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오늘도 수고했어.
방송이 끝난 후.
이현우는 드물게 선톡을 날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ㅋㅋㅋㅋ
-난 그냥 방송 본 것밖에 없는데?
-진상 처리해주셨잖아요.
-처음부터 얼마나 귀찮게 굴던지.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은 많고.
-3만 개나 쐈는데 식데 같은 거 없냐고 그러고.
-번호 알려달라고, 모닝콜 서비스 없냐고 막 하고.
-하여튼 정말 진상이었다니까요?
쮸쮸바의 진상질에 환멸이 났는지.
이유나가 분노의 메시지를 쏟아냈다.
-환불 처리는 마무리했으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지금부터 뭐 할 거야?
-네!
-밥 먹고 뉴튜브 보면서 뒹굴거릴 것 같아요.
-그럼 드라이브나 갈까?
-저번에 가기로 했던 거.
-지금요?
-어.
-지금.
-다음 주부터 학교 간다며?
-그럼 평일 밤에 놀 시간은 더 이상 없을 거 아니야.
-아….
-그건 맞아요.
-드라이브하면서 밥도 먹고, 경치 구경도 하고.
-시간도 좀 보내다가 오자.
-너랑 같이 가려고 서울 드라이브 코스도 많이 검색해봤거든.
-싫어?
-아, 아뇨!
-싫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방송 때문에 체력이 좀 힘들어서요.
-금방 준비할게요.
-언제 오실 거예요?
-20분 안에 도착해.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드라이브 약속이었지만.
이유나는 튕기지 않고 수락했다.
이현우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검은색 스포츠카가 야밤의 도로를 질주한다.
“어, 지훈아. 또 보네. 오늘도 누나랑 드라이브 좀 다녀올게.”
“아…. 네. 형.”
20분 만에 도착한 이유나의 집 앞.
그날처럼 이유나는 남동생과 함께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날과 달리 이지훈의 반응은 순둥순둥했다.
이현우는 그를 위해 오늘도 지갑에서 5만 원권을 뽑았다.
“혼자 둬서 미안해. 자리가 두 자리뿐이라. 나중에 다른 차 사면 그땐 같이 드라이브가자.”
“아니에요. 두 사람 데이트하는 건데, 제가 방해하면 되나요. 감사합니다. 맛있는 거 시켜 먹을게요.”
3, 40만 원 되는 돈에 이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평생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그였다.
그러나 그건 부모님의 지원 덕분이었다는 걸 한국에 와서 깨달았다.
부모님이 없는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 한국에서의 생활은 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다.
취미 생활 없이.
먹고 자고 싸기만 해도 한 달에 이백만 원 가까운 생활비가 들었다.
이유나와 이지훈, 둘 다 한창 먹을 때인 고등학생이지 않은가.
여기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 취미생활이라도 한다면 들어가는 돈은 배가 되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이현우는 남매의 희망이자, 유일한 등불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정말 어찌 되었을지.
엄마가 쥐여주었던 돈을 다 썼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이현우가 주었던 30만 원과 그가 후원해준 코인을 환전한 돈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젠 이지훈도 알고 있었다.
남매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현우가 있어야 한다.
“야!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그냥 드라이브지.”
데이트라는 말에 이유나가 벌컥 화를 냈다.
얼굴이 살짝 빨간 게 이 상황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어…. 데이트 아니에요?”
“데이트든 드라이브든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갈게. 지훈아, 집 잘 보고 있어. 유나는 얼른 타.”
“네. 가세요.”
이유나가 조수석에 올라타고.
이현우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만나자마자?
이유나는 당황스러워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부끄러워서 데이트는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이미 두 번째 데이트이기도 했고.
포옹도 했다.
그리고 이현우는 매일 질리지도 않고 고백하는 중이지 않던가.
장난스럽게 던져보는 느낌이 커서 매일 거절하긴 하지만.
“저번엔 한강 공원 갔으니까. 오늘은 남산으로 가볼까?”
“…. 네….”
활기찬 성격을 가진 그녀답지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손잡는 것 정도로 이런 반응이라니.
너무 귀엽다.
“유나야. 너는 남산도 가본 적 없겠네.”
“네? 아! 맞아요. 한국에 온 게 몇 번 되지 않으니까요. 올 때마다 친척만 보고 다시 돌아가기 바빴죠.”
“그럼 설명 좀 해줘야겠네. 우선 남산에서 보는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그리고 남산에는 연인들이 자물쇠를 거는 문화가 있는 거 알아?”
“네. 알아요. 드라마에서 봤어요. 남산 루프 테라스에 자물쇠를 걸고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잖아요. 꽤 낭만적인 일이라 생각해요.”
“그럼 오늘 우리도 자물쇠 하나 걸까?”
“엣…? 아니, 그건 연인들이나 하는 거 아니에요…?”
활기차게 대답하던 이유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진다.
그리고 붙잡힌 손도 꼼지락거렸다.
귀엽다.
너무 귀엽다.
이제까지 만났던 다른 여캠들과는 너무 다른 반응.
이현우의 심장도 두근거린다.
마치 그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달까?
풋풋한 첫사랑을 하는 듯한 설렘이 가슴에 깃들었다.
“그럼 네가 하나만 해주면 되겠네.”
“뭐를요…?”
“허락. 내가 매번 고백하잖아. 그때 네가 받아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진짜아. 또 장난치지 마세요!”
매번 진지하지 않게 던지니까 진짜 장난이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렇게 넘어가고 싶은 건가?
“싫으면 오늘 하루만 연인 할까?”
“하루만요?”
“응. 지금 이 데이트 할 동안만. 그럼 자물쇠를 걸어도 되지 않겠어? 솔직히 해보고 싶지 않아? 남산에 자물쇠 거는 거.”
“음….”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재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이유나가 턱에 손가락을 대며 고민했다.
하루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현우가 싫은 것도 아니고.
장난으로 고백하는 게 싫은 것뿐이니까.
아마 이현우가 좋은 분위기에서 진지하게 고백한다면 받아….
“와아악! 이건 아니고!”
“어? 아니야? 그럼 남산은 포기할까?”
“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니, 해요! 하루 연인! 좋아요. 뭐 하루니까요!”
“하핫, 그래. 그럼 지금부터 연인 사이인 거지?”
“아, 네, 네….”
연인.
묘한 울림이 있는 단어였다.
오늘 하루뿐인 임시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할까.
안 그래도 이현우에게 관심과 후원을 받고, 맹렬한 대시를 받고 있던 이유나의 가슴이 뛰었다.
아까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심장이 움직였다.
좀 더 말랑말랑하고 음악적으로 뛴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찾아온 설렘.
왜인지 숨이 조금 빨라지고.
얼굴엔 홍조가 낀다.
부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좋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자기야.”
“네? 네에?”
“하하핫, 뭘 그리 놀라? 연인끼리 자기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하, 하지만 겨우 하루짜리인데….”
“그래도 연인은 연인이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자기도 그러지 말고 호칭으로 불러. 뭐든 좋아. 오빠, 자기, 여보. 뭐라고 부르고 싶어?”
“아….”
“힘들면 천천히 해도 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자물쇠 걸고 야경 좀 보다가 돈까스 먹을까? 남산 돈까스가 유명하던데.”
검은색 스포츠카는 남산 주위를 부드럽게 달렸다.
도로 위를 달리는 드라이브.
차 안에서는 설렘과 기분 좋은 흥분이 가득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도착한 남산 주차장.
차에서 내리느라 잠시 잡았던 손을 놓아야 했지만.
차에서 내린 이현우가 다시 이유나의 옆에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사람이 꽤 있네요?”
“유명한 데이트 코스니까. 사람은 좀 많아도, 그만큼 좋은 곳이라는 거겠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손잡는 것에 익숙해진 듯.
이유나는 아까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만 말한다.
하지만 경직되어있는 팔과 등 그리고 빨간 볼이 아직도 설렘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것도 그렇네요….”
“저기서 자물쇠 판다. 가보자.”
또각또각.
이유나의 단화 굽이 돌바닥에 울리는 소리.
이현우의 발소리.
두 사람이 걷는 소리가 얽혔다.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는 줄어들었다.
항상 대화를 먼저 거는 이현우도.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유나도.
주변은 소란스럽다.
하지만, 둘에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남산 타워의 오르막길.
그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서울의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옆 사람이 너무나 신경 쓰였으니까.
“여기에 걸까?”
자물쇠가 한가득 걸려있는 남산타워 루프 테라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열리지 않았던, 이현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제야 닫혀있던 이유나의 입도 열린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상하다.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이건 가짜인데.
예행연습이고, 일일 데이트, 일일 연인일 뿐이다.
그런데 진짜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가슴이 뛴다.
“이걸로 우리 사랑도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사, 사랑이요?”
또 장난치는 건가?
이유나가 놀란 눈으로 이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현우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이제까지 장난을 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다.
이유나라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과 외모에 끌려 방송을 찾았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캐시백 계약과 색다른 재미를 위해 계속 후원했다.
하지만 그녀를 점차 알게 되고, 순수하면서도 밝은 모습에 점점 마음이 끌렸다.
“유나야. 나랑 사귀자. 진심이야.”
“에? 에…?”
빠꾸 없는 돌직구에 이유나가 당황하며 눈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녀가 연애 경험이나 남자 경험이 있었다면 이처럼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뭔지, 어떤지도 금세 눈치챘었을 거다.
이현우에게 명백히 호감을 느끼고 있고, 그와 사귀는 것에 그리 거부감을 나타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남자와 손을 잡는 것도 처음이고.
남산타워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고백을 받는 건….
솔직히 처음은 아니지만,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좋은 건지.
기쁜 건지.
싫은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헷갈렸다.
“자, 잠시만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지. 얼마든지 생각해봐도 좋아.”
“아니아니, 조금만 생각해본다는 게 아니라. 날짜를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어요. 솔직히 지금 좀 많이 당황스러워서요. 아니, 싫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회장님이 지금 이렇게 고백을 할 줄은 몰라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해야 하나?”
속사포 랩처럼 말을 내뱉는 이유나의 모습에 이현우가 피식 웃었다.
진심을 가득 담은 고백이었기에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장하고 당황하는 이유나의 모습을 보니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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