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차라타의 거리(2) (85/98)



〈 85화 〉차라타의 거리(2)

85화 차라타의 거리(2)

낮잠을 자다 일어난 고양이처럼 벨페고르는 느른히 기지개를 켠다.
피곤함에 잔뜩 찌들린 표정을 하고는 쩌억, 하품을 시작으로 대충 스트레칭을 한다.
몸동작 하나하나가 굼떴다.

“하으음…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예요…?”

먼지가 묻은 마녀 모자를 툭툭 털며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다.

“실험체가 따라오더군.”
“……안 그래도 도적단이 따라붙었길래…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그때 골목에 봤던 불량배가 떠올렸다.
이어 느릿히 뒤따라오던 무리의 기척을 느꼈던 이카루트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등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실험체를 봤다.
창녀 행세를 하던 실험체. 상점을 꾸려나가던 실험체. 호객행위를 하던 실험체까지 생각보다 벨페고르의 실험체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일부러 차라타의 거리에 벨페고르를 배치했다.
어두운 거리 홍등가의 아래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오갔다.
거리 특성상, 가면이나 망토를 쓴 채 제 신분을 가린다.

작정하고 정체를 숨긴 용사를 가려내기엔 혼자로는 부족하다.
벨페고르는 실험체와 감각을 공유하며 다량의 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시내린 사항은?”
“…….코빼기도 못봤어요….”

벨페고르는 낡은 소파에 덜렁 누웠다.
풀썩 일어나는 먼지 덕분에 레실리아는 잔기침을 하였다.
코를 막는 성녀를 슥 보고는 벨페고르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성녀와 데이트 중이었나봐요…?”
“……”
“아, 앗…! 벨페고르 님! 데, 데이트같은 거 아니에요! 저희는 성검을 찾으러 온 것 뿐이에요!”
“…….그냥 농담던진 건데…”
“아, 아아…앗! 그랬나요…”

레실리아는 창피한듯 시선을 피하며 큼큼거린다.
뚱하게 바라보던 벨페고르는 어깨를 으쓱인다.

“……여기 있으면서 용사의 기척은 못 느꼈어요…아마 누군가의 보호하에 움직이는 거겠죠…”

나른히 기지개를 켜더니, 추욱 몸을 늘어뜨린다.
소파 위로 늘어진 벨페고르는 물을 흠뻑 먹은 대걸레처럼 흐물거린다.

“용사를 보호하고 있는 인간의 정체는 알겠나?”
“…… 다프넬 이벨롯… 그 여자의 짓이겠죠 뭐….”

벨페고르는 모자 챙을 아래로 꾸욱 눌러, 얼굴을 가린다.
하품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어지간히 피로했던 것 같다.
그나저나 다프넬 이벨롯,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럼 그 여자를 찾아야겠군.”
“……쉽진 않을 거예요…다프넬 이벨롯…워낙 쥐새끼 같아서…귀찮아…”

가려지지 않는 턱선이 들썩인다.
덫을 설치할 무언가만 있다면 다프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고민하던 찰나, 벨페고르의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뒷세계에 오랫동안 지낸 인간을 알게 되었는데……꽤나 도움이 될 거예요…”

벨페고르는 무심하게 모자 챙을 들어올린다.
약간 충혈된 눈을 도륵도륵 굴리더니 졸린 눈가를 비빈다.
중요한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라 조금 기다려야 한다.

“이거…가져가면…좋아할 거니까… 벨이 준 선물이라고 해요…”

벨페고르는 어지럽게 쌓인 재료를 뒤적이다가, 향주머니를 준다.
주머니 속엔 말린 잎사귀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받아들인 향주머니에 코를 갖다대니 싸하고 미묘한 향이 올라온다.
약간의 미약 성분이 들어간 잎담배였다.

“이름은?”
“…뭐더라…아…발텐이었던가…?”
“더욱 귀찮아지겠군.”

이카루트는 옛 생각이 나, 미간을 약간 좁혔다.
발텐은 용사 퀘스트를 한다면 서브 퀘를 무자비하게 내는 npc 캐릭터였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어려움에 반해 보상과 습득하는 경험치가 저조했다.
처음 접하는 뉴비에게 웬만해선 차라타의 거리 퀘스트를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게임 세계관 내에서는 비밀스러운 인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플레이 유저라면 한 번쯤 만난 캐릭터이기도 하다.

“……마왕님은 생각보다……음…잘 아네요…”

벨페고르는 구겨진 모자 챙부분을 느리게 펴며 지나가듯 말한다.
생략된 말 부분에 궁금증이 서려 있었다.

차라타의 거리에서 유명한 정보상 발텐은 평범한 인간들은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인물이었고. 고위급 마족인 벨페고르도 최근 연을 맺게 되어 알았다.
베일에 싸인 인간을 마왕이 알고 있다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보좌관에게 매일 오전, 오후 인간계의 정세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상당히 귀찮은 일…이겠네요…”

벨페고르는 깐깐한 마몬을 생각하며 고개를 잘게 내저었다.
작은 의구심이 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풀어야 했다.
말과 행동이 느리지만 눈치가 빠른 벨페고르에게 빙의자라는 걸 들켰다가는 실험체 행이었다.

이카루트는 성녀에게 향주머니를 넘겨주었다.
레실리아는 망토 안주머니에 넣어, 잎담배를 챙겼다.
꽤나 지독한 담배향에 레실리아의 콧잔등이 살짝 찡그러진다.

‘다프넬도 용사가 회귀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대현자와 엘프 왕은 회귀한 용사를 알고 도와준 것 같지만.
다프넬은 모르겠다.
게임 시나리오상 다프넬은 튜토리얼 퀘스트에서 잠깐 등장하고 사라진다.
본격적 용사로 원정나가기 전, 다프넬을 도와줘야 튜토리얼을 깰 수 있었다.

‘실론드 마을은 이벨롯 가의 남작령에 속해 있어. 용사가 다프넬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면 신탁의 기운을 완벽히 숨길 수 있었겠군.’

다프넬 이벨롯은 제국 변방에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을 도와,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을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황실의 어둠을 뒷처리해주는 처리장 담당이었다.

‘황실에 반역하는 세력은 몰래 쓸어버리고, 현 차라타의 거리를 감시하는 지배자이기도 하지.’

차라타의 거리 위주로 서브 퀘스트를 깨다보면 알 수 있는 이스터 에그였다.
불법이 성행하는 거리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도 거래를 하였다.
그날 봤던 용사의 귀에 달랑거리던 고대 성물이 생각났다.
다프넬의 도움 없이는 구하기 어려웠다.

다프넬과 용사의 관계는 튜토리얼 후반에서 진즉 끝났어야 했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 뿐 아니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
다프넬의 지원이 있다면 용사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보스를 잡으려면 옆의 끄나풀 부터 처리해야 한다.

“정보상부터 찾아야 겠군.”
“……처음 봤던 홍등가…어딘가에 있을 걸요…그 정보상…장소를 자주 바꾸거든요오…….하암…졸려…”

반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고는 하품을 쩍쩍 한다.
벨페고르는 모자를 벗어 얼굴 위로 올린다.

“쿠울….”

그대로 잠의 수마에 빠져들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주고 자기는커녕, 덜렁 눈부터 감는다.
짧고 굵게 용사를 찾을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동선이 생겨났다.

“그 정보상이 어디 있을지 대충 짐작가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레실리아는 생각에 잠긴 눈을 옮겼다.

“저도 만난 적이 있거든요.”

***

새카만 밤과 붉은 등밖에 없는 사창가.
두 개의 단색은 거리를 어둡고 암울하게 만들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촌집을 지나,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니 탁 트인 광장이 보였다.

“아앙, 핫!”
“이 암캐가! 밖에서 실금하면 어쩌자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흐읏!”

차악, 착!
가죽채찍이 살결을 찢는 소리가 또렷히 들렸다.
가면을 쓴 남자가 가죽채찍을 들고 사정없이 엎드린 여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지켜올라간 볼기짝에 붉은 줄이 그어졌지만 표정은 아파하기보다 행복해보였다.

「암캐 78호」

여자의 목에 명찰이 찰랑거렸다.
익숙한 목끈이 매어져 있었고. 이어진 목줄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남자가 줄로 바닥을 탁탁 치니, 여자는 몸을 뒹굴여 배를 보였다.

“여긴 조교사와 노예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장소라고 들었어요.”
“…….별의 별 곳도 다 있군.”

조교사가 잘근잘근 아랫배를 밟아주자, 여자 노예는 헐떡이며 남은 소변을 배출한다.
인간의 변태 성욕은 가끔 마족보다 웃돈다고 생각했다.
레실리아의 시선은 꽤 긴 시간동안 그들에게 머물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을 뻗었다.

“좋냐? 야, 좋냐고.”
“읏, 후욱, 후…주인님의 보지가 최곱니다!”
“아앙♡ 이런 막돼먹은 노예 자지같으니라고♡♡”

수치스럽지도 않는지 지나가는 곳마다 야외하드sm조교가 한창이다.
벽을 짚은 여자 조교사의 보지에 남자 노예가 철퍽거리며 사정없이 쑤신다.
안대로 노예의 눈을 가리고 있어, 오로지 느낌으로만 좆질을 했다.
무자비한 자지 기둥에 조교사는 오옷, 거리며 더욱 보란듯이 다리 한쪽을 든다.

푹, 푹, 푹, 푹.
찰팍, 찰팍, 찰팍.

외설적인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렸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레실리아의 발걸음이 살짝 느려졌으나 고개를 젓고는 보폭을 넓힌다.
또 다른 골목을 지나가자 레실리아는 어느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평범한 창녀촌처럼 앞면은 투명한 창이 있었고.
알몸의 여인들이 마네킹처럼 자세를 취하며 이방객을 유혹한다.
거리 밖에는 험악한 인상의 포주가 담배를 뻑뻑 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흘긋 본다.

“……여자 손님은 안받는데. 이색취향이야?”

레실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포주는 거의 사라진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짓이긴다. 발 주변엔 짓밟힌 담배 꽁초가 몇 개 더 있었다.

“붉은 달이 떴네요.”

망토를 여민 레실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선을 따라 옮기던 포주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랜만에 손님이군. 따라와.”

정보상 발텐, 마스터를 찾는 메시지였다.
포주는 입구를 가리는 붉은 휘장을 열어젖혔다.
마중 나오는 창녀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세 명이서 나란히 걸었다.

“저번과 다른 분위기로 변장하셨네요.”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유랑자여야만, 정보를 캐낼 수 있지. 몇 번째 방문인가?”
“저는 두 번째 방문이예요.”
“그럼 주의사항은 듣지 않아도 무방하겠군.”
“아뇨, 진짜 손님은 처음 방문이라서요.”
“흐음? 그렇군.”

맨끝에 선 이카루트를 보자 포주의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 번만 말할테니 잘 들어라. 마스터를 뵌다면 첫 번째, 눈을 깜박이지 마라. 운이 좋지 않으면 눈알이 파일 수 있다. 두 번째, 거짓말은 금물이다. 그 분께선 거짓말을 매우 싫어하신다. 마지막 세 번째, 혹여나 널 시험한다면 즉시 도망쳐라.”

철제문 앞에 당도한 포주는 서늘한 경고를 하였다.
게임 뉴비였을 적, 차라타의 거리에서 읽었던 대사 스크립트가 음성으로 들렸다.
정보상이 어떤 일을 벌일 지 예상하고 있기에 이카루트는 묵묵부답이었다.
반응이 없어 여유로워보이기까지 했다.

“이번 손님은 자신있나보군. 자, 들어가.”

포주는 입꼬리 한 쪽을 비틀며 문을 열어주었다.
레실리아는 땀나는 두 손을 모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인가.”

장검을 맨 남자가 석상에 앉아 있었다.
그 주변은 곧 흘러내릴 것 같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빙 둘러 앉으며 교태를 부렸다.

“창촌으로 이사하고 난 후 첫 손님이로군.”

남자는 뺀질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무릎 위로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 턱을 건다.
고롱거리는 여인의 머리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건방진 시선을 보낸다.

“네가 정보상 발텐인가.”
“그렇다면?”
“웃기는군.”

이카루트는 어쭙잖은 시험에 들 생각이 없었다.
귀찮고 짜증났다.

“가짜가 말이 많다.”

정보상인 척 하는 남자를 향해 오오라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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