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뒤틀린 튜토리얼(2)
37화 뒤틀린 튜토리얼(2)
마왕과 성녀가 떠나간 골목.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시선이 있었다.
음습한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여인이 작은 현미경을 내려놓는다.
“진짜 마왕이 널 찾아왔구나.”
표정은 확신감이 가득찼다.
주황색의 구불진 머리칼을 가볍게 손으로 치우고는 팔짱을 낀다.
당당하고 거만한 자세. 그녀가 입고 있는 벨벳 드레스와 비싼 장신구는 신분을 나타냈다.
생각을 하는듯 입술을 짓씹으며,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있잖아. 일하는 것도 좋지만 쉬엄쉬엄하는 게 어때?”
신뢰감을 주는 부드러운 음성. 남녀 모두가 한 번쯤 돌아볼 법한 미성이었지만.
여인은 되러 기분만 나빠졌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묘하게 불만이 가득찬 표정에 음성의 주인은 낮게 웃음을 흘린다.
“…네 말이 맞았어. 성녀는 진짜… 인간계를 배신한 거네.”
“성녀도 나름 사정이 있었겠지?”
“같이 동행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 성녀를 언제까지 믿을 건데!”
여인은 짜증 섞인 잔소리를 우다다 해댔다.
음성의 주인은 차를 홀짝, 마시며 이를 조용히 듣고만 있는다.
“다프넬. 케이크 먹을래?”
“이씨, 야!”
“……그럼 나 혼자 먹는다?”
태연하게 케이크까지 먹는 모습을 보니 제 복장만 터져나갔다.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도리질 치던 여인, 다프넬은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모험가 행세를 하는 마왕과 성녀가 보였다. 행복해보이는 성녀의 옆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이길 수 있는 판을 손쉽게 뒤엎었다. 빠르게 패배를 승복한 태도에 다프넬은 배신감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마족을 대적해야 할 성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한때 성녀를 동경하고 숭배했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음음, 진짜 단 거 먹으니까 기분 좋아진다.”
“내가 더 화가 나는 건 뭔줄 알아? 최악의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용사님이 내 눈앞에 있다는 거야.”
다프넬은 톡 쏘며 눈앞에 있는 이번 대의 용사 레티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전 대의 용사 렉스 에티아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성별도 다르고 외모도 살짝 다르지만. 렉스를 아는 자가 보면 남매로 오해할 만 했다.
다프넬 또한 렉스를 알고 있었기에 레티나를 보자마자 그가 다시 살아돌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랬다.
“아직 때가 아니야.”
달각, 차를 음미하고 있던 레티나는 천천히 눈을 올렸다. 황금을 닮은 눈동자는 총명하게 빛났다.
고갯짓에 따라 높게 올려묶은 갈색 머리칼은 산들거렸다. 호전적인 기세가 느껴지자 왠지 렉스가 생각났다.
쟤도 렉스처럼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니까. 다프넬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에 찻잔 위를 엄지로 쓰다듬던 레티나는 얇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지켜보자. 성녀가 정말 배신했는지는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아.”
“레티나, 너 참 쉽게 쉽게 말한다? 어떻게 만나려고?!”
“아, 마왕도 함께 보겠네?”
“얘는 진짜!”
용사 레티나는 여유롭게 남은 찻물을 마신다.
다프넬은 헛소리하는 친우를 보면서 두통이 올라와, 결국 머리를 짚는다.
‘정말 오랜간만에 보겠어.’
레티나는 목덜미를 손끝으로 짚었다. 그 순간 번뜩거리며 심장에 꿰뚫는 아픔이 느껴졌다.
시선은 불순물처럼 천천히 가라앉았고. 이에 따라 고대 성물을 품은 귀걸이가 사락, 흔들린다.
***
그 시각 마을 중앙 쉼터.
‘쓸데없는 것 밖에 없군.’
이카루트는 샅샅이 게시판을 살펴보았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광고 전단지와 마을 소식글. 그 외에 마물 습격에 관련된 주의 공고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용사의 용 자가 쓰여진 건 하나도 없었다.
“흥흥♡ 정말 쓸데없는 것 뿐이네♡”
“당신, 조금 말을 예쁘게 하면 안되나요? 여긴 마을 주민들이 서로 소통하는 창구라고요.”
“하찮은 가축들 주제에 말이 많다♡ 그런게 꼭 필요해? ”
“……!일부러 그러신 거죠?!”
“♡”
레실리아가 눈을 치켜뜨자, 릴리트는 모른 척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상성이 안맞는 관계가 붙어있으니 자잘한 말다툼이 이어진다. 근처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흘끔거릴 정도로 옥신각신한다.
“모험가님 혹시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마침 마을 주민이 이카루트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흘끔 보니, 나이가 지긋한 노인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을에 산 것 같았다.
용사에 대해 잘 알겠군. 짧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루트는 필요한 말만 했다.
“용사를 찾고 있었다.”
“허허, 이것 참….곤란한 질문을 하셨군요.”
너털웃음을 터트린 노인은 주름진 입가를 우물거린다.
레실리아와 릴리트도 궁금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고. 짧은 침묵 끝에 입술이 떨어졌다.
“이번 대 용사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이 전(前) 대 용사님의 고향이라고 소문나서부터 유동 인구도 많아졌고 순례하는 모험가들로 북적이지요.”
노인은 이곳에 있는 이번 대 용사의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일찍히 수하들을 풀어놓길 잘했군. 벨페고르의 실험체를 발견한 이카루트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가려던 그때 눈치없는 노인은 말을 자꾸 이어갔다.
“렉스 님은 어릴 적부터 용맹한 분이셨지요. 하나 뿐인 여동생을 지킨다고 목검을 들고 얼마나 골목 거리를 쑤시고 다녔는지…허허, 어른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제일 먼저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죠.”
전부 알고 있었다. 용사 플레이를 수없이 하면서, 돌진적이고 쓸데없이 정의로운 성격 때문에 손해도 봤다.
오죽하면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용사를 호구라고 불렀다. 퀘스트를 할 때마다 자꾸 바보처럼 부탁을 응해주는 용사가 짜증났지만.
경험치와 필요한 보상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수행했다.
“훗날, 성녀님께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장차 영웅이 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하필, 그 마족 놈이….”
푸훗, 릴리트는 입가에 손을 대고 조용히 웃음을 흘렸고.
레실리아는 불편한듯 곁눈질하기 바쁘다. 정작 용사를 죽인 마왕은 아무렇지 않게 들었다.
노인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슬픔에 젖은 노인을 마주한 성녀는 주름진 손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성격상 아파하는 인간을 두고 보지 못했다.
“할아버님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허허…. 지나간 일이지만 허무하게 죽은 렉스 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군요….”
“분명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셨을 거에요. 만물을 창조하신 여신, 가이아 님께서 가진 운명의 수레바퀴를 통해 영혼은 다시 돌아오는 법이니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험가 님.”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다한들, 성녀는 성녀였다.
레실리아의 자비로운 미소에 노인은 감동을 받은듯 양손을 모은다.
“일단 알겠다.”
“무슨 일이신지 몰라도 꼭 용사님을 찾아뵙길 빕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은 허허, 웃으며 양손을 모은채 고개를 숙였다. 모험가에 대한 예우였다.
‘어디 간 거냐. 렉스 에티아.’
시간이 없었다. 실론드 마을을 기점으로 사라진 용사의 기운.
빨리 좇지 않으면 또 다시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이카루트의 발길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자, 성녀도 다급히 따라갔다.
“용사가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네요♡ 원래 이곳에 없던 사람처럼♡”
“모든 방법을 동원하서라도 찾아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릴리트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연기처럼 파스슥 사라졌다.
아마 낮잠을 자고 있을 인간들의 꿈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서큐버스가 갑자기 흔적없이 사라지자, 레실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마을 주민, 아니 주민인 척 하는 벨페고르의 실험체들은 자기 일만 하였다. 성녀는 그제야 마을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레실리아 아르넬.”
철그럭! 이카루트는 망토로 가려진 목줄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한다.
살짝 당기는 힘에 레실리아는 순순히 이끌렸다. 좁은 사잇길로 들어간 둘. 바싹 붙은 여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용사의 기운을 찾아라. 찾는다면 네가 기뻐할 보상을 주지.”
보상이란 말에 허벅지가 틈없이 달라붙는다.
반절 감긴 청안은 야릇한 기대감이 조금 섞여 있었고. 숨결이 제법 거칠었다.
“네, 주인님…♡”
레실리아는 한층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늦은 저녁. 마을 건물에서 하나 둘 씩 등이 꺼질 무렵.
쉼터에 앉아있는 두 명의 표정에 그림자가 짙어졌다.
“…죄송합니다 주인니임….”
용서를 빌던 레실리아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카루트는 성녀를 대동한 채 마을 곳곳 돌아다녔다. 제법 크고 넓은 마을 내부를 샅샅이 찾아가 신성력을 퍼트렸다.
안 가본 건물이 없을 정도로 전부 얼굴을 내비쳤다.
“용사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레실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추욱 늘어진 어깨, 꼼지락대는 손가락은 마치 칭찬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용사가 당최 어떤 방법으로 꼭꼭 숨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성녀 또한 당혹스러웠다. 마법 유물로 기운을 감춰둔다한들, 신성력 앞에서는 다 들통났다.
투명한 거울같은 신성력 앞에서 용사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정말 용사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기운은 분명히 느껴질 텐데.”
죽음을 암시한 말이 나오자, 성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때 발견한 기운은 뭐였지.’
그 독특한 오오라가 가짜일리가 없다. 이카루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사이, 두 손을 모은 레실리아는 얼굴을 숙였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릿결은 표정을 감추려는듯 그늘이 깊게 드리워졌다.
“저기…실례합니다…?”
“…?!”
한 여인이 슬며시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레실리아가 화들짝 놀라자 되러 놀란듯 뒷걸음을 친다.
이어 살풋 입가에 손을 댄다.
“앗! 갑자기 놀래켜서 죄송해요. 오후부터 두 분 쭉 봤는데, 숙박할 곳이 없어서 그런가…싶어서.”
“아….”
벌써 한밤중이 되었다.
구름에 파묻힌 달빛이 살짝 새어나오자, 레실리아는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줄 몰랐는듯 안절부절 못했다.
아직 게이트가 통합되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하루라는 시간이 소모되었고. 용사를 찾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마족인 이카루트는 탄탄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 병에 걸리지 않지만. 성녀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최근 생겨난 마물 둥지 때문에 마을 내 여관은 용병단으로 전부 꽉 차 있을 거에요.”
“마물 둥지라니요…?설마 마물이 또 등장했나요?”
“네! 모험 중간에 마을로 오신 것 같은데….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잠깐 저희 집에 머무르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서슴없이 제 집을 숙소로 제안한 여인은 생긋 웃는다.
그러자 이카루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웃거렸다. 콧잔등을 함께 찡그리니, 왠지 누군가와 닮았다.
‘누구 닮았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자, 새하얀 달빛이 쉼터를 내리쬐었다.
옅은 갈색의 단발 펌헤어 스타일. 색 바랜것 같은 금안은 순하게 쳐져 있었고.
달라붙은 옷 위로 드러난 탱탱한 젖라인 아래로 옆으로 살짝 휘어진 허리.
커다란 둔부를 드러내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용사님…?”
“네?”
레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아는 용사의 얼굴과 판박이었다.
그리고 이카루트 또한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저, 전 용사님이 아닌걸요?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용사님이 아닌, 루시 에티아라고 해요.”
튜토리얼 퀘스트에서 죽었던 용사의 여동생.
루시 에티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