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용사 발견
47화 용사 발견
“조금 놀란 것 같네.”
톤이 높은 미성이 잔잔하게 들린다.
이카루트는 턱끝을 비틀었다. 다시 부활해서 그런 걸까.
뭔가 달라졌다. 다른 점을 찾으려 매섭게 훑어보자 레티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왜 이런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묻지 말아줘.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혀서.”
“많이 달라진 것 같군. 성별 뿐 아니라 성격도.”
“아아, 그렇겠지. 난 지금 이번 대의 용사 레티나니까.”
“……현재 네 이름인가.”
레티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팔짱을 낀다.
움직임에 따라 귀걸이가 반짝인다. 귀걸이 중앙 홈에 고대 성물이 박혀 있었다.
시선을 느낀 레티나는 귀걸이를 살짝 만지작거린다.
희미한 기운은 성물에 빨려들어가며, 그녀의 기척을 가려주고 있었다.
“예쁘지? 나름 비싼 값하는 애라서 성능도 좋더라.”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었군.”
“눈치 하나는 빠르네.”
이카루트는 이공간을 찢었다.
포효하듯 모습을 드러내는 마검(魔劍).
검 끝은 곧 레티나에게로 향한다.
“추격은 끝났다. 렉스 에티아. 그만한 각오는 되어있겠지.”
“하아…난 레티나라니까? 이카루트.”
짧게 한숨을 쉰 레티나는 여유만만해보였다.
“나를 또 죽여봤자 소용없을걸. 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쓸데 없는 소리.”
“마계는 이미 승리했어. 인간계가 정복되었는데도 너는 끝까지 나를 따라왔지.”
“…….”
“용사가 이 세상에 없어져야만, 전쟁은 비로소 마계의 승리인 거 아냐? 하지만 내가 용사인 이상, 넌 나 못 죽여.”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골반을 옆으로 틀며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목숨이 빼앗긴 자 앞에서 취할 태도는 아니었다. 이카루트는 땅에 마검을 내려꽂았다.
검 끝은 분노한 것처럼 옅은 지진을 일으켰지만.
검의 주인은 요동치 않았다.
“그래, 알고 있다.”
“……뭐야.”
되러 보기 드문 미소를 짓는다. 확신이 찬 눈빛에 레티나의 얼굴이 구겨진다.
“용사가 새로 나타났다는 소식에 나는 다양한 선택을 두었지. 그리고 너를 직접 대면한 후에, 선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호, 그래서 네 선택은?”
“당장 죽이는 건 관두겠다.”
“뭐?”
레티나의 미간이 심히 일그러졌다.
대화를 듣고 있던 올리비아 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마왕의 목적은 헤아릴 수 없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태도에 둘은 경계를 바짝 세운다. 하악질하는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 아군 릴리트 또한 흥미롭게 지켜본다.
쾅!
동굴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 동굴 입구쪽으로 낸시와 루시가 연달아 달렸다.
낸시는 양쪽 귀를 막은 상태로 소리를 꽥 지른다.
“빨리 피해!”
ㅡ 콰앙!
전보다 큰 폭발음. 동굴 입구가 우루루 무너지며, 급히 달리던 루시가 발에 걸렸다.
굴러떨어지기 전에 음산한 오오라가 여체를 받쳐준다.
“쿠웨에엑!”
쿠쿠쿵! 거대한 성력. 그리고 도망치려던 촉괴는 동굴을 뚫었지만 이내 연기처럼 흩어지며 흔적이 지워진다.
“저, 저기 언니가…! 언니!!!”
아직 동굴 속에 괴물과 레실리아가 함께 있었다.
울부짖은 루시는 잔재밖에 남지 않는 동굴을 허망하게 쳐다본다.
멘탈이 나간듯 동상처럼 앉아있었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릴리트가 루시의 혈을 손끝으로 쿡 찔렀다.
“방해되니까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어♡”
“……서큐버스….”
마침 근처에 피신했던 레티나가 째려본다. 살기어린 눈길에 릴리트는 키득키득 웃으며, 루시의 어깨를 꼬옥 안았다. 보란듯이 루시의 턱을 들게 하여, 볼을 만지작거린다.
이어 용사 레티나를 마주보며 도발하기 시작한다.
“네가 로라와 성녀가 찾던 용사님 맞아?♡ 너 찾는다고 우리가 얼마나 진 빠지는 줄 아니?♡ 후후, 너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여동생에게 손대지 마!”
“흥흥~♡ 싫은데? 얘도 다른 애들처럼 음란해지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친오빠랑 같이 질척질척섹스를 원한다면 너도 좋아할 것 같은데♡ 혹시 알아? 널 기억해줄지♡”
“ㅡ닥쳐!”
파드득! 레티나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자, 숲속의 새들이 놀라 창공 위로 달아난다.
한순간에 퍼진 용사의 기백. 다시 부활했지만 기세는 어디가지 않았다.
고위급 마족 릴리트 또한 날카롭게 마기를 흘렸고. 곧 싸움이 나기 직전이었다.
우웅.
그때 이카루트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점점 커졌다. 검은 늪처럼 반경을 넓히더니 사람이 둥실 떠오른다. 의식을 잃은 성녀 레실리아 였다.
성력을 제어하던 목끈이 저절로 풀려졌다.
이카루트는 시야를 낮춰, 누워있는 성녀를 훑고는 목끈을 거두었다.
손에 닿자 목끈은 잿가루처럼 부서진다.
“성녀는 가까스로 데려왔습니다.”
성녀를 데려온 용의 그림자.
리바이어던은 담담하게 상황 보고를 하였다.
성녀는 분명 촉괴에게 잡힌 인간들을 구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의식을 잃을 정도로 거대한 성력으로 촉괴를 쓰러뜨렸지만.
동굴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살아남은 주민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리석군요.”
“……그 이타적인 희생 정신이 레실리아의 장점이야.”
이카루트는 눈을 들었다.
인간을 구해기위해, 홀로 기꺼이 목숨까지 바쳤다.
레티나와 올리비아는 그런 성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심해하는 것 같았다.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엘프는 그렇다쳐도.
레티나는 아니었다.
게임 속 주인공은 전형적인 용사 성격이었다.
이타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밀고 나갔으며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전혀 딴 사람 같군.”
“너도 그래. 이카루트,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야.”
레티나는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재빠른 기척이 눈앞에 나타났다.
“용사여! 전송 마법진이 다 되었다네! 어쿠쿠, 타이밍이 좋지 않게 왔구먼!”
“아냐, 딱 맞게 왔어.”
대현자 델피네는 모자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찡긋 윙크하고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린다. 언제부턴가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이카루트는 성녀를 안고, 급히 공중에 떠올랐다.
콰콰쾅!
쨍한 하늘 아래로 번개가 내려쳤다. 정확히 마왕이 있는 쪽이었다.
모래바람이 불자, 델피네는 조그만한 입술로 뭐라 중얼거린다.
웅웅, 대며 용사와 용사 일행 아래로 나타나는 마법진.
“잡아라.”
“존명.”
“네 주인님♡”
리바이어던과 릴리트는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이들을 향해 올리비아는 활시위를 당긴다.
쾅! 쿠웅! 콰쾅!
여러 다발의 바람 화살이 날아왔으나 리바이어던이 가볍게 막아낸다.
그리고 발빠른 릴리트와 낸시의 육탄전이 시작되었고.
마법진은 점차 빛을 냈다.
“레실리아….”
아수라장이 된 주변.
레티나는 그의 품에 조용히 안겨있는 성녀를 주시한다.
마치 슬퍼보이면서 분에 차 있었다. 레티나의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위로 올라간다.
이카루트는 용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카루트, 넌 정말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구나.”
“…….”
“아, 그리고 성녀를 너무 믿지 마. 이건 충고가 아니고 경고니까.”
레티나의 입가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이내 고대 성물이 담긴 귀걸이를 슬금슬금 만지다가 가차없이 빼버린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툭, 떨어진 귀걸이.
“어디 한 번 찾아봐.”
이질적인 기운이 레티나의 심장을 타고 스물스물 드러난다.
마검을 뽑고, 금세 달려들 것만 같았는데 이카루트는 조용히 있었다.
성녀를 소중히 안고 있는 모습이 그 답지 않게 우스웠지만.
“만나는 즉시, 성녀와 함께 네 심장에 성검을 찔러넣어줄게.”
레티나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파바밧! 마법진에 새어나오는 빛이 그들을 아울렀고.
릴리트와 리바이어던은 싸우다 말고 재빨리 빠져나왔다.
“어머나♡ 도망갔네요~♡”
“…….”
이카루트는 땅에 착지하였다. 성녀는 신생아처럼 숨을 고르며 편안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엷은 미소까지 새어나오는 걸 보니 마음 편히 꿈도 꾸는 것 같았다.
보기 싫었던 릴리트는 성녀의 볼을 꾹꾹 눌러대며 장난친다. 미간이 구겨지자 더욱 즐거운듯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른다.
“이카루트 님.”
리바이어던은 넌지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고대 성물이 담긴 귀걸이. 용사의 기운을 감춰주었지만 그 용도를 눈앞에 버려졌다.
‘대놓고 찾으라는 뜻이군.’
실시간 위치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적에게 일부러 떡밥을 던져주는 용사의 행동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관 없었다.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모른다고 했지.’
이카루트는 속으로 비웃었다.
전생의 그는 게임 고인물이었다. 이곳은 게임 속 세상이었고, 각각 캐릭터를 몇 천시간 플레이한 고인물이었다. 특히 마왕과 용사의 시나리오를 몇 백번이나 깼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용사의 위치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보도 알고 있었다.
“일단 돌아간다.”
“흥흥~♡ 좇아가지 않고요?”
“용사 말대로 죽여봤자 소용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야겠지.”
“원인…말씀이십니까….”
리바이어던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 고개를 기웃거린다.
이에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전생의 그만 아는 사실.
성검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용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렉스 에티아를 플레이하면서, 대화 스크립트에 잠깐 언급되었던 이스터에그였다.
‘실수를 했었지. 성검을 찾으러 가던 원정길에 용사를 죽였으니.’
당시 이카루트는 빙의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눈 뜨고 보니, 게임 속 세상이라는 비일상적인 이야기를 누가 믿을까.
그때 급한 선택을 했다.
이내 성검 또한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보란듯이 자취를 감췄다.
성검의 위치는 용사만이 알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성검의 위치를 알 수 없었건만.
가정한 최악의 상황이었던 용사가 새로 나타났다.
“철수한다.”
“흐음~ 진짜 안 좇아가도 되요?♡”
“아직 용사에겐 성검이 없어.”
부활한 용사는 성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허릿춤에 있었던 낡은 롱소드. 튜토리얼 퀘스트에 받는 아이템이다.
이를 보자마자 죽이겠다는 선택지를 뒤로 미뤘다.
만일 성검이 있었다면 성검을 부숴뜨리고 가차없이 그녀의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이제야 성검을 찾는지 우문이군.’
레티나는 원정대와 재결합한지 오래된 것 같았다.
전송 마법을 타고 희미하게 남겨진 기척의 끝은 튜토리얼 끝난 다음 첫 퀘스트를 받았던 장소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는 성검을 찾으러 원정길로 올라섰다.
‘성녀만 달라진 게 아니었어.’
다시 만난 용사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성별만 다를 뿐, 외양은 똑같았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 달라졌다.
평소라면 동굴 속에 찾아 들어가,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했을 것이다.
루시만 데려오라고 할 뿐. 고향이 습격당하는 상황을 방관하며 성녀까지 죽이려고 했다.
오늘 마주친 살기는 진심이었고.
레티나는 성녀와 함께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대체 누가 주인공인지…….’
왠지 선과 악이 바뀐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