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애버글로우 습격(2)
72화 애버글로우 습격(2)
레실리아는 실눈을 떴다.
고요한 공기가 느껴지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키에에엑!”
콰앙!
화가 잔뜩 난 스콜피온은 사정없이 전갈 꼬리로 내려쳤다.
단단한 그림자 장막은 공격 데미지를 흡수하였고. 꼬리 공격은 전부 무효화가 되었다.
고위급 마물치고는 지능이 낮았다. 성이 난듯 공격 대상은 이카루트로 바뀌어졌으며 그를 죽이기 위해, 독안개를 내뿜는다.
“독안개다! 모두 대피해라!”
음산하고 지독한 안개가 땅에 깔린다. 황급히 숨을 참은 타르샤는 거리를 벌렸지만.
독안개의 속도는 어마무시하게 다가와, 이불처럼 온 지면을 깔았다.
“으윽…숨이…!”
“고통스러워…흐으읏…”
저 만치 도망가던 엘프들은 갑자기 숨막히는 고통에 털썩 주저앉았고.
숨을 참고 버티던 궁병대도 비틀비틀 몸을 일어서지만 이내 힘이 풀린다.
타르샤는 황급히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콱, 이빨 자국을 내어 흐릿한 정신을 차렸다.
검 한쪽을 바닥에 찍고 전투 태세 풀지 않았다.
“인간 언니, 먼저 도망치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성녀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엘프는 고통스러운듯 쌕쌕거린다.
저를 도와준 은인이라도 도망치길 바라는 마음에 어린 엘프는 씨익 웃는다.
시퍼렇게 뜬 입술은 바싹 말랐고. 중독된 흰자에 핏발이 선다.
콜록, 잔기침을 하자 검은 핏방울이 튀었다.
“……배신자라고 들을지언정, 저는 누군가를 수호해야 할 사명이 있어요. ”
레실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심장 소리는 꺼져가기 직전이었다.
레실리아는 죽어가는 어린 엘프의 턱을 세우고는 이마를 대었다.
파앗.
이마 중앙에 성스러운 빛이 떠오른다.
빛덩어리가 광채를 이루며 커다란 돔을 이룬다.
엄청난 성력이 파도처럼 흩날렸고. 애버글로우 숲속을 덮었다.
독안개가 서서히 중화되면서 마물의 숨통을 콱 옥죄었다.
스콜피온은 괴롭게 울부짖으며 성력 앞에서 몸부림을 친다.
“키에에…키에엑!”
“이쪽이다!”
이때 공격할 타이밍이었다.
촤아악, 타르샤는 딱딱한 견갑에 쇠꼬챙이처럼 쌍검을 박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훅 끼치며, 칼날에 힘을 더한다. 날카롭게 내려꽂자 스콜피온이 괴성을 지른다.
커다란 몸뚱아리를 좌우로 흔들며 전갈 꼬리를 마구 내려친다.
기기긱, 기긱!
고통스러운듯 바닥을 꼬리로 냅다 긁어대더니, 공격 대상을 바꿨다.
“키에엑!”
위아래로 늘어난 전갈 꼬리.
끝을 선단처럼 날카롭게 세우고는 빠르게 돌진한다.
레실리아는 성모 마리아처럼 어린 엘프를 안아든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애버글로우 숲속을 정화한다고 힘의 중심지가 약해진 상태였다.
“성녀! 빨리 도망쳐!”
미간을 일그러뜨린 타르샤는 여분의 단검을 꺼내, 급히 던졌다.
바람을 실어 던졌지만 타격조차 없었다.
레실리아는 피하지도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겸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이런, 제기랄!”
욕지기가 저절로 나왔다.
타르샤는 몸을 내던지며 성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속도는 스콜피온 쪽이 우세했다.
전갈 꼬리는 머리를 두동강 내듯 끝을 빳빳하게 세웠다.
서걱.
“하찮은 놈이로군.”
낮게 드리운 음성에 스콜피온의 검은 눈알이 천천히 움직인다.
언제부턴가 이카루트는 옆에 서 있었고. 한손엔 검고 커다란 대검이 들려 있었다.
콰콰쾅!
전갈 꼬리와 함께 스콜피온의 육중한 몸이 조각조각 찢겨졌다.
새까만 피가 분출되며 마기가 드글드글 뒤끓었고.
근처에 머무르던 검은 오오라가 공명하며 검신에 달라붙었다.
물안개처럼 흩날리는 마기는 매우 어두웠다.
‘저 검이 말로만 듣던 마검(魔劍)이였어.’
타르샤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마물을 쓰러뜨렸다. 게이트에서 나온 마물은 돌연변이종이 많아, 엘프 종족이 전부 달라붙어야 했다.
일대일 대결에서도 이카루트는 마검을 쓰지 않았다. 만약 마검을 썼다면 몇 초내로 끝났을 것이다.
요동치는 마검에 타르샤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살려주셔서 감, 사합니다….”
성녀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어린 엘프가 눈을 떴다.
꺼져가던 잿더미처럼 맹독에 죽어가던 생명체는 기적적으로 숨을 쉬었다.
어린 엘프는 이카루트와 레실리아를 번갈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실리아를 응시한다.
“……상처는 없는 것 같군.”
“아, 아…. 네 주인님….”
레실리아는 흐트러진 머릿결을 귀 뒤로 조심스레 넘긴다.
드러난 뺨에 낯선 홍조가 끼어 있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타르샤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고. 어린 엘프는 말똥말똥 눈을 뜬 채 가만히 레실리아를 올려다본다.
“크에엑…키익….”
죽은 줄 알았던 스콜피온이 피를 토한다.
허옇게 까뒤집힌 눈알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비상이 걸렸다.
타르샤는 등에 꽂힌 쌍검을 뽑아버리고는 급히 뒤로 물러선다.
칫, 타르샤는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피가 묻은 칼날이 연기를 내며 부식하였다.
“회복이 덜 된 이들은 어서 피해라!”
타르샤는 궁병대장을 일으켜세우며, 대신 지시를 내렸다.
돌연변이종 마물은 지성이 낮지만 기본적으로 맷집이 쎘다.
탄탄한 견갑을 완전히 잘라냈어도 스콜피온의 목숨은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잘려진 머리와 꼬리가 꿈틀대자 어린 엘프는 징그러운듯 성녀의 품에 안긴다.
레실리아는 괜찮다는듯 엘프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며 흩어진 성력을 일으켰다.
“키에에엑!”
스콜피온의 눈은 정확히 레실리아에게 꽂혀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던 찰나.
퉁!
매끄러운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차갑고 이질적인 바람이 느껴졌고. 익숙한 기운에 타르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엑! 키엑! 키이이…….”
ㅡ 쿵
스콜피온의 미간이 망치로 때린듯 부서진다.
뚝배기가 깨진 스콜피온은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저벅저벅. 햇빛을 등지고 선 엘프가 고고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성녀, 그 아이를 놓으세요.”
“……올리비아.”
“쓸데없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서 품에 있는 아이를 놓으세요.”
월계수 관이 번쩍 빛났다.
그림자가 아늑히 드리워진 얼굴에 시퍼런 안광이 보였다.
꽈악, 활시위가 뒤로 당겨지자 레실리아는 엘프의 머리를 살짝 쓰담어주고는 내려놓았다.
“가, 가지 마세요…!”
어린 엘프는 무서운듯 성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다급한 손길은 벌벌 떨렸고. 레실리아는 순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으나 손을 잡고 물렸다.
“당신들이 왜 이곳에 온 건지 묻고 싶군요.”
“올리비아 언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 분들은 우릴 구해주셨어요!”
“엘레이자. 네멋대로 방문을 허락했구나.”
올리비아의 눈매를 지켜뜨며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엘레이자는 소리없이 입을 벙긋이다가 주먹을 쥔다.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몰아치자 나뭇잎이 잘게 흔들거린다.
“용사님께서 애버글로우 숲속에 마족들이 찾아올 수 있다고 주의를 주셨다. 더욱 경계를 견고하게 하여 조심하고자 몇 번이나 언질을 했건만…….”
“올리비아 언니! 그렇다고 언제까지 타종족을 배척할 건가요!”
“내가 언제 타종족을 배척한다고 말했지? 마왕이 쳐들어올 수 있으니 숲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아뇨, 언니는 마왕이 아닌 평범한 인간들도 똑같이 의심했어요. 숲에 계속 나가지 않는다면 죽이라고 명하지 않았나요?”
엘레이자는 한걸음 움직이며 답답한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소금 사막 가운데에 계속 머무를 건가요? 마족과의 전쟁에선 이미 패배했고. 중간계의 질서는 변했어요.
이곳에 있다가는 엘프 종족이 사라질 수 있어요.”
엘레이자는 한사코 물러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졌다.
“방금 죽인 마물을 보셨잖아요. 올리비아 언니, 우리는 마족에게 협력해야 해요. 언제까지 전 대 용사님의 그림자만 보고 따라가실 건가요!”
“닥쳐! 렉스는 죽지 않았어!”
올리비아는 분노에 치닫았다.
렉스 에티아는 부활했다. 레티나가 된 용사는 다시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왕보다 빨리 성검을 찾았고. 신물 세계수의 뿌리로 인간계의 질서를 잡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집착에 가까운 그릇된 충성심은 엘프 왕의 시견을 좁게 만들었다.
“엘레이자, 내가 애버글로우 숲속의 왕이다.”
올리비아는 거만하게 턱을 올렸다.
위엄서린 바람이 여기저기서 불어오자 모든 엘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같이 한쪽 무릎을 조아리며 경배의 자세를 취한다.
“저 자들을 잡아라.”
“네.”
“잠깐 멈춰, 난 다크 우드에서 왔다. 동족 수장으로서 엘프 왕 올리비아에게 대면을 요청하러…으윽!”
궁병대장은 타르샤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손목을 제압한다.
무자비하게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지만. 마왕과 성녀는 가만히 밧줄에 묶였다.
“이러지 마세요! 인간 언니는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치료받았던 어린 엘프가 앞을 가로막았다. 궁병대원들이 흠칫거리자 바들바들 떨면서도 성녀를 지키려고 애쓴다.
올리비아는 무표정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겨, 어린 엘프의 이마 쪽을 향한다.
레실리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자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어린 소녀여, 이 이상 왕명을 듣지 않으면 너를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흐으…….시, 싫어요! 인간 언니는 저를 살려줬단 말이에요!”
활시위가 뒤로 당겨질수록 바람이 거칠게 분다.
두려움을 느낀 어린 엘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를 말없이 쳐다보던 엘레이자는 무력감을 느꼈다.
‘올리비아 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어.’
아랫입술에 피가 나도록 짓이긴다.
조용히 눈길을 주던 이카루트는 다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끌고 가.”
“흐윽, 흐아앙! 저리 가! 싫어! 인간 언니한테 그러지 마요!”
올리비아는 겨우 자비를 베풀었다.
궁병대원은 가냘픈 팔을 억지로 끌었고. 어린 엘프는 울고불며 성녀를 계속 찾았다.
저 만치 목놓아 우는 울음소리에 레실리아는 그만 고개를 떨군다.
“내일 사형장을 열 것이다.”
“네.”
“뭐, 뭐? 이봐!”
“다크 우드의 수장이라고 했나요? 마왕과 함께 있는 당신에게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나, 몇 없는 동족입니다. 결례를 용서하시고, 면담요청에 응하겠습니다.”
올리비아의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타르샤는 기가 막혔다.
여왕의 눈짓을 따라 궁병대장은 손목을 풀었다.
손목을 쓰다듬으니,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짙은 멍이 들었다.
“저들은 내일 아침, 즉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본보기로 보여줘야겠지.”
올리비아는 분기서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특수 성물로 만든 수갑까지 채워졌다.
오오라를 흘러보내자, 수갑이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꽤 골치아픈 일이 생겼군.’
속으로 걱정하는 것치고는 이카루트의 표정은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