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또 다른 변수
66화 또 다른 변수
[흐읏, 하아, 아앙, 하아앗! 거, 거기…거기는 아앙!]
[그 쪽이 더 좋은 것 같군. 보지 제대로 대라.]
[아, 아냐, 아냐아…하읏, 어, 아닌데, 너무 깊, 핫, 하아앙!]
추잡스러운 신음소리가 울려퍼지는 방안.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가 사이로 레티나는 팔짱을 낀다.
느긋하다못해 여유로운 표정.
검지와 엄지를 비비다가, 손톱 끝에 숨을 불어넣는둥 태연하다.
듣다 못한 다프넬은 눈썹을 확 일그러뜨린다.
“……레티나 아까부터 왜 이런 걸 듣는거야?”
“음, 그냥? 솔직히 흥분되지 않아?”
“얘, 얘는 진짜 미쳤어!”
“왜? 너도 좋지 않아?”
“아니, 전혀, 절대로, 싫거든!!”
쾅! 다프넬은 급히 탁상을 내려쳤다.
탁상 위로 고이 있던 티타임 세트가 흔들거렸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용사 레티나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손톱을 딱딱 튕긴다.
“부정하는 것 치고는 많이 흥분했네?”
“너, 너어…!!”
“알았어 알았어~ 이제 장난 안 칠게.”
“장난 안 칠거면 그만 좀 듣지?”
“예예, 알겠습니다.”
달칵, 통신용 구슬이 진동하며 빛이 사라졌다.
연락이 끊긴 구슬은 미세한 금이 가더니, 파삭 깨졌다.
산산조각난 구슬. 깜짝 놀란 다프넬은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이럴 줄 알았어.’
다크 엘프왕 타르샤와 통신용 구슬을 교환하여 서로 연락망을 만들었다.
엘프의 맹세까지 올린 타르샤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왕의 공격을 받았다.
마왕은 제 행보를 미리 알았는듯 타르샤의 통신용 구슬이 파괴되기 직전이었고.
연락을 끊자마자 함께 연결되어있는 이쪽 구슬마저 자동으로 파손되었다.
‘다크 우드에서 괜히 시간낭비했네.’
다크 우드과 맞붙은 인접 마을에서 성검 관련된 소문이 퍼지도록 일부러 냅뒀고.
다크 엘프왕 타르샤의 접점을 통해 맹세를 세우게 했다.
‘렉스 에티아였을 적, 성검이 있을 법한 자리에 흔적도 남겨놓았는데. 떡밥을 물지도 않았어.’
중앙 나무 밑둥.
성검을 찾으러 원정을 나갔던 당시 신탁을 받았던 레티나는 본능적으로 성검의 위치를 깨달았다.
다크 우드 중심지의 나무. 얼핏 보면 평범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천년 이상을 넘는 시간을 살았고. 신화시대에 잔존했던 세계수의 뿌리라는 설화도 있었다.
‘결국 허탕만 친 셈이야.’
그녀가 원하던 정보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너…일부러 통신을 안 끊고 있었어?”
다프넬은 그제야 제 실수를 눈치챘는듯 흘긋 곁눈질한다.
레티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지만.
동료애가 깊은 다프넬은 자책감을 만들었다.
“아…미안해…”
“난 괜찮아. 그것보다 너도 같이 들으니까 좋았잖아 그치?”
“으우…!! 레티나!”
“하하, 너무 장난쳤나?”
레티나가 평소처럼 뒤통수를 긁으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장난을 많이 치는 탓에 다프넬은 저절로 친우에게 기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빙긋 웃는 레티나를 보면서 다프넬은 한숨을 쉬었다. 이마를 짚고는 스르르 시선을 옮겼다.
홍등가의 빛이 내려앉은 창틈.
레티나는 중앙에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창가 너머의 광경은 창녀들과 마약상, 노예상이 판치고 있었고. 그곳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때묻지 않았다.
“레티나 너도 참 대단하다. 차라타의 거리를 네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걸.”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지 뭐.”
“수준이라는 게 있잖아.”
“글쎄, 난 그런 걸 구분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레티나는 대놓고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고 가게 홍보하는 엘프 창녀를 즐겁게 관람하고 있었다.
차라타의 거리.
일명 뒷세계였다.
인간계의 어두운 면을 담아, 총집합한 세상이었으며. 불법적인 것들은 전부 몰려 있었다.
차라타의 거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벨롯가의 남작 영애 다프넬은 친우 레티나가 걱정되었다.
하루는 거리를 걷다가 노예상한테 납치당해서, 레티나는 그대로 성노예로 팔려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팔려가기 직전. 노예상은 상품 점검이라는 명목하에 레티나의 젖탱이를 만졌고.
그는 반병신이 되었다.
‘뒷일 수습한다고 며칠을 밤새서 막았지만. 소문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빠르게 퍼져나갔지.’
좁은 뒷세계에선 소문이 급속도로 퍼진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대의 용사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레티나를 수준급 실력의 용병으로 알고 있다.
그녀를 탐내는 귀족들도 있을 것이며, 뒷세계의 일에 자연스레 손을 뻗칠 수 있었다.
깊어가는 밤. 홍등가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피부 테두리부터 삼켜질듯 붉게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프넬은 레티나만큼은 적어도 이 거리의 색으로 물들지 않길 바랬다.
“다프넬, 이제 슬슬 가볼게.”
“조심히 가.”
“아! 성검의 위치는 잘 옮겨두었고?”
“내 일처리 실력을 뭘로 보는 거야? 걱정말고 얼른 네 일 보러 가.”
레티나는 개구지게 웃었다. 하지만 미소 뒤로 초조함이 느껴졌다.
촉이 좋은 다프넬은 괜찮냐는 말을 꺼내려다가, 삼켰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필 신전으로 옮긴 이유가 뭐야?”
본래 성검은 마탑 지하실에 있었다.
먼저 발견한 대현자는 미리 레티나에게 말했고.
그녀는 유적 제단에 꽂은 성검을 쉽게 뽑았다. 성력을 흘러보내어 봉인을 풀기는커녕, 가만히 냅뒀다.
잠자는 성검을 그대로 가져가 다프넬에게 부탁하였다.
“대신관에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잘 이야기해서, 가이아 신전에 두긴 했는데…… 다른 곳에 뒀어도 괜찮았잖아.”
다프넬 또한 뒷세계의 주름을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평범한 남작 영애로 접견을 했다면 수상한 의심을 단번에 받았을 것이다.
한때 성녀 레실리아가 수호하던 신전. 성벽은 허물어졌고. 주변은 마(魔)로 가득하여, 황폐화가 되었다.
모든 신관이 대피하여, 그곳은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황무지 가운데 성검의 위치가 옮겨졌으며 신전에 찾아가는 발걸음은 당연지사 없었다.
의구심이 섞인 다프넬의 질문에 레티나는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는다.
“이유는 단순해. 성검이 있을 법한 자리니까.”
“성검은 너를 위한 신물이잖아.”
“거야 그렇지. 하지만 보편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성검은 어디와 가장 밀접하겠어? 바로 신전이야.”
알아듣기 쉽게끔 조목조목 알려주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당최 이해가지 않았다.
레티나는 이번 대의 용사였다.
용사라면 응당 성검을 찾아, 몸에 지내야 할 것이며 대적자 마왕을 무찌르는 일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아, 말이 길어졌네. 나 선약이 있어서 빨리 갈게. 이 정도 설명이라면 너도 납득했지?”
“……그래 알았어.”
다프넬은 뚱하게 반응하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티나는 빙긋 웃고 만다.
밖으로 나서자, 낡은 복도에 짙은 그림자를 지나치며 안주머니를 뒤적인다.
웅웅, 또 다른 연락용 구슬에서 진동한다.
전과 사뭇 달라진 표정. 얼음장같은 분위기가 돋친다.
“찾았어?”
[아뇨~ 찾지 못했는데여~? 애당초 신화 시대에나 존재한 세계수의 뿌리를 어떻게 찾아요~]
“……가격 두 배로 쳐줄게.”
[세 배.]
“쳇, 까다롭긴.”
[제 기준에서 손님이 가장 까탈스럽거든여~ 어떻게 하실래요?]
“무조건 찾을 수 있어. 세계수의 뿌리는 진짜 있으니까.”
레티나는 턱을 세게 다물었다.
세계수의 뿌리. 이를 찾아야, 다시 부활한 그녀가 알고 싶은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였고. 최후의 보루였던 차라타의 거리에서 제일 가는 정보상에게 손을 뻗었다.
[근데~ 세계수의 뿌리를 찾아서 뭐하실 건데여~? 국물로 고아서 드실건감~]
정보상은 비웃는듯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앞질문에 초점을 맞춘 레티나는 입꼬리를 틀어올린다.
“이 세계를 만든 신을 찾을 거야.”
염원과 함께 옅은 분기가 저절로 드러났다.
홍등가의 빛이 새어나오며 레티나의 옆얼굴까지 광적으로 퍼진다.
세계수의 뿌리를 따라가다보면, 창조주 가이아 여신을 만난다는 설화가 존재했다.
진짜가 맞다면 아니, 진실이어야 했다.
‘렉스 에티아로 돌아갈 거야.’
레티나는 거추장스럽게 달린 젖가슴이 보기 싫었다. 탱탱한 골반과 엉덩이도.
가냘프고 고운 목소리, 부드럽고 긴 머리결와 단아한 라인마저 꼴보기 싫었다.
그리고 자주 싸웠지만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동생 루시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전 대의 육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은 뭐든 할 것이다.
예전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루시와 함께 밭일도 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맞아 평범하게 오손도손 가정을 꾸리며 살고 싶다.
용사가 되고 싶다던 철없는 생각은 저만치 밖으로 사라졌다.
이타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세계.
사랑하는 가족과 믿고 따라와주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결국 마왕에게 죽었다.
다시 부활한 순간, 레티나는 허무했다. 제일 먼저 루시에게 찾아갔지만. 루시는 오빠를 알아보지 못했다.
세계는 ‘렉스 에티아’를 지우기 시작했다.
고향 사람들의 달라진 기억. 가족에겐 타인이 되었다.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무쳤던 시기, 이리저리 도망치던 레티나는 새로운 신탁을 받았다.
그날 유일하게 ‘렉스 에티아’를 알아본 이가 있었다.
성녀.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다.
마왕 이카루트.
모든 이들은 신탁을 받은 용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만.
마왕은 부활했다고 확신했다.
성녀는 신의 대리자였기에 납득이 되었어도 마왕은 아니었다.
‘확실히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야.’
전대 용사였을 적, 마왕은 갑자기 예측하기 어려운 행보를 이어갔다.
대현자의 지혜로 함정을 요리조리 빠져나갔어도 보란듯이 원정대가 가는 길목마다 마족이 따라붙었고.
급기야 본인 등판하여 목숨을 가져갔다.
다시 부활한 레티나는 몸을 숨기며 전쟁의 흐름을 살폈다.
‘전례없는 빠른 승세를 펼쳤어. 성녀도 이를 알고, 미리 고개를 숙였던 거고.’
완전히 마왕의 편에 붙어, 배신자라고 인간계와 원정대 동료들은 떠들었다.
‘일부러 욕을 받아먹으면서까지 마왕에게 붙은 이유가 있어.’
레실리아는 대의를 위한 희생적인 정신과 이타심이 누구보다도 높았으니까.
철저히 신탁의 기운을 죽이면서 정복한 이후의 정세도 살폈다.
아수라장이 된 세계에서 조금이나마 마음 붙일 곳이 고향 실론드 마을이었다.
아직까진 루시를 보는 게 힘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변두리에 거주하며 마왕과 성녀의 동향을 살폈다.
‘마왕은 성녀를 의심하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뒀어. 내가 마왕이었다면, 먼저 제거할 경계 대상이 성녀일텐데 말야.’
대현자 말로는 성녀는 완벽하게 타락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레티나는 믿지 않았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레실리아가 생각없이 패배에 승복하고, 성노예로 자진해서 들어갈 리가 없었다.
성녀와 마왕. 분명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들에게 존재했다.
“나는 어서 신을 찾아야만 해. 그래야 모든 의문이 풀릴 테니까.”
레티나는 다짐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구는 성녀와 마왕.
세계수의 뿌리만 찾는다면, 그들의 진짜 정체도 드러날 것이다.
[……]
손님한테서 중2병의 대사를 연달아 들은 정보상의 침묵은 제법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