보던 아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군. 그게 대체 뭐지?”
“누가 사탕이에요. 어려서 유모가 가끔 만들어줬던 간식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탕?”
아스터가 그제야 호기심을 보이자 마리안은 생긋 웃었다.
“아직 굳지 않아서 제대로 사탕의 형태가 잡히지는 않았지만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녀는 선반 한구석에 놓아둔 다기들 사이에서 티스푼을 하나 챙겨와 조금씩 굳기 시작하는 끈적한 누가 사탕을 한 스푼 덜어냈다.
“드셔보세요.”
마리안이 티스푼을 아스터에게 건넸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건네주는 사탕을 받아들여 즉시 입 안에 사탕을 밀어 넣었다.
“음, 끈적끈적하지만 부드럽고 달군.”
“굳어지면 끈적거림이 줄어들어요. 서재에서 발견한 요리책에 이 누가 사탕이 그려져 있더라고요. 당신에게도 먹여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던 마리안은 아스터가 자신을 뚫어질 듯이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날 위해서 만들었다는 건가?”
“네? 아, 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마리안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얼버무리려고 하자 아스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마리안은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스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오랜만에 누가 사탕을 생각하니 먹고 싶기도 했고, 드셔본 적이 없을 것 같기도 해서…….”
아스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별다른 뜻이 없다고 하면 그가 조금 어이없어하거나 실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스터는 오히려 방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화사해서 마리안은 잠시 넋을 잃었다.
“고마워.”
아스터는 눈가를 휘며 말했다.
“어쨌든 마리가 내 생각을 해준 거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늘 함께 지냈으니 생각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웃고 있는 아스터의 얼굴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아주 맛있는 간식은 아니지만요.”
그녀가 변명하듯 말하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달콤해서 좋은걸. 너처럼 달아.”
그렇게 말한 아스터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마리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리안은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늘 무뚝뚝했던 아스터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마리안의 코앞으로 다가온 아스터가 바짝 굳은 마리안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마리안은 눈을 굴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요즘 아스터의 앞에서 별것도 아닌 일로 긴장하고 당황하는 것 같아서 그 점이 신경 쓰였다.
그런 마리안에게 아스터가 티스푼을 내밀었다. 마리안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해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물었다.
“한 스푼 더 주겠어?”
“아, 네.”
마리안은 허둥지둥 아스터에게서 스푼을 받아 사탕을 한 번 더 덜어냈다. 아스터가 그걸 받아서 입 안에 넣는 모습을 보면서 마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스터는 그저 사탕을 한 번 더 먹고 싶었을 뿐인데, 그가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괜스레 긴장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맛있어. 단단해져도 맛있겠지만 말랑말랑해서 좋아. 이에 들러붙지만 않으면 더 좋을 텐데.”
“살살 녹여 먹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렇겠네.”
나름 맛을 평가하던 아스터가 마리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마리는 안 먹어?”
“저는 만들면서 많이 먹었어요.”
마리안은 방금 전에 티스푼으로 누가 사탕을 뜨다가 손끝에 묻은 사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황해서 허둥대다 손에 묻었는데 눅진하고 끈적여서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묻었구나.”
“네, 끈끈해서 잘 안 떨어지네요. 손을 닦아야겠어요.”
아스터의 시선에 마리안은 어색하게 손을 숨기려 했지만 아스터가 그런 마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
당황한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아스터가 사탕이 묻어있는 마리안의 중지와 검지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입에 물었다.
깜짝 놀란 마리안이 그 즉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을 뒤로 빼려 했지만 아스터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특별히 강하게 끌어당긴 것도 아닌데 마리안이 한순간에 그의 곁으로 끌려가 버렸던 것은 너무 놀라고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아스터의 입술이 사탕을 먹은 탓에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 붉은 입술이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모습은 마리안에게 대단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말로 형용할 수는 없지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뜨거워진 얼굴과 달리 몸은 바짝 굳어버려서 마리안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아스터가 마리안의 눈을 주시한 채 천천히 손가락에 묻은 사탕을 혀끝으로 반복해서 핥았다.
“읏!”
마리안은 작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작은 동물들이 손가락을 핥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혀끝이 손가락을 몇 번이나 핥는가 싶더니 붉은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물었다. 입술에 힘을 주어 손가락을 빨아들이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한편으로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마리안으로서는 이 기이하고 야릇한 감각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아스터는 공을 들여 그녀의 손가락을 할짝거렸다. 마치 마리안의 손가락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달콤한 무언가라도 된 듯싶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듯 보드라운 입술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무, 무슨 짓을…….”
이제는 두 뺨뿐만이 아니라 귀까지 화끈거릴 정도로 달아오른 마리안이 말을 더듬었다.
“아깝잖아. 이렇게나 달고 맛있는데.”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리안과 달리 아스터는 태연했다. 그 사실이 마리안에게는 조금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스터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말이 없었고 마리안의 행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아스터를 무기력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정적이고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마리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행동은 마리안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히 과감했다.
마리안은 시선을 돌린 채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어서 도저히 아스터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스터가 물고 있는 손가락과 입을 맞춘 손등마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한참 만에 아스터가 마리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마리안은 한 걸음 물러나서 얼른 등 뒤에 손을 숨겼다. 그러나 곧 손으로 두 뺨을 감싸지 않을 수 없었다. 열이라도 나는 듯이 뺨이 화끈거렸다.
아스터가 그런 마리안을 보면서 해사하게 웃었다.
“얼굴, 빨갛게 됐어.”
“…….”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아스터가 한 발 더 다가왔다.
“아…….”
마리안은 숨을 삼킨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스터가 가까이 다가온 덕분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봐야 했다.
늘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그만 봐왔기 때문에 이렇게 서있으려니 올려다봐야 했다. 그건 매우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리안은 또래의 아가씨들보다 키가 큰 편에 속했지만 아스터의 어깨밖에 닿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아스터에게서 묘하게도 박력과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과는 전혀 결이 달랐지만 어쩐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아스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바다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마리안의 진한 푸른 눈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깊은 바다가 연상되었다. 깊고 푸른 눈이 파문이 일어난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늘 하얗던 두 뺨마저 붉은 노을처럼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침착한 얼굴로 담담하게 자신을 돌봐주던 그녀가 이렇게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귀여웠다.
그녀의 눈 속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아스터는 손을 뻗어 마리안의 턱을 살며시 쥐었다.
마리안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아스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푸른 파도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아스터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마리안도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뚫어질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터의 눈을 그녀 역시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그의 금안은 따스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황금색이었다.
아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마리안은 얼마든지 거부하거나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남자를 밀어내지 않은 채 그녀 역시 살며시 고개를 들어 입술을 내밀며 눈을 감았다.
아스터의 입술이 마리안의 입술에 닿았다. 마리안은 잠시 숨을 멈추고 그 부드러운 접촉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스터에게서 달달한 누가 사탕의 맛과 향이 났다. 태양처럼 환하고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어린 시절에 먹던 친근한 맛과 향이 났다.
그것에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그녀가 입술을 끌어 올리는데, 아스터의 두 팔이 마리안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단맛이 나는 혀가 미끄러지듯 침범해 왔다. 아까 그가 검지와 중지를 빨았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이 낯설고도 기묘한 감각이 마리안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으면서도 숨 막힐 정도로 달고 야릇했다.
아스터의 키스는 깊고 진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끈적이는 누가 사탕을 참을성 있게 녹여 먹듯 마리안의 혀를 살살 얽고 빨아들였다.
마리안은 그 감각이 낯설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들뜨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안은 어린 시절 그 어떤 케이크나 쿠키보다 유모가 만들어준 투박한 누가 사탕을 좋아했다. 유모는 늘 기대에 가득 차 눈을 반짝이는 마리안이 보는 앞에서 사탕을 만들어주었다. 가끔은 마리안이 크랜베리나 피스타치오 같은 누가 안에 넣을 재료들을 고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마리안은 유모가 사탕을 만들어주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완성된 누가를 한 스푼 가득 떠서 입 안에 쏙 넣어주는 순간을 좋아했다.
유모가 만들어준 사탕 속에는 마리안을 생각하는 유모의 진심과 사랑이 담겨있었다.
마리안에게 누가 사탕은 아직 그런대로 풍요롭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맞닿아 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마리안은 누가 사탕을 먹을 때마다 행복감을 맛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스터의 키스가 바로 그 행복한 단맛을 가지고 있었다.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그 단맛에 마리안은 잠시 넋을 잃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은 채 상대를 갈구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이제 까치발을 한 채 아스터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숨결과 숨결이 닿았고, 타액이 흘러내릴 정도로 깊고 진한 키스가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호흡이 가빠져서야 마리안은 아스터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아스터는 아쉽다는 듯 마리안을 놓아주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마리안만이 아니었다. 아스터 역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을 보고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마리안은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까 그 사탕보다도 마리, 네가 더 달게 느껴져.”
그래서 아스터가 속삭였을 때 그녀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한참 뒤에야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마리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어째서일까. 널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돼.”
아스터는 다시 한번 마리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넌 따뜻하고 달콤하고 그리고 부드럽고 다정하지.”
마리안은 아스터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
“…….”
순간 마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그녀의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녀의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어왔다.
“키스 또 해도 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웠다. 마리안은 입을 여는 대신 눈을 감고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아스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뜨자 그는 진심으로 기쁜 듯 웃고 있었다.
“넌 너무 사랑스러워. 내가 사랑스럽다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말이야.”
마리안은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에게서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어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녀가 쿵쿵 울리는 가슴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진정하려고 애쓰는 사이, 다시 한번 아스터의 입술이 다가왔다.
마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번에 아스터가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마리안의 입술이 아니라 눈꺼풀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마리안의 눈에 닿았다. 눈두덩을 살짝 누른 입술은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빠르게 뛰던 가슴은 이제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귓가에서 북을 울려대는 것 같았다.
아스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의 시선에 눈가를 휘며 속삭였다.
“눈 감아. 이번에는 입술에 할 거야.”
마리안은 얌전히 두 눈을 감고 기다렸다. 두 번째 키스는 더욱 달았다. 아스터의 입술이 닿는 순간 마리안은 기꺼이 입술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아까보다 더욱 뜨거워진 그의 혀가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그녀의 혀를 얽어맸다.
두 번째 키스가 너무 달아서 온몸이 설탕처럼 녹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마리안은 두 뺨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뜨겁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스터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리안은 헐떡였다.
숨이 너무 가쁜 나머지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을 때, 이대로는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아스터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로 옮겨 갔다.
목선을 따라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진득하게 닿았다 떨어져나가고 있을 뿐인데 그 부분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고 몸이 떨려왔다.
“널 좀 더 알고 싶어.”
그녀의 귓가에서 아스터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달콤하던지 마리안은 그만 숨을 삼켰다.
“널 만지고 싶고, 갖고 싶어.”
아스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진한 욕망을 담아 빛나고 있었다. 역광이라 그런지 그의 눈이 평소보다 더 짙어서 어두운 호박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당장에라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시선마저 더욱 끈적하게 느껴졌다.
‘네가 할 일은 저분을 돌보고 저분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문득 칼멘의 말이 마리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클로타르와 칼멘이 그녀에게 아스터를 잘 돌보라고 한 이야기에는 바로 이런 것도 포함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리안은 자신이 추측하는 게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굳이 너 같은 거에게 시중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
상냥한 얼굴을 하고서 차갑고 오만하게 말했던 클로타르의 얼굴도 떠올랐다.
마리안은 클로타르를 생각하는 순간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열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 눈빛인지 시선만으로도 아플 지경이었다.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스터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는 마리안의 행동에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지만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쁜 듯 웃으며 좀 더 다가와 마리안이 자신의 얼굴을 더 잘 만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숨결마저 닿을 듯이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아스터의 욕망을 반영하듯 그의 숨결은 뜨거웠다. 마리안은 아까보다 훨씬 열기가 오른 그의 뺨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아스터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느라 마리안은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져봤었다. 그러나 오늘은 유달리 특별하게 느껴졌다.
손끝에 티 한 점 없이 매끄러운 피부가 닿았다. 어찌나 부드럽고 매끈한지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그의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터.”
가만히 이름을 부르자 그가 마리안과 시선을 마주쳐 왔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몇 번이나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아스터를 보고 있으면 클로타르가 떠올랐다. 똑같은 얼굴이 어쩌면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는 것인지 마리안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클로타르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오만하고 섬뜩했다. 마리안은 클로타르를 조금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를, 아스터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마리안은 자신의 심장이 왜 두근거리는지 모를 정도로 둔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스터가 절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기뻐요. 정말이에요.”
아스터는 클로타르와 달리 언제나 솔직하고 다정했다. 늘 꾸밈없는 그의 마음과 직선적인 호의를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리안도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당신이 좋아요.”
그렇게 말한 순간 마리안은 아스터의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나는지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이 해사하게 피어났다. 그가 당장 마리안에게 키스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리안은 그에게 좀 더 해야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남자의 턱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막아 감싸 쥐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에 아스터가 멈칫했다.
“당신을 좋아하지만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
아스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네.”
“나를 좋아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지?”
아스터는 당황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화사하게 빛나던 그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졌다. 마치 거절이라도 당한 듯이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거절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게는 이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져요. 분명 저는 당신에게 호감이 있고 당신을 내심 좋아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지 못했어요.”
아스터는 말없이 마리안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리안은 자신의 마음을 그가 얼마나 이해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천천히 설명했다.
“자기 마음을 안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거잖아요. 아스터도 절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한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 말에 아스터가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는 모습에 마리안은 미소 지었다.
“이해해요. 저는 클로타르 저하께서 데려온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한동안 절 의심하고 경계했죠.”
그 말에 아스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리.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함께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좋아진 건가요?”
“그래. 네가 좋아졌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마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아스터의 대답에 기뻐서 가슴이 더욱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솔직한 그의 대답은 마리안을 한층 더 설레게 했다.
아스터에게 어째서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기쁜지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안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사실 저는 돈 때문에 이곳에 팔려 왔어요.”
아스터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꼭 알려야 하는 말이었다. 전부터 마리안은 자신이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아스터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너무나 기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왜 그의 곁에 있는지 아스터가 충분히 이해한 다음이어야만 했다.
아스터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돈 때문에 팔려 왔다는 말이 너무나 뜻밖인 듯했다. 그는 놀란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마리안은 아스터가 돈에 팔려 왔다는 말의 뜻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리안이 살펴본 바로는 아스터는 오랜 시간 유폐되어 있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한번 말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사뭇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했다.
마리안이 가끔 의미 없이 떠들어 대는 이야기에 반응하는 모습만 봐도 상당한 수준으로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시중을 들다 보면 그가 일반 상식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전에도 잠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희 집은 르샤베 왕국에서도 꽤 이름난 남작 가문이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형편이 매우 나빠졌죠. 지금도 도저히 귀족다운 품위를 유지할 형편이 아니라서 조만간 왕실에서도 작위를 거둬 갈 것 같아요.”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돈에 팔려 왔다는 건가?”
“네. 어머니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게 이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어요. 그런데 그 고리대금업자가 저한테 빚을 변제해 줄 테니 자신을 팔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동안 제 나이 또래의 여자가 해볼 수 있는 온갖 일을 해봤지만 빚을 갚는 건 불가능하다 싶어서 동의했어요.”
마리안은 약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같이 몰락한 귀족 여자는 그나마 형편이 좀 좋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평민 여자들은 매춘부로 팔려 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귀족 여자는 수요가 좀 더 많아요. 늙은 귀족이나 졸부의 하녀나 첩으로도 들어갈 수도 있고, 가끔 가정교사 같은 걸로 고용되기도 하죠. 그놈의 신분과 출신이란 게 대체 뭐라고…….”
“…….”
아스터는 눈에 띄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마리안에게 어떻게 반응해 줘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터의 그와 같은 표정이 오히려 마리안을 안타깝게 했다. 마리안도 불행하다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아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아스터의 상황이 마리안보다 더 나쁘지 않던가.
“저는 칼멘 후작에게 넘겨졌고 이곳으로 와서 클로타르 저하를 만나게 되었어요. 특별한 설명 없이 당신을 돌보라는 말을 들었죠. 사실 이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늙고 추한 남자의 정부가 되지 않은 게 어디예요. 그런데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아스터를 봤을 때는 정말로 이게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었죠.”
마리안은 아스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실 무서웠어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거든요. 당신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했어요.”
“…마리안…….”
“더욱이 당신의 상태는 매우 나빴죠. 의사 선생님이 괜찮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무서웠어요. 고통스러워하는 당신과 온종일 같이 지내야 하는 것도 힘들고 불편했고요.”
아스터는 마리안의 이야기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무척 깊어 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뭔가 생각하던 아스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마리는 내가 좋아진 건가?”
마리안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어째서?”
“당신은 어째서 저를 좋아하게 되었나요?”
“그건…….”
마리안이 되묻자 아스터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도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좋아졌어요.”
그런 아스터 대신에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마리안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 당신이랑 같을 거예요, 아스터.”
사실 마리안은 좀 더 분명하게 이유를 말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피투성이가 된 아스터를 보는 게 무서웠지만, 그다음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 동정심이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를 보며 안쓰러움이 생겨났고 돌봐주며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조금씩 정이 들었다.
아스터의 따스한 금안과 찬란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정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는 동안 그가 보여준 성품은 더욱 고귀하고 훌륭했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예민하고 까다로워지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늘 다정했던 어머니는 생활이 어려워지고, 거기에 몸도 아프게 되자 점점 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리안은 그런 어머니를 돌보는 데 익숙해서 아스터 또한 다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상처를 입고 탑 속에 유폐되어 있던 아스터였다. 몇 년이나 이곳에 갇혀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리안이 아스터의 곁에 하루 종일 붙어있는 게 불편했듯, 아스터 역시 그녀가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리안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아스터의 그와 같은 사소한 태도와 행동 하나하나에 마리안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가 조금씩 보여주는 친밀한 얼굴과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이 기뻤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가 건네기 시작한 말 한마디가 마리안의 마음을 한없이 따스하게 만들었다.
마리안은 진심으로 아스터가 좋아졌고 그를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 모든 것을 던질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안과 아스터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불안정했다.
마리안은 아스터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 더 크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이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거 같아.”
아스터는 그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아…….”
마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이렇게 바로 대답해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심장이 한층 더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얼굴도 좀 더 화끈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스터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하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개를 조금 숙이자 마리안의 얼굴이 한층 가까워졌다. 그녀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스터는 마리안의 뺨에 그대로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대신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알았어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아스터.”
마리안은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아스터는 마리안의 뺨에, 콧잔등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다시 물었다.
“한 번만 더 키스하게 해줘.”
마리안은 그날 오후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스터의 품 안에 안겨 그와 오래도록 키스를 나눴던 것만 기억했다.
* * *
한동안 마리안은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스터는 전에 없이 마리안을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날도 늘어갔다.
사실 마리안은 기다려주겠다고 약속한 아스터가 어느 순간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아스터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눈으로 마리안을 뚫어지게 보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스터는 절대로 마리안의 허락 없이는 그녀가 잠을 청하는 난롯가 앞으로도 오려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그런 그를 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아스터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채의 밖에서는 이제 화창한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탑 속의 방은 여전히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아스터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마리안은 이따금 그가 창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표정이 너무 공허해 보여서 마리안은 가슴이 아팠다.
‘여기서 얼마나 나가고 싶을까.’
밖에 나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 따위는 섣불리 물어볼 수 없었다. 그나마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지 않은 채 꼭대기 층에서 한두 층 정도는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니 말이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오기 전까지는 그 정도도 허락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아…….”
그날도 성채의 중정에서 마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스터를 생각할수록 자꾸만 한숨이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미 한낮이라 햇볕이 전혀 가려지지 않는 중정은 이제 꽤 더웠다. 마리안은 뜨거워진 햇볕을 피해 잔디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더워졌는데도 굳이 중정으로 내려온 것은 산책을 하면서 방 안을 장식할 만한 들꽃이라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샅샅이 뒤져봐도 중정에는 나무와 멋대로 자라난 관목과 덤불이 있을 뿐 어디에도 꽃은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잡초 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정말로 큰 용기를 내었다.
“저어…, 혹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성채의 병사와 기사들을 책임지고 있는 수비 대장 토르튼이 지나갈 때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성채의 문밖으로 잠시만 나가면 안 될까요?”
토르튼의 너무나 황당해 하는 얼굴을 보고 마리안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탑의 창문에서 보니 성채 밖에 라벤더가 무더기로 피어난 곳들이 있어서요. 조금만 꺾어 오고 싶어요. 만일 제가 직접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혹시 다른 분들에게라도 부탁할 수 있을까요?”
“라벤더로 뭘 하려는 겁니까?”
“장식용으로 쓰다가 잘 말려서 베갯잇에 넣고 싶어서요. 라벤더 향은 방향 효과가 좋으니까요.”
토르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엉뚱한 부탁이긴 했지만 그는 마리안이 말하는 라벤더가 피어난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성채의 후문에서 코앞인 곳이었다. 수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성채에서 유일하게 라벤더와 관목이 자라는 지역이었다. 그 일대는 시야가 탁 트여있어서 그 어떤 자도 성채에서 감시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없었다.
마리안을 절대로 성채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특별 지시 따위는 없었고,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도 없었다. 기사 하나를 딸려 내보낸다면 허락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토르튼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칼멘 후작님께서 당신이 이곳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도우라 하셨으니 협조하겠습니다. 기사 하나를 동반한다면 나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지켜보는 눈이 많을 겁니다. 시간은 30분 드리겠습니다.”
마리안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허락이었다. 마리안은 성채의 사람들이 조금 더 좋아졌다. 감시역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혹시 지금 바로 나가볼 수 있을까요?”
“바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토르튼이 기사 하나를 불러 지시하자 그가 곧 다가와 마리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귀찮다고 생각할 만한데도 그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토르튼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문을 열자, 마리안은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지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넘어보는 성채의 문이었다.
라벤더는 후문에서 5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마리안은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라벤더가 연보랏빛 물결처럼 흔들리는 광경은 장관이라 할 만했다. 탑 꼭대기에서 늘 바라보긴 했었지만 직접 내려와서 향을 맡으며 바라보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마리안은 함께 성채 밖으로 나온 기사가 뜨거워진 태양 아래에서 꼿꼿이 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가져온 가위로 부지런히 라벤더 가지를 잘라 바구니에 담았다.
그녀는 즉석에서 작은 라벤더 다발도 만들었다. 고생해 준 기사와 토르튼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기사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마리안으로서는 그렇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정확히 30분 뒤에 성채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리안은 동행해 준 기사와 토르튼에게 작은 라벤더 다발을 내밀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다른 걸 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리안이 진심으로 인사하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리안은 한결 행복해진 기분으로 동쪽 탑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바구니 가득 꺾어 온 라벤더가 향긋했다. 마리안이 사랑해 마지않는 향이었다.
‘아스터도 좋아해 주겠지.’
마리안은 생긋 웃으며 좀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숨이 찼지만 그래도 아스터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아스터도 라벤더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향긋한 향을 함께 맡고 이 우아한 보랏빛을 눈으로 감상하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난로 위에 쌓아두고 천천히 말려야겠다.’
그러고 난 뒤에는 베개와 작은 주머니 속에 말린 라벤더를 넣을 생각이었다.
마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꼭대기 층에 도착해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아스터가 성채의 후문이 있는 쪽의 작은 유리창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스터, 혹시 절 보고 있었나요? 이것 봐요. 수비 대장님이 허락해 줘서 라벤더를 이렇게나 많이 가져올 수 있었…….”
마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이쪽을 돌아보는 아스터의 얼굴이 유독 창백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아스터?”
마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혹여 잘못 봤나 해서였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잘못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스터는 정말로 창백한 얼굴로 유령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마리안은 너무 놀란 나머지 툭 하고 바구니가 떨어지면서 바구니 가득 들어있던 라벤더가 바닥 위에 엉망으로 흩어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아스터에게로 뛰어가려 했지만 그가 먼저 다가온 것이 빨랐다.
“아?”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와 아스터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 한두 발 내딛는 정도로 바로 좁혀질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아스터가 다가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마리, 마리.”
그는 마리안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며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스터? 수, 숨을 못 쉬겠어요.”
하지만 아스터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빼지 않았다. 그제야 마리안은 남자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제발, 아스터……. 조금만 힘을 풀고…….”
숨이 콱 막혀오는 감각에 가슴을 조금 밀어내자 그제야 아스터가 손힘을 풀었다.
“미안.”
그러나 손힘을 풀었을 뿐 그는 여전히 마리안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얼굴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여전히 몸을 떨면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마리안은 그를 먼저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라도 있나요?”
마리안은 가능하면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스터가 바로 입을 열지 않아서 마리안은 두세 번 더 되풀이해 말했다.
“아스터, 무슨 일인지 알려줘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네가 잘못되는 줄 알았어.”
아스터가 힘없이 대답했다. 여전히 마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제가 잘못되다니요?”
마리안은 의아해졌다.
“네가 성채 밖으로 기사와 함께 나갔잖아.”
“아…….”
마리안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거라면 수비 대장님에게 제가 부탁을 드렸어요. 며칠 전부터 창밖으로 보이는 라벤더를 꺾어 오고 싶었거든요. 절 놔주면 보여줄게요. 딱 30분을 주는 바람에 정말 열심히 모아 왔다고요.”
그러나 아스터는 좀처럼 마리안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그의 품 안에 갇혀 잠시 동안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혹시라도 제가 떠날까 봐 그런 거예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아스터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제가 왜 갑자기 말도 없이 당신을 떠나겠어요?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아스터, 진정하고…….”
“네가 몰라서 그래!”
그때 아스터가 외치듯이 말했다. 마리안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이래 그녀는 아스터가 언성을 높인 것을 처음 보았다.
“왜, 왜 그러는 거예요?”
마리안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스터가 단순히 그녀가 떠날 것이라 생각해서 떨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스터?”
답답한 마음에 마리안은 고개 숙인 아스터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늘 다정하게 빛나던 금안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가 무척 불안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리안은 침착하게 말하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아스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리안은 그의 입술이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덮어오는 것을 느꼈다.
첫 키스를 한 날 이후로도 마리안은 몇 번이나 아스터와 키스했었다. 그러나 그 키스들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가벼운 것들이었고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스터가 초조하게 마리안의 입술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마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키스부터 하는 그가 당혹스러웠지만, 그 절박한 몸짓에 탓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몸에서 힘을 조금 뺐다. 그의 요구에 따라 입술을 살짝 벌리자 평소보다 급하게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전에는 늘 달콤하기만 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의 키스는 달콤함보다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달착지근하게 입 안에서 감기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밀려오는 폭풍처럼 성급하게 휘감는 그의 키스에 마리안은 평소보다 빨리 숨이 가빠졌다.
좀처럼 숨을 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은 듯한 아스터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져 나갔을 때는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스터는 전과 달리 그녀에게 여전히 폭풍우 같은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마리안의 턱에, 목덜미에 그리고 어느덧 그의 입술이 가슴께로 내려가며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옷자락 위로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앗!”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마리안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아직 아스터에게 대답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도 라벤더를 열심히 꺾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대답하는 데 오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마음을 확실히 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닿는 순간 그녀는 폭풍우에 휘말리는 작은 배처럼 방향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아스터의 손이 가슴에 닿은 순간은 조금 화가 났다. 그래서 단호하게 그 손길을 뿌리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스터는 그 이상으로 그녀를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마리안의 가슴과 어깨와 팔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입술에, 코에, 이마와 뺨에 그리고 목덜미에 전에 없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아…….”
타인의 손길이 이런 식으로 몸에 닿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손길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 데다 애정이 듬뿍 담겨있어서 마리안은 혼란스러워졌다.
아스터를 밀쳐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밀쳐내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감정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유모가 떠나간 이래 그녀를 이토록 소중하게 대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던 남자의 입술이 아직도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는 마리안의 가슴에 다시 닿았다.
부드럽고 풍만한 여체의 윤곽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던 남자가 정점의 유두를 이 끝으로 살며시 깨문 순간, 마리안은 등줄기를 따라 짜릿한 감각이 퍼져나가며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바짝 맞닿은 허벅지 사이로 어떤 물체가 비벼졌다. 그것은 상당히 크고, 단단한 것이었다.
마리안은 그게 뭔지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남자를 가까이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꽤 오랜 세월을 허드렛일을 하며 온갖 일을 경험한 터였고, 평민 아낙이나 또래의 여자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교양 있는 척하며 젠체하는 귀족들과 달리 갖가지 힘든 노동을 할 때마다 질펀한 음담패설을 쏟아내며 깔깔대고 웃어댔다.
덕분에 마리안은 그런 이야기에 익숙했고, 서로 호감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벌이는 정사에 대해서 꽤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방면에 쓸데없을 정도로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맞닿은 아스터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속옷이 젖어 드는 느낌에 당황했다.
계절에 따라 얇아진 옷감 위로 남자의 입술이 몇 번이나 그녀의 유두를 물었다. 그 작은 자극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한 기분이었다.
“아앗!”
그녀의 입술에서 결국 작은 신음이 새어 나오자 아스터가 얼굴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리, 나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아스…터.”
마리안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흥분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마리를 안고 싶어. 내 팔 안에 널 이대로 가두고 밤새도록 안고 싶어.”
아스터의 손길이 그녀의 가슴에서 단전으로 그리고 좀 더 아래쪽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이곳에 나를 파묻고 싶어. 네가 허락한다면 말이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옷자락 위로 부드럽게 밀부를 더듬는 손길에 마리안은 온몸을 떨었다.
“저, 저는…….”
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려고 했다.
“지, 지금은 안 돼요. 아직 대낮이잖아요.”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뱉은 순간 마리안은 크게 당황했지만 아스터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밤에는 허락해 주겠다는 소리야?”
마리안은 당황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스터가 눈가를 휘며 웃는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금방 정신을 차린 그녀가 정정하려 입을 벌렸을 때는 아스터의 입술에 그만 다시 한번 삼켜지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키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아스터의 키스는 갑작스럽게 밀려온 폭풍우 같았다. 그러나 아까의 키스가 마치 난파되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위태로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충만한 애정이 느껴지는 키스였다.
마리안은 그녀의 입술을 마치 사탕이라도 되는 양 빨아 먹으며 매달려 오는 아스터 때문에 머릿속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가 허락해 줄 줄은 몰랐어.”
마침내 입술이 다시 떨어졌을 때 아스터가 정말로 기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리안은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허락하지 않았다면 더는 만지지 않았을 건가요?”
“응. 당연하지.”
그러자 아스터가 뜻밖에도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뿐만이 아니라 그는 마리안에게서 다소곳하게 떨어져 나가서는 그녀의 엉망이 된 옷차림을 정리해 주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바구니에서 라벤더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그럼 방금 전까지 허락도 받지 않고 온몸을 더듬으며 집어삼킬 듯한 키스를 하던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까는 왜 그런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죠? 성채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라벤더를 줍던 아스터의 손길이 멎었다. 마리안은 똑바로 선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스터는 마리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여전히 바닥에 떨어진 라벤더를 주우며 말했다.
“날 키워준 유모가 있었어.”
그건 마리안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까지 이곳에서 같이 지냈을 거야. 마리안처럼 늘 곁에서 날 돌봐줬었지. 그때의 수비 대장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수비 대장이 유모를 불러서 기사와 함께 성채 밖으로 내보냈어.”
“…….”
마리안은 아스터가 라벤더를 주우며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묻고 있는 마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사는 유모를 라벤더 수풀 한가운데로 데려갔어. 그리고 등 뒤에서 칼로 찔러 죽였지.”
“…….”
너무 뜻밖의 이야기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가슴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기 창밖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어. 나는 먼 곳도 아주 선명하게 잘 볼 수 있거든. 유모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 뒤로 나는 이곳에서 쭉 혼자 지내게 되었지. 유모가 죽은 뒤에는 칼멘 후작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클로타르와 함께 말이야.”
“…아까는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그래. 저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어.”
마리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 속에 차갑고 커다란 돌덩어리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기 이전에 아스터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어린아이가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마리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아스터의 등을 끌어안은 채 부드럽게 다독였다.
아스터는 말없이 그런 마리안의 포옹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저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수비 대장님이 제 부탁에 좀 어처구니없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친절하셨는걸요. 아스터는 모르겠지만 성채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제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마리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물론 마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클로타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려도 친절하던 수비 대장은 그녀를 끌고 나가 아스터의 유모처럼 죽일 것이다.
“그래.”
아스터는 마리안을 돌아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마리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아까는 놀라게 해서 미안해.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어.”
마리는 그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자 아스터도 마리안의 손을 마주 잡으며 미소 지었다.
“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 말에 마리안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뺨이 다시금 화끈거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저도요.”
마리안은 스스로 한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라벤더를 줍는 데만 몰두했다. 아스터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다행히 아스터는 그 이상 별말 없이 마리안을 도와 바닥에 떨어진 라벤더를 다시 줍기 시작했다. 그가 구석으로 떨어진 라벤더를 줍느라 잠시 등을 돌렸을 때, 마리안은 재빠르게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한 대 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