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엘프 왕의 의구심
75화 엘프 왕의 의구심
“재갈과 안대를 풀어라.”
“읏…!”
가려진 안대가 벗겨지자, 위엄있게 앉은 올리비아가 있었다.
눈짓하니 옆에 있던 궁병대장이 거칠게 재갈을 뺐다.
까슬한 재갈이 여린 입가를 쓸었고. 입술은 퉁퉁 부어올랐다.
“성녀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네요 올리비아.”
눈을 지켜뜬 레실리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 누구도 무례하게 성녀를 대하지 않았다.
마왕성에서도 억지로 끌려다니지 않았고 저를 막대할 자는 마왕 한정이었다.
“다짜고짜 포박하고는 경거망동하게 구는 행실은 대체 어디서 배우셨나요.”
“배신자에게 그런 예우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올리비아는 턱을 대며 새초롬히 내려다본다.
눈처럼 새하얀 성복을 입고 다니며 누구에게나 자애를 베풀었던 성녀.
전쟁 이후, 마왕 직속 노예로서 용사 찾기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입고 있는 회색 옷처럼 레실리아는 점차 검게 물들었다.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성녀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확신하기엔 의문이 많았다.
올리비아는 손을 휘저었다.
엘프 궁병들과 시녀들은 전부 고개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기척없이 발걸음을 죽이며 빠져나가는 공기처럼 퇴장한다.
레실리아는 힐끔 곁눈질을 하며 상황을 살폈고.
이내 단 둘이 남게 되었다.
미어캣마냥 경계하는 성녀 모습에 올리비아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본래 엘프는 의심이 많은 종족입니다. 갑자기 마계로 돌아선 당신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바로 죽이지 않고 유예했던 건가요.”
레실리아는 쉽게 말해줄 생각이 없는듯 대답을 교묘하게 피했다.
빤히 주시하던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었다.
척추를 꼿꼿히 펴더니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맞부딪치는 눈빛은 파앗, 횃불처럼 튀어올랐다.
이내 정적을 깬 이는 올리비아였다.
“부활한 렉스를 만났던 사실을 왜 원정대에 숨겼습니까.”
마음 한켠에 항상 가졌던 의문을 던졌다.
렉스 에티아는 성검을 찾던 도중에 마왕에게 살해당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인간계는 통곡하였다.
그 이후로 한동안 신탁이 나타나질 않았다.
마족들의 강세가 들끓었고 인간들은 초조하게 신탁을 기다렸다.
이 모든 사태를 성녀는 조용히 관전하였다.
새로 부활한 용사를 만나, 신탁을 내렸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계가 승리하고서야 대사제관이 공표하였다.
그리고 각자 자리에 돌아간 원정대원을 찾아가, 렉스 에티아가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제일 먼저 그를 찾으러 움직인 건 올리비아였다.
“다른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한 질문에 답해주세요.”
“숨긴 게 아니었어요. 용사님이 절대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거든요.”
올리비아는 벌떡 일어섰다.
분위기가 왠지 날이 섰으며 느리게 오는 발걸음에 무언의 화가 실렸다.
“올리비아 정말이에요.”
레실리아는 나지막히 말했다.
어느새 올리비아는 손톱 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힐끔 보던 레실리아는 다시 눈을 들었다.
올리비아의 꿈틀대는 미간은 언제라도 일그러질 것만 같다.
“당신은 세상을 수호하는 용사의 역할과 나누지 않았습니까?”
“…….”
“제가 알기론 성녀 또한 인간들을 지키고 수호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의 관망이 전쟁의 패망을 이끌었습니다.”
부득, 잇새가 갈렸다.
레실리아는 반절 눈을 내리깔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무심하고 방관하는 반응에 올리비아는 더욱 분노하였다.
“진정 성녀가 맞습니까? 전쟁에 승리해야만 당신과 용사님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살아남아요.”
“…….”
“분하지만 엘프 종족의 미래도 달려 있죠. 용사님께선 분명 부활한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 원정대에 알려, 용사님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야죠.”
레실리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조용히 한곳을 쳐다보며 입매를 굳혔다.
화가 난 올리비아는 성녀의 멱살을 잡았다.
으읏, 고통어린 신음을 흘리자 우악스럽게 위로 올렸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건가요. 말을, 말을 하라고!”
올리비아는 답답한듯 멱살을 잡은 채 마구 흔든다.
손목이 묶여있는터라 성녀는 아무 저항도 못했다.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말간 청안에 올리비아의 분개한 얼굴이 떠오른다.
“이러니까 말하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멱살잡힌 옷가지는 우글거린다.
레실리아는 핏발 선 눈과 마주하며 숨을 길게 내쉰다.
숨소리에 진정한듯 올리비아의 손힘이 점차 풀린다.
“레티나는…. 새로 부여받은 삶에 허무함을 느꼈어요. 용사로 살아갈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예요. 레티나는 죽어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겪었죠.”
은유적인 표현에 올리비아는 멱살을 놓았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대체 무엇이길래.’
레티나도 언급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겪었다며, 원정대의 방향을 전과 달리하겠다고 말했다.
종교 관련된 용어는 심오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올리비아는 위엄있게 내려다보며 턱을 지켜들었다.
“자세히 풀어서 말하세요.”
“어떤 선택을 하든, 가이아 님께서 정해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다시 태어나도 똑같아요. 레티나는 절대적인 이치를 비로소 알아버린 거죠.”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올리비아는 다시 물어보고자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성녀의 표정은 왠지 허망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듯 눈을 깜박인다.
“회귀(回歸)라고 아시나요?”
올리비아는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에 짜증났기 때문이다.
대사제관도 그렇고, 성녀도 그렇고.
종교직책을 가진 인간들은 하나같이 생경하고 이상한 말을 주절거린다.
“아, 당신에겐 생소하겠네요.
태초의 세계는 용사님께 일어난 현상을 회귀라고 부르기도 한대요.”
레실리아는 처연하게 웃었다.
마치 누군가를 생각하며 말하는 것 같았다.
***
동일한 시각.
초조한듯 타르샤는 발끝을 탁탁 움직였다.
천막 앞에 보초를 서며, 언제 들이닥치지 모를 엘프 궁병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후웅♡ 흐으우…하앙♡”
“하, 완전 좋아죽네. 아주!”
타르샤는 짜증을 냈다.
늦바람 들면 무섭다더니.
발정난 엘프는 자지맛을 알아버린 탓에 마왕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정력이 강한 이카루트 또한 편하게 엘프의 쫄깃한 보지에 좆으로 마구 타박해주었고.
덕분에 타르샤는 외로이 바깥을 지켰다.
“하우우♡ 마왕님 거대 자지에 또 갈 것 같아앗♡”
“……제기랄.”
팟팟팟, 물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타르샤는 결국 귀를 막고 천막 앞에 쭈그려앉았다.
무릎을 세워 앉으니 팬티가 음부에 찰싹 붙었다.
“으읏….”
즙이 흘러넘쳐, 보지가 맞닿은 팬티 중앙부분이 금세 젖었다.
기분나쁜 축축함에 타르샤는 짧게 욕을 뱉었다.
제자리에 다시 앉고는 허벅지를 살짝 벌린다.
수상할 정도로 주위가 조용하다.
타르샤는 가을 바람을 날려, 고요한 밤공기를 가른다.
바람 한 줄기는 성녀의 기척을 읽으며 따라갔고.
팔짱을 낀 타르샤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사락.
“성녀는 중심지에 있다.”
“……뭐야, 벌써 찾은 게냐.”
괜히 바람을 날렸네.
타르샤는 툭툭 엉덩이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천막 내부를 슬그머니 살펴보고는 얼굴을 확 찌푸린다.
엘레이자의 헐벗은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입가와 음부 쪽은 정액범벅이었으며 무릎과 등허리는 흙먼지가 가득 묻었다.
아직도 쾌감이 가시지 않았는듯 몸을 흠칫거린다.
그에 반해 이카루트는 깔끔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한 섹스한 마족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봐, 너 옷은 어떻게 할 거냐.”
“후웃……. 다크 우드의 수장님께 천박한 꼴을 보여버렸네요….”
엘레이자는 심호흡을 하며 젖가슴을 가렸다.
구석진 곳에 버려진 원피스. 타액과 흙투성이가 되어 도저히 입을 수 없었다.
“입어라.”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엘레이자의 정수리 위로 묵직한 천이 떨어졌다.
엘레이자는 느리게 눈을 끔벅인다.
떨어지기 직전의 천을 잡아채자, 나머지 길다란 천조각이 흙바닥에 쓸렸다.
펄럭, 제대로 펼치니 익숙한 망토였다.
“이 옷, 마왕님이 입었던 망토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부터 성녀를 구하러 갈 것이다. 여왕직을 대리로 맡은 엘프가 추태를 보이면 소란이 나겠지.”
“……푸훗, 글쎄요. 저는 상관 없는데 말이죠.”
엘레이자는 쿠션을 끌어안듯 망토를 안았다.
코로 냄새를 맡는듯 잠시 얼굴을 묻는다.
이내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는 휘익 어깨를 두른다.
“저도 함께 갈게요.”
“그 꼴로 어딜 같이 가겠다는 거냐?”
타르샤는 마음에 안든다는듯 팔짱을 꼈다.
엘레이자는 알몸 위로 망토만 걸쳤다.
망토자락이 질질 끌렸고. 소매가 길어 손가락이 빼꼼 튀어나왔다.
“다른 엘프들이 네 꼴을 보면 수상하게 느낄 것이다.”
“괜찮아요. 저만 올리비아 언니에게 불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엘레이자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다.
허나 비틀어진 입꼬리 끝은 숨길 수 없었다.
“미리 모의한 건가.”
“후후, 언니를 뺀 엘프들의 의견은 동일했어요. 종족의 미래는 승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이죠.”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냐?”
타르샤는 말에 수상함을 감지했다.
엘레이자와 교미를 맺으면서 들었던 것이기에 이카루트는 큰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가면 엘프는 멸족해요. 동족 수장님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그, 그럼 네 녀석, 설마 마족 놈들의 노예가 될 생각이냐?!”
“수장님. 전쟁의 승리자는 인간계가 아니랍니다.”
멸족 루트로 진행중이었고. 엘레이자는 이를 금방 예측하였다.
그리고 확연히 달라진 이번 대의 용사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마음을 크게 먹은 엘레이자는 마왕에게 복종하여, 존속을 유지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 뿐 아니라, 모든 엘프도 현재 상황에 이성적인 결론을 지었다.
단 올리비아만 빼고 말이다.
“마침 기회가 되었네요. 이 때를 노려, 저는 왕위를 찬탈할 생각이에요.”
“……다른 엘프들은 아는 사실인가.”
“후후, 제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입을 맞췄답니다.”
전부 계획된 거였군.
엘프의 계략에 꼬인 셈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 이카루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엘프 궁병이 많이 없었던 것도 이제야 설명되는군. 하, 굉장히 뻔뻔하기 짝이 없어!”
타르샤는 일부러 찾아왔다.
급작스레 움직이는 다크 엘프 왕을 아무도 잡지 않고, 방관하였다.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두려운 걱정이 앞섰다.
마왕이 사고칠까봐 겁이 났던 탓에 바삐 자리를 떴다.
천막 주변에 주둔한 엘프 궁병의 수가 몇 십명이나 되었지만.
올리비아가 다짜고짜 성녀를 데리고 간 이후로 몇몇 엘프 궁병들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벗어났다.
‘젠장 여기서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타르샤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지금 절 도와주시면 올리비아 언니의 처녀도 따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요?”
“아주 미친 년이네!”
동족이 뭐라든간에 괘념치 않는듯 엘레이자는 마왕의 팔을 잡았다.
기쁘게 웃는 눈매는 또 다른 흥분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