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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화 〉대현자 함락(1) (51/98)



〈 51화 〉대현자 함락(1)

51화 대현자 함락(1)

파지직, 순수한 마력(魔力)와 마기(魔氣)가 부딪쳐 공명을 이룬다.
한걸음 떨어진 레실리아는 양손을 모은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델피네는 성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비틀린 웃음을 머금는다.
그리고 지팡이를 고쳐잡아, 바닥에 내리친다.

ㅡ 구구구구…
옅은 지진이 일어나며, 마법진이 드러났다.
양옆에 일렬로 이루어진 석상들이 삐걱거리며 움직인다. 거대한 석상 무리는 잠에서 깨어나듯 눈에 붉은 빛을 발한다.
다수의 붉은 눈동자는 곧 이카루트에게 향한다. 이카루트는 검고 탁한 오오라를 쉴새없이 흘린다.

“구어어…구어어어!”

석상의 거친 포효가 차례차례 이어졌다. 저마다 무기를 지켜들고는 그대로 이카루트에게 달려간다.
쿵, 쿵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소음. 이카루트는 무심하게 손가락을 튕긴다.

“구억?!”

쿵!
바닥을 타고 꿈틀꿈틀 기어오는 오오라는 석상의 발끝에 휙 가로챘다.
석상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자, 도미노처럼 다른 석상도 제각각 넘어졌다. 손끝을 빙글 돌리자 석상들이 붕 떠오른다.
그리고 일자로 내리그었다.

쾅! 파지직ㅡ
석상들이 박살났다. 조각조각 부서진 석상. 발끝에 채이는 돌조각은 파스슷, 연기처럼 사라진다.

“전부 사라졌어요…!”

성녀의 외침에 이카루트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쉽사리 끝날 리가 없었다.
마왕 캐릭터로 게임 플레이하면서 대현자를 상대하는 법이 가장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선상에 앉은 델피네는 발끝을 까닥거리며 바라볼 뿐.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구륵, 구으으…구어어어…”

조각조각난 석상이 일어나며, 저마다 철썩 붙기 시작했다. 자석처럼 서로 밀고 당기며 형태를 만들었다.
이카루트는 즉시 오오라를 일으켰다. 돌조각들이 이어지는 이음새에 손날로 내리친다. 함께 뻗어나가는 오오라.
이음새 부분에 닿자, 오오라가 흩어지며 흡수되었다.

“구어…구어어…!”

새로운 석상이 탄생했다.

‘마기를 흡수하여, 재생시킨 것 같군.’

한층 단단해지고 강해진 석상.
생각보다 귀찮은 녀석들이었다. 함부로 오오라를 흘렸다가는 힘만 실어주는 격이었다.
이카루트는 이공간을 찢었다. 여러 개의 이공간이 나타나자 다양한 무기가 쏟아졌다.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무기 뿐이었다.

“오호라, 매우 괜찮은 선택을 했구만. 이 녀석들은 고대 유물로 이루어졌다네. 기운으로 싸웠다가는 전부 빼앗기기 십상이지.”
“제법 귀찮게 구는군.”
“이건 어떨까? 싸움을 즐기는 자네라면 기뻐할걸세.”

쿵! 델피네는 다시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고요히 빛을 발한다.
옅은 마력이 타고 올라가 석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기운을 흡수하여, 로이더한 것마냥 석상의 육체가 울퉁불퉁해졌다.

“구어..구어어!!”

석상 무리는 전보다 날렵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카루트는 손끝에 오오라를 실처럼 얇게 뽑아냈다.
주위에 둘러싼 무기들이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석상을 공격한다. 검, 창, 둔기등등 여러 가지의 무기가 허공에 날아, 검무를 추는 것 같았다.
석상 무리는 빠르게 피하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무기의 공격하는 속도를 따라갈 순 없었다.

‘약점은 어딨지.’

게임에서 보지 못한 몬스터였다. 이카루트는 연주하듯 손끝을 놀리며 약점을 샅샅이 훑었다.

“주인님, 심장이에요! 무기로 중간에 자리한 심장을 찌르세요!”

창을 들고 있던 석상이 거침없이 휘두르자, 심장 부근에 있던 핵이 보였다.
먼저 발견한 레실리아는 온 힘을 다해 크게 외쳤다.

“주인님?”

델피네가 의문섞인 음성을 흘렸고. 동시에 석상들이 고개를 휙 돌린다.
여유만만하던 대현자의 표정이 실금이 떠올랐고. 이내 파삭 깨지면서 서늘한 분노가 차오른다.

“오호라, 성녀 자네가 인간계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마왕을 주인으로 떠받는구먼. 이거 원, 레티나가 들으면 제법 화가 날 법도 한대?”

지팡이 끝을 쾅 내려치자, 붉은 빛이 번뜩 치솟았다.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갔고. 석상 무리는 방대한 기운을 흡수한다.
끼긱, 돌아가는 석상의 눈길. 공격 대상은 레실리아로 변했다. 레실리아는 양손을 꽈악 쥐며, 손등에 희미한 핏줄이 돋는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성력이 흘러나오자 석상 무리는 홀린듯이 다가간다.

“제일 먼저 자네부터 죽여야겠다네. 성녀, 아무리 패배를 승복했다한들 자네가 인간계를 배신하면 쓰나.”
“……그건 오해에요.”
“재밌어, 재밌구먼! 방금 들었던 호칭이 주인이지 않았던가. 자네가 무슨 개라도 된 것마냥 말야.”

델피네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다.
분노를 넘어, 살기가 이글이글 올라간다. 대현자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어릴 적 그녀는 학파 장로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장로들의 시기어린 질투가 더러운 열등감을 만들어냈고. 이는 배신까지 이어졌다.

대현자는 장로의 모함으로 인해 죽을 뻔 했고. 그녀 덕분에 커졌던 학파는 제국 소속으로 들어가, 다른 학파와 합쳐졌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학파의 행보에 델피네는 넌더리가 나, 마탑에 숨어지냈다.
세상과 단절한 델피네에게 손을 내민건 다름아닌 용사 렉스였다.

“난 세상에서 배신자가 가장 싫거든.”

델피네는 입술을 짓이겼다. 핏방울이 맺힌 입가. 레실리아의 눈매가 처연히 내려가자 델피네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여우 같은 년…”

짧게 욕을 뱉은 델피네는 지팡이로 쾅! 찧었다.
장전한 총알이 나가듯 석상 무리가 우루루 성녀에게 달려갔다. 레실리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한다는듯 눈을 감고, 기도 자세를 취한다. 여유롭다못해 회개하는 것 같아, 델피네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구어어!”

석상들이 단체로 무기를 드는 순간, 이카루트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파바박! 얇은 오오라에 이어진 무기들이 각각 심장의 핵에 꽂힌다. 퉁, 의식이 끊겨진 석상은 하나 둘씩 무너진다.

“여전히 어리석은 가축이로군. 한낱의 감정에 지배당해 쩔쩔매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 이런!”

어느덧 이카루트가 델피네의 뒤로 이동했다. 분노로 인해 기척을 읽지 못했다.
콰앙! 델피네는 급히 자리를 피했고. 선상은 부서진 흔적만 남았다. 이카루트가 방대한 오오라로 칼날처럼 공격했다.
거침없이 따라오는 공격.
델피네는 우다다, 뛰어가며 미리 생성한 마법진들을 지팡이로 건드린다.

물기둥이 솟구치며, 불덩어리가 날아오는둥 다양한 마법이 펼쳐졌다.
이에 이카루트는 가볍게 캔슬시켰다. 그리고 오오라를 퍼트려, 그물처럼 델피네를 향해 날아갔다.

“칫! 성가시구먼ㅡ”

델피네는 넓은 마법장막을 휘두른다. 검은 오오라가 진득하게 장막결을 따라붙었지만. 이어 솟구치는 불바람 덕분에 파스슷, 사라진다.
한숨을 고른 델피네는 씨익 웃는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대현자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후우, 정말 땀이 날 정도로 싸우는 건 오랜만일세.”

아티팩트가 걸린 망토를 집어던졌다. 짝 달라붙은 광택 재질의 하이레그 복장.
둔덕과 도끼자국이 적나라하게 보였지만. 마력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려주는 특수옷이었다.
델피네는 엄청난 기세를 드러냈다.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고는 마법진을 새로 생성한다.

“…쿠륵, 쿠에엑…”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실론드 마을을 습격했던 촉괴 소리와 비슷했다.
눈치챈 레실리아는 살짝 안색이 질렸다. 흐물거리는 모양새도 여러 다발의 촉수가 튀어나온 것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물같은 색깔이 아니었다. 델피네의 머리색과 똑같은 물빛이었다.

“그날 마을을 습격했던 마물을 소환해봤다네.”
“미개한 돌연변이를 소환했다는 발상자체가 기막히군.”
“후훗, 마법사에겐 호기심이 크나큰 원동력이라네.”

마물은 마계의 몬스터였다. 간혹 변질되는 마기의 특성에 따라 돌연변이가 종종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마계는 강함을 추구하고 서열을 중시한다.
마족도, 마물도, 돌연변이도 강한 자가 나타나면 즉시 꼬리를 뺀다. 그날 촉괴가 이카루트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간 것처럼.

“쿠에에엑…쿠에에엑!”

새로 탄생한 촉괴가 울부짖는다. 마왕에 대한 두려움따위 없었다. 델피네의 소환수이었기에 소환자의 명만 따르고 복종한다.
징그러운 모양새에도 귀여운듯 델피네는 촉괴를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에 여러 개의 촉수가 기분좋은 것처럼 푸르르 떤다.

“어째서 내버려둔거죠? 저 마물은 마을 주민들을 습격하고, 여인들의 순결과 목숨을 앗아간 괴물이라고요!”

레실리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실론드 마을에 수많은 피해를 주었던 마물이었다. 성력을 이용해 마물을 쓰러뜨렸지만, 지반이 약한 동굴은 무너져 수많은 여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 마물을 죽이지 않고 소환하였다.

“어째서…그래도 전 당신들을 믿고 있었는데…”

마을을 헤집었던 촉괴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이카루트에게 그 사실을 알았던 날, 마음 한켠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용사도 용사 일행도 있었다. 왜 그들은 마을을 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는가.
루시를 구하려고 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빼내고 난 후에 마을 여인들을 구출한 줄 알았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레실리아 또한 그들에 대한 의구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을 배신한 자네가 할 말은 아닐텐데? 설마 마물에게 잡혀죽었던 여인들을 동정하는 건가?”
“동정이 아니에요! 그리고 마물이 습격하고 있는 상황을 왜 내버려두신거죠? 처음부터 동굴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마을 여인들을 살리려고도- ”
“이보게, 자네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용사를 따라 마왕을 토벌하는 원정대일 뿐이라네. 우리가 왜 어이없이 잡혀들어간 여인들을 살려줘야하는 건지 모르겠구먼.”
“뭐라고요…?”

레실리아는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델피네는 귓구멍을 후벼판 손톱에 숨을 후, 불어넣는다.
아래로 땋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새초롬하게 눈을 치뜬다.

“설마 기대라고 한 겐가? 우리 원정대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네. 저 오만한 마왕의 죽음. 그것 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 전에는 곳곳에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셨잖아요.”
“호오, 역시 자네도 전대의 기억을 하는구먼.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네. 렉스 녀석의 성격 알지 않는가? 귀찮을 정도로 이타심이 가득한 자라는 걸…”

옛 기억을 회상한 델피네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어차피 옛것이다. 그날의 렉스는 사라졌고. 새로 탄생한 레티나가 용사였다.

“레티나가 부탁했지. 마왕이 성검을 찾으러 온다면 목숨을 간당간당하게 붙을 정도로 막아달라고 말일세.”
“들어보니 용사가 먼저 찾은 모양이군. 그래서 성검은 어딨지.”
“글쎄…일단 나와 대결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

델피네는 방대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팡이 끝을 타고 저절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을 타고 올라오는 마력.

“쿠에에엑!”

마력을 흡수한 촉괴가 우렁차게 울부짖고는 그대로 박차나갔다.
어리석게도 이카루트에게 공격을 가한다.
혀를 찬 이카루트는 오오라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이건 제가 막을게요.”

레실리아가 한걸음 앞장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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