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으헤헤헷.”
실소가 새어 나왔다.
없게 보일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
‘미치겠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이현우의 뇌에서 호르몬이 뿜뿜 나왔다.
보상중추 영역이 활성화되며 기쁨과 설렘, 쾌감이 차올랐다.
마약을 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다.
이래서 사랑은 마약과 같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섹스와는 전혀 다른 기분 좋음.
이현우는 정서적 쾌락에 환희를 느꼈다.
“다시,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
또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서 부탁했다.
“에…? 못 들으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또 듣고 싶어서.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
“으으….”
이유나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이현우가 바라는 말은 다시 해주었다.
“좋아요. 우리 오늘부터 1일 해요….”
“응. 나도 좋아. 고마워.”
아쉽게도, 처음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 환희가 퍼지진 않았다.
그래도 기분 좋다.
이현우는 헤죽헤죽 웃으며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유나가 내 여자친구네?”
“네…. 저, 회장님. 저는 연애가 처음이라서 전부 다 서툴 거예요. 그래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아하하, 하하하핫.”
이유나는 부족해도 잘 봐달라는 의미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현우에겐 다르게 들렸다.
그가 또 이유나의 처음을 차지했다.
첫 데이트, 첫 드라이브, 첫 한강공원, 첫 남산타워.
그리고 첫 연애까지.
연애를 계속 지속하는 한.
이유나의 모든 것은 이현우가 처음이다.
이보다 남자의 남성성을 채워주는 일이 있을까?
“왜, 왜? 웃으세요? 제 말에 웃긴 부분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아니.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아서 웃은 거야.”
이현우는 그저 좋다는 듯 웃었고.
이유나는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뭔가 좀 기쁘다.
사귄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좋아해 주니까.
가슴 속에 뭔가 말랑말랑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인 걸까?
“좀 신기해요.”
“뭐가?”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럼 어떤 식의 연애를 상상했는데?”
“막 만화처럼 길 가다가 부딪쳐서 아앗, 너는…. 이런 정도까진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학교나 모임 같은 곳에서 만나서. 서로 알아가다가. 썸도 타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는…. 제 첫 연애는 분명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모쏠의 흔한 상상이었다.
이현우도 모쏠이었기에 어느 정도 이유나의 생각에 공감한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네? 회장님 첫 연애 때는 어땠는데요?”
“어? 응? 나 네가 첫 여자친구인데…?”
이거 좀 없어 보이나?
남자는 여자 모쏠아다를 좋아하지만, 여자는 남자 모쏠아다를 싫어한다는 걸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모쏠이라고만하고 아다라곤 하지 말까?
그러다 이상한 오해를 하면….
말을 뱉고 어떻게 수습할까 고민하던 이현우.
그는 놀라워하는 이유나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에에? 회장님 모쏠이었어요? 진짜? 거짓말이죠!”
“아니. 진짜야. 가끔 만나는 여자는 있어도. 여자친구라고 딱 못 박아둔 사람은 없어. 진짜 네가 처음이야.”
모쏠까진 어떻게든 괜찮다.
하지만 아다는 안 된다.
그건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헐. 회장님. 나쁜 남자였어요? 하긴…. 그렇게 돈이 많으면….”
이유나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겉으로 보면 이현우를 탓하는 것 같은 말투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완전 달랐다.
이현우는 돈이 많다.
그만큼 여자도 많을 것이다.
후원하는 여캠들만 보아도 그렇지 않나.
그런데 그 많은 여자를 만나고도 여자친구는 이유나뿐이었다고.
고백한 건 너뿐이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그가 이제껏 만나왔던 여자 중 이유나가 최고라는 것이다.
“아…!”
기분은 좋은데, 기분 좋은 걸 티 내기 싫어서 탓하는 척을 하던 이유나의 머리에 뭔가 떠올랐다.
후원하는 여자가 많다는 말은….
“회장님.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지. 뭐든 다 물어봐.”
“회장님이 후원하는 다른 여캠들요. 그 사람들하고도 이렇게 드라이브해요?”
이전까진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현우가 후원하는 여캠이 많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미션만 잘 걸어주면 되었다.
그러나 이현우의 여자친구가 되니, 다른 여캠들의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이현우의 주위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게 기분이 엄청 나쁘다.
이런 게 질투인가?
공부 잘하는 애에 대한 승부욕이 아니라.
여자 대 여자의 질투심이라니.
이유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 어?”
드물게.
이현우가 당황했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언젠가 이런 질문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미친년인 달링은 질투심에 칼을 휘두르려했고.
안 미친년인 여우찡도 질투심에 짓궃은 장난을 매번 치지 않나.
게다가 순둥한 편인 빵잇또한 다른 여캠 이야기가 나오면 뾰루퉁한다.
여자에게 질투심은 패시브였다.
당연히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다른 여캠과의 관계를 추궁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첫날부터 그럴 줄은 몰랐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설득할 생각이었다.
코인 무한 능력에 관한 것을 다 풀어놓지는 못해도.
모종의 사정이 있어 코인을 쏘고 캐시백을 받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쉽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매주 꽂히는 금액을 보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런 질문을?
심히 당황스러웠다.
“당황하는 것 보니까 맞네. 혹시…. 설마, 다른 여캠들한테도 사귀자고 그러는 거예요?”
“아냐, 아냐. 맹세코 드라이브 하는 건 네가 처음이었고. 다른 여자랑 드라이브한 적도 없어. 그리고 네가 첫 연애라니까?”
진실이다.
다른 여자들하고는 드라이브라기보단.
떡을 치기 위해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흐으음….”
이유나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현우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선서하듯 팔을 들어 올렸다.
“선서. 선서자 이현우는 지금 이 시간부터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아냐. 서로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 원래 댐도 자그마한 구멍 하나에 무너지는 법이라고 했어. 나 정말 내 모든 걸 다 걸고 말할게. 네가 첫 연애 상대고. 드라이브 한 것도 네가 처음이고. 고백한 것도 내 인성 처음이었어. 다른 여캠들하고 가끔 보는 건 사실이야. 만날 때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그런데 절대로 데이트하듯 드라이브 한 적은 없어. 남산 타워에 간 적도 없고, 한강 공원에 간 적도 없어. 진짜야.”
이현우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진실성 100퍼센트인 건 당연했다.
말을 하지 않은 부분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건 서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 밝히지 않는 것이 나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래도…. 약속 하나만 해줘요. 저 아프게 하지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당연하지. 내가 내 여자를 아프게 할 리가 없잖아.”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심야의 청계천.
달빛조차 수줍어 모습을 감췄지만.
청계천 산책로의 가로등은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설렘을 느끼며 걸어가는 남녀가 있었다.
이현우와 이유나.
별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고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취향이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즐겁다.
연애를 처음 하는 이현우도.
모쏠이었던 이유나도.
설렘과 사랑이라는 감정에 천천히 스며드는 중이다.
“헐. 진짜 디지몬도 안 봤어?”
“그거 제 세대 아니라서요. 그래도 이름은 알아요. 저 어릴 때는 짱구나 슈가슈가룬 같은 거 봤어요.”
“짱구는 나도 봤어. 지금도 보는 애들 있을걸? 근데…. 슈가슈가룬은 뭔지 모르겠네.”
“헐. 회장님…. 생각보다 틀이었네요?”
“야! 아무리 그래도 틀이 뭐야. 우리 나이 차이 생각보다 얼마 안 나거든?”
이현우가 찔리는 듯 벌컥 화를 냈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이유나는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현우도 보통의 커플처럼 상대방과 공감하고, 상대방이 경험하고 느낀 걸 알고 싶어 했다.
세대 차이가 난다며 정서적 교류가 차단되는 건 원치 않았다.
“흐음, 뭐어…. 그렇다고 치죠. 아! 아이스크림이다! 회장님. 저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밥 안 먹고? 아이스크림 먹게?”
“먹고 또 먹으면 되죠.”
그건 맞는 말이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이스크림 정도로 배가 찰 리도 없었다.
꼰대가 되기 싫은 이현우는 당장 지갑을 열었다.
딸기 맛 소프트아이스크림과 초코 맛 소프트아이스크림이 각자의 손에 들렸다.
이유나가 행복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다.
저리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이현우도 호기심이 생긴다.
딸기 맛이 더 맛있는 건가?
“그렇게 맛있어?”
“단 건 언제나 진리예요.”
“그래? 한 입씩 바꿔 먹을까? 딸기 맛도 궁금한데.”
이현우가 그리 말하며 몸을 숙여 이유나의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이유나의 몸이 굳는다.
“에? 이거….”
간접 키스.
애들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애 부분에 있어 경험치가 0인 이유나는 애가 맞았다.
“아…. 싫었어? 미안.”
간…. 이라는 말이 이현우의 귀에도 들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현우는 귀염움을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귀여워.
너무 귀엽다.
사람이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걸까?
가슴이 콩콩하고 뛴다.
진짜 미쳤나?
왜 이러지.
고백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남산 타워에서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단둘이 손을 잡고 걸었던 그날.
그날부터 심장이 좀 많이 이상하다.
“아니, 싫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부끄러워서.
이유나가 뒷말을 삼켰다.
고작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것으로 간접 키스를 생각했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였다.
“그래? 그럼 내 거 먹어. 나도 한 입 먹었으니까.”
“에에에에?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초코 맛 싫어해요!”
거짓말이다.
단 것을 신봉하는 이유나에게 초콜릿은 국가에서 허락한 마약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내뱉는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조차 이현우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앗! 회장님! 저 다리 밑에 조명 엄청 예뻐요!”
“그러네. 우리 저기서 사진 찍을까?”
“사진….”
사진이라는 말에 이유나가 볼을 붉혔다.
그녀가 ‘우리 첫 사진이네요.’ 라는 말을 아주 작게 읊조렸다.
그녀도 설레고 있는 것 같아 이현우도 기뻤다.
“잘 찍어야겠네. 한 팔천 장 찍고. 그중에서 제일 잘 나온 거로 고를까?”
“아하하핫. 어떻게 팔천 장이나 찍어요. 그냥 소소하게 다섯 장?”
“그것도 좋아.”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다리 조명 아래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메라 어플을 켜고 셀카를 찍었다.
두근두근.
사진을 찍기 위해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평소의 이현우였다면 고개를 돌려 뽀뽀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은 깁스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찰칵.
어색한 두 사람의 얼굴이 사진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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