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수상한 엘프
70화 수상한 엘프
사락ㅡ
시선의 궤적을 따라 오오라가 흩날린다.
음산한 기운을 느낀 발걸음들은 그 자리에 멈춘다.
강자의 기백에 주춤 물러서지만.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몸을 엎드리고, 경계심을 세운다.
“……!”
휴식을 취하던 타르샤가 벌떡 일어섰다.
이리저리 눈을 옮기더니 오만하고 당당한 기세를 드러낸다.
“애버글로우에 사는 동족들이여, 짐은 다크 우드에서 왔다.”
조용한 숲속에 고요히 울러퍼지는 타르샤의 음성.
엘프 왕만의 위엄이 서렸다.
사락, 사락.
엘프 종족은 하나 둘 씩 얼굴을 보인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에 서늘한 경고가 느껴졌고.
들고 있는 활시위는 허튼 짓이라도 하면 곧장 쏠 것 같았다.
명백한 적대감을 느낀 레실리아는 팔 한쪽을 쓸었다.
“거진 몇 백년만에 보는 동족이로군요.”
저 멀리서 모습을 숨긴 엘프가 나긋하게 오고 있었다.
지위가 높은듯 발걸음에 맞춰, 엘프들은 예를 차린다.
“올리비아…?”
“후후, 저희 언니를 아시는 분 같네요. 원정대 분이신가요? 아니면 황족 분?”
엘프는 놀랍게도 애버글로우 숲속의 엘프 왕 올리비아와 똑 닮았다.
조목조목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점은 있었다.
끝을 말린 웨이브진 중단발, 늘씬하지만 조금 더 작은 체구.
특히 인상과 분위기에서 달랐다.
올리비아가 완벽한 고양이 같다면, 저 쪽은 여우에 가까웠다.
“많이 놀라셨나요? 저는 엘프 왕님의 쌍둥이 동생 엘레이자 입니다.”
초록에 가까운 청녹안이 곡선을 그린다.
엘레이자는 자연스레 이카루트를 보면서 인사를 올린다.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섞인 시선에 이카루트와 타르샤는 서로 무언의 눈짓을 오간다.
“짐은 다크 우드에서 온 왕으로서 애버글로우의 엘프 왕을 독대하고 싶다.”
“그건 조금 곤란해요. 언니는 용사님과 함께 원정대로 떠난 상황이라, 제가 대리로 여왕직을 맡고 있답니다.”
올리비아는 용사 곁에 계속 머무르는 것 같았다.
충성심이 곧고, 우직한 성향이라 서포터 역할을 도맡아했다.
용사 플레이하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생각하며 이카루트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다크 우드에서 왕이 직접 행차하신 거라면, 중요한 사항이겠네요.”
“여기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떤가.”
“저는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 분들은 다르겠네요.”
엘레이자가 손바닥을 올린다.
그 순간, 모든 엘프들은 활시위를 당긴다.
급격한 태세 전환에 레실리아는 놀란듯 흠칫 두 손을 마주잡았다.
미약한 반응이지만 엘프들의 경계심이 한층 거세졌다.
공기는 금세 팽팽해졌다.
“올리비아 언니는 얼굴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아요. 소수의 인간들만이 알고 있죠. 예시로 이번 대의 용사님, 대현자님, 황족 그리고…… 대신관들이죠.”
더욱 끌어당기는 활시위.
사근사근한 음성은 정적을 쉴 새없이 가른다.
“제가 알기론 대신관님 중에서 여성분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 한 분 있네요.”
엘레이자의 입술은 느리게 휘어진다.
“성녀님이 계시네요.”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청녹안은 짙게 빛을 발한다.
레실리아는 마법으로 머리색과 기운을 덮은 상태였고.
감각이 뛰어난 엘프라도 검은 머릿결의 평범한 여성으로 보일 터.
똑똑한 엘레이자는 한순간에 예측하고 간파했다.
“하, 억측이다.”
“그럼 증거를 보여주세요. 저희들은 당신처럼 인간에 우호적이진 않으니까요.”
타르샤가 콧방귀를 끼자, 엘레이자가 손을 거둔다.
동시에 엘프들도 활시위를 내렸다.
“이들은 다크 우드 인근 마을에서 만나 짐과 동행하는 여행자다.
이 인간 여자는 성녀의 시중을 들었지. 소문으로만 듣던 엘프 왕을 처음 본 거라 실수를 한 것 같군. 짐이 대신 사과하겠다.”
“저,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레실리아는 어리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한다.
타르샤의 달변이 먹힌듯 엘레이자의 고개가 옆으로 까닥인다.
“매우 설레겠네요. 그래서 엘프 왕과 닮은 저를 본 소감은 어떠신가요?”
“아…아름다우세요. 소문에 듣던 것 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고고하세요.”
“보기와 달리 똑똑한 인간이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가까이 다가온 엘레이자는 턱을 살짝 지켜든다.
기분좋은듯 입매를 느긋하게 올리고는 시선을 뒤로 옮긴다.
이카루트를 보는 눈빛이 묘하기 짝이 없다.
“저 인간 또한 여행자다.”
“후후, 그럴 것 같았어요.”
뭐지? 타르샤는 미간을 옅게 좁혔다.
손바닥 뒤집듯 엘레이자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배타적인 태도가 전혀 아니었고.
은근슬쩍 눈매를 가느다랗게 접으며 살살 웃음치는 것도 왠지 거슬렸다.
“엘프의 맹세를 받은 자들이니, 그대들에게 해가 되진 않을 거야.”
“어머…. 엘프의 맹세까지. 꽤나 신임을 받은 인간들이로군요.”
엘레이자는 살짝 놀란듯 입가를 가린다.
약속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엘프에겐 맹세란 생명을 거는 것과 똑같았다.
엘프의 맹세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며, 타 종족에게는 더욱 조심했다.
“다크 우드의 왕께서 그러시다면, 더 할말은 없네요. 일단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엘프들은 완전히 무장해제했다.
엘레이자는 앞서 종족을 대동하며 발을 사뿐사뿐 옮긴다.
슬쩍 이카루트에게 눈길을 주고는 애굣살이 음푹 담긴다.
그녀에게 미세한 기류가 느껴졌다.
***
사이사이 커다란 나무에 집으로 추정되는 굴이 있었다.
마을 입구는 따로 없고, 창공을 노나드는 어린 엘프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바깥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소금사막이었기에 애버글로우 숲 전체는 엘프의 터전이었다.
똑같은 엘프지만, 사는 양식도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다크 우드와 많이 다르죠?”
“그래, 신기할 정도로 전혀 달라.”
“후후, 그래도 보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을 거에요.”
천막에 들어간 엘레이자는 자연스럽게 대접하였다.
시중을 들던 시녀와 궁병대는 공기처럼 밖으로 나갔고.
기척은 사라졌다.
그제야 타르샤의 경계심이 누그러진다.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군.”
“동족이잖아요. 그리고 다크 우드의 왕께서 직접 행차를 하셨는데, 의심할 거리는 없다고 봐요.”
엘레이자는 온전히 동족과 무리를 믿었다.
다행히 엘프 왕 올리비아처럼 배타적이지 않았다.
“실은 궁금했어요.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 소금 사막 한가운데잖아요. 인간 용사를 처음 봤을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엘레이자는 말문을 틔었다.
쌍둥이 언니와 달리 동생 엘레이자는 인간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저도 함께 모험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엘프 종족을 지켜야 했기에애버글로우 숲을 떠날 순 없거든요. 또 다른 엘프의 왕을 이렇게나마 뵙게 되서 영광이에요.”
“짐 또한 애버글로우의 동족과 대면은 처음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크 우드에 초청해주고 싶군.”
“후후, 말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금세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짙게 우려낸 녹차를 마시며, 서로 근황을 묻는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끝에 타르샤는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짐은 세계수의 뿌리를 찾고 있다. 그렇기에 애버글로우의 도움이 필요하여, 직접 찾아온 것이다.”
“신물을 찾으러 오셨다고요?”
엘레이자는 고개를 기웃거린다.
세계수의 뿌리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물이었다.
사실 유무도 정확하지 않는 민담에 불과하기에 진지하게 말하는 타르샤가 신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수의 뿌리는 실제로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주로 성검이 있는 장소에 나타난다고 하더군.”
“함께 계신 여행자 분이 알려준 것 같네요.”
엘레이자는 웃으며 이카루트를 뚫어지게 주시한다.
타르샤는 속으로 쯧, 혀를 찼지만. 왕답게 불편한 감정을 티내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수의 뿌리와 애버글로우 숲속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요?”
“성검이 나타날 확률이 있다고 한다.”
“성검…… 성검이라….”
엘레이자는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는다.
골똘히 생각하듯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찻잔을 바라본다.
찻잔에 비치는 누군가를 쳐다보더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역시 성검을 찾으셨군요.”
“……그래.”
타르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듯 눈이 둥글게 휘어진다.
엘레이자의 시견은 생각보다 깊었다.
어줍잖은 거짓말이라도 하다간 쉽게 들통날 것 같았다.
“안타깝지만, 이곳엔 성검이 없어요. 세계수의 뿌리는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고요.”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검의 동향은 알고 있어요.”
달그락, 이카루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용히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하며 엘레이자는 차를 마신다.
“용사님은 벌써 성검을 찾았어요.”
“……!! 뭐라고?!”
“신기하게도 대현자님이 머무르는 마탑 지하실에 있다고 들었어요.”
“하! 성검을 찾았다면 인간계에 역전의 기회가 생긴 거군.”
타르샤는 희망의 불씨를 태웠다.
용사가 뽑은 성검만이 마왕에게 유일무이한 죽음을 안겨주었다.
인간계가 승리한다면 숨통을 조이는 마기도 물러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마족과 마물들도 사라질 것이다.
“글쎄요. 성검이 있다해도 용사님이 쓰지 않으면 말짱도루묵이 되겠지요.”
“…?대체 무슨 뜻이냐.”
“올리비아 언니는 이번 대의 용사님께 다시 맹세를 올렸죠. 용사님이 어떤 일을 하든 따라갈 것이고, 설령 나쁜 목적이라도 충성을 다할 거에요.”
타르샤의 주먹이 느슨하게 풀린다.
왠지 불안했다.
홀짝, 차를 마시는 엘레이자는 삐뚜름하게 입매를 올린다.
“이번 대의 용사는 세계를 구할 생각이 없어요.”
“허…! 신빙성이 없는 말이야!”
“성검을 찾고도, 봉인을 풀지 않았다고 언니한테 들었거든요.”
“용사의 사명은 세계를 수호하는 일이다!”
탕! 분노한 주먹이 탁상을 내리친다.
용사가 다크 우드에서 나타난 이유 또한 성검 때문이었다.
벌써 성검을 찾고도, 뻔뻔하게 타르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세계의 멸망조차 막을 생각이 없었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용사의 세치 혀에 휘말려 멍청이처럼 엘프의 맹세를 올렸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다.
마계에 정복당하는 순간 질서가 무너졌다.
마(魔)가 드리워져, 동식물은 말라비틀어졌으며.
이를 포식하는 마물들이 생태계를 지배하였다.
부와 명예를 가진 인간들은 서로 의심하고 배신하며 싸우기 바빴고.
대다수의 힘없는 인간들은 고통에 애곡하였다.
이종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일수록 함께 단합하여 뭉쳐야하거늘, 주축에 선 이들은 멍청했다.
‘성녀는 인간계를 배신하고, 용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던 간에 관심도 없었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타르샤의 분기어린 시선이 저절로 성녀에게 향했고.
레실리아의 가냘픈 어깨가 흠칫거렸으나, 차를 마시며 회피했다.
“애버글로우의 엘프 왕은 이 사태를 관전만 하는가.”
“후후, 올리비아 언니는 애초에 숲과 엘프 종족의 평화만 기렸어요. 인간들과 타 종족은 상관없을 테니까요.”
“허, 근시안적인 관점을 가졌군! 고대 엘프 왕이신 엘론드님께서 통곡할 일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레이자는 선뜻 동의했다.
타르샤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눈가가 어쩐지 흥분에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