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폭탄 선언
83화 폭탄 선언
기척을 완전히 죽인 타르샤는 문 틈새로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마왕과 엘프 왕의 거친 정사 장면에 순간 주춤거렸지만 타르샤는 정신차렸다.
우웅, 우웅.
가슴 안주머니에 진동하는 연락용 구슬.
‘하필 타이밍도…용사한테 연락왔어.’
타르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용사에게 맹세를 올리며 서로 수신망을 주고받았고 가슴 안 주머니에 소중히 넣은 채 항시 이동하였다.
지금 받으면 저 눈치빠른 마왕에게 들킨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마왕을 피해, 타르샤는 살금살금 기척을 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수풀이 우거진 숲 속.
타르샤는 거대한 크기의 나무 뒤로 숨었다.
긴장감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우웅, 뒤적이며 꺼낸 연락용 구슬은 빛을 희미하게 발하고 있었다.
달칵.
[어, 늦게 연락 받았네요.]
천하태평한 용사의 목소리.
알게 모르게 약이 올랐다. 타르샤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엘레이자가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지금 용사는 멸망해가는 세상을 지킬 생각이 없어.’
맹세를 올리고 다시 다크 우드로 복귀한 날부터 용사는 여태껏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느긋히 연락하는 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르샤는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너…”
[이카루트와 만났어요?]
“하, 너! 알고 있었군. 이미 다크 우드에 마왕과 수하가 지배하고 있었어!”
[워워, 진정해요. 어림짐작만 했는데 진짜 이카루트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지금 나는 이카루트인가 뭔가와 동행 중이다. 어쩌다 이상한 엘프에게 꼬여서네 동료를 작위에서 끌어내리려고ㅡ”
[성녀는요?]
“뭐?”
[성녀랑 같이 있는 거 아니였어요?]
타르샤는 조금 당혹스러운듯 입매를 다물었다.
용사는 마치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듯 말했다.
성녀와 마왕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줄 알았거늘, 그녀는 언급하고 있었다.
‘용사, 무슨 꿍꿍이냐.’
타르샤는 지극히 용사가 수상했다.
눈매를 가늘게 지켜뜨고는 연락용 구슬을 노려본다.
사박,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지만.
타르샤는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시견이 좁혀진 상태였다.
“그 배신자와 동행하고 있지만…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
“그리고 애버글로우의 대리 통치자에게 들었다. 성검을 찾고도 봉인을 풀지 않았다고 말야.”
[호오… 대리 통치자라면 엘레이자 장로 님이겠네요. 그 분이 그렇게 확신하던가요?]
“인간계는 멸망해가는 중이다. 그런데 용사인 네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냐!”
사박.
순간 지척에 들렸던 소리가 뚝 끊겼다.
타르샤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시선을 옮긴다.
“조금 수상해서 따라가봤는데…실례가 되었네요.”
성녀 레실리아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는다.
[오랜만에 목소리 듣네. 안녕, 레실리아.]
“……용사님과 연락하고 계셨군요.”
연락용 구슬을 응시하는 눈빛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서늘한 분위기에 압도된 타르샤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레실리아는 아무렇지 않는듯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레티나 님.”
[오, 제대로 불러줘서 고마운데? 신탁을 다시 받았을 때 이후였나. 그때 보고는우리 처음 만나지?]
“푸훗, 용사님께서 여전히 능청스러우시네요.”
레실리아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지만.
눈은 냉랭했다.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를 한다.
대화 내용은 친화력이 가득하고 평온하게 들려도 묘한 압박감은 타르샤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부여받은 삶은 어떤가요. 만족하시나요?”
[아니, 전혀. 레실리아 너도 내 마음을 알잖아.]
“그쵸.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렇기에 저는 당신이 가는 행적을 말리고 싶어요.”
[내가 어떤 길을 갈 줄 알고?]
대화의 흐름은 점점 수상해졌다.
중간에 끼어있는 타르샤에게 알려줄 심산은 없는지 용사와 성녀는 서로만 아는 대화를 지속했다.
“마왕님을 죽일 거잖아요.”
[그건 용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사명이야.]
“그 전에 세계수의 뿌리를 찾는 이유가 뭐죠.”
성녀는 정공법을 썼다.
세계수의 뿌리는 허구의 신물에 불과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세계수의 뿌리를 찾아다니는 용사를 타르샤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멸망을 막을 심산으로 최후의 선택을 하는 건가 싶어, 납득했지만.
알쏭달쏭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나는 신을 증오해. 증오하다못해 환멸하지. 그래서 세계수의 뿌리를 통해 신을 직접 찾아갈 거야.]
“……허상에 사로잡히셨군요.”
[허상? 정말 그렇게 생각해 레실리아?]
웃음기가 서린 용사의 음성이 까칠해졌다.
분위기가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어지자 레실리아의 미간이 뒤틀렸다.
[마왕을 죽이면 세계수의 뿌리를 찾을 수 있어.]
확신이 찬 어조에 레실리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얻은 조건은 마왕의 죽음.
레티나도 이카루트와 똑같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마왕이 맞나 싶더라고. 그래서 나는 시험하는 거야.]
“성검의 봉인을 풀지 않는 것도 그 이유였군요.”
[맞아 나는 꽤나 조심성이 있는 편이거든. 최대한 불안 요소를 배제하려고.]
“……만일 마왕 님을 죽이고 세계수의 뿌리를 찾는다면 어찌할 생각인가요?”
[오, 좋은 질문이야. 레실리아 너에게만 특별히 말해줄게.]
숨을 들이마신 용사는 나지막히 웃음을 흘린다.
[내 몸을 다시 찾을 거야.]
“제가 그날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간 이상, 많은 이들의 사라진 기억을 재생시킬 수 없어요.”
둘 다 이해하기 힘든 말을 주고받는다.
타르샤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레실리아를 흘겨보았다.
성녀는 두 손을 배꼽 근처에 기도하듯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에 피멍이 들 정도로 힘을 준다. 그만큼 레실리아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참고 있었다.
[괜찮아 레실리아.]
“……”
[내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난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니까.]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타르샤는 말없이 입을 쩌억 벌렸다.
용사는 미쳤다.
일상을 이야기하듯 레티나는 평온하게 멸망을 거론하였다.
충격을 받은 타르샤와 달리 레실리아는 기도하던 손을 풀었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허탄스러웠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대적할 수 밖에 없겠군요.”
[레실리아 그거 알아? 우리 예전에 잠깐 만났어. 실론드 마을 지척에서 네가 기절했었지. 너를 위해서 그날 마주한 마왕에게 친히 내 안부까지 전해줬다고?]
“마을 주민들이 몰살 당한 날까지 당신은 제게 친절히 안부를 전해줬군요. 그것 참 감사하네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용사의 장난에도 성녀는 여유로운 웃음을 가진 채 날카롭게 받아쳤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잖아. 레실리아 나중에 기회를 줄게. 그날 다시 생각해봐.]
“당신이 회유를 해도 제 마음은 돌이킬 수 없어요.”
[그럴 줄 알았어. 레실리아 너는 신념만큼은 올곧은 여자였지.]
레티나는 아쉽다는듯 혀를 다셨다.
중간중간 조용한 침묵은 날이 서 있었고. 타르샤는 눈치보며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조만간 또 보자.]
용사는 먼저 작별을 고했다.
연락용 구슬에 빛이 사그라들더니 쩌적, 금이 갔다.
이미 적에게 들켜버린 수신망이었다.
다시 쓸 일이 없다고 판단한 용사는 제멋대로 수신을 끊었다.
경거망동한 용사의 행동에도 타르샤는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일은 주인님께 비밀로 지켜주세요.”
“……”
“부탁드릴게요.”
둘 사이의 그녀가 모르는 비밀이 공유된 것만 알 뿐.
깊게 알기 어려웠다.
아예 허리까지 깊숙이 숙인 레실리아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절실히 표현했다.
‘내 혜안은 틀리지 않았어.’
타르샤는 속을 내려다보는 특이능력,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용사에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감지했어도 감안하고 맹세를 한 이유는 마음의 중심 때문이었다.
용사 레티나는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위해,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아이러니한 말에 아연실색하였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군.’
질서를 중시하는 엘프는 어느 종족보다도 평화를 원했다.
세계의 질서를 깨뜨리고 박살내는 마족을 대적해야 하지만.
동세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일단 지켜보겠다.”
혜안은 성녀를 꿰뚫어보듯 지켜본다.
슬쩍 고개를 든 레실리아의 눈매가 희미하게 곡선을 짓는다.
성녀는 진심을 다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혼란스럽긴 해도 정황상 중립을 서야겠지.’
타르샤는 고개를 주억거릴 뿐. 그 이상의 말은 삼갔다.
***
얼결에 구속 계약이 맺혀진 엘프 왕은 자연스레 직위를 내려놓았다.
지속되는 쾌락,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엘레이자의 말 몇 마디에 함락 당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왕관 수여식.
“현 엘프 왕, 엘레이자 님께 고대 엘프의 영광이 함께 하길!”
엘레이자의 머리 위로 금빛 월계수 관이 씌어졌다.
엘레이자는 멀리서 지켜보던 마왕과 눈을 마주하자 응큼하게 웃는다.
“쯧쯧, 불여시같은 엘프가 왕의 자리에 앉다니.”
“그래도 엘레이자 님과 뜻이 잘 맞잖아요.”
“흥, 그래서 더욱 기분 나쁘단 말이다…”
타르샤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힌다.
성녀의 말이 맞았다.
새로 수여받은 애버글로우의 수장, 엘레이자와 뜻이 잘 맞았다.
종족의 번영과 존속에 대한 방안이 서로 비슷했고.
밤새도록 토의할 정도로 의견이 일치했다.
“갈라진 동족을 합치려면 서로의 생태계를 잘 알아야겠지.
이쪽 엘프 몇몇을 선발하여 다크 우드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 전에, 네 녀석의 부하를 설득시켜야겠지만 말야.”
설득은 즉슨, 전투하겠다는 말이다.
어느새 호전적인 기세를 펼치는 타르샤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환각 마법에 걸린 다크 우드를 구해야만, 동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
‘단단히 뿔이 났군. 아가레스가 매우 좋아겠어.’
이카루트는 부하의 변태 취향을 숨기며 모른 척 하였다.
엘프 종족끼리 서로 합치면 단결이 강해질 것이고 존속될 것이다.
다크 엘프 종족은 전부 처녀를 잃었고.
릴리트가 장난으로 건 음몽에 애버글로우 엘프들은 욕정을 남몰래 호소했다.
‘긍지의 뜻은 변질되었으니 이렇게라도 인간과 교류하면서 지내는 쪽이 훨씬 나을 거야.’
마계의 승리로 인해, 엘프는 멸족당할 위기였다.
고리타분한 관념에 스스로 더욱 가둬 고립되는 것보다 여러 종족과 교류하는 편이 엘프 입장에서는 나을 것이다.
“주인님…올리비아는 어떻게 되었나요?”
“혼자 독방에 있겠지.”
한때 엘프의 왕이었던 올리비아는 독방에 감금되었다.
엘프 궁병 대장의 감시하에 그녀는 홀로 있으며 연락이 끊긴 용사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구속 계약을 맺었으니, 제게 상처입힐 순 없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알비아그 제국 도서관으로 갈 계획이다.”
랜덤으로 나타나는 성검의 위치.
그 중 많이 나타났던 곳이 알비아그 제국 도서관이었다.
메인 히로인 공주 엘리제와 관계를 깊게 맺어가는 중간에 성검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퀘스트가 끼워져 있었다.
‘공주가 나의 또 다른 눈이 되었으니, 인간계의 정세도 알 수 있겠지.’
혼자 딜도 자위하며 부르짖던 공주가 생각났다.
아직도 밤새 자위하고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레실리아가 팔을 당겼다.
“주인님… 차라리 용사를 찾아가는 게 어떨까요?”
팔을 뱀처럼 휘감은 레실리아는 젖가슴을 바싹 붙인다.
눈가가 붉게 휘어지며 애교섞인 미소를 짓는다.
또 앙탈부리는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는 아양에 이카루트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유는?”
“봉인한 성검을 그대로 들고 다닐 수 있잖아요. 제가 아는 용사님이라면, 소지할 것만 같거든요.”
성녀의 말에 일 리가 있었다.
게임 플레이하면, 인벤토리에 여러 무기를 소지하며 들고 갔다.
성검이 있다해도 게이트에 튀어나오는 마물마다 상대법이 다르다.
용사 캐릭터로 플레이할 당시, 마왕을 성검 말고도 다른 무기로도 상대한 전적이 있었고.
고인물이 되자마자 장비템을 하나도 안 갖추고 맨몸으로 상대하기도 했다.
“주인님, 우리 용사님의 행적을 따라가요.”
레실리아의 입가 위로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