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묘한 동거
마리안과 남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여러 날이 흐르면서 남자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처음 사흘 정도는 열이 내리지 않아 걱정했지만, 사흘이 지나자 열이 조금씩 내리면서 식사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안은 남자의 식사 시중을 들고, 하루에 세 번 약을 먹게 하고, 붕대를 갈고 약을 발랐다. 의사가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다녀간 덕분에 그녀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상처를 돌보는 일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남자는 여전히 상처 입은 맹수 같은 눈으로 마리안을 바라봤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리안 역시 남자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마리안은 남자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라고 해도 저런 상황에서 갑자기 돌봐주겠다며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리안도 딱히 억지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결국 탑의 꼭대기 방에는 온종일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아…….”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한 그 분위기를 먼저 감당할 수 없어진 쪽은 마리안이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시간을 보내자니 지루하고 심심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있던 마리안은 갑갑함을 견딜 수 없어서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잠시 내려갔다 올게요.”
남자는 자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눈조차 뜨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문이 잠겨있었지만 둘째 날부터는 문이 열려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마리안은 자신에게 꽤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마리안은 곧 자유롭게 탑을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마리안이 돌아다녀도 괜찮은 것은 이곳의 사람들이 감시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마리안과 남자가 머무는 곳은 성채의 동쪽 탑의 최상층이었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보고 마리안은 자신이 있는 곳이 동쪽 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상층의 방에서 나선형의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남자를 매달아 채찍질했던 감옥 같은 방이 나왔다. 거기서 계단을 좀 더 내려가면 역시나 감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철창문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 둘을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마리안이 부탁하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처음에는 감히 병사들에게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마리안은 이따금 그들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하루가 길고 지루한 것은 마찬가지라서 그들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리안이 말을 걸면 성채에 대해 알려주었다.
병사들은 성채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마리안이 생각했던 대로 이곳은 과거 르샤베 왕국이 영토 전쟁을 벌일 때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마리안이 남자와 함께 기거하고 있는 탑과 그 맞은편에 보이는 탑이 성채에서는 가장 높았다. 대략 6층 정도의 높이였고, 그 외에도 남쪽과 북쪽에 훨씬 낮은 높이의 탑들이 더 있었다.
성채 전체의 높이는 3층 정도였다. 성채의 외벽이나 해자의 규모도 작아서 아무리 봐도 전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곳은 전략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것 같았다.
성채를 지키는 병사의 수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정문과 요새의 외벽 곳곳에 이곳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이 제법 보이긴 했지만, 성채 안에는 병사가 열대여섯 명에 이들을 감독하는 기사 서너 명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성채 밖에 있는 병사들까지 전부 세어봤지만 오십 명이 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저들의 역할은 이곳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감시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리라.
“이상한 곳이야…….”
마리안은 성채의 2층에 있는 서재 안을 거닐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 넓은 성채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공간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건물을 지은 덕분에 비교적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1층과 지하로 연결되는 곳에는 거대한 주방이 있었다. 1층에는 각종 갑옷으로 장식된 넓은 홀이 있었으며, 2층에는 도서관이라 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서가 제법 빼곡하게 꽂혀있는 서재가 있었다.
성채의 3층에는 전시에 사령관이나 귀족들이 머무는 듯한 방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방들은 거의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가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지 먼지가 수북하게 내려앉은 하얀 천들로 덮여있었다.
성채의 정중앙에는 일부러 공간을 빼서 만든 작은 정원도 있었다. 소수의 병사만이 지키는 곳에서 정성 들여 가꾸는 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무 몇 그루가 있는 잔디밭을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은 마리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마리안은 그 모든 장소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던 그녀였지만, 닷새쯤 지났을 무렵에는 성채 안에서 그녀가 모르는 곳이 거의 없게 되었다. 서쪽 탑 근처에만 얼씬거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지난 며칠 동안 성채 안에서 여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여자가 한 명도 없는 건지, 그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마리안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마리안에게는 이곳에서의 삶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가족을 만날 수 없고,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기서는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때가 되면 성채의 하인이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설렁줄을 당기면 필요한 것들도 최대한 챙겨주었다.
마리안을 힘겹게 하는 것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성채 내부의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공기와 지루한 나머지 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뿐이었다. 처음에는 병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결국 금지당했다.
‘서쪽 탑에만 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곳은 클로타르 저하의 공간이라 저하께서 오실 때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외의 장소라면 어딜 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병사들과 대화하는 것은 삼가기를 바랍니다.’
마리안이 성채에 온 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에 수비 대장 토르튼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토르튼에게 알았다고 말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유령이라도 된 기분인데…….”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서재의 책장 사이를 가만히 손으로 쓸며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를 제외하면 이제는 다들 그녀를 보고도 못 본 척을 하다 보니 정말로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러 날 대화다운 대화를 못 해봐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간병을 하면서도 유령 취급을 받고 있지…….”
여전히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리안이 몇 번이나 인사를 건네고, 상태가 어떤지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그녀에게 냉담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경계하면서 무시로 일관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자가 이제는 사나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성채에 이런 작은 서재라도 있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리안은 어제 눈여겨봤던 책을 한 권 책장에서 꺼냈다. 이곳에는 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었다. 이런 책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오늘 마리안이 선택한 것은 고전 소설이었다.
“잘됐지, 뭐.”
마리안은 책장을 넘기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이렇게 느긋하게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마리안은 여느 귀족가의 아가씨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가정교사를 통해 기본적인 소양을 갈고닦았으며 본래 책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참이나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읽다 만 책을 손에 들고 탑 꼭대기의 방으로 돌아간 마리안은 움찔했다.
남자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어서 마리안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갇혀있었던 걸까.’
고작 며칠 갇혀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이토록 답답하고 힘든데 저 남자는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탁자 위에 책을 내려놓고 쾌활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피 칠갑을 한 빈사 상태라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지만 햇빛 아래에서 보는 남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클로타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반짝이는 신비로운 금안까지 똑같았다.
상처 탓에 며칠이나 심하게 앓느라 얼굴이 핼쑥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마리안은 남자의 아름다움에 그리 감동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도사리는 맹수를 보는 것 같아서 마리안은 그의 앞에 설 때마다 긴장해야 했다.
오늘따라 남자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평소에 남자를 감싸고 있던 살벌한 기운마저 오늘은 조금 풀어진 듯 보였다.
남자의 금안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마리안은 무심코 그가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졸고 있는 기분 좋은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없으세요? 붕대를 갈아드릴까요?”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리안은 남자의 반응에도 그러려니 했다. 대신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등을 살펴보았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피와 진물이 흘러내려 붕대를 자주 갈아줘야 했는데, 이제는 그 정도는 아닌 듯싶었다. 조금 주저하다 등을 살짝 쓸어보았지만 남자는 딱히 몸을 피하거나 아파하지 않았다.
“붕대는 아직 괜찮을 거 같아요. 약을 한 번 더 드시겠어요?”
남자가 말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마리안은 별수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조금씩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그렇게 해서 이 기묘한 동거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마 그 뒤에 일어난 일만 아니었다면 지루하고 답답하긴 해도 탑 속에서의 생활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열흘이 흘렀다. 마리안이 남자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있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의사 베르트와 신관이었다.
베르트는 남자의 상태가 호전되자 전보다 띄엄띄엄 찾아왔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남자를 살피러 왔었다. 하지만 신관을 대동하고 온 것은 처음이었다.
엉거주춤 일어서는 마리안을 보며 의사는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좀 어떻습니까?”
의사의 질문에도 남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서 마리안이 대신 설명했다.
“나흘 전부터는 열도 없고, 식사도 제법 하셨어요. 상처도 이제는 눈에 띄게 좋아졌고요.”
“과연 그렇군요.”
베르트는 무심한 어조로 남자의 등을 바라보고는 왕진 가방을 열었다.
“잠시 확인을 좀 하겠습니다.”
청진기와 체온계 같은 것들을 꺼내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선 사람은 신관이었다.
“아…….”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관의 손끝에서 따스해 보이는 금빛이 일렁이는 순간, 남자의 등에 엉망진창으로 나있던 피딱지와 상처의 흔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반시간도 채 안 되어 남자의 상처는 깨끗이 아물었고, 하얀 피부 위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신관들의 치유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마리안은 그 광경을 정신없이 눈에 담았다. 신비롭고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할 만큼 굉장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사와 신관조차 무표정했다.
마침내 모든 치료가 끝나자 의사는 공손하게 신관을 먼저 방에서 나가게 한 뒤, 마리안을 돌아보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오늘 밤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마리안은 의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지만 베르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지난번에 주고 가서 절반 넘게 빈 약병을 살펴보고는 왕진 가방에서 새 약병을 꺼내 그 옆에 놓았을 뿐이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
마리안이 뭐라 대답도 할 새 없이 의사는 방을 빠져나갔다.
마리안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별수 없이 마리안은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베르트 선생님.”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의사를 따라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의사는 건조하게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 말이에요. 오늘 밤에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라고 하신 거요.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 신관께서 치료해 주셨는데도 저분은 아직 다 낫지 않은 건가요?”
분명히 신관의 치유력으로 남자의 등이 매끄럽게 낫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의사는 잠시 마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네?”
“때가 되면 당신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길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휴식을 취해두도록 해요. 오늘 밤은 바쁠 테니까.”
베르트는 뜻 모를 말만 하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베르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여전히 당혹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을 돌아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한 가지 더 충고해 드리죠. 주제넘은 동정을 하지 말길 바랍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
베르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버렸다.
마리안은 멍하니 계단을 내려가는 베르트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었다. 마리안은 한숨을 길게 쉬고는 탑의 위쪽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심지어 그녀는 저 위에 누워있는 왕세자와 판박이처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미리 설명 좀 해주면 안 되나?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부아가 치밀어서 마리안은 입술을 내밀었지만 베르트를 따라가서 더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왔다. 어차피 따라가서 물어봤자 더는 말 안 해 줄 게 뻔했다.
동쪽 탑 꼭대기의 방에 들어서자 남자가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마리안이 다가가도 깨어나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다.
신관의 치유력으로 상처가 깨끗이 나았다고는 해도 그동안 줄곧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침대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워서 잠든 것 자체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잠든 얼굴이 천진난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마리안은 한동안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햇빛 덕에 한층 더 반짝이는 금발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미의 신이 지상에 강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역시 예쁜 걸 보니까 좋네.’
마리안은 소리 없이 웃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면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마저 좋아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잠든 남자를 보고 있던 마리안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제는 그녀의 자리가 되다시피 한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마리안은 곧 자세를 바꿔 편히 누웠다. 남자도 자고 있으니 의사의 말대로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마리안은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마리안은 편하게 돌아누운 채 어제부터 읽고 있었던 책장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밤이 될 때까지 그날은 줄곧 평온한 하루였다. 남자는 저녁을 먹을 때 한 번 깨어났던 것을 제외하면 계속 잠을 잤다. 그 잠이야말로 회복을 위한 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리안은 식사 시중을 든 것을 제외하면 남자가 계속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해가 지자 탑 꼭대기의 방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남자의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책을 읽고 있는 곳에만 촛불을 밝히고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그러고는 담요를 꼼꼼히 덮고 자리에 누워 다시 책을 펼쳤다.
‘평화롭네…….’
무심코 마리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그의 동태가 신경이 쓰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상태를 살피곤 했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마리안은 한가롭게 하품을 한 번 했다.
등을 기댄 쿠션은 푹신했고, 난롯불의 온기는 기분 좋게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오늘은 저녁 식사도 꽤 맛있었다. 특히 후식으로 나온 산딸기와 라즈베리를 올린 타르트는 매우 훌륭했다.
이곳에 온 뒤로 추운 성채 안에 갇혀 지내느라 잊고 있었지만, 창밖 너머의 세상은 이제 6월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마리안은 타르트 위를 장식하고 있는 산딸기와 라즈베리를 보며 그 사실을 실감했다.
의사의 충고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밤이 깊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어느덧 긴장의 끈이 풀렸다. 마리안은 읽고 있던 책이 작게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난롯가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빠르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마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따금 부엉이나 늑대 같은 야생 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이곳은 주변이 무척 조용한 숲 한가운데의 성채였다. 그래서 탑의 꼭대기 층에서도 말이 달려오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리안은 얼른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려다 흠칫했다. 종일 조용히 잠들어 있던 남자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봐왔던 남자는 늘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앞에 멀쩡히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가슴을 뛰게 했다.
만월이라 유독 밝게 빛나는 달빛과 난롯불의 희미한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금발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리안은 새삼 남자가 자신보다 월등히 키가 크고, 깡마르긴 했지만 골격도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왕세자 클로타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가 마리안의 기척을 깨달았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마리안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이 너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본 순간 마리안은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졌다.
‘뭐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마리안도 알 수 없었다. 무심한 듯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눈이 너무나 가라앉은 탓이었을까.
창밖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성채에서 기르고 있는 사냥개 여러 마리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성채의 문이 열리고 돌길을 따라 여러 마리의 말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리안은 창밖 너머로 이곳으로 오는 사람이 클로타르임을 알아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순간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은 왕세자 저하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죠?”
남자는 마리안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침대로 돌아갔다. 그는 침대에 눕는 대신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았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여러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을 대동했는지 갑주가 돌계단을 밟을 때마다 철컥철컥하고 울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났다.
마리안은 그 소리에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한 가지 더 충고해 드리죠. 주제넘은 동정을 하지 말길 바랍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왕세자 클로타르가 오늘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아, 일어나 있었네? 안녕, 마리. 그동안 잘 지냈어?”
기사 두 명과 병사 네 명 그리고 칼멘 후작을 거느리고 나타난 클로타르가 눈가를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왕세자가 그렇게나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마치 누가 머리 위에서부터 차가운 얼음물을 쏟아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마리안은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무릎을 굽히고 절을 했지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손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타르는 마리안에게 그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도 일어나 있었구나. 하긴 오는 소리를 이미 다 들었겠지.”
클로타르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며 다가갔다.
마리안은 왕세자가 남자에게 걸어가는 동안 칼멘 뒤에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멘은 마리안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리안을 훑어본 칼멘이 클로타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마리안도 클로타르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클로타르와 마주 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클로타르가 왕세자답게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고 훨씬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달랐다. 클로타르가 활짝 웃고 있는데도 섬뜩하게 보인다면 남자는 조각처럼 무표정하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네 장점은 튼튼하다는 것밖에 없잖아.”
남자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인 클로타르가 갑자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 거친 행동에 깜짝 놀란 마리안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이 클로타르는 남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말했다.
“여전히 시건방져서 마음에 들어. 그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날 쳐다보니까 말이야. 나와 똑같아서 진절머리가 나는 그 낯짝으로 말이지.”
클로타르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고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풀며 힘껏 밀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자가 침대에서 밀려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
너무 놀란 마리안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클로타르가 명령했다. 무척이나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끌고 가.”
그러자 지금까지 클로타르의 뒤편에 서있던 기사들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양옆에서 팔을 붙잡아 그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일부러 질질 끌리게 남자를 끌고 나갔다.
그렇게 끌려 나가면서 남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을 뿐이다.
“후우.”
남자가 끌려 나가자 클로타르가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떨고 있는 마리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칼멘의 뒤에 조용히 서있던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바로 따르자 병사들도 방을 나섰다.
밖에서는 기사 두 사람이 남자를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방 안에는 마리안과 칼멘만이 남아있었다.
마리안은 돌처럼 굳어져 칼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칼멘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멘은 그녀를 외면한 채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마리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조금 전에 본 광경에 얼어붙어 곧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황급히 칼멘의 뒤를 따라나섰다. 마리안이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칼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클로타르는 바로 아래에 있는 감옥 같은 방으로 남자를 끌고 갔다.
마리안도 따라 들어서려고 했지만 계단 앞에 서있던 병사들에게 제지당했다. 당장 검을 꺼내 들어 위협을 가하는 병사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낯설었다. 아마도 성채의 병사들이 아니라 클로타르를 따라온 병사들 같았다.
마리안은 칼멘이 클로타르가 들어간 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서 문이 닫혀버리자 그녀는 자신이 이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병사들이 막고 있는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남자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던 기사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잠시 열린 문 사이로 방 안의 광경을 엿본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방바닥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마법진처럼 보였다.
비록 마리안은 살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마법진을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저렇게 빛나는 복잡한 문양의 그림은 마법진 이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야 마리안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이 마법진을 그린 마법사일 것이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클로타르가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서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방 안의 풍경이 보인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기사들은 문을 닫은 뒤 마리안을 저지한 병사들 옆에 나란히 서서 문을 지키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기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표정이라도 읽으려고 했지만 한밤중이라 복도는 매우 어두워서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얼굴이 잘 보인다 해도 마리안은 그들에게서 어떤 표정 변화도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떡하지…….’
마리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멍하니 서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마리안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불규칙하게 내려치는 매서운 채찍 소리였다.
‘이게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부터 마리안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리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낮에 의사와 신관이 와서 남자를 깨끗하게 치료했는데 어째서 클로타르가 도로 남자를 끌고 가서 채찍질한단 말인가.
금발에 금안은 라베인 왕가 직계의 상징이었다. 분명 남자도 왕가의 직계로 왕세자와 혈연관계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이런 외딴 성채의 탑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마리안이 귀족다운 생활을 영위해 본 적이 없다고는 해도 왕국 내 사정에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채찍질을 당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저지른 왕족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채찍질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채찍이 공기를 가르고 바닥을 후려치는 소리만 들려왔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그 신음이 누구의 것인지 머릿속으로 깨닫는 순간 마리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그가 피투성이였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리안은 이런 끔찍한 폭력을 알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또래의 귀족 아가씨들에 비하면 세상의 험한 모습을 많이 본 마리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격한 폭력이란 고작해야 술에 취해 주먹질하는 시정잡배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폭력이라고 해서 정도가 덜하지는 않았다. 귀족들보다 훨씬 고단한 삶을 영위하는 하층계급의 일상에서 폭력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피해자는 늘 하소연할 곳도 없는 약자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은 전혀 다른 종류의 끔찍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 고귀한 왕세자가 혈육으로 보이는 남자를 감금하고 구타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와 기사 그리고 신관과 마법사까지 동원되었고, 칼멘 후작 같은 고위 귀족이 침묵으로 방조하고 있었다. 어쩌면 칼멘은 왕세자를 부추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똑같은 폭력이라고 해도 훨씬 치밀하게 계획해 권위적으로 행사하는 폭력이었다.
마리안은 이 폭력에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폭력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행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찍질을 당하는 남자는 사실 마리안이 모르는 곳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잔인하잖아…….’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죄인에게 고문이나 매질을 하는 일이 비교적 흔하다고는 해도 이미 죽을 정도로 다친 사람을 깨끗이 치료해서 처음부터 다시 때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끔찍했다.
이런 일이 정당하다면 어째서 왕세자는 밝은 태양 아래에서 온 백성이 볼 수 있는 광장 한복판이 아니라, 이런 비밀스러운 성채의 탑 안에 남자를 숨겨놓고 깊은 밤에 찾아와 매질한단 말인가.
들려오는 신음이 너무 처참해서 마리안은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사들은 주저앉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쯤은 무척 익숙한 듯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리안이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마리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만 바라보았다.
클로타르가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뒤로 쓸어 넘겼다. 반듯한 하얀 이마와 유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마리안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뺨에 튄 붉은 핏방울을 분명히 보았다.
예를 표하는 기사 중 한 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클로타르가 마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겠군.”
그는 마리안이 일어서기도 전에 긴 다리를 접어 그녀의 앞에 앉아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클로타르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차가운 금빛 눈동자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타르는 손가락으로 마리안의 턱을 쥐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겁을 먹었군그래.”
“…….”
처음 클로타르를 봤을 때만 해도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했었는데, 이제 마리안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클로타르에게서 어떻게든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똬리를 틀고 입을 벌린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너도 제법 귀엽게 생겼어. 처음에 봤을 땐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지만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바들바들 떠는 게 주제 파악도 잘하고 있어서 그 점도 아주 마음에 들어.”
이번에도 한 차례 마리안의 얼굴을 품평한 클로타르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턱을 쥐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창백한 뺨을 쓰다듬었다.
마리안은 언젠가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어느 백작가에서 어린 소년이 장난을 친답시고 그녀의 목 뒤에 작은 청개구리를 밀어 넣었을 때가 생각났다.
클로타르의 손이 뺨을 쓰다듬는 감각은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작은 청개구리가 등줄기를 따라 옷 속으로 파고들 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마리안은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바라보던 클로타르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네가 이곳에서 할 일은 저 안에 있는 놈을 잘 돌보는 거야, 알았지? 내가 없는 동안 친절하게 대해주도록 해.”
그는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 달쯤 뒤에 다시 올 거니까 그때까지 잘 돌봐. 네가 잘해낸다면 상을 주지.”
“…….”
“마리, 대답을 해야지?”
마리안은 마치 목을 졸리는 사람처럼 가까스로 대답했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클로타르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마리안에게서 손을 떼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리안은 어느 틈에 칼멘과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방에서 나와 클로타르의 뒤편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타르가 그들을 말없이 한 번 바라보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들 역시 마리안을 버려두고 클로타르를 따라갔다. 이어서 지금까지 마리안의 출입을 막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마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그녀는 겁에 질려있었다.
클로타르가 남자를 고문했던 방의 문은 절반가량 열려있었다. 당장 들어가서 남자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텐데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이렇게 겁을 집어먹은 것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대체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마리안은 자신을 질책하며 한 번 더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있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저 안에서 어떤 참상이 벌어져 있을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절반쯤 열려있는 문의 손잡이를 마저 당겼다.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마저 열렸다. 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여전히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쓰러져 있는 검은 물체를 확인한 순간, 마리안은 언제 겁을 먹고 주저했냐는 듯 정신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자가 마법진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방 안에는 불을 밝힌 촛대가 여러 개 놓여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마리안은 어두워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밝은 곳에서 시뻘건 피로 얼룩진 바닥과 상처를 입고 쓰러진 남자를 자세히 봤다면 충격이 몇 배는 더 컸을 것이다.
“…이봐요, 괜찮아요?”
아직도 푸른빛을 내는 마법진이 섬뜩했지만 마리안은 이를 악물고 쓰러진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감히 크게 말하거나 그를 흔들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남자의 코앞에 대보았다.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마를 만져보자 마리안은 움찔했다.
‘너무 뜨거워. 어떡하지…….’
남자를 방으로 옮겨야 할 텐데, 그녀의 힘으로는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은 마리안에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마리안은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다급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꽤 널찍한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고 좁은 창문 몇 개와 여전히 기괴하게 빛나는 푸른 마법진 그리고 남자를 묶어둔 쇠사슬과 구석에 놓여있는 물을 담은 대야 정도가 전부였을 뿐이다. 이곳은 정말로 말로만 들어본 지하 감옥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등이 만신창이로 찢겨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리안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병사들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나에게 돌봐주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지.’
남자를 홀로 두고 가야 하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사람을 데려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울음이 섞여있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북받쳐 올라왔다. 마리안 본인도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쥐고 한 번에 두 개씩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클로타르에게서 명령을 받았는지 기사 둘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안도 몇 번이나 본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마리안의 얼굴을 보자 잠시 주춤했지만, 곧 묵묵히 방으로 들어가 쓰러진 남자를 끌어 올려 동편 탑의 꼭대기 방으로 옮겼다.
“뜨거운 물, 붕대 그리고 수건을 갖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그들이 적당히 남자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나가려고 하자 마리안은 기사 하나를 붙잡았다.
“왕세자 저하께서 제게 이분을 돌보라고 명령하셨어요. 그러니 내가 내 일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건을 갖다 달라고 전해줘요.”
마리안은 기사가 거절할 새도 없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뜻밖에도 기사는 정중하게 대답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마리안은 기사의 태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남자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실낱같은 숨을 쉬고 있었다. 촛불을 여러 개 밝힌 데다 아래층에 비해 달빛이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덕분에 꼭대기 층의 방 안은 매우 밝았다.
마리안은 입술을 꾹 깨문 채 피로 시뻘겋게 물든 그의 셔츠를 바라보았다. 공황 상태에 빠졌던 머리가 조금씩 냉정을 되찾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벽난로로 뛰어가 불을 지폈다. 아까 저녁 때 지폈던 불이 꺼져버린 탓에 방 안이 상당히 썰렁했다. 체온을 유지하려면 방 안이 먼저 따뜻해야 했다. 난로에 불을 지피자 바로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마리안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게 이 빌어먹을 연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 충격 탓인지는 마리안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드디어 불이 붙기 시작한 난로 속에 장작을 한 개 더 던져 넣었다. 방 안이 따뜻해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왜 이렇게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불을 다 피우고 나자 마리안은 문가를 노려보았다. 분명 이 성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클로타르가 오늘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병사와 기사들도,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도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클로타르가 돌아가자마자 신속하게 남자의 상처를 돌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마리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때쯤 밖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이어 하인 두 사람이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와 수건 그리고 붕대를 가져왔다.
“장작이 모자랄 것 같으니 넉넉하게 더 가져다줘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왕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시면 바로 치료를 위한 물품들을 준비해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 문제를 왕세자 저하께 직접 말씀드려야 하나요?”
마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수건을 건네주는 하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말씀하신 대로 바로바로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면서 안도하는 한편으로 마리안은 등줄기에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도, 대답하는 하인도 왕세자가 또다시 이런 짓을 할 거라고 가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장작은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하인들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마리안이 보기에 가장 정상이 아닌 사람은 바로 왕세자 클로타르였다.
하지만 마리안은 제정신이 아닌 클로타르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남자의 셔츠를 벗겼다.
분명 낮에 신관이 다녀가면서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었던 등허리가 넝마처럼 찢어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마리안은 이를 악물고 뜨거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닦았다.
남자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여서 차라리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상처를 닦는 마리안의 손길에 고통스러워했다면 마리안은 무서워서 치료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상처를 닦아내고 전에 의사에게서 받은 약을 등에 살살 펴 발랐다. 그리고 약이 조금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붕대를 감았다.
전과 달리 이제는 붕대를 감는데도 제법 요령이 생겼다. 마리안은 자신이 능숙하게 붕대를 감을 수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처에 직접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얇은 담요까지 덮어주고 난 다음에야 마리안은 자리에 앉아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꽤 따뜻해진 방 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리안의 손과 팔, 입고 있는 옷과 남자의 침구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침대 근처에는 피가 묻은 수건과 붕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처참했다.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그것들을 모두 모아 양동이 하나에 정리한 뒤 방문을 열고 문 옆에 내려놓았다.
방문을 여는 순간 복도를 따라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마리안은 그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환기가 조금 될 정도로만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은 뒤, 마리안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단한 치료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처를 돌본 덕분인지 그의 얼굴은 조금 편안해 보였다.
마리안은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의사가 주고 갔던 약을 꺼내와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남자의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내자 급격하게 피로와 탈력감이 몰려왔다. 마리안은 난롯가의 자리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게 풀린 탓인지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리안은 두 손으로 양미간을 몇 번이고 꾹꾹 누르다가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채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래서 어느 틈에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마리안이 깨어났을 때는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방 안은 매우 따뜻했다.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마리안은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마르고 터진 입술에서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을 찾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리안은 황급히 물을 가져왔다.
“물 가져왔어요.”
물컵을 입가에 대줬지만 역시 마시지 못했다. 스푼에 물을 떠서 남자의 입가에 흘려 넣었지만, 얼마 삼키지 못한 채 남자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하자 마리안은 애가 탔다.
아직 희미한 햇빛 아래에서 남자의 얼굴은 마치 백지장처럼 하얗기 그지없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열에 들떠 신음하는 그가 너무 안쓰럽고 가련해서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마리안은 한 가지 생각에 미치자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물컵을 들어 천천히 물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 없이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잔뜩 마르고 거칠어진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어 물을 흘려 넣어주자 그가 어미에게서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얌전히 물을 받아 마셨다. 스푼으로 흘려 넣어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남자의 하얀 목울대가 물이 넘어가면서 꿀꺽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계속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한참이나 시간을 들인 끝에 결국 물 한 잔을 전부 남자에게 마시게 할 수 있었다.
“…….”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자도 물을 다 마셨을 무렵에는 의식이 돌아왔는지 훨씬 맑아진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의아함과 놀라움이 떠올라 있었다.
마리안은 햇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그 금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로타르와 똑같은 눈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섬뜩하고 잔인하게 빛나던 클로타르의 눈과 달리 남자의 눈은 맑고 투명했다. 순금을 모아 햇빛으로 녹여내면 이런 느낌이 나지 않을까. 보면 볼수록 신비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몇 시간이고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마리안은 남자 역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당황한 나머지 허둥대는데 갑자기 마리안의 뺨이 달아올랐다.
채찍질을 당하며 짓씹어서 피가 터지고 부어오른 남자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안타까웠다고는 해도 남자의 입술이었다.
저 입술에 자신이 직접 입을 맞추고 물을 마시게 했다고 생각하자 당혹스러워졌다. 아까는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라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정신이 들고 나자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더 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마리안은 고개를 홱 돌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뺨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잠시만이라도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마리안의 시선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급하게 허공을 헤맸다. 그때 창가의 탁자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구석에 앉아있으면 조금은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발을 내디디려던 마리안이 흠칫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남자의 손이 마리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지만 마리안은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려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선을 조금 비스듬히 한 채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리안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옆에 있어.”
잔뜩 쉰 목소리였다.
“…….”
마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이 성채에 들어와 남자와 함께 동쪽 탑에서 머물기 시작한 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게 오늘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마디가 대체 뭐라고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서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을게요. 좀 더 주무세요.”
마리안이 침대 옆에 앉자, 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겨웠던지 그는 곧 눈을 감았다.
그는 무척 힘들고 지쳐 보였다. 마리안은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통증이 무척 심할 테니 그가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렇게라도 눈을 감고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리안 역시 매우 피곤했지만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어제오늘 본 일들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느덧 밖에서는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도 좀 더 높이 떠올랐다.
마리안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뜨면서 기온이 올라가자 난로를 피우고 있는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한 정도를 넘어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비교적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리안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난로의 불을 끄고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날이 밝고 한참 지나자 아침 식사를 들고 하인이 찾아왔다. 그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침상을 차린 뒤 꽤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마리안은 아침 식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주방에서는 신경을 썼는지 우유를 넣어 푹 끓인 오트밀과 신선한 과일, 묽게 끓인 채소 수프, 갓 구운 빵과 과일잼을 가져왔다.
“식기를 치우러 올 때 뜨거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더 가져다줘요.”
“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쯤 오시죠?”
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정오가 지나서 오실 겁니다.”
“알았어요. 가봐요.”
하인이 방을 나가자 마리안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그녀로서는 남자가 잠들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깨워서 묽은 수프라도 조금 먹여보고 싶었지만, 다시금 고통이 엄습하는지 남자의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약을 먹이기 전에 조금이라도 뭔가 먹게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다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피부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준 뒤, 마리안은 약병을 가져와 스푼에 약을 따르고 남자에게 먹였다. 하지만 약은 남자의 턱과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을 뿐, 제대로 삼키게 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별수 없이 마리안은 약을 입에 머금었다. 무척 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청량하면서도 시원한 향과 맛이 있어서 마냥 쓰기만 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잔뜩 메마른 입술은 꽤 뜨겁고 거칠게 느껴졌다. 입가에 약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입술을 마주 대고 약을 먹이는 쪽이 스푼으로 약을 먹일 때보다는 효율이 좋았다.
마리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이번에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깨어났다면 꽤 민망했을 것이다. 대신에 남자는 약을 먹인 뒤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숨소리가 점차 고르고 안정적으로 변하자 마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리안은 상처에 닿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주면서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길고 마른 손이었다. 마리안이 자신의 손을 대보자 남자의 손은 그녀의 것보다 한참이나 더 컸고 열 때문에 상당히 뜨거웠다.
마리안은 한동안 그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자가 너무 안쓰러웠고,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마리안에게도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