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마탑 지하실 (50/98)



〈 50화 〉마탑 지하실

50화 마탑 지하실

‘……성녀와 함께 가셔야 합니까.’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말야.
이카루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성검 수색할 장소로 옮기기 직전. 마몬의 의심스러운 시선은 끊기지 않았다.
구속 계약을 맺었지만. 충성심이 높은 보좌관은 안심은커녕 레실리아를 수상하게 여겼다.

‘그래도 성검을 부숴뜨릴려면, 성녀가 필요해.’

용사 외엔 성검을 다루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없었으니, 세세한 설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마검과 대적하는 유일한 무기라는 내용만 있을 뿐. 애초에 게임이었다. 게임 유저라면, 무기 설명보다 무기 내구도나 성능같은 것에 더욱 신경썼다.

‘구속 계약도 맺었으니 뒤탈은 없겠지.’

레실리아를 데리고 가긴 하나,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우와아… 멋지다….”

이공간(異空間)을 찢고 나오자  레실리아는 휘둥그레 눈을 뜬다.
거대한 산맥. 세찬 눈바람이 불어, 산 봉오리에 허연 눈이 덮였다. 레실리아는 신기한듯 주위를 둘러보며 옅은 탄성을 뱉는다.

“이런 멋진 광경 처음 봐요…”

성녀는 양손을 모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인간계에서는 신전, 노예가 된 이후로는 마왕성에만 갇혀 살았다. 바람과 함께 내리는 눈은 신전에만 내리는 줄 알았고.
멀리서 바라본 조그만한 산은 실제로 매우 컸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게 아름다웠다.

레실리아는 하나하나 눈동자에 사진처럼 담아냈다.
이카루트는 앞서 가려던 걸음을 멈춰 기다려주었다. 성녀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부름을 받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인생의 대부분을 신전에서 보냈기에 한번쯤 볼 법한 풍경도 레실리아는 경이로워했다.

“아… 앗!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바보처럼 들떠서…”
“다 봤으면 가지.”
“…! 네, 주인님…”

레실리아는 조금 더 커진 눈으로 휙휙 돌아본다.
울창한 숲속. 길이 험난했으나, 성녀는 힘든 기색없이 잘 따라왔다.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자, 이카루트는 이공간의 문을 열었다.
파직, 허공에 나타나던 균열이 스파크를 튀기며 스르르 사라진다.

‘여기도 마법 결계가 있었나.’

이공간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인위적인 곳이다.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경계를 찢어들어가는 편한 능력이지만. 마탑 주위에 둘러싼 결계가 있어 역시 통하지 않았다.

첫번째 성검 탐색 장소는 마탑 지하실이었다. 마탑주인 대현자 델피네는 현재 원정대로 일을 비웠을 터.
마탑에 진입하기까지 수많은 마법을 걸어놓고 갔을 것이다.
결계 범위가 어디까지로 넓은 건지. 탐색하기 위해 이카루트는 오오라를 흘려보냈다.
옅은 마기가 조금씩 땅에 스며들었다.

“……이상하군.”
“주인님?”
“결계 기운이 느껴지질 않아.”

이카루트는 아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퍼석한 흙을 훑으며 천천히 기운을 살폈다. 이공간이 열리지 않는 건 마법 결계 때문이다.
하지만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결계 범위를 알 수 없다면 능력 쓰기가 조금 불편해진다.

‘상당히 귀찮아지겠군.’

이카루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자 레실리아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다.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나요?”
“그래, 어떤 종류의 마법이 발현되는지도 범위조차 예측하기 어렵군.”
“아하….”

레실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곰곰이 생각하는듯 검지를 턱에 댄 채 눈을 또르르 굴린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옮긴다.

“마법도 쓸 수 있으세요…?!”
“마기와 마나의 원천은 사념이니까, 근본은 다르지만 원리가 비슷하니 기본적인 마법정도야 쓸 수 있지.”
“앗, 저는 마몬 님이 특출난 줄 알았어요…그…마법을 쓰셔서….”

기사단장 로라를 만나려 갈 적. 결계 마법을 간단히 푸는 마몬이 신기했던 것 같다.
마족은 지성과 능력이 강할수록 다양한 마법을 썼다.
인간은 마법을 쓰는 자가 드물었고. 높은 경지에 올라간 마법사는 더더욱 없었다.
대현자 델피네만이 고위급 마족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놀랍네요….”
“종족마다 차이가 있으니까, 놀라울 건 없다.”
“그렇지만 대단한 걸요.”

레실리아는 눈웃음을 짓는다. 이내 허리를 펴고는 짧게 스트레칭을 한다.
마치 준비운동하는 것 같았다.

“여기 따라오길 잘한 것 같네요.”
“…….”
“이제야 제 가치를 주인님께 증명할 수 있게 되서 다행이에요.”

레실리아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커다란 가슴팍을 내밀고는 한 손으로 짚는다.
위로 올려다보는 눈빛은 자신감이 가득찼다.
레실리아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었다. 메인 시나리오의 조연 NPC캐릭터에 불과했기에 그는 성녀를 플레이할 수 없음에 안타까웠다.

“델피네님께선 아마 수많은 마법 결계 위로 또 다른 마법을 씌우셨을 거에요.”
“……그래서 보이지 않았던 거군. 이공간도 펼쳐지지 않는 걸 보면, 구속 마법이겠지.”
“네, 맞아요. 워낙 꼼꼼하신 분이니, 다른 마법과 이중으로 걸어놓았겠죠.”
“환영 마법이겠군.”

이카루트는 저 멀리 눈덮인 산맥을 보았다.
마탑이 있는 지역은 겨울이 없었다. 세찬 눈바람이 몰아치지만 피부에 닿이는 눈 결정체는 차갑지 않았다.
마탑으로 추정되는 탑 모양 또한 진짜가 아니었다. 게임에서 본 마탑은 빽빽한 숲에 있지 않았고.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밟고 있는 땅.  지하속에 있었다.

“마법을 그냥 쓰지 않고도 창의적으로 활용하시니 델피네님의 지혜에 감탄스러워요.”

레실리아는 자조적으로 웃는다. 불편한 손끝은 목끈을 더듬거린다.
성력이 흘러나오자 파짓, 거리는 목끈. 순간 레실리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힐끔 옆으로 돌아보는 눈빛에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오늘 한 번만 풀어주겠다.”

이카루트는 성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구속 계약도 맺었고, 용사와 일행의 정보를 낱낱이 흘려주며 이카루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수상한 낌새도 많았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행보에 걸림은 없었다.
철컥, 목끈이 풀려졌다. 떨어지는 목끈을 잡아챈 성녀는 멀뚱거리다가 환하게 웃는다.

“…! 주인님, 감사합니다.”

목끈 하나를 풀었을 뿐인데 레실리아는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기회삼아, 도망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이 성력은 보호와 치료의 목적인 힘이 아니에요.”

레실리아는 양손을 모아, 기도 자세를 취한다.
순수하고 고결한 기백이 흘러나왔고. 성력과 마기가 부딪치자 약한 격동을 발한다.
한없이 성스러운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고. 이카루트는 본능적으로 마기를 거뒀다.

“세상의 순리대로 돌아가게 하는 거죠.”

파앗! 가슴팍을 중심으로 허연 빛덩어리가 터졌다.
거칠게 불던 눈바람. 흔들거리던 잎사귀도 멈췄다. 이내 허연 빛이 감싸더니 산맥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레실리아를 중심으로 줄기처럼 뻗어가는 성력. 방대하고 거대한 양의 성력에 이카루트는 그림자 장막을 펼쳐, 스스로 보호했다.
마치 성녀 자체가 빛덩어리가 된 것 같다.

ㅡ 파삭

환영 마법이 거울조각처럼 깨졌고. 눈앞에 넓고 메마른 대지가 보였다.
거친 산맥과 울창한 숲속, 그 주변 모두가 환영이었다.
성력이 사그라들면서 빛 또한 꺼져갔고. 거대한 성력을 지탱하던 몸도 힘없이 무너졌다.

“주, 인님….”

이카루트는 성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레실리아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싱긋 웃는다.
칭찬해달라는 것 같아,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믿어줘서 고마워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레실리아는 힘든 내색 없이 말한다.
그리고 목끈을 달라는듯 양손을 모아 조심스레 내민다.

“방금 한 것처럼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겠나.”
“……지금처럼 규모가 크면 조금 힘들 수 있겠네요.”

레실리아는 심호흡을 하였다. 곧은 어깨선이 달달 떨렸다.
성력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있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아 성검을 찾았다면. 봉인을 깨우기 위해서 방대한 성력이 필요할 수 있다.
계산이 끝난 이카루트는 지체없이 공주님 자세로 안았다.

“꺄아악! 주, 주인님!”

화들짝 놀란 레실리아는 급히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보통 여성이라면 내려달라고 몸부림치지만. 레실리아는 그러기 싫은듯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주인님…이러시면…저 부끄러워요….”

부끄럽다는 것치고는 고개를 좌우로 비비적거리며 킁킁 냄새까지 맡는다.
부드럽게 새어나오는 숨결이 왠지 뜨겁다.

“저…목끈은 안 채워주시나요…?”
“그러면 성력 제어받을텐데.”
“그, 음, 성력 쓸 때만 풀어주세요오….”

이카루트는 고개를 말없이 기웃거린다. 성녀는 머릿결로 옆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하였다.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수줍게 올린다.

“제가 주인님 거라는 표식같아서 조,좋았거든요….”

이카루트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손바닥으로 표정을 가린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
결국 그는 다시 성녀에게 목끈을 채워주었다.

***

흙더미에 파묻인 마탑문.
쾅! 이카루트는 가볍게 폭발시켰다. 미궁처럼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
레실리아는 이카루트의 옷깃을 동앗줄 삼아 천천히 뒤따라갔다.

‘이상하군. 함정이 없어.’

델피네를 찾는 퀘스트를 하면 하루 반나절은 기본이었다.
그 이유는 수많은 함정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심지어 랜덤으로 달라졌다.
세이브 저장을 하지 않으면 색다른 함정에 걸리기 때문에 마탑에 들어가는 즉시 세이브 저장포인트만 몇 개가 되었다.

마탑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서늘한 침묵에 이카루트의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레실리아도 수상함을 느꼈는지 미어캣마냥 휙휙 둘러본다.
이카루트는 빠르게 계산했다. 대현자 델피네는 이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마탑 주변으로 마법을 이중삼중으로 걸었다면.
비어있는 내부는 위험한 이변이 도사리고 있었다. 딱 한 가지의 상황만 예외한다면 말이다.

“어째서…아무것도 없는 거죠.”
“내가 추측한 게 맞다면ㅡ”

쿠쿠쿵!
타이밍 좋게도 거대한 지하석문이 열렸다.
넓은 홀. 양옆에 서있는 석상은 각자 무기를 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 누군가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오호, 이게 누군가. 오만하신 마왕님과 배신자 성녀님이구먼.”

까닥이는 발끝을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역시 대현자 델피네가 탑 내부에 있었다. 델피네가 휴식을 취할때만 내부에 걸어놓은 마법을 해지시킨다.
그녀도 귀찮게 함정에 걸리긴 싫은 것 같았다.

“자네가 여길 올거라는 레티나의 예상이 들여맞았어.”

델피네는 건들거리며,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용사가 성검을 지키려고 지시한건가.”
“하지만 성녀와 함께라니……. 자네, 여전히 남의 말은 들어먹지 않는구먼.”
“묻는 말에 답해라. 어리석은 대현자여.”
“뭐라?! 누가 누구 보고 어리석다고 한 거냐!”

델피네는 불같이 화를 냈다.
쿵쿵 내려찍는 지팡이에 힘이 실렸고. 팟, 분노로 튕기는 마나 스파크가 눈에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자네와 결판을 짓는구먼.”
“……귀찮게 구는군.”
“내가 제법 집착이 강해서 말야. 어쩌겠는가? 내 지대한 호기심이 부추기고 있다네.”

엄청난 기백이 몰아친다.
전투 태세에 레실리아가 한 걸음 앞섰지만. 이내 이카루트의 팔에 저지당한다.

“기어오르는 가축에게는 제 주제를 알게 하는게 좋겠지.”
“호오, 나는 그 오만방자한 콧대를 부숴주고 싶구먼.”

맞부딪치는 둘의 시선.
호승심이 가득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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