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호텔로 와. 지금 당장.”
“지금! 알았어! 잠깐만 나 아직 화장 안 해서….”
“필요 없으니까 그냥 바로 와. 당장.”
“아! 응!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이현우는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포랑이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가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확실히…. 주종관계까진 아니더라도 갑을관계는 명확히 하신 것 같네요.”
“네.”
“좋아요. 잘못했을 때는 체벌도 꼬박꼬박했고. 그런데도 옆에 있으려 한다니. 집착과 애정을 이용하면 충분히 조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방으로 올라가서 기다릴까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서요.”
그 말에 이현우는 곧장 다른 방을 빌렸다.
장기투숙객인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직원이 있었지만, 옆에 있는 포랑을 보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1104호의 옆방 키를 내주었다.
“오늘은 간단하게 맛만 보도록 하죠. 어차피 본격적으로 조교를 하려면 제 바운더리 안에서 해야 하니까요. 오늘은 조교 대상자…. 이예린의 성향과 성격 그리고 반응 등을 심층 분석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렇게 하시죠.”
“조교 현황은 매일 보고를 드릴 거지만, 원하신다면 매일 참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네요. 이예린이 의뢰인에게 큰 집착을 품고 있는 만큼 조교 현장에 자리하고 있으면 조교 진행도가 높아지거든요.”
“매일….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는 것이면 몰라도요.”
“그래도 괜찮아요. 선택 사항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오늘 설득에 대해선 최선을 다해주셔야 합니다. 이예린이 조교를 받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조교 대상자가 조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수락할 겁니다.”
이현우가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이예린이 무조건 승낙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걸 생각이었다.
“믿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혹시나 해서 드리는 질문인데…. 혹시 수갑이나 안대 같은 SM 물품이 있을까요? 제가 오늘 몸만 오느라 물품은 챙겨오지 못해서요. 없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분위기를 챙기는 것이 더 좋아서요.”
포랑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있다.
마침, 얼마 전에 성인용품점에서 그런 용품들을 잔뜩 구매했었다.
“있어요. 잠시만요. 원래 제 방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가져올게요.”
이현우가 1104호로 돌아왔다.
침대에선 아직도 김하나가 곤히 잠을 자고 있다.
구석에는 혹시라도 룸 메이드들이 열어볼까 싶어 엄중히 봉인해놓은 상자가 있었다.
봉인이라고 해봐야 걸쇠를 닫아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현우는 그 상자를 통째로 들고 나섰다.
그리고 포랑에게 다가갔다.
“호오…. 제법 본격적이네요? 바닐라라고 들었는데.”
금발에 가까운 밝은 노란색 머리를 꼬며 기다리고 있던 포랑은 상자를 보고 반색했다.
수갑부터 안대 그리고 볼 개그나 채찍까지.
웬만한 물품은 다 들어 있었다.
“저기…. 아까부터 바닐라, 바닐라 하시던데. 바닐라가 뭡니까?”
“아, 죄송해요. SM과 관계없는 무 성향자를 바닐라라고 하거든요. 입버릇이라. 하여튼, 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예린이 오면 뒤쪽에 그냥 서 있을 거예요. 이예린이 조교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말하기 시작할 테니, 호흡 맞춰주세요.”
그리 말한 포랑이 준비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상자를 뒤져 수갑 등의 물품을 꺼내 침대 위에 잘 보이도록 놓는다.
그리고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태에 이현우가 살짝 당황했지만 놀란 티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보여줬던 사진들에서 그녀가 조교사 일을 할 때 어떤 복장으로 있는지 알아서였다.
‘평소에도 저렇게 입고 다니나….’
놀랍게도 그녀는 가죽 재킷 안에 얇은 가죽조끼? 아니면 코르셋? 한 장만을 입은 채였다.
끝이 의문형인 이유는 옷의 형태가 평범한 것과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흉부를 조이고 어깨끈이 있긴 한데….
가슴을 전혀 가려주지 못하는 옷이다.
적당히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가죽조끼 바깥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젖꼭지 끝에 달린 피어싱이었다.
저런 곳까지 피어싱을 하면 안 아픈가?
이현우가 그런 감상을 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음에도, 포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옷을 마저 벗는다.
가죽 바지 안에는 탄력적인 엉덩이가 있었다.
팬티는 가죽이 아닌 일반적인 T팬티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모자를 벗고 끈으로 머리를 당겨 묶는다.
조교사 패션의 완성이었다.
‘변태 같아 보이기보다는…. 세 보이긴 하네.’
얼굴과 젖꼭지에 있는 피어싱.
몸 여기저기에 있는 문신.
그리고 전문적인 복장.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섹슈얼하게 다가오기보다는 전문가로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왔다.
“현우야!”
“들어와.”
“응! 응! 근데 왜 옆방이야? 원래 방은…? 누구…?”
이현우의 품에 안기며 아양을 부리던 이예린.
그녀는 방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기대 서있는 수상한 복장의 여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는 여자가 이현우랑 한방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젖가슴까지 까놓고 있다니?
그녀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린다.
“일단 지금은 신경 끄고. 이리 와서 앉아.”
“하, 하지만….”
“내 말 안 들을 거야?”
“아, 아니야! 앉을게! 여기 앉으면 될까?”
달링은 포랑을 신경 쓰면서도 이현우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다.
이현우는 그녀를 마주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조교를 받았으면 해.”
“조교…?”
“네 행동과 정신머리를 고치기 위한 일이야. 너도 네가 미쳤다는 건 알고 있지? 정신병. 있는 거 알고 있잖아.”
“으응….”
이예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그녀가 미쳤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현우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뭔가 좀 이상했다.
“나는 그동안 그걸 고쳐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그런데 고쳐지지가 않았지. 패보기도 하고, 설득해보기도 하고. 이런 식이면 우리 끝은 절연하고 다시 보진 않는 것이 되겠지.”
“아니! 현우야! 그건…!”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차분하게 들어. 네가 이 상태로 계속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거야. 근데 내가 고치려고 하고 있잖아? 아직 널 버리지는 않았어.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조교를 해보려는 거야.”
“으응…. 근데 조교라는 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맞아?”
이예린이 SM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바닐라들이 생각하는 SM이란 대개 묶고, 때리고, 명령하고, 복종하는 1차원 적인 것이었다.
“맞아. 그런데 BDSM이 생각보다 심오하더라고. 너 같은 정신병자도 주인의 말을 듣게 할 수 있을 만큼.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일반적인 후원자와 BJ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로 관계가 새로 정립되는 거야. 이 세상에 나를 주인으로 두는 건 너뿐이고. 내 노예가 되는 건 오로지 너뿐인 거지.”
이현우의 설득이 점점 먹혀들고 있었다.
오로지 단둘이서만 이뤄나가는 특별한 관계라니.
그거참 멋지고 끌리는 어휘였다.
노예라는 단어가 좀 걸리긴 하지만, 뭐 어떤가.
이현우를 위해서라면 성노예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은 것 같아. 그러면 현우 네가 날 조교 해준다는 거지? 둘이서만? 그럼 만날 시간이 늘어나겠네?”
이예린이 좋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이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1차원적인 SM이라면 나도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완전히 널 조교 하지는 못할 거라고 봐. 그래서 전문가를 불렀어.”
“전문가…?”
이예린의 시선이 포랑에게로 돌려졌다.
그녀의 광기 어린 시선에 포랑도 지지 않고 맞서 바라봐준다.
두 사람의 눈길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어, 전문 조교사야. 날 대신해서 널 조교 해 줄.”
“그런 거 싫어! 난 현우 너랑 붙어있는 게 좋지, 저런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조교? 하….”
“힘들겠지. 아프기도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조교를 완벽히 받아내고. 내 노예로 다시 태어나면. 내 옆에 있게 해줄게. 한집에서 같이 살기도 할 거야. 네가 나를 위해서 수발을 들고. 아침밥도 차려주고. 씻겨 주는 것은 물론. 밤에도 봉사하는 거지.”
“하, 한 집에서 같이…?”
이건 이예린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녀가 이현우와 함께 지내는 것을 얼마나 꿈꿨던가.
이제 와선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꿈이 이뤄진다고?
조교가 뭐든, 저 여자가 뭔 짓을 하든 이건 받아들여야 했다.
“할래! 무조건 해!”
“잘 생각하고 대답해. 내가 조교 해주는 게 아니라, 전문 조교사인 포랑이 조교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과정은 네 성격상 무조건 힘들고 아프고 괴로울 거야. 그래도 할 거야?”
이예린과 한집에서 산다는 결론은 포랑과 이야기를 나눈 후 생각한 것이었다.
조금 성급하긴 했지만, 짧은 생각으로 나온 결론은 아니었다.
포랑의 말대로 이예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한 집에 사는 것 정도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겠지.
중세 귀족들처럼 말 잘 듣고,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는 메이드와 함께 사는 것 아닌가.
이현우의 계획이 실현되려면 포랑이 이예린을 완벽하게 조교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이현우는 그녀를 믿었다.
아니, 그녀의 전문성을 꿰뚫어 본 자신의 안목과 그녀를 소개해준 밤바라기 형님을 믿었다.
잘될 것이다.
만약에 안 되면?
그때는 정말 이예린과의 인연을 끝장내야겠지.
“할게! 무조건 버틸게! 너랑 같이 살려면 조교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현우야. 누나만 믿어.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버텨줄 테니까. 에헤헤헷.”
이예린이 호언장담을 하며 조교를 수락했다.
이현우는 잘 부탁한다는 간절함을 담아 포랑을 돌아보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포랑이 움직인다.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또각또각하며 걸어온다.
분명,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데.
어째서 또각또각 소리가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포랑이 걸을 때마다 젖꼭지 끝의 링 피어스가 흔들렸다.
그녀는 젖꼭지가 이예린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예린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이예린이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반가워. 내 이름은 포랑. 하지만 넌 그렇게 부를 일 없을 거니까 잊어버려도 좋아. 너도 한 미친년 한다면서? 나도 미친년으로 불리는데. 앞으로가 재밌겠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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