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4화 (4/24)

4장 조금씩 마음을 열다#키쿠절갠

의사 베르트는 하인의 말보다 훨씬 늦게 찾아왔다.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자 검은색 마차 한 대가 성채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 베르트는 홀로 찾아왔다.

“처치를 깔끔하게 잘했군요.”

남자의 상태를 살펴본 베르트가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통증과 약 기운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상처를 돌보고, 새로운 약병을 몇 개 꺼내 마리안에게 건네면서 설명했다.

“환자가 잠을 푹 자게 해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혹시 통증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루면 이 약을 반 스푼 정도 물에 타서 마시게 하세요. 물은 반 컵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약은 하루에 최대 두 번만 먹어야 합니다.”

마리안은 그가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약병을 잘 갈무리했다.

반시간도 안 되어 베르트가 진료를 다 끝내고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자, 마리안은 그의 곁에서 불쑥 던지듯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이 반복된 거죠?”

“…비교적 오래된 일입니다.”

베르트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하고는 마리안을 돌아보았다. 그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여서 마리안은 내심 기대했다. 의사가 뭔가 쓸모 있는 사실을 알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베르트는 별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덧붙였다.

“당신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보다시피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신관은 언제 오는 거죠? 신관이 있으면 상처를 금방 아물게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클로타르 저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

마리안은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차가운 것이 등을 따라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클로타르는 남자의 몸을 찢어발겨서 그가 최대한 오래도록 고통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의사의 말만으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악의에 마리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는 그런 마리안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마리안이 눈치껏 잘만 일하면 왕세자의 신뢰를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편히 살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딴에는 마리안을 생각해서 해주는 이야기 같았지만 마리안은 결국 참다 못해 베르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선생님은 이런 일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

한참 떠들어대던 의사가 당혹스러운 듯 마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리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마저 물었다.

“저분이 엄청난 범죄라도 저질렀나요? 반역죄쯤 되는 중범죄를 저질러서 이런 벌을 받는 건가요? 저만한 형벌을 받으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왕성에서 일어난 반역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거죠?”

“…….”

의사가 입을 꼭 다물었다.

“전 정말로 모르겠어요. 설령 저분이 끔찍한 악인이라고 해도, 사람을 채찍질해서 넝마로 만들어 놓고는 치료해서 다시 그만큼 형벌을 가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베르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때로는 높으신 분들의 판단에 의구심을 갖지 않고 묵묵히 따라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럼 하다못해 저분이 왜 이렇게까지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지나 알려주세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런 끝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죠? 저분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베르트의 눈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그의 무심한 얼굴이 무너졌다.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마리안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고뇌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왕세자 저하께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한참 만에야 베르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마리안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리안은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권리라고요? 사람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때리는 게 왕세자 저하의 권리라는 건가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가하는 정당한 형벌이라면 어째서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거죠?”

“…유감스럽지만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허용 범위의 것이 아닙니다.”

“…….”

의사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을 몰아세우며 추궁하는 마리안 때문에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마리안으로서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저렇게 숨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베르트가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 탑에 들어온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본분은 이것저것 캐묻는 것이 아니라 이분을 돌보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클로타르 저하께서 당신을 고용한 이유입니다.”

베르트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덧붙였다.

“당신이 할 일은 이 일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뿐입니다. 어쭙잖은 정의감을 내세워 클로타르 저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세요. 당신을 위해 하는 충고입니다.”

이번에는 베르트가 똑바로 마리안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쨌든 베르트가 호의를 가지고 충고했는데, 그를 무턱대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전혀 말해줄 수 없다는 건가요?”

“조만간 당신도 알게 될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의사는 불편한 기색으로 말하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언제 오세요?”

결국 마리안은 한발 물러섰다. 그제야 베르트는 마리안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사흘 후에 오겠습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마리안은 의사가 빠져나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남자는 의식 없이 누워있었다.

“하아…….”

그 모습에 마리안은 다시 한숨을 쉬고 말았다.

남자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마리…….”

머리가 복잡해서 오후 내내 창밖만 응시하고 있던 마리안은 깜짝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나셨어요? 물을 드시겠어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마리안은 얼른 물병에서 물을 따르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자신이 마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를 마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가족뿐이었다. 특히나 돌아가신 아버지는 항상 마리안을 ‘나의 마리’라고 불렀다.

클로타르가 그녀에게 마리라고 부르긴 했지만 마리안은 그에게 자신의 애칭을 허락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왕세자가 그녀를 뭐라고 부르든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남자가 마리라고 불러준 것은 어쩐지 기뻤다.

마리안은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아 물컵을 건네면서 물었다.

“저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흐릿하던 금빛 눈동자가 훨씬 선명한 색을 띠는 모습을 마리안은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상처 입은 맹수 같던 사나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남자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좀 더 용기를 내었다.

“아까 절 마리라고 불렀잖아요. 아닌가요?”

남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걸요. 이곳에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가르쳐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죠?”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로 마리안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스터.”

“아스터.”

우아함과 기품이 느껴지는 이름에 마리안은 그의 이름을 입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다가 물었다.

“그럼 제가 아스터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훨씬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마리안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마리안을 살짝 외면하며 대답했다.

“그냥 아스터라고 하면 돼.”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터 님은 왕세자 저하와 혈연관계이지 않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누가 봐도 똑같이 생겼는걸요. 이 나라에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직계 왕족뿐이라는 사실을 세 살 난 어린아이도 알고 있어요.”

“…….”

아스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말없이 마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을 뿐이다.

“죄송해요. 캐물으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전 단지 아스터 님이 왕족이시라면 이름으로만 부르는 게 매우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러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누가 내게 그런 걸 신경 쓴다는 거지?”

“…….”

마리안은 그 말에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아스터의 말이 맞았다. 그는 감금당해 채찍질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감옥에 갇혀있는 평범한 죄수들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저 이름으로 불리는 정도로는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좋아요. 아스터라고 부를게요. 아스터, 당신 이름을 알게 되어서 무척 기뻐요.”

마리안은 활짝 웃었다. 거의 한 달 만에야 알려준 이름이었다. 그가 조금은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아서 기뻤다.

아스터가 그런 마리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금색의 눈을 보자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마리안의 가슴속에 퍼져나갔다.

마리안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몸을 좀 닦아드릴게요. 땀을 많이 흘렸어요.”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마리안은 얼른 하인을 시켜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했다.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상처가 없는 팔과 가슴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자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식사를 하세요. 그러고 나면 진통제를 드릴게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입맛이 없겠지만 약을 먹으려면 드셔야 해요. 조금이라도 좋아요.”

아스터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순히 마리안이 건네주는 음식들을 입에 넣었다. 통증이 엄습하는지 실제로 먹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리안은 아스터가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안도했다.

그 뒤로는 처음 아스터를 간병했을 때와 비슷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마리안은 벽난로 앞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며 아스터를 돌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손이 많이 가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스터는 묵묵히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식사와 약을 챙기는 마리안의 간호와 시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따금 말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과묵했으며 침묵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하지만 전처럼 노골적인 경계와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리안은 아스터를 훨씬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나흘이 지나자 열이 내리면서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찾아와서 환부를 살핀 베르트는 전에 없이 회복이 빠른 편이라며 마리안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인 것 같다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물론 마리안은 의사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해서 다행이에요.”

클로타르가 다녀간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마리안은 아스터의 붕대를 새로 갈고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이제 피딱지가 내려앉기 시작한 그의 넓은 등은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흉물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벌써 두 번째인 마리안은 더 이상 붕대에 피고름이 묻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새로 붕대를 감고 옷까지 새것으로 갈아입힌 마리안이 사용한 붕대와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스터가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마리안은 그 말에 놀라서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있던 아스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고생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걸요.”

마리안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내 곁에서 온종일 시중을 들려면 힘들지 않나?”

“조금 불편한 것만 빼면 괜찮아요.”

마리안은 붕대와 옷가지를 정리한 바구니를 구석에 밀어놓고는 아스터의 곁에 다가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많이 불편한 건가?”

“제 생활이 없긴 하니까요. 이곳에서는 사생활이라는 게 없잖아요.”

마리안은 이제 그녀의 자리가 되어버린 벽난로 앞의 잠자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는 것이 힘들었지만 사람은 누구나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바닥에서 자는 것에도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밤이 되면 아직도 싸늘한 탑 안에서는 벽난로 앞이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잠자리만이 아니었다. 가족도 아닌 젊은 남자와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머물려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전의 마리안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 공간에서 젊은 남자와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스터가 환자라서 거의 종일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지루하긴 해도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다.

마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원래 이곳에 오기 전에는 종일 허드렛일을 해야 했거든요. 지금은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도 꽤 익숙해요. 어머니가 몸이 약해서 이런저런 병을 자주 앓으셨거든요.”

원래부터 허약했던 어머니는 빈곤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주 아팠다. 어머니는 빈번히 오르내리는 열과 두통으로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날이 많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잔병치레를 되풀이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주치의와 어머니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있어서 수고를 덜었지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그 모든 게 마리안의 일이 되었다.

덕분에 마리안은 낮에는 힘든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았다. 특히나 어머니는 열이 오른 상태에서 심한 편두통까지 엄습하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간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에 비하면 아스터는 상처가 위중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손 갈 일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 대하기 편한 환자였다.

“그래서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을 돌보기만 하면 되는 지금이 전보다는 훨씬 편해요.”

마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활짝 웃자 아스터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리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쩐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군.”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늘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어쨌든 가족을 위해서 일한 거니까요.”

아스터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런가. 잘 모르겠군. 나는 가족이 없어서…….”

순간 마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여전히 아스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아스터는 클로타르 저하와 가족이지 않나요?”

아스터는 이번에도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클로타르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그건…….”

그 말에는 마리안도 대체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만 달싹이다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네요.”

말해놓고서도 너무 암울해서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아스터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클로타르를 싫어하지만 그쪽은 내가 싫어하는 것의 몇 배는 더 날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난 가족이 뭔지 모르지만 그런 게 가족일 리가 없잖아?”

마리안은 아스터의 이 말에도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결국 마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가족이라는 게 꼭 사랑과 애정으로 구성되는 관계는 아니니까요.”

그 말에 아스터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도 싫어하고 증오하는 가족이 있나?”

마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싫어하고 증오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조건 사랑하기만 하는 건 아니라서요.”

“그건 무슨 뜻이지?”

“전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것만이 부모님에 대한 감정의 전부는 아니에요.”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싫어하기도 한다는 건가?”

마리안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터를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마리안으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리안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좋은 부모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 알리체 남작은 따뜻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무능력해서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처자식을 부양하기에도 벅찼다.

그는 정의롭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 때문에 가족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알리체 남작 부인 역시 마리안과 리아나 두 자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붓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데다 무능했고,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별히 큰 병을 앓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몸이 약하다 보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점이 문제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자신의 기분과 몸 상태에 심하게 좌우되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알리체 남작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마리안의 할아버지 때 중앙 정계에서 소외를 당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은 상당해서 마리안의 부모님이 똑바로 가계를 운영하고 집안을 돌봤다면 그럭저럭 귀족의 체면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안의 아버지는 재산을 지키기는커녕 가문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어머니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제 알리체 남작가는 귀족다운 품위를 유지할 재산마저 잃어 작위도 반납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마리안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의 여름날부터 스물두 살이 된 지금까지 병약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대신해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마리안은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동생이 가장 소중했고 그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면서 자신의 부모님이 사람은 좋아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너무 힘든 밤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부모님을 미워하고 원망했어요.”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아스터를 돌아보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길어진 이야기를 듣던 아스터가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이야기하는 중에 잠들어 버린 그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전부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리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터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마리안의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에게 반응하려 했지만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마리안은 편히 잘 수 있도록 이불을 고쳐 덮어준 뒤 잠시 주저하다가 결이 좋은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상처가 제법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아스터는 아직 밤마다 충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약을 복용하면 약 효과가 가장 강력한 시간 동안에만 지친 듯이 수마에 빠져들고는 했다.

마리안은 처음에는 아스터가 단순히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몸만 아픈 게 아니겠지…….’

잠든 아스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리안은 생각했다.

마리안도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리안은 따끔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하지만 그녀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스터의 상처가 너무 심하고 열이 높아서 간병을 하느라 잠을 못 잤지만, 이제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성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편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클로타르와 칼멘은 그녀에게 아스터의 시중을 잘 들면 된다고 말했지만, 마리안은 그들에게 단순히 간병인이나 하녀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클로타르는 아스터에게 죽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정성껏 시중들라며 자신을 아스터의 곁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의도가 무엇인지, 왜 이런 지속적인 고문과 학대가 일어나는지 알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마리안의 머릿속이 이렇게 복잡한데 당사자인 아스터가 아무 생각이 없을 리 없었다. 채찍질당한 등만큼이나 그의 마음속도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리안은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잠든 아스터에게 시선을 주었다. 며칠 사이에 도로 수척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잠든 얼굴은 마치 천사 같았다.

‘아…….’

문득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리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스터를 보고 있으려니 클로타르가 생각났다. 아스터와 똑같은 얼굴을 한 클로타르도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 같은 용모의 소유자였다.

왕세자는 차기 군주의 재목에 걸맞게 어질고 현명하며, 총명하고 용맹한 사람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르샤베 왕국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왕세자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마리안은 이제 클로타르가 결코 어질고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탑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

아스터에 대한 연민과 별개로 마리안은 불안해졌다.

아스터는 분명 클로타르의 쌍둥이 형제였다. 왕세자의 쌍둥이 형제가 어째서 이런 탑에 갇혀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이 엄중하게 관리되는 데다 왕세자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극비 사항인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그냥 감금해 둔 것도 아니고 고문과 학대를 자행하고 있는데, 그런 비밀을 알게 된 그녀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리안은 그 점이 가장 두려웠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아스터를 돌보는 것만 생각하자.’

마리안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클로타르와 칼멘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스터를 잘 보살피는 일이었다. 미리 걱정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마리안이 아스터를 잘 돌보지 못해도 클로타르는 그녀에게 책임을 물으려 들 게 뻔했다.

마리안은 그날 밤늦게까지 아스터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아스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마리안이 그의 침대 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아스터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만히 그녀의 뺨을 쓸어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후로 다시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아스터의 상처는 이제 상당히 회복되었다. 의사는 더 이상 붕대를 매일 갈아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아스터는 마침내 침대에 등을 기대고 누울 수 있게 되었다.

6월 중순이 지나면서 마리안은 이제 벽난로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오후에는 탑의 꼭대기 층이 상당히 더워져서 아스터와 탑 중간에 있는 작은 빈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방은 클로타르가 아스터를 고문하는 방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돌바닥에 하얗게 회칠한 벽이 전부인 곳이었다. 그래도 꼭대기 층보다는 시원해서 마리안은 깔개와 의자를 옮겨놓고 그곳에서 아스터와 시간을 보냈다.

사실 처음에는 아스터를 꼭대기 층 방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기사들은 더위를 피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아스터는 그 이상으로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리안에게는 성채를 돌아다니는 일도 여전히 허락되었다. 감시하는 병사들의 시선이 따라붙기는 해도 마리안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꼬박꼬박 중정에서 산책을 하고 서재를 찾아가 읽을 만한 책을 고르고는 했다.

마리안이 항상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맞춰 돌아다니자 처음에는 바짝 따라붙던 감시도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성채의 정원은 매우 작아서 산책로를 돌아보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는 잔디밭과 나무가 있었고 새들도 가끔 날아 들어왔다.

마리안에게 산책 시간은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스터를 비교적 편하게 대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보내는 시간의 편안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와 온종일 붙어있다 보니 이 짧은 산책 시간이 마리안에게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한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도 마리안은 보는 눈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성채의 두텁고 웅장한 돌벽 사이로 엿보이는 푸른 하늘과 바람에 실려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졸리네…….’

햇볕이 꽤 뜨거워진 덕분에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전날 밤에 문득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척이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마리안은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까운 나무둥치에 등허리를 기댔다. 이대로 딱 5분만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그녀의 시선 끝에 작은 덤불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안은 그것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엉겅퀴를 한데 뭉쳐놓은 것 같은 그 덤불은 마리안이 아주 잘 아는 라카인이라는 이름의 약초였다.

페퍼민트와 로즈마리를 섞어놓은 듯한 시원하면서도 맵고 달콤한 향을 풍기는 약초로, 말려서 찻잎 대신에 끓여 마시면 진정 효과가 있었다.

잘 으깨서 펴 바르면 타박상이나 염좌 혹은 근육이 뭉쳤을 때 통증을 완화하는 데도 좋았다. 의사를 부를 형편이 안 되는 민간에서는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약초이기도 했다.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라카인의 잎을 따기 시작했다. 마침 주머니 속에 상처를 닦을 때 쓰는 얇은 면 수건이 있어서 갓 따낸 잎은 수건으로 잘 감쌌다.

기사들이 발견하면 빼앗지는 않겠지만 무엇에 쓸 생각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아서, 마리안은 약초를 치맛자락 속에 잘 숨겨서 동편 탑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일어나셨어요?”

산책을 가기 전에 확인했을 때는 잠들어 있던 아스터가 일어나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침대에 몸을 기댄 채 마리안을 보고 있었다.

“덥지 않으세요?”

“바람이 불어서 괜찮아.”

아스터는 마리안이 열어둔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도 조금 전까지 중정에 잠시 앉아있었는데 바람이 정말 상쾌하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터의 말에 수긍한 마리안이 수건에 잘 싸인 약초 잎을 꺼내자 아스터가 드물게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게 뭐지?”

“라카인이에요. 민간에서 많이 쓰는 약초인데 중정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이걸 말려서 차처럼 끓여 마시면 불면증에 꽤 좋거든요.”

마리안은 라카인이 잘 마를 수 있도록 방 한구석에 약초 잎을 한 장 한 장 펼쳐놓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말리지 않은 생잎을 으깨서 바르면 진통 효과가 있어요. 기름에 섞어서 아픈 데를 주물러주면 근육이 뭉친 데도 좋거든요. 제가 이걸로 어깨를 좀 주물러드릴게요.”

마리안은 밝게 말하고는 아스터가 보는 앞에서 잎사귀 몇 개를 찻잔에 넣어 스푼으로 짓이겼다. 그러고는 얼굴과 몸에 바르는 묽고 연한 기름을 조금 넣어 짓이긴 잎사귀를 개었다. 방 안에는 순식간에 라카인의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번져나갔다.

“향이 제법 좋군.”

아스터가 자신의 자리에까지 풍겨오는 라카인의 향을 맡고 감상을 말하자 마리안은 웃어 보였다.

“그렇죠? 그래서 향유로 만들어서 냄새 제거용으로도 자주 사용해요. 잠깐 일어나 앉아보세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을 벗어야 하나?”

“셔츠의 단추만 몇 개 풀어주세요. 어차피 환부 근처는 피해야 하니까 벗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목덜미랑 어깨 위쪽에만 바를 거니까요.”

마리안은 라카인을 개어놓은 기름을 손에 조금 덜어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러고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아스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어머니에게 종종 해드리던 건데 어떠세요? 이렇게 하면 두통이 좀 나아지고, 잠도 잘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괜찮으세요?”

목덜미에서 뒤통수로 이어지는 곳을 가볍게 압박하며 마리안이 물었다. 등의 상처 때문에 한 자세로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스터는 목과 어깨가 많이 굳어있었다.

“…괜찮아.”

아스터는 작게 대답했다.

그가 뜸 들여 대답하자 마리안은 혹시 아픈 건 아닌가 싶어서 아스터를 곁눈질로 한참 살폈다. 그러나 눈까지 감고 있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좀 더 자신감을 얻은 마리안은 환부를 피해 천천히 근육이 풀어질 수 있도록 정성 들여 안마를 계속했다.

돌처럼 단단하던 근육이 제법 부드러워졌을 때는 마리안도 꽤 피로해졌다. 한참이나 안마를 하던 마리안이 드디어 손을 멈췄을 때였다.

아스터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마리안을 응시했다.

“좀 더 해드릴까요?”

아스터의 눈이 나른하게 풀려있었다. 마치 따뜻한 햇볕을 쬐며 졸고 있는 금색 눈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저 눈이 약 기운으로 몽롱해져 있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게 나른하게 풀려있는 것은 처음이라 마리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팔도 아프고 힘들기도 했지만 도움이 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아스터는 여전히 나른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보다 이쪽으로 와.”

말뿐만이 아니라 아스터가 손을 뻗어 마리안의 손목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 힘이 생각 외로 강해서 마리안은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아스터가 기대어 앉아있는 침대 위에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마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스터가 여전히 나른한 고양이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속하려면 피곤하고 힘들 텐데. 나도 해줄게.”

“아, 저는 괜찮…….”

뜻밖의 말에 당황한 마리안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스터의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살짝 내리눌렀다. 놀라서 움찔하려는 찰나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마리안은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방금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마리안은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그 자리에 굳은 채 눈만 깜빡이는 마리안의 어깨를 아스터의 마르고 긴 손가락이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놀라고 당황한 것과 별개로 아스터의 안마는 상당히 시원했다.

문득 마리안은 동생이 안마를 해줄 때가 생각났다. 밖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어린 동생이 안쓰러운 얼굴로 다가와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주곤 했었다.

물론 어린아이의 손으로 하는 안마가 그리 대단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니를 생각해 주는 동생의 마음이 귀엽고 기특해서 가슴속이 한없이 따스하고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러나 아스터의 안마에는 마음이 한없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의 손길이 거칠고 아파서가 아니었다. 아스터는 생각보다 섬세하게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고, 사실 꽤 시원하고 좋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제대로 안마를 받아보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리안도 상대가 아스터가 아니었다면 말없이 호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편안히 몸의 힘을 풀고 맡길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자꾸만 몸이 긴장하면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등 언저리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

어깨를 조심조심 주무르던 아스터의 손이 앞으로 넘어가 쇄골 근처를 꾹 눌러주는 순간 마리안은 움찔해서 몸을 떨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서 마리안은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갑자기 마리안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남자의 손이 몸에 닿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 그러지? 아팠어?”

아스터가 놀란 듯이 물었다. 마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진 데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한순간 염려와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마리안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녀는 아스터를 밀어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픈 게 아니면 좀 더 앉아있어.”

하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도로 앉혔다.

“제가 이런 걸 받을 입장이…….”

“상관없어.”

아스터가 그녀의 말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마리안은 그 이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자 이쪽을 바라보는 아스터의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 그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해서 마리안은 어쩐지 그의 시선을 받아내기 힘들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스스럼없이 대해서 그러는 것 같긴 한데…….’

자신이 너무 격의 없이 대해서 그도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대하는지도 몰랐다.

성채에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여러 가지 지식을 종합해 보면 아스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동쪽 탑에 갇혀있었던 듯했다. 그는 글을 읽고 쓰는 기초적인 지식은 습득했지만,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고 자연히 예법이나 관습 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마리안은 더욱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터는 분명 성인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동시에 마리안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별생각 없이 아스터와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그의 몸을 만졌는지를 깨달았다.

아스터가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그녀가 돌볼 대상이었다고는 해도 그는 젊은 남자였다. 그런데 마리안은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으며, 오늘은 안마를 해주겠다며 스스럼없이 그의 옷을 벗겨 몸을 만졌다.

갑자기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마리안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어,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요.”

더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에서 손을 들어 올려 다시 거절하는데, 아스터가 자신을 밀어내는 마리안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아직 마리안의 손에는 그녀가 만들어낸 약초 향유가 일부 남아있어 미끈거렸다. 마리안이 얼른 손을 뒤로 빼며 옷자락에 대충이라도 닦으려고 하자 아스터가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가만히 있어.”

오히려 그는 붙잡고 있던 마리안의 손을 천천히 부드럽게 어루만져 그녀의 손에 묻은 라카인의 향유를 짜내듯 자신의 손에 묻혔다.

마리안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자신의 손등과 손바닥, 손가락 사이사이의 틈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매만지는 감촉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손이 무척 작네.”

신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한 아스터의 목소리에 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파?”

손등을 꾹 눌렀을 때 마리안이 통증을 느꼈다고 생각했는지 아스터의 목소리가 사뭇 조심스러웠지만, 마리안은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괜…찮아요.”

마리안이 억지로 태연한 척 대답하자 아스터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까 마리가 여기를 주물러줬을 때 무척 시원하고 좋았거든. 마리는 어떻지?”

그리고 거절하거나 막을 새도 없이 아스터의 두 손이 미끄러지듯 마리안의 옷깃 속을 파고들어 목덜미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지점의 한 곳을 꾹 눌렀다.

마리안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진정해, 마리안 알리체. 아스터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잖아.’

그는 단지 마리안을 편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마리안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했듯이 어디까지나 단순한 호의였다. 그걸 잘 알면서 괜히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태연하게 말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저, 저도 좋아요.”

“그래? 다행이군.”

가볍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해맑아 보여서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오늘따라 아스터가 왜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시선을 마주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얼마 전부터 마리안의 질문에 비교적 순순히 반응해 주었지만 늘 이런 식으로 시선을 마주 한 채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자꾸만 시선을 마주쳐 오는 아스터에게서 눈을 돌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앗!”

그때 아스터가 등의 한 지점을 꾹 눌렀다. 순간 그 자리가 저릿할 정도로 아프면서 동시에 찌르르 울려서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냈다.

“아팠어?”

“그게…….”

많이 아픈 건 아니지만 저릿하면서 주변이 욱신욱신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미간을 찌푸린 것을 보고 말했다.

“못 견디게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바로 관둘 테니까.”

“괜찮아요.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은걸요.”

아픈 것보다도 어느 틈에 어깨를 따라 다시 목덜미로 올라온 남자의 손길에 신경이 쓰였다. 달리 노출도 없었고 그저 옷깃 사이로 손을 넣어 어깨만 안마를 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데도 얼굴이 자꾸만 붉어졌다.

“여기가 유달리 단단하게 굳었어.”

“읏!”

딱히 어깨가 아프다거나 결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아스터가 만져주는 곳은 정말로 잔뜩 경직되어 있었던지 매우 아팠다.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손끝으로 원을 그리듯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바닥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세가 바뀌어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제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마리안은 자신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몇 번이나 흘러나온 시점에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아스터의 손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말없이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정말이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방 한구석으로 가서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수건을 담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상당히 차가웠던 물이 이제는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마리안은 수건을 꾹 짰다.

“손에 묻은 기름을 닦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

“왜 그러지?”

그에게 물수건만 건네주려고 했던 마리안은 손을 내미는 아스터의 행동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보자 뭐라 하기도 그래서 가만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미끈거리는 그의 손을 물수건으로 몇 번이나 꼼꼼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데 아스터가 그녀를 붙잡았다.

“옆에 있어.”

말뿐만이 아니라 아스터가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고개를 묻었다.

마리안은 침대 옆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너한테서 나는 향이 기분 좋아.”

“향이라고 해봐야 라카인 향일 텐데요.”

라카인의 향이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긴 했지만, 아스터는 마치 달콤한 장미에 달라붙는 꿀벌처럼 굴고 있었다.

마리안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차마 그를 밀쳐내지 못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기대있는 아스터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 모습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약 기운에 취해 잠들어 있는 아스터를 돌볼 때 몇 번이나 만져봐서 저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잘 알고 있는 마리안이었다. 지금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꾹 참고 있었다.

더욱이 허리춤에 매달린 남자에게서도 라카인 향이 나고 있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라카인 향이 너무나 아찔해서 마리안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라카인 향이 이렇게나 자극적일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가슴이 계속 빠르게 뛰고 있어서 마리안은 그 소리가 아스터에게 들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오늘따라 어린아이같이 행동하시는 거 알아요?”

마리안은 그를 부드럽게 밀어내면서 애써 밝게 말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달라는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가?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많이 매달리는가 보군.”

그러나 아스터의 대답에 마리안은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아스터는 누군가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마리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른 물수건과 세숫대야를 정리했다.

그날 이후로 아스터의 행동은 확실히 달라졌다. 마리안은 그 사실을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마리안에게 시선을 주는 시간이 늘어났다. 마리안이 처음 탑에 왔을 때만 해도 아스터는 마리안이 가까이 다가갈 때 경계한 것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마리안이 그의 시선을 느끼는 날이 많아졌다.

‘왜 저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지.’

시중을 들 때는 물론이거니와 청소하거나 물건을 정리하거나 혹은 자신의 자리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아스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오늘도 오후 내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견디다 못한 마리안이 결국 아스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자꾸 필요한 게 있냐고 물어보지?”

“절 계속 보고 계신 것 같아서요. 필요한 게 있으셔서 그런 게 아닌가요?”

마리안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직접 말했을 거야.”

“…….”

“내가 지켜보는 게 불편한가?”

마리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하지만 아스터가 그녀의 대답을 요구하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절 계속 보고 계시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긴 해서요.”

“별다른 의미는 없어.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하군.”

아스터가 무심한 얼굴로 대답해서 마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서 계속 단둘만 있다 보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가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번 의식하자 그녀는 아스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꽤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성채 안을 돌아다니는 시간을 좀 더 늘렸다. 전에는 아스터가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지만 지금은 덕분에 그에게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중정에서 산책을 하겠다거나, 주방에 다녀오겠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재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할 때면 늘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그녀를 부러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갇혀 지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절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그를 두고 나올 때마다 해방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아스터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체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얼굴인데…….’

그날도 마리안은 서재의 한구석에 앉아 갓 뽑아낸 책을 넘겨보며 생각에 잠겼다.

의식적으로라도 아스터와 클로타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는 생각이 났다. 그 둘은 분명 쌍둥이 형제일 것이다.

‘클로타르가 왕세자이니까 그쪽이 형인 걸까?’

마리안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째서 아스터는 탑에 유폐된 걸까…….’

쌍둥이는 드물지 않았다. 귀족 가문에서도 쌍둥이 형제나 자매가 태어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개중에는 아스터와 클로타르처럼 외모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쌍둥이라고 해서 동시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한날한시에 태어나긴 해도 엄연한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단지 몇 분의 차이로 한 아이는 맏이의 자리를 갖게 되고, 다른 아이는 차남이나 차녀의 자리에 머물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운명이 그러한 것일 뿐이라 평민이나 보통 귀족 가문에서는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가의 혈통이라면…….’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르샤베 왕국을 다스리는 라베인 왕가는 대대로 골육상잔이 잦았다. 르샤베 왕국은 건국 이래 400년이 되어가고 있는 나라였지만 왕관이 평화롭게 계승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의 국왕은 그래도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지만, 전전대 국왕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형제 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그 이전에도 왕위 계승을 놓고 내란이 일어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왕가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을 꺼리는지도 몰랐다. 세간에 클로타르 왕세자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무해.’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천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스터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왕가에서 태어나고도 이런 탑에 갇혀있다. 단순히 감금된 것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면서 마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백 보 양보해서 국왕이 왕위 계승의 혼란을 피하려고 쌍둥이 왕자 중 하나를 유폐해 숨겼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안은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지만, 왕위 계승을 놓고 내란이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나라에 위기가 닥쳤는지에 대해서는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상식적인 수준에 그치긴 했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배운 게 있었다. 그러니 왕가에 쌍둥이 형제가 태어났을 때, 왕실이 경계심을 가진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폐시킨 왕자에게 지속적인 고문까지 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걸까…….”

어쩌면 마리안이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터가 국왕에게 거역하고 왕세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스터는 분명 아주 어린 나이부터 탑에 갇혀 지냈는데, 그런 그가 국왕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설령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혈육인데 굳이 고문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것도 주기적으로 일부러 고통스럽게 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베르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신관은 애초에 그녀에게 말을 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인이나 병사들에게 묻는 것은 위험했다. 마리안이 꼬치꼬치 캐물으면 그들은 바로 클로타르에게 고해바칠 것이다.

클로타르의 성격상 왕실의 치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는 마리안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당사자에게는 더욱 물어볼 수 없었다. 질문받는 자체가 괴로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무리 마리안이 그를 친근하고 스스럼없이 대하고는 있다지만, 어쨌든 아스터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라 클로타르와 마찬가지로 왕족이었다. 이런 곳에 갇혀있는 것만 아니라면 그는 마리안이 절대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마리안은 머리가 아파져서 미간을 찡그린 채 읽던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았다. 어차피 머릿속에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지난번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한 번 더 읽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리안은 하나 앞의 책장으로 걸어가서는 원하는 소설을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했다.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좀처럼 손이 닿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발판을 가져와서 밟고 올라가는 게 나았겠지만 조금만 더 하면 책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리안은 그대로 책장에 매달렸다. 그러다 그만 실수로 옆에 있던 다른 책 한 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툭 하고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 펼쳐진 채로 추락했기 때문에 마리안은 잠시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 어떡해. 설마 망가진 건 아니겠지?”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책을 주워 들고 조심스럽게 상태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책장이 살짝 구겨지긴 했지만 제본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마리안은 최대한 책장에 주름이 남지 않도록 잘 눌러 펴면서 무슨 책인지 책장을 넘겨보았다.

“요리책?”

그런데 뜻밖에도 그 두꺼운 책의 정체는 요리책이었다. 정확히는 평범한 요리책이 아니라 각종 격식을 갖춘 연회와 만찬에서 내놓는 요리들을 모아 소개하는 책이었다. 만드는 방법 외에도 음식의 기원과 지방별 특색 등이 삽화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계속해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녀가 먹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요리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공들여 그린 요리 삽화가 한결같이 먹음직스러워서, 마리안은 간만에 상상력을 발휘해 책 속에 소개된 음식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천천히 책장을 넘기던 마리안의 눈에 우연히 삽화 하나가 들어왔다. 거기에는 마리안이 잘 아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누가 사탕이었다.

그녀에게도 유모가 있던 시절, 유모가 어머니 몰래 몇 번인가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

“이게 여기에 왜 들어갔지?”

마리안의 기억으로는 특별히 대단한 음식이 아니라서 연회용으로 언급된 것을 보니 의외였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책을 들여다본 마리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것은 견과류가 아주 조금 들어간 사탕이었지만, 삽화에 그려진 사탕에는 막대한 양의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들어갔다. 이런 걸 잔뜩 쌓아놓는다면 엄청 호화롭게 보일 것이다.

마리안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가 사탕의 그림을 가만히 손으로 쓸었다. 그녀가 알던 소박한 사탕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마리안은 이 사탕이 어떤 맛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사탕의 부드러운 단맛이 그리워졌다.

“사탕 먹고 싶다.”

마리안은 무심결에 툭 내뱉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다지 만들기 어려운 음식은 아니었지만 성채의 주방장이 이런 걸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스터는 먹어본 적이 있을까?”

그리고 마리안은 무심코 아스터를 떠올렸다. 왜 그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줄곧 그에 대한 일을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리안의 유모는 마리안이 심한 감기나 배탈을 앓고 나면 누가 사탕을 만들어 쥐여주곤 했다. 평소에는 치아 건강과 올바른 식습관을 위해 엄격할 정도로 단 음식을 못 먹게 했지만 아프고 난 다음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마리안에게 누가 사탕의 부드러운 단맛은 유모와 그녀의 따스한 품, 항상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주름진 손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한 조각이었다. 그 유모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해고당해 다른 곳으로 가야 했지만…….

‘아스터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을까.’

잠깐 고민하던 마리안은 책을 책꽂이 속에 다시 잘 꽂아두고는 서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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