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애버글로우 습격(1) (71/98)



〈 71화 〉애버글로우 습격(1)

71화 애버글로우 습격(1)

엘레이자와의 좌담이 끝났다.

“하, 정말 헛되고도 헛되군.”

천막에 나온 타르샤는 깊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같은 마기가 드리우자 뜨거운 햇볕을 가로막았다.
본래 높고 청명한 푸른 색조차 탁하게 물들었다.

“역시 인간 종족은 믿을 수 없어.”
“나도 동의한다.”
“하! 네 녀석은 더더욱 믿을 수가 있어야지!”

타르샤는 코웃음을 쳤다.
어느새 다가온 이카루트를 흘끔 보고는 미간을 짚었다.
엘프의 맹세는 단순하지 않았다.

‘목숨을 다해 약속을 이행하고 지키는 것.’

엘프 종족만 쓰는 언령이 새겨져, 함부로 발설하거나 실천하지 않으면 즉시 심장을 옥죄었다.

‘용사,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갑자기 다크 우드에 찾아온 용사 레티나.
세계수의 뿌리에 대해 물어보더니 다짜고짜 중앙 나무를 잘랐다.

‘아, 미안. 여기에 뿌리가 있는 줄 알았어.’

화사하게 웃으면서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으나, 용사의 뛰어난 실력 앞에 결국 패배했다.

타르샤는 자기가 아는 세계수 관련된 설화를 전부 알려주었고.
그녀는 망해가는 세상에 종족을 지켜주겠다는 조건하에 엘프의 맹세를 받아냈다.

‘원정대는 왜 지금 세상을 내버려두는 거지?’

멸망하기 직전의 세계.
세상이 이대로 멸망하면 인간도 엘프도 역사 뒷편으로 사라진다.
성검을 찾고도, 마왕과 싸우기는커녕 속편하게 설화나 찾고 있으니 용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용사의 목적은 확실히 알았군.”
“그 놈의 세계수의 뿌리 때문인 거냐?”
“그래.”
“이런, 제기랄!”

타르샤는 참지 못하고 짜증섞인 욕을 뱉었다.
연거푸 얼굴을 쓸더니, 팔꿈치로 무릎을 대었다.
이내 뚱한 표정으로 냅다 입을 연다.

“네 녀석은 왜 다크 우드에 멋대로 쳐들어온 거냐.”
“내 목적은 하나다. 성검을 찾아 부수는 거지.”
“그래서 다크 우드를 그딴 식으로 만든 거고?”
“아가레스의 고약한 취미다. 나는 그저 성검이 나타날 장소에 주둔하라는 명만 내렸다.”
“이, 변태 녀석이…!!”

순결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다크 우드의 엘프 종족을 쾌락으로 지배하였다.
엘프 여성의 긍지에 직결된 문제였다.
마족이나, 인간이나 똑같았다.
타르샤는 육체 세뇌만 풀리다면 언제든지 아가레스의 목숨을 노릴 각오를 다졌다.

‘아가레스의 지독한 인형놀이에 당하겠군.’

안타깝게도 아가레스는 야생고양이같은 여자를 놀잇감으로 쓴다.
너무 순종적이면 재미없다고 죽이지만.
앙칼진 반응을 보이면 끝까지 타락시키는 재미가 있다며 괴롭힌다.

마왕의 후보에 들었던 마족인지라, 엘프 왕 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르샤는 갈갈이 날뛴다.

“아가레스가 있어야, 네 종족의 명이 조금이나마 유지될 것이다.”
“닥쳐라! 네 놈 따위가 무엄하다! 흐읏?!”

이카루트는 뾰족한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엘프 종족은 귀가 약점이다.
나리엘과 타르샤를 포함한 다크 엘프과 교미하면서 발견했다.
귀를 만지면, 엘프는 쉽게 흥분한다.

“흐읏, 으우웃! 마, 만지지 마…!”
“다른 엘프가 널 보고 있군.”
“으읏…!!”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한쪽 귀를 만졌다.
타르샤는 주먹을 꽉 쥐며 쾌락을 버텼다.
아랫배가 쿵쿵 쑤셨고. 뒷덜미에 스물스물 소름이 돋았다.

“박히고 싶은 표정이군.”
“아, 아냐…제발…아니…흐응…!”

타르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흠칫흠칫 어깨가 들썩이면서 흰자가 반절 보일 듯 말 듯 하다.

“흐읏, 우우우…!그, 만…!”
“알겠다.”
“흐우웃!”

거의 절정하기 직전에 멈췄다.
부르르, 타르샤는 몸을 떨더니 얼굴을 떨궜다.
허리를 숙인 채 헥헥대는 숨결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인간과 교미하여 종족의 대를 이어가는 것도 괜찮겠지.’

용사가 전쟁에서 이겨야만, 다크 엘프 종족이 살았다.
하지만 패배한다면 수많은 마물로 인해 멸족을 당했다.
용사 플레이 하면서 다크 엘프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어려웠다.

이미 전쟁에서 마계가 승리하였고. 멸족 루트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애버글로우 숲속에도 마물 게이트가 열린다. 이들도 멸족은 피할 순 없어.’

그가 기억한 바로는 용사가 패배를 수긍하면, 곳곳에 마물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몰살 루트로 진입되면 선택에 따라 애버글로우의 진멸까지 일어났다.

‘용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성검을 찾았지만 전쟁을 다시 일으킬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몰살 루트로 진입되는 순간.
용사의 선택은 엘프 종족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된다.

“와아! 인간 언니, 더 이야기 해주세요!”
“인간들은 정말 날렵하지 않나요? 몇 미터 밖에 있는 것도 못본다면서요?”
“인간 언니, 원래 인간 여자들은 머리 색이 검정이에요?”

저 멀리 성녀의 주변을 옹기종기 둘려싼 어린 엘프들.
귀를 쫑긋거리며 레실리아의 치마를 붙들며 질문을 던진다.
레실리아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차분히 대답을 해주었고.
친절하게 답해주는 모습에 푹 빠진 엘프들은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몽땅 물어보았다.

“인간 언니는 용사님을 본 적 있어요? 저희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용사님은 여자에요 남자에요? 아, 그리고 성검을 다룬다고 하던데, 인간 언니는 성검을 본 적 있어요?”
“저도 몇 번 뵙지 못했지만, 이번 대의 용사님은 여성분이고, 성검은 평범한 검처럼 보여도 성력을 불여넣으면 하얗고 아름답게 변한다고 들었어요.”
“진짜요?! 인간 언니는 그럼….”

쉴 틈없는 질문 세례에 성녀는 미소지으며 답해주었다.
어린 엘프들은 레실리아가 마음에 드는지 너도나도 제 이야기를 마구 꺼냈다.

“인간 언니, 세계수에 대해 알고 있어요?”
“엘프 종족의 태어난 기원이 세계수래요! 고대 엘프들은 세계수를 통해 인간들과 화합했다고 하는데 인간 언니는 알고 있었어요?”
“에이, 인간 언니는 모를걸? 우리처럼 몇 백년이나 살진 않잖아!”
“세계수 당연히 알고 있죠. 저희는 세계수의 뿌리를 찾으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에요.”

레실리아는 빠르게 호응해주었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의 눈이 반짝거리며 가까이 붙는다.

“우와! 진짜요? 인간들은 모를 텐데! 어떻게 알지?”
“인간들도 다 아나봐!”
“인간 언니, 인간 언니! 그러면 세계가 탄생한 기원도 알아요?”
“흐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똑똑한 엘프 여러분이 알려줄 수 있어요?”
“와아, 인간 언니가 우리 보고 똑똑하대!”
“똑똑한 엘프들이 제대로 알려주자!”

어린 엘프들은 신이 나는지 쫑알쫑알 말한다.
이카루트도 아는 게임 세계관이었다.
대화 주제는 세계수의 뿌리가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고.
레실리아는 제멋대로 흘러가는 내용을 인내심 있게 들으며 맞장구를 쳤다.

“……역시 아무나 성녀가 되는 게 아니었어.”

조용히 중얼거린 타르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멀리서 어린 엘프들의 대화만 들어도 정신이 어지러운데.
중앙에 있는 성녀는 미소까지 머금은 채 묵묵히 들어주었다.

“아참! 인간 언니! 인간 언니는 성녀님을 만난 적 있어요?”
“성녀님이요?”
“네! 궁병대장님께 들었어요! 인간 언니가 성녀님 시중을 들었다고 했어요!”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이종족에게 배타적이고 스스로 고립된 애버글로우 숲.
인간이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큰 이슈였다.
매일매일 물레바퀴처럼 지낸 지루한 일상.
호기심이 많은 어린 엘프들은 소문에 당연히 귀를 기울였다.

“성녀님은 어떤 분이세요?”
“진짜 인간계를 배신한 거에요?”
“성녀님은 대전쟁에서 왜 배신했대요?”

어린 엘프들은 순수하게 궁금증을 표했다.
잠자코 듣던 레실리아는 무릎을 굽혀 시야를 맞춘다.
한 명 한 명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엘프 님들은 성녀님의 행동에 어떻게 생각해요?”
“배신은 나쁜 거에요!”
“맞아, 배신은 나쁜 거야.”
“하지만 성녀님께서 생각이 있으신게 아닐까요.”
“예를 들면 용사님과 모의를 해서 계략을 꾸몄다던가?!”
“푸흡, 글쎄요.”

레실리아는 턱가에 입을 댄 채 웃음을 피식 흘렸다.

“또 다른 구원이 있을 거니까,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한 거겠죠?”

어린 엘프들의 고개가 동시에 갸웃거린다.

“그치만 배신했잖아요!”
“마왕에게 완전히 붙었다고 하던데요?!”
“성녀는…… 인간계를 수호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인걸요.”

반절 내리깐 눈은 고요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내 한 템포 느리게 말을 이었다.

“선택에 따라 수많은 결과를 낳게 되요. 성녀님은 될 수 있는 한에서 구원에 가까운 선택한 거라고 믿어요.”
“으으, 말이 너무 어려워요.”

어린 엘프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레실리아는 엘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듯 웃음을 머금었다.

“흥, 포장은 잘하는군.”

타르샤는 건방지게 콧방귀를 끼고는 다리를 꼰다.
사륵, 천막에 닫혀있던 천이 걷어지며 엘레이자가 나타났다.

“오늘 하루 여기에 머무르실 생각인가요? 애버글로우의 밤은 제법 빨리 찾아온답니다.”
“하늘이 벌써 어두워졌군. 이봐, 어떻게 할까.”

타르샤는 엉덩이를 탁탁 털며 눈짓하였다.
하루라도 다크 우드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결정권은 마왕에게 있었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짭짤한 향이 그윽해졌다.
소금 사막에서부터 건너온 내음에 이카루트는 장소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하룻밤 정도는 머물러도 괜찮아요.”

가만히 있는 이카루트 옆에 엘레이자가 다가왔다.
거리가 슬그머니 좁혀지자 머릿결을 귀 뒤로 넘기며 눈매를 접는다.

‘유혹하는 거군.’

엘레이자의 동공이 어느새 풀렸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눈길이 자꾸 그에게 닿였고. 살금살금 여우처럼 눈웃음 치는 것이 영 수상했다.

콰앙!

그때 숲속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콰지직, 이어서 나무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엘프들은 한곳에 시선을 급히 옮겼다.

“키에에엑!”
“어서 도망치세요! 안쪽으로 당장!”

고위급 마물. 스콜피온이 게이트를 찢고, 등장했다.
제일 먼저 정신차린 궁병대장이 큰 소리를 외쳤다.
엘프 종족은 침착하게 대피하였다.

“궁병대는 최대한 결계 끝까지 밀어붙여라!”

궁병대장은 빠르게 선두지휘를 하였고.
발빠른 엘프 궁병대원들은 사방으로 포위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콰아앙!

하지만 움직임이 더 빠른 스콜피온은 전갈 꼬리를 휘둘렀다.
붕 휘두르자 엘프들은 금세 나가떨어졌다.

“칫, 타이밍에 맞게 마물이 등장했군.”
“타르샤 님 조심하세요. 저 꼬리를 맞으면, 맹독에 즉시 오염돼요.”
“알고 있다!!”

성질이 급한 타르샤는 쌍검을 빼들었다.
그대로 뛰쳐나가며, 이곳을 덮쳐오는 전갈 꼬리를 막아냈다.

쾅!

“꺄아악!”

땅을 쓸면서 휘두르는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한 엘프들이 공격당했다.
그 중 어린 엘프도 있었다.
제 다리에 접질러지기까지 해, 철푸덕 쓰러졌다.

“흐으…흐으윽….”

어린 엘프는 겁에 질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흐느끼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질질 몸을 끌었지만.
스콜피온의 다음 표적이 되었다.
전갈 꼬리가 세차게 휘두르자, 성녀는 빠르게 뛰어갔다.

“이런! 조심해!”

꼬리를 막던 타르샤는 우당탕 넘어졌고.
스콜피온은 타겟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궁병대장도, 타르샤도 따라 뛰쳐갔지만.
발발발, 기어가는 수많은 다리의 속도에 미처 따라가질 못했다.

레실리아는 몸을 던져, 어린 엘프를 힘주어 안았다.
곧 덮쳐오는 그림자에 눈을 질끈 감으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콰아앙!

스콜피온은 무자비하게 전갈 꼬리를 휘둘렀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흙먼지.

“쿨럭, 쿨럭…!”

타르샤와 궁병대장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헛기침을 한다.
그러다 정신차린 타르샤는 따끔거리는 눈을 억지로 들었다.
먼지 폭풍이 조금씩 가라앉았고. 그 가운데 인영이 드러났다.

“!!”

그림자 장막 사이로 이카루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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