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차라타의 거리(3) (86/98)



〈 86화 〉차라타의 거리(3)

86화 차라타의 거리(3)

챙!

맑은 마찰음이 울렸다.
장검을 빼들은 남자는 가볍게 오오라를 내쳤고.
살기가 담긴 오오라는 즉시 흩어지며 그림자로 가라앉는다.

“마스터가 아닐 거라고 예측한 이유는?”
“감이다.”
“눈빛을 보니 마스터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군.”

게임에서 정보상 발텐을 한때 질리도록 만났다.
차라타의 거리 퀘스트가 없어도 메인 시나리오를 이어가는데 별 무리가 없다는 걸 알고서야 가지 않았다.

대규모 패치 이후로 빙의한 지라 용사처럼 성별이나, 모습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걱정했건만.
그럴 일은 없었다.

드물게 본모습을 먼저 드러냈고.
손님을 대상으로 이상한 시험이나 장난을 치는 건 여전했다.
이카루트는 이공간을 찢어, 마검을 들었다.

“상당히 귀찮은 여자군.”

정보상 발텐이 운영하는 그림자 조직 단체는 발텐의 명만 듣고 움직인다.
‘그녀’가 그만하라고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시덥잖는 시험을 그만한다.
기다릴 시간도 여유도 없다.

키이잉, 칼날이 부르짖으며 공명을 한다.
그 여파에 남자는 장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아든다.
등에 식은땀이 났다. 묵직하고 광활한 살기가 퍼지자, 주위에 있던 여인들도 숨어있던 무기를 빼어낸다.

그리고 유령처럼 일어서더니, 사방으로 둘러싼다.
단도를 쥐는 솜씨나 익숙하게 전투 자세를 잡는 걸 보니 햇병아리같은 실력은 아니었다.

내부는 어두운 적막감이 드리워졌다.
누군가가 먼저 무기를 휘두르면 당장, 전투를 시작할 기세였다.

자박, 자박.
레실리아가 망토자락을 펄럭이며 남자 앞을 막는다.
줄타기하는 경계심이 급속도로 올라갔고. 한데 모여드는 이목에 레실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망토 안주머니를 뒤적인다.

지켜보는 눈빛에 스산한 기류가 흘렸다.
물건의 정체에 따라 레실리아의 생사 여부가 결정 짓는다.
적대적인 시선 중에서 여유롭게 관망하는 시선이 숨어 있었다.

이를 발견한 이카루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리자 남자의 장검에 날이 선다.
적의 틈이 보였지만, 마스터의 명 없이는 손가락조차 까닥하지 못한다.

“잎담배 예요.”

벨페고르가 직접 챙겨준 잎담배 선물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장검을 바닥에 꽂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내 훤히 드러난 이맛살이 살짝 일그러진다. 의심하고 있었다.

“벨이 주는 선물이예요.”

레실리아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나른히 대는 여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농후한 엉덩이 라인이 매력적인 여인은 짧은 웃음을 흘린다.
짙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덜렁대는 가슴 윤곽 위로 아슬아슬하게 유륜이 가려졌다.
상의를 벗어던진 채 아랫치마자락을 질질 끌고 있었다.

“음, 어떻게 알았어요~? 저를 만났다면 말투도 체구도 얼굴도 달랐을 텐데~”
“기운이 다르거든요. 생명체마다 느껴지는 본질적인 기운으로 당신을 찾은 것 뿐이에요.”

레실리아는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맞잡는다.
정보상 발텐은 키득거리며 빈 석상에 앉았다.
그 순간 성녀와 마왕을 뺀 모든 인간들이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다.

“합격~”

팔걸이에 무릎을 올린 발텐은 뒤통수를 받친 채 다리를 흔들거린다.
숯많은 머리칼은 흔들거리지 않고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다.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그녀에게 기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부길드장, 받아와~”
“마스터. 저번처럼 독이면…”
“닥치고 가져와.”

발텐은 실실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인다.
한탄하듯 한숨을 쉰 부길드장은 어쩔 수 없이 잎담배를 받았다.
대기하던 여인이 파이프 담배를 공손히 꺼냈고.
발텐은 파이프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낀 채 휙휙 돌린다.

“그 마약쟁이가 준 게 진짜 맞네~ 손님이랑 많이 친한가봐요~”
“뭐…당신에게 이걸 가져가면 좋아할 거라고 말하더군요.”
“아항~”

그리고 부길드장의 손에 있는 향주머니를 뺏고는 코를 바싹 붙인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깊게 들이마신다.
싸하고 매캐한 향에 기분좋아진 발텐은 파이프 담배를 지휘하듯 까닥까닥 움직인다.

“그래서 무슨 정보를 원하시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현 용사 레티나의 위치를 알고 싶다.”

발텐은 흐음, 거리며 뜸을 들인다.
그리고 말없이 빈 파이프에 잎담배를 채웠다.
성냥을 준비하던 여인이 불을 키우자,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그건 위험해서 안되는데요?”
“……다프넬 이벨롯 때문인가.”
“하항, 정답~”

장난기 서린 웃음을 흘리자 코와 입술 사이로 연기가 뻐금뻐금 새었다.

“손님도 잘 알고 있으면서~ 무서운 빽이 있는 사람을 건들면 저희 길드도 위험해요.”

파이프 담배 끝으로 주위를 훑었다.
창녀로 위장한 길드원들은 아직도 경계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빙글 돌아간 단도 끝은 언제라도 전투할 기세였다.
발텐은 킬킬거리며 파이프 끝을 문다.

“개인으로 움직일 순 없나보군.”
“원래 혼자 의뢰를 받기도 했는데~ 지금 감시자의 눈이 점점 심해져서요~”

뺨이 홀쭉해지다가, 푸후 터트리며 담배 연기가 눈앞을 가린다.
뭉게진 담배 냄새에 레실리아는 숨을 참아도, 목구멍이 따가웠다.

“다프넬이 너를 주시하고 있다. 이 말인가.”
“그런 셈이죠~ 정확히는 저를 포함한 모든 정보상이지만~”

차라타의 거리에서 제일 가는 정보상에게 영향력을 가할 정도로 다프넬은 용사의 흔적을 은폐하고 있었다.

“다프넬 이벨롯의 정보를 알고 싶지 않나요?”

발텐은 뻐금뻐금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깊게 뱉으며 느른한 표정을 짓는다.
내부는 금세 탁한 안개로 가득찼다.

“비밀리로 움직여도 다프넬의 눈을 피할 순 없어요. 차선책을 선택하는 게 손님 입장에서는 좋을 걸요? 혹시 아나요~ 그 여자를 좇다가, 용사를 만나게 될 지?”
“관심 없다.”

들고 있던 마검은 그림자가 되어, 바닥으로 꺼졌다.
전투 태세를 가뿐하게 푼 이카루트는 발을 돌렸다. 다프넬은 이스터 에그와 백 번 넘게 용사의 튜토리얼을 본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늦더라도 정보상을 통해서 용사의 정보를 얻는 것보다 벨페고르에게 명을 내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잎담배는 그냥 네가 가져라. 불필요한 대화는 사절하지.”

이카루트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였다가 올렸다.
조용히 응시하던 발텐은 물고 있는 파이프 담배를 팔걸이에 툭 친다.

휘익!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눈 옆에 작은 칼날이 지나갔다.
고개만 옆으로 틀어, 이카루트는 가뿐히 피했다.
여인들의 단도가 슬로우 모션으로 눈앞에 다가왔고. 검은 오오라를 피워낸 이카루트는 장막을 만들었다.

퉁, 단도가 튕겨나가자 다른 여인이 가로지르며 헛점을 노렸다.
이런 식으로 사방을 둘러싼 여인들은 상대방의 시각을 교란시키듯 치고뺐다를 반복했다.
다수의 공격에도 장막은 튼튼했다.

서걱!

그때 남자의 장검에 검은 오오라가 뻗어나왔다.
나선 형태가 장막과 맞부딪치자, 실금이 생긴다.
남자의 오오라는 마기와 비슷하게 느껴졌으나, 본질(本質)은 달랐다.

“마족과 계약한 인간인가.”
“……이 이상, 움직이지 마라.”
“진짜 네 힘도 아닌 주제에 겉맛만 들었군.”
“이, 이 자식이!”

마족과 계약한 인간은 마기가 섞여 본인이 가지고 있던 고유 마나가 타락한다.
모든 감각을 두 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생명력을 태운다.
거대한 오오라를 방출시켰던 남자는 장검을 바닥에 꽂은 채 심호흡을 한다.

가슴팍이 세차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걸 보니, 두 번 이상은 힘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고 오오라를 모으자 이카루트는 손가락을 튕겼다.

우웅.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숨통을 죄었다.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렀고 맥박 소리가 살려달라는듯 귓가에 둥둥거렸다.
풀썩, 공격을 하던 여체가 동시에 쓰러졌다.

옅은 검은 안개가 에워싸자, 다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입안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몇 톤짜리의 돌덩이가 온 몸을 내리누르는 느낌에 남자는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스터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인간에게서 보기 힘든 충성심을 드러내며 기울어진 장검에 몸을 기댄다.

‘이 정도의 마기를 버텨내다니. 대단하군.’

성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고서는 웬만한 인간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벌레를 잡더라도 손톱을 세워 몸을 짓누르고 부숴야 한다.
오오라의 양을 더욱 늘리려고 이카루트는 다시 힘을 끌어올렸다.

“하항, 보기보다 끈질기시네여~ 좋아요 의뢰 받아들일게요~”

일부러 정보상 발텐 쪽으로 오오라를 보내진 않았다.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하지만, 그래도 발텐의 안색은 여간 좋지 않았다.
파이프 담배를 빙글 돌리자 시중들던 여인이 곧바로 도자기 그릇을 내민다.
담배를 거꾸로 하고는 텅! 맑은 소리를 내며 담뱃재를 쏟아버린다.

“대신 조건부예요. 손님 전투 실력이 상당한 것 같으니까~ 제 부탁도 들어주세요.”

팔걸이에 엎드린 발텐은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그에게 가리킨다.

‘결국 퀘스트를 받는 건가.’

발텐이 주는 서브 퀘는 쉬워보이지만.
대부분은 동선만 길고, 퀘스트 도중에 인물 찾기가 어렵게 되어 있어 시간을 엄청 잡아먹는다.

처음 접하는 뉴비가 헤맬 순 있으나, 이카루트는 게임에서 알아주는 고인물 유저였다.
말없이 고갯짓하자 발텐은 자세를 바로 세우고는 다리를 꼰다.
조직원들의 목숨에 오가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기색이 넘쳐났다.

“저는 다프넬이 항상 지니고 있는 마젠타 목걸이를 원해요.”

마젠타 목걸이는 감시자의 상징이었고, 감시와 보호마법이 이중으로 걸려 있어 이것만 있으면 차라타의 거리를 알 수 있었다.

‘대규모 패치때문인가. 내가 알던 퀘스트가 아니야.’

이카루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자신이 키운 고양이가 탈출해서 찾아달라는둥, 어느 노점상 주인에게 정체불명의 물건을 대신 달라는둥 별 시덥잖는 퀘스트만 준다.
다프넬을 직접 만나지 않고서야 마젠타의 목걸이를 찾을 수 있다.
결국 내용만 다를 뿐. 동선도 길고 찾기 어려운 인물만 골라 부탁을 했다.

“그림자 조직이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저 마젠타 목걸이 때문이거든여~ 감시 마법이 걸려 있어, 수상쩍은 행동만 보여도 바로 목이 날아가여~”

발텐은 목에 손날로 긋는다.
마젠타 목걸이만 없다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는다. 워낙 경계심이 세고, 눈치가 빠른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순식간에 덜미가 잡힌다.
이때껏 스파이로 들어간 조직원들은 목이 날아갔고. 죽은 인원만큼 충원하느라 얼마나 귀찮았는지 모른다.

“저것만 없다면 용사의 위치, 흔적, 정보, 사생활까지 삭삭 긁어줄 수 있다구여~”
“위치. 그것만 알면 된다.”
“이번 손님은 원하는 게 명백해서 좋네요~”

기분좋게 대답한 발텐은 무릎을 세워 턱을 얹는다.
얄쌍하게 눈매를 뜨고는 파이프 담배를 문 채로 말을 이었다.

“공짜 정보부터 드리져~ 다프넬 이벨롯, 광장에서 유명한 조교사인 거 아시나요?”

조교사라는 단어에 레실리아가 움찔 몸을 떤다.
그리고 이카루트를 흘끔 보더니, 조용히 두손을 모은다.

“사디스트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실은 그 여자, 저보다 더한 마조히스트거든여~”
“……변태 기질을 이용하란 뜻이냐.”
“뒷세계의 지배자가 실은 누군가에게 복종당하길 원한다니~ 재밌지 않나여?”

발텐은 담배를 빙글빙글 장난치면서 비웃었다.
다프넬이 M기질을 가진 조교사라는 건 생전 처음 듣지만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마젠타의 목걸이를 함부로 훔쳐오면 추적이 뜨는데다가, 마법 각인이 되어 있어서 본 주인이 해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네요.”

발텐은 요사스럽게 아랫입술을 핥고는 씨익 입가를 찢는 것 마냥 웃는다.

“다프넬과 직접 만나, 목걸이를 받아오라는 뜻이군.”
“빙고~ 정답입니다~”

차라타의 거리 퀘스트는 여전히 극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