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일촉즉발
76화 일촉즉발
“보름달이 예쁘네요.”
엘레이자는 망토자락을 옆으로 여밀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둑한 마(魔)의 그림자가 걷어지며 둥근 달이 떴다.
마계의 하늘에 익숙해진 이카루트는 고작 달 하나가 뜬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흥! 작당모의하기 좋은 날이겠지.”
“후후, 수장님께서 많이 삐치신 것 같네요. 혹시 저와 마왕님의 교합 행위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짐을 뭐, 뭘로 보는 거야! 절대 그런 거 아니다!”
타르샤는 뺨이 붉어진 채 소리를 꽥 질렀고. 엘레이자는 재밌다는듯 입가를 가린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걸음 또한 경쾌하다.
엘레이자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려버린 타르샤는 씩씩거리면서도 뒤따라갔다.
사삭, 사삭.
근처에 하나 둘씩 들리는 발소리.
나무 사이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엿보인다.
타르샤는 귀를 쫑긋이더니 엘레이자를 흘겨본다.
“제대로 작당한 모양이군.”
“애버글로우의 질서가 답답한 건, 저 뿐이 아니에요. 다크 우드의 수장님.”
“하긴 너희 쪽이 유독 폐쇄적이긴 했어.”
인근 마을과 물물교류를 하며 인간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크 우드였다.
외딴 섬처럼 고립된 애버글로우를 지켜보며 수장인 타르샤도 답답하게 느꼈다.
의견 대립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종족 통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현 여왕 올리비아는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거늘 진보적인 엘레이자는 타르샤와 가치관이 비슷했다.
“쯧,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네. 살다살다 질서를 어기고 반란을 일으키는 동족을 도와줄 줄이야.”
“이 모든 건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죠. 두 분 다 고마워요.”
엘레이자는 슬쩍 눈길을 주더니 싱긋 웃는다.
앞만 보고 가던 이카루트는 자연스레 무시했지만. 엘레이자는 그것마저 좋은지 뒷짐을 진 채 졸졸 따라붙는다.
특유의 핑크빛 기류가 불쾌했다. 꼴보기 싫었던 타르샤는 혀를 짧게 찼다.
“엘레이자 님 이쪽으로.”
“올리비아 언니는?”
“성녀와 함께 응접실에 있습니다.”
중심지에 집결한 엘프 궁병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이자의 뒤로 그림자에 숨어 있었던 엘프 궁병들이 튀어나왔고.
엘프 궁병 대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주먹을 오른쪽 심장부근에 갖다댄다.
왕에게 보이는 예우였다.
‘현 여왕에게서 완전히 돌아섰군.’
타르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엘프 궁병들도 전부 예우를 갖췄고. 그제야 상황이 실감되었다.
애버글로우 숲의 엘프 종족은 오랫동안 인내하고 참아왔던 것이다.
현 여왕 아래에서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자 마침내 반기를 들어섰다.
‘우리가 여길 오지 않았더라도 반란을 일으킬 기세지만 타이밍도 좋아.’
하필 전쟁에서 승리한 마왕과 함께 애버글로우로 들어왔다.
반란을 준비 중이었던 애버글로우에겐 큰 기회였고. 반란의 주축이었던 엘레이자는 마왕의 패를 잡았다.
있을지 모를 세계수의 뿌리를 찾으러 온 건데 하룻밤 사이로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파노라마처럼 휙휙 지나가는 짧은 기억을 떠올리고는 타르샤는 머리를 짚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모든 일이 네 녀석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타르샤는 실눈으로 지켜떴다.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에 이카루트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럼 그렇지. 네 놈이 뭘 알겠냐 싶다만….”
타르샤는 한숨을 쉬었다.
이에 이카루트는 모른 척하며 한곳을 바라본다.
중심지에서 북방향.
커다란 나무는 여왕을 위한 휴식처이자 응접실이었다.
“전 대의 용사 렉스가 죽고 난 후, 올리비아 언니는 방황하였어요.”
언제부턴가 엘레이자가 곁에 있었다.
표정은 무언가 회상하듯 추적추적 젖어갔다.
“언니의 방황은 애버글로우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새로운 용사가 나타난 이후로 더욱 심각해졌어요. 언니가 자리를 비울 무렵, 장로들과 모의한 끝에 저는 마계를 찾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렸죠.”
미간이 좁혀지며 종잇장처럼 일순 일그러졌지만.
힘주던 눈가가 풀리는 동시에 긴장한 어깨도 함께 누그러졌다.
“운이 좋게도 마왕님께서 직접 와주셨네요.”
엘레이자는 미소를 지었다.
마왕을 바라보는 눈빛은 처음 주인을 만난 개처럼 기뻐보였다.
쾅!
엘레이자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응접실 문이 부서졌다.
산산조각난 문 틈새로 여러 다발의 화살촉이 잽싸게 비집고 나왔다.
파바밧!
마왕과 두 엘프가 있는 근처로 화살촉이 꽂히자, 돌풍이 몰아쳤다.
흙먼지가 일어나며 그들을 냅다 삼켰다.
“엘레이자 님!”
엘프 궁병 대장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의 세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회오리처럼 불어 올라가는 바람. 바람결은 잘게 부순 칼날처럼 따끔거렸다.
“궁병대 1대대장 슈라이넬. 오랫동안 내 곁에 보좌해준 성의를 생각하여 자비를 베풀겠다.”
서늘한 음성이 들리자 궁병 대장, 슈라이넬은 흠칫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고대 엘프 종족이 썼다는 유물. 주군은 빗나가지 않는 활 페일 노트를 들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사태에 대해 당장 해명해라.”
페일 노트는 대대로 엘프 왕이 쓰는 도구였다.
은색의 잎사귀로 얽힌 활대에 달빛을 받아 더욱 시퍼렇게 빛났고.
언제라도 쏠 것처럼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줄이 빳빳해지자 궁병 대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엘프 궁병들도 납작 엎드려, 동태를 살폈다.
“해명할 것도 없어요. 보고 계신 짐작대로니까요.”
“……엘레이자….”
한 차례의 세찬 폭풍이 가라앉았다.
빽빽히 둘러싼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엘레이자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이들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쓸데없는 일을 벌인 건 너였구나. 마왕의 사탕발린 말에 넘어간 거냐?”
“후후, 언니야말로 용사의 사탕발린 말에 넘어간 게 아닐까요?”
“엘레이자!!”
올리비아의 흰자에 핏발이 섰다.
호흡이 일순 거칠어졌고 활시위를 당겨 동생에게 향했다.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쏠 기세였다.
“너랑 농담따먹기 하자고 말한 게 아니다. 마왕, 네 녀석 때문에…네 녀석 때문에!!”
활시위는 옆으로 옮겼다.
용사가 언급되면 올리비아의 감정이 파도처럼 마구 요동쳤다.
“전쟁에서 네 놈이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마왕 네 녀석이 없었다면! 지금쯤 레티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았겠지! 이게 죄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분노가 넘실거리며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올리비아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탓에 궁병 대장은 눈뜨기가 힘들었다.
근처에 몰래 주둔해있던 엘프 궁병들도 똑같이 최대한 몸을 엎드렸다.
“올리비아 언니 이제 그만하세요.”
“닥쳐라! 엘레이자! 감히 날 배신해? 네가 마왕의 편에 들어가면 어쩌자는 거냐!”
“세계를 구할 마음이 없는 용사에게 어찌 희망이 있겠어요.”
그 순간 올리비아가 주춤 물러섰다.
일순 바람이 멈췄고 팽팽한 활이 느슨해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엘레이자는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찾는다한들 용사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쓰일 뿐이죠. 인간계는 정복당했고 벌써 일어난 결과를 바꿀 순 없어요.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 과거로 가지 않는 이상, 우리에겐 희망이 없어요.”
“아냐…. 레티나는 어떤 수를 써서도 세상을 지킬 거야…….”
“용사님에게 집착하지 마세요.”
엘레이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 걸음 내딛자 올리비아가 물러섰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서로 한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전쟁의 승리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 부로 마왕님께 복종을 맹세했고 종족의 존속과 평화를 담보로 용사 잡는 데에 협력할 거예요.”
“엘레이자…!!”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왕위를 찬탈할 계획입니다.”
엘레이자가 손바닥을 펼치자 미리 대기하던 엘프 궁병대가 사방을 둘러싼다.
엘프 궁병들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저를 믿고 따르던 엘프 종족이 단숨에 돌변했다.
특히나 쌍둥이 동생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컸다.
“엘레이자…. 너 진심이구나.”
“저는 항상 진심이었어요. 올리비아 언니.”
올리비아의 마음은 와장창 깨지고 부서졌다.
조용하고 차갑던 자신과 달리 동생은 똑부러지고 당당했다.
누구보다도 종족의 미래를 생각했고 마음도 같아, 올리비아는 알게모르게 동생을 의지했지만.
평행선을 이루며 함께 뜻을 맞췄던 엘레이자는 일찌감찌 돌아섰다.
“언니가 믿고 있는 신념대로 가다간 엘프 종족은 곧 패망의 길로 들어서겠죠.”
“…… 너희들….”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올리비아는 떨리는 동공을 겨우 잡고 시선을 옮겼다.
경계를 하는 궁병대원들 그리고 충성을 맹세했던 궁병 대장이 가까운 지척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모두 엘프 왕을 적대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
올리비아는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위엄을 지키며 조용한 모습을 보이던 엘프 왕이었다.
고삐가 풀린듯 올리비아는 눈물까지 보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하아…그래, 전세는 마왕에게 완전히 기울어졌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고개를 숙이느라 머릿결이 양옆으로 쏟아졌다.
올리비아는 한쪽 귀 뒤로 머릿결을 꽂으며 소름끼치게 웃는다.
“용사님이 이기면 모든 게 끝나.”
웃음에 광기가 서렸다.
이윽고 뒷걸음치는 올리비아를 바싹 경계하며 다들 공격 태세를 풀지 않았다.
“크흐읏…!”
“성녀, 당신은 이 사태를 관조하고 있겠군요.”
“……주인님….”
레실리아의 머릿결을 우악스럽게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힘없이 쓰러진 레실리아는 처연히 고개를 들었다.
왼쪽 뺨이 피멍으로 가득차, 퉁퉁 부어올랐다.
“용사님의 추측대로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으윽…!”
올리비아는 등허리에 발을 올리고는 잘근잘근 밟아주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자 올리비아의 표정은 한층 경멸스럽게 변했다.
다시 앞머리를 붙잡아 성녀의 목에 날카로운 활촉을 들이민다.
당장이라도 꿰뚫을듯 선단이 허연 목덜미에 스쳤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봐! 당장 그 활촉을 내려놔!”
“다크 우드의 수장까지 마왕의 편이 들다니……. 참 통탄스럽습니다.”
“제기랄!”
타르샤는 쌍검을 뽑아들었지만 어쩔 줄 몰랐다.
성녀의 목에 피가 쏟아질수록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왕님 어떻게 할까요?”
“……기다려라.”
엘레이자는 차분히 수신호를 주었다.
대치하고 있던 궁병대는 활시위를 끝까지 놓지 않고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마왕이 덤벼들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무대를 구경하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주인님…….도와주세요….”
레실리아는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은 채 사정하고 있었다.
애달프고 구슬픈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누구라도 성녀를 위해 나서서 구해줄 것이다.
“응석부리지 마라.”
하지만 이카루트는 최애캐를 알고 있었다.
전투하는 방식과 역할이 달라도 성녀는 마왕과 동등한 힘을 지녔고.
적어도 제 몸을 보호할 실력은 있었다.
“지금 이쪽으로 온다면 그토록 원하던 자지를 물려주지.”
“!”
“이, 이 미친 놈이!!”
마왕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음탕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경악을 금치못한 타르샤는 얼굴을 붉힌 채 소리를 빽 질렀고.
올리비아를 포함한 엘프들은 벙 찐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실리아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더니, 슬그머니 내리깐다.
수줍은 홍조가 유독 눈에 띈다.
그 순간 허연 빛덩어리가 팟! 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