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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마물 둥지(2) (45/98)



〈 45화 〉마물 둥지(2)

45화 마물 둥지(2)

곳곳에 불길이 일어난 마을.
촉수와 맞서 싸운 경비대는 턱없이 쓰러졌다.
그 가운데, 촉수에 잡힌 여인들은 보지를 개방한 채로 음기를 빨아먹히고 있었다.

‘촉괴로군.’

촉괴는 슬라임 계열의 돌연변이 종이자, 상급 마물이었다.
단단한 균열을 깨고 들어갈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마계에서도 보기 힘든 종이었다.

“여기였던가.”

이 근방에서 강한 신성력을 느꼈다.
엉망진창이 된 거리. 이카루트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다.
스물스물, 촉수들이 숨죽이며 다가온다.
한 발자국 떼자, 뒤늦게 따라오던 그림자가 옅게 퍼진다.

서걱.

“쿠르륵…쿠엑….”

난도질당한 촉수는 꾸르륵, 거리며 도망갔다.
이카루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주변을 훑어본다.

‘이 상황에서도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던가….’

음액에 절여진 여인들. 음기가 쪽 빨려, 말라죽은 시체들도 간혹 보인다.
거리 마다 쌓여가는 시체. 이카루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향은 지옥이 되었어도 용사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용사가 아닌 것 같군.’

그가 아는 용사라면 이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호전적이고, 정의로운 성격.
올곧은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렉스의 별명이 호구였을 정도로 바보같았다.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열광도 받았다.

슈우욱….

“정말 달라졌어.”

이카루트는 조용히 눈을 들었다.
공기 흐름이 바뀌어졌다.
반대편으로 불어오는 바람. 곧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며 입을 쩌억 벌린다.

쾅!

“용사 그리고… 용사 일행도 말야.”
“…….”

흐트러지는 연기.
화르륵, 불길은 금방 사라졌고.
사선에 검은 장막이 생겼다.
이카루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장막은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 날. 우리를 따라오던 기척이 너였군. 대현자 델피네.”
“……자네는 여전히 무례하구먼.”

양갈래로 땋아내린 물빛 머리가 인상깊은 여인.
왜소한 체구와 귀여운 인상을 지니고 있지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대현자였다.
인상을 가득 찌푸린 델피네는 제 키보다 길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몰래 뒤따라가던 네 녀석이야말로 무례한 게 아닌가. 잘도 스토킹하더군.”
“뭬, 뭬야?! 스토킹은 자네가 하지 않았나! 마을에 미리 마족을 풀어두어, 함정을 만든 놈이 말이 많구먼! 용사를 찾겠다는 집착은 여전하고! 응?!”

델피네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찧으며 불만을 표한다.
성녀가 짧은 반바지가 부끄럽다고 푸념하던 날. 그들을 추적하던 기척의 정체가 눈앞에 있었다.

‘전 대의 용사 일행도 함께 있었군.’

렉스는 원정하는 도중, 마검에 찔려 사망했다.
당시 원정대 일행이 있었다.

바람을 다루는 엘프 여왕.
몸이 날쌘 수인족 도적.
마법을 쓰는 대현자 델피네.

리더가 죽으면, 무리는 자연스레 와해된다.
이카루트는 일부러 그들을 찾아 죽이진 않았다. 전쟁 준비를 하느라 바빴는터라, 용사가 없는 원정대는 이빨빠진 사자나 다름없었다.

“하여튼! 난 잠깐이라도 자네를 막아야 한다네!”
“당장 막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이카루트는 엄지를 올려 뒷쪽을 가리켰다.
스물스물, 가지처럼 뻗은 촉수가 암컷 냄새를 맡고 오고 있었다.
델피네는 한심한 눈초리로 흘겨보곤 지팡이를 쿵! 하고 내리찍는다.

화르륵!

“쿠에에엑! 키엑!”

지팡이 끝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겼다.
커다란 불길이 위로 솟구쳐올랐고.
델피네를 뺀 모든 생명체들을 집어삼켰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흥, 자네도 여전히 눈치가 빠르구먼.”

팔짱을 낀 델피네는 콧방귀를 낀다.
이카루트는 허공에 몸을 드러냈다. 이공간(異空間)을 다루는 특이 능력.
이 때문에 놓쳐버린 델피네는 관자놀이를 짚는다.
위잉, 위잉. 마침 이상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쯧, 이번에말로 승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녀는 케이프에 부착되어있는 가슴 주머니에 신호용 구슬을 꺼냈다.
부르르 진동하는 구슬. 한참 바라보던 델피네는 아쉬운듯 혀를 짧게 찼다.

“자네, 성녀를 너무 믿진 말게.”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
“실은 자네도 의심하고 있지 않나?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왜, 급히 고개를 숙였을지.”

델피네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카루트 또한 알고 있었다.
성력을 제어하는 목끈이 매었는데도 성녀는 상급 마물은 가볍게 쓰러뜨렸다.
그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고위급 마족과 대련할 수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레실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왕성을 탈출하지도 않을 뿐 더러 마왕의 시중까지 자청하였다.
에로 소설을 빌미로 노예로서 머무르고 있었다.

“뭐, 교단측에서는 성녀를 배신자로 지정한 상황이니 갈 곳도 없겠구먼. 이런! 시간이 다 됬어.”

델피네는 신호용 구슬을 주머니 속에 쏙 넣었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는 입가에 미소를 띤다.

“아쉽지만 조금 있다가 봅세.”

휘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었고.
델피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만 쓴다는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순간 이동한 델피네의 기척을 찾아봐도 느껴지지 않았다.

퍼엉!

그 순간 가까운 지척에 폭발음이 들렸다.

‘저기에 있는 건가.’

공기 중으로 허연 빛가루가 떨어졌다.
옅은 신성력이 느껴지자 이카루트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발자국 걸음을 떼자, 길다란 그림자가 서서히 흩어졌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하아…하아…”

신성력을 펑펑 써대는 탓에 체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레실리아는 목끈을 쓰다듬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 정도의 힘을 써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당신은 참 운이 좋네요.”

촉괴는 생각보다 강했다.
수를 셀 수 없는 촉수. 촉수를 하나씩 성력으로 떼어낼 때마다 지원오듯 다른 촉수가 딸려온다. 촉수 마다 여인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음부를 벌린 채 음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죽음의 공포가 척추를 강타했다.
꾸물거리는 촉수에 붙잡혀, 저 여인들처럼 음란한 얼굴로 보지가 빼앗기면…
레실리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 겨우 기도 자세를 취하니, 싱그러운 신성력이 올라온다.
타인을 치료할 순 있어도 정작 자가치료는 안된다.
레실리아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성녀는 그런 존재였다.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타인을 지켜야 한다.
널부러진 여인들을 내려다보며 레실리아는 마음을 다 잡았다.

“ㅡ 언니!!”
“….?! 루시?”

퍽! 등 뒤를 공격하던 촉수는 몽둥이에 맞고,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루시는 몽둥이를 붕붕 휘둘렀다.
퍽! 퍼퍽! 암캐를 잡으려던 촉수는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후우, 언니 !괜찮으세요…?!”
“아, 네…괜찮아요.”

둘은 등을 바싹 맞붙였다.
촉수와 대치하는 상황. 루시는 몽둥이를 움켜잡으며, 할 말을 이어갔다.

“하아,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래요? 모험가 님은 어디 가셨어요?”
“주인…ㅁ, 모험가님이랑 같이 있지 않으셨어요?”
“…!! 아, 그, 가, 가, 같이 있긴 했는데 폭발음이 들리자마자 바로 뛰쳐나갔어요! 전 언니 찾으러 가신 줄 알고…”

레실리아가 슬쩍 눈을 돌리자 루시의 목덜미와 귓바퀴가 붉어졌다.
일부러 시선을 맞추치지 않으려고 애꿎은 촉수를 쏘아본다.
휘익! 일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올 겁니다.”
“네? 으윽!”
“루시!”

서늘한 음성. 깜짝 놀란 루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가온 촉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쿵!
루시는 반항도 못한채 그대로 몸이 쓰러졌다. 스르르 넘어지는 여체를 촉수가 잽싸게 잡아챘다.
상반신을 꿀꺽 삼키고는 스으윽, 유유히 움직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레실리아는 본능적으로 방어막을 쳤고.
한 여인은 공중제비를 돌며, 사뿐히 바닥에 발을 딛는다.

“다…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성녀.”

째려보던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윽고 경악한다.
늘씬하고 여리여리한 몸. 금발 머릿결 사이로 삐죽하게 긴 귀. 그 위로 월계수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숲속에 정착하여, 자연과 노닐며 산다는 엘프 종족.

“엘프 여왕… 올리비아…”

수장인 올리비아였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머릿결을 뒤로 넘기는 것만으로도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때 촉수 하나가 흐물거리며 달려든다.

“키에에엑!”
“또 마물 습격이라니. 이젠 질리는군요.”

올리비아는 황금테를 두른 활을 우아하게 들었다.
그리고 촉도 없이 활시위를 당긴다.

퉁!
쫘악 벌려, 음액을 질질 흘리는 촉수 입안이 터졌다.
줄을 당기는 손톱 주변에 따뜻한 바람이 노닌다.
엘프 여왕, 마왕을 토벌하는 원정대에서 궁수로 다녔던 올리비아는  바람을 다룰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성녀. 어연, 세월이 지났군요. 인간에게는 길겠지만 제겐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올리비아.”
“성녀가 대적자 마왕과 함께 붙어다니다니. 부활한 용사님을 먼저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저희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 또한 이제야 납득했습니다.”

지켜올라간 눈매. 올리비아는 적대하고 있었다.
레실리아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볼 뿐.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때 촉수에게 먹힌 루시의 하체가 버둥버둥 몸부림을 친다.

“으웁! 으으읍! 사, 살려줘! 꺄악!”
“용사님께 여동생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만 물러가주시죠.”
“올리비아. 여동생만 지키는 용사에게 타인의 안전을 맡길 순 없어요.”

레티나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다시 고향에 찾아간 이유도 루시 때문이었고.
멀리서 남모르게 지켜주고 있었다.
들이닥친 촉괴 덕에 올리비아는 황급히 루시를 지켜주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물러나시죠.”
“루시만 잡힌 게 아니에요. 수많은 생명이 붙잡혀 있어요.”

마을 주민들이 촉괴 사이에 갇혀 있었고.
올리비아의 바람화살은 돌풍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다.
자칫 잘못 공격하면, 주변에 애꿎은 주민이 다친다.

올리비아는 한쪽 눈썹 끝을 올린다.
저지하는 성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두두두….

‘…! 위험해.’

지변이 옅게 흔들렸고.
어디선가 방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올리비아는 크게 발돋움하였다.
몇 번의 공중제비 후, 건물 지붕으로 올라섰다.
공기는 거대한 마(魔)에 반응하여 파동친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와야겠어.’

이공간이 쩌적, 갈라지며 그림자와 함께 이카루트가 나타났다.
마왕에게 들켰다가는 제 목숨이 위험했다.
올리비아는 바람을 일으켜, 몸을 맡겼다. 산들 바람은 기척을 숨겨주었고 급히 도망쳤다.

“쿠엑! 쿠에에엑!”

촉괴 또한 울부짖으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촉수들이 그림자 반대편으로 냅다 달렸고.

“꺄악! 자, 잠깐! 난 내버려 두고 가!”

도망치면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려는 것처럼 얇은 촉수 하나가 성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즉시 들고 튀었다.

“……여기 있었군.”

이카루트는 어이가 없었다.
촉괴는 도망치는 와중에 먹잇감을 들고 튀었다.
그 많고 많은 먹잇감 중에서 성녀가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카루트는 오오라를 넓게 퍼트렸다.
검은 안개는 엄청난 마기를 이끌며 파도처럼 다가왔다.
금방 다가온 안개는 돌풍을 일으켰다.

파사삭! 촉수를 조각조각 잘라내고. 깨부수어 가루로 만든다.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촉수는 어느 한 구석으로 돌진한다.
그곳은 수많은 촉수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게이트 균열이 깨져 있었다.
저길 통해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주인님…!”

몸부림 치던 레실리아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촉괴 또한 균열 틈새로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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