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3 4 / 백 년 전에 이 세상에 온 어느 걸리버에게 (1)
* * *
(1)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일단 아주 엉뚱한 곳으로 전이하진 않았다.
전이문의 주문과 마나가 반응한 마력광이 걷힌 뒤 드러난 풍경은
다행스럽게도 눈에 익은 장소로 보였다. 리제의 저택이었다.
‘다행이다….’
일단 안도의 한숨 한 번 쉬고.
함께 전이해왔던 루시탄 쪽을 살폈다. 안색이 파리한 게 그다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루시탄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루시탄!”
바닥에 쓰러지려는 몸을 받아내면서 꽉 끌어안았다.
묘하게 가볍게 느껴지는 건 둘째치더라도, 이 녀석의 몸이…
‘뭐야, 왜 이렇게 뜨거워…?’
그냥 감기가 있어서 열이 올랐다는 수준이 아니다. 루시탄의 몸은 달궈진 석탄처럼 뜨거웠다.
불규칙하게 내쉬는 숨과 뺨을 잠시 만지자마자 묻어나는 땀방울이 생각을 불안으로 몰고갔다.
“야, 이… 러지 말라고… 바츠 경한테 당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으… 리제, 리제! 어딨어, 리제!”
루시탄의 팔을 어깨에 감고는 일어섰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몸이라는 게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진다고 하지만
지금 그걸 의식하고 있을 정신적 여유 같은 게 없었다.
부르는 소리에 출입문이 열리고 리제가 들어온 것은 반갑다.
“로제이아 님? 언제 돌아오셨… 무슨 일이시죠?”
여전히 골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쪽을 바라본 리제는 즉시 상황을 파악한 듯 가까이 다가왔다.
루시탄을 번쩍 들어 올린 뒤 성큼성큼 앞서가는 게… 다소 안심이 될 정도로 믿음직했다.
다행히 술라가 리제에게 뭔가 해코지를 하진 않은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발열, 오한, 호흡 불규칙. 경련, 의식불명. 아무래도 모겐슈테른에 가셨던 일이 잘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즈왈트 님은 한발 먼저 손님을 데리고 돌아오셨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고보니… 으, 잊고 있었어.”
거기다가 잊고 있었던 게 한명 더…
얼굴을 마주치면 어떻게 나올까, 그 잊고 있던 또 한 명은.
“그러니까, 절 잊으시면 안 되잖아요, 장미 씨!”
…뭐 이럴 거라고는 생각했지.
여러 개의 침대가 나란히 나열해있는 침실에 도착하고 나자,
거기에서 즈왈트와 함께 서 있던 웬즈데이가 종알거렸다.
적당히 웬즈데이를 쓰다듬어서 달래고,
리제가 루시탄을 침대에 눕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 옆 침대에는 페리링도 아직 잠들어 있었고.
잠시 루시탄의 상태를 살피던 리제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과로입니다. 짧은 시간에 대단히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하아…. 이 바보가… 진짜.”
그 방에 연금된 동안 뭐, 잠도 안 자고 기록만 냅다 파고 있기라도 했던 건가?
그 다음에는 칼 프레드릭 바츠와 칼을 섞었고? 유들유들하게 구는 주제에 왜 그랬던 건지…
“뭣보다 성전력(??力)을 과도하게 썼습니다. 피로가 쌓여 있던 몸이 그 부담을 더 버티질 못한 것이죠.
일단 지금은 이대로 쉬게 해 주는 편이 좋겠습니다.”
“성전력… 뭐야, 그건?”
“교회에 속한 성기사가 사용하는, 마법과는 다른 능력입니다.
열신교에서 섬기는 최고위의 여신, 라에라드에게 봉사하는 기사에게 내리는 축복이 힘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한때 주인님께서도 관심을 두고 연구하셨죠.”
성전력…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어엿한 성기사라고 했었지.
난 아직도 이 녀석이 교회에 속한 몸이라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름만 걸어놓은 수준이겠거니 했는데. 아무튼 조금 안심했다. 쉬고 나면 된단 말이지.
“그보다 페리링이라고 하신 저 하프엘프께서는 꽤 강한 수면제를 드신 것 같습니다만.”
“…뭐 좀 얌전히 만들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사람 중 하나둘 정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구.”
리제가 느릿하게 유리알 같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렇습니까,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제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의 뒤를 채근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뇨, 장미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데요?!”
…리제와는 다른 의미로 별로 골렘 같지 않은 웬즈데이가 대신 채근해왔다.
리제, 웬즈데이, 그리고 말없이 앉아있는 즈왈트…
대체 주위에 온통 골렘투성이라는 게 참. 이걸 인복이 있다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는 좀 미묘하다.
“기다려 봐. 나도 아직 생각 정리가 덜 됐으니까… 정 알고 싶으면 잠깐 들어오던가.”
“으, 그건 싫어요. 음침하단 말이에요.”
…속이 음침한 여자라서 미안하네.
웬즈데이의 볼을 한번 쭉 늘렸다가 놓아주니 녀석은 엄살 어린 울상을 지었다.
골렘 주제에 그 정도로 엄살 부리지 말라고.
‘아, 맞다. 그보다 하나 더 있었지. 확인할 것이.’
확인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술라가 여기에 있었던 이상… 여기에도 뭔가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뭣보다 술라가 직접 조정했다고 하는 리제.
리제에게 뭔가 되먹지 않은 짓거리를 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아니… 그랬다면 순순히 페리링이나 루시탄을 돌봐주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당장 우릴 제압해서… 아니, 그냥 술라가 직접 왔겠지.’
모겐슈테른 성에 나타난 술라가 전이문을 타고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일단 그 전이문을 어떻게든 닫아두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리제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를 위해서라도 그 편이 좋겠지.
“리제, 잠깐 나 좀 볼래? 웬즈데이랑 즈왈트는 여기 있어줘. 조금 민감한 얘기라서.”
“네? 대체 저희한테도 비밀로 할 정도로 민감한 얘기라는 게 뭔, 앗! 설마 에로한… 읍읍!”
즈왈트가 커다란 손으로 웬즈데이의 입을 덮으면서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즈왈트, 고맙긴 한데 너무 막 대하진 말라구. 마치 고양이처럼 버둥거리고 있잖아.
리제는 고개를 이상하다는 듯 한 번 갸우뚱하고는 선선히 일어서서 따라나섰다.
“하실 말씀은?”
“…일단 부탁이 두 가지가 있는데. 모겐슈테른 성에는 지금 언데드가 날뛰고 있어.
이쪽으로 혹시 넘어올 위험이 있으니까, 전이문은 이제 폐쇄해줘.”
“모겐슈테른 성에 언데드가… 술라 님께서 급히 떠나신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조처하겠습니다.”
…교묘하게 돌려 말한 게 되어버렸지만, 특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론 선제후의 성에 지금 언데드가 넘쳐흐르고 있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아무튼 전이문이 사라졌다면 다소 안심이다… 술라가 이쪽으로 직접 날아온다면 그건 좀 골치아프지만.
그 전에 알아낼 수 있는 걸 전부 알아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이 저택에 있는 서재에 들여보내 줘.
전에 나한테는 벤 가브롤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싫어했다… 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거지?”
“로제이아 님. 그건…”
리제가 당혹한 듯 눈을 한번 굴렸다. 입술을 깨물고 어깨를 살짝 바들거리는 게…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자각은 충분히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실 겁니다. 제가 한 말 또한 거짓말이 아니니까요.”
리제는 체념한 듯이 고개를 약간 떨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재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묘하게 생기가 없었다.
리제는 그 서재에 가까이 가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 자신 외에 다른 이들 전부.
무슨 사연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주인이 죽은지 수십년이 넘도록 저택이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도록 시녀 골렘들은 오늘도 저택을 관리하고 있다.
그 만들어진 지성으로 한정된 기능만 유지할 수 있는 다른 골렘들과는 달리 리제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애착, 집착, 염려… 마치 아버지가 딸에게 쏟는 듯한 그런 애정이.
서재에 있는 무엇인가가 리제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했다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서재를 피하는 것도 설명이 되겠지.
아무튼, 낡은 자물쇠가 잠긴 커다란 나무문 앞에 도착했다.
리제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그 낡은 자물쇠를 풀었다.
찰칵 소리가 나면서 녹슨 자물쇠가 스르륵 풀려나가 문이 조금 벌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열지 않았다면 분명 안에 먼지가 장난 아니…
“…지 않네?”
문 너머는 깨끗했다. 공기는 신선하고 상쾌하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깨끗하다고 해야 할까, 살풍경하다고 해야 할까.
수많은 책과 종이뭉치들이 정리되어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긴 했는데,
책상이나 책장에 먼지 하나 없었고 종이뭉치도 삭거나 벌레먹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몇 년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던 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바람 계열 주문이 걸려 있습니다.
지맥으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아 자동으로 발동하고, 또 갱신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전용 청소 주문 같은 건가? 편리하네, 그거.”
한번 배워두면 어딘가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그렇게 한가롭게 생각할 수 있을 때가 아니지.
전이문은 없앴다지만 술라가 언제 여기까지 날아들지 알 수 없는 상황.
“일단… 여기를 좀 살필게. 괜찮겠지?”
“네. 로제이아 님. 편하신대로 살펴보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시녀 골렘에게 이야기하시고요. 식사도 여기로 갖다주라고 할까요?”
“부탁해.”
리제는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걸음걸이로 서재를 나섰다. 일단 이 안에 뭐가 있는지부터 좀 살펴봐야겠는데…
그보다 조금 기가 죽어버리고 만다. 장서량은 장난이 아니었다.
밖에서 본 건 문이 좀 크지만 평범한 방이었을 뿐인데 마치 공간을 억지로 늘려놓은 것 같이,
원근감조차 다소 어긋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방이었다.
“…막막하네.”
일단 책 말고 다른 기재가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영시경(???)이 보인다. 마법이 걸린 아이템 등을 감정할 때 쓰는, 영적 시야를 제공해주는 기구이다.
기억이 담긴 물품을 살펴보면 기억의 편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식으로.
그러고보니… 주머니에서 용의 허물을 꺼냈다. 이걸로 뭔가 알 수 있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은 조금 주저하기로 했다. 헤카이트 당주의 수업을 떠올린 탓이다.
용이란 한낱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긴 세월을 살기 때문에,
그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은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용의 기억이란 대개 인간의 인지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 많아, 후유증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응, 용의 기억으로 뇌진탕이 걸리는 것보다는
기약없이 책을 들여다보는 것이 좀은 더 낫겠지.
“하지만 대체 뭣부터 봐야….”
한숨이 나온다. 용의 기억으로 뇌진탕이 걸릴 것이냐,
아니면 끝도 없는 장서의 바다에서 익사할 것이냐.
양자택일이 너무 노답인 게 아니냐고.
“…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종이뭉치를 펼쳤다.
아무 생각 없이 펼친 종이뭉치의 내용을 반쯤 체념해서 들여다본 순간…
“……어?”
리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벤 가브롤이 기록을 남기기 싫어했다는 말.
분명 이 세계의 사람들이 얼핏 보기에는 알 수 없는 의미의 작대기를
종이에 끝없이 끄적이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종이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건 이 세계의 문자가 아니었다.
만약 벤 가브롤이 이것에 대해 남들에게 일절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이 자체로 훌륭한 암호가 되지 않을까.
종이를 가득 채운 문자는…
다름 아닌 한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