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56화 (156/157)

〈 156화 〉 3 ­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10)

* * *

(10)

칼끝이 바들거렸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 자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비지땀이 열이 몰린 뺨에서부터 턱까지 흘러내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시탄!”

선 자가 돌아보았다. 손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떨리는 눈을 하고서.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은 불쌍할 정도로 떨고 있다.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다가, 손에서 마검이 미끄러졌다.

“너… 괜찮아?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그 사람….”

벽에 기대어 쓰러진 이를 보았다. 주저앉은 이는 눈을 감은 채로 미동도 없다.

칼 프레드릭 바츠, 이 나라에서 검으로는 따라올 수 없다는 사람이

루시탄의 앞에 주저앉아있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이긴 게 아니야. 바츠 경은… 프레드릭은….”

가벼운 공황에 빠진 것처럼 그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리는 루시탄의 팔을 붙들었다.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싶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적거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그 얘기는 나중에! 지금은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정신 차리라고!”

으득, 이를 물고는 루시탄은 헛디디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미련 한 자락을 담아 마검을 바투 움켜쥐고는 프레드릭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번 눈을 꽉 감았다가 떴을 때, 녀석은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그론 선제후는?”

침착하게 묻는 그의 질문에 조금 가슴 안쪽이 아릿하게 짓무른 듯이 먹먹해졌다.

그러고보면 이제 그는 어떻게 될까. 쓸모를 다했다면… 죽게 될까?

아니면 죽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되어버릴까?

“선제후… 라는 그 사람, 몇 가지 네게 전하라는 말을 해 줬어. 일단…

도착하고 나서 얘기하자. 지금은 좀 생각을 정리해야 하니까.”

“어디로 갈지는 생각해 봤고?”

“…지금 갈 수 있을 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어.”

루시탄의 팔을 잡아끌어 지하층으로 향했다. 리제의 집으로 통하는 전이문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잠든 페리링을 맡긴 즈왈트를 그쪽으로 보내서 확인했던 터이다.

적어도 즈왈트가 전이문을 통과할 때까지는 작동하고 있었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그자, 술라가 리제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지금은 즈왈트가 통과한 뒤 지금까지의 그 짧은 사이에 술라와 엇갈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데…

‘이게 다 우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말야? 나랑…

루시탄이 이 성에 와서…. 우리가 이 성에 오는 바람에…’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틀어막듯 사방에 널려있는 시체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혀온다.

머리가 베어져나간 병사, 몸 없이 홀로 떨어져 있는 팔, 사방을 붉게 칠한 핏자국…

그 모든 끔찍한 광경이 나와 루시탄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고 보면…

정신이 일그러질 것 같다.

뱃속이 뒤집혀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낼 것 같아서 눈앞이 바들거렸다.

‘…아냐.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런 거… 몇 번은 봤잖아. 정신 놓지 마!’

휘청거리려는 정신을 질타하면서 시체를 밟으며 나아갔다.

질척하게 발아래 끈적하고 질척하게 밟히는 감촉이란… 제정신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도 어쩌면 진즉에 정신 쪽이 망가져버린 걸지도 몰라.

‘어쩌면 여기 왔을 때부터 이미 반쯤은 돌아버렸을지도 모르겠고.’

루시탄의 팔을 잡아끌어 지하로 뛰어내려가며 자조했다.

생각해보면 늘 이랬다. 내 인생이라는 건 늘 이딴 식이었다고.

‘이 세계는 좀 펴진 인생 2막인 줄 알았는데, 씨발.

생각해보면 좆같은 인생인 건 똑같아.

미친놈들한테 시달리고, 눈치 보고, 매번 죽을 뻔하고. 진짜 개 좆같아…!’

달관해서일까, 자꾸만 입가가 씰룩거린다.

계속 먹다 보면 달겠지 달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던 포도가

사실은 마지막 한 알까지 신 포도였던 듯이 참기 어려운 격정이 솟았다.

하지만 아무리 좆같아도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지금은 참아야만 해.

“…하아… 젠장, 참으려고는 하는데, 또 이렇게 좆같은 상황이….”

기억을 겨우 더듬어 아래로 내려가던 길을 찾던 중, 숨을 삼켜야만 했다.

공황에서 겨우 벗어나 숨을 몰아쉬던 루시탄도 탄식할 정도였으니까.

“아주 그냥 명절 선물세트마냥 가지가지로 나오네. 상자 까면 스팸이 나오겠어.”

계단 아래에는 득시글거린다고 표현해야 할… 예의 인간 말미잘들이 창궐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한 이 공간이야말로… 그걸 만들어내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이다.

“…여신이시여, 저건 대체 뭐지?”

“난 인간 말미잘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뭐, 언데드 말미잘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 같네. 지하에서 봤어. 이 성 지하.”

용이 탈피한 허물을 지키듯이 배치되어있던 그 흉물들을 떠올렸다.

여기 있는 것들은 지하의 그것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층 더 까다로워졌다고 해야겠지. 좆같은 점은 똑같다.

투구와 갑옷이 마치 고열로 녹아 눌어붙었다.

몇 명의 병사 시체가 서로 등을 맞댄 채 기괴하게 꺾인 다리로 바닥을 디뎠고,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손에는 그 병사가 들고 있었을 창이나 검, 방패를 아무렇게나 휘저어댔다.

“인간 말미잘… 그 말이 딱 맞아.”

루시탄이 천천히 검을 겨누면서 이를 으드득 깨물었다.

일단은 기사 서품을 받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말했지만,

위장 신분이라고 해도 녀석이 가진 신앙심 자체는 어느 정도 진지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역겹거나 징그러워하기보단 진지하게 분개하고 있었으니까.

“저걸 정말 술라가 만들어냈다고?”

“…적어도 그론 선제후가 말한 바로는 그래.”

그론 선제후의 증언대로라면 성 지하에서 탈피한 용의 허물은 술라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 말미잘이 된 인간들은… 분명…

‘운 나쁘게 지하로 내려와 그 허물을 본 사람들일 것이고.’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말미잘들이 쌓인 이후에는…

지하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그 말미잘이 적당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미잘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고일을 배치해서…

‘잠깐…. 그럼 나는 어떻게 무사했지?’

그 말미잘과 가고일, 용의 허물까지 본 나는 정작 무사하다. 그 이유까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니, 한가롭게 그런 걸 짐작하고 있을 시간 자체가 아깝다.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저것들이 나타났다는 건 적어도 이제 눈치볼 생각이 없어졌단 얘기지.

우리도 저 꼴 나기 싫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고.”

“…솔직히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술라가….”

루시탄도 루시탄 나름대로 속사정을 캐면서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모양이지만,

역시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해한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 사람 좋은, 관대하고 점잖은 척 행세했던 노인이

그런 음험한 속내를 품고 있었다는 걸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죽어줄 순 없잖아. 난 저렇게 되기 싫어.

네가 저렇게 되는 것도 죽어도 싫고.”

“그 점에서는 역시 서로 뜻이 맞아.”

마음을 다잡았다. 각자 서로의 무기를 손에 쥔 채로 각오를 굳힌 뒤…

루시탄이 먼저 달려나갔다. 지팡이를 겨누고 주문을 준비해서…

“이번엔 제발 한 건 좀 해주지 않으려나!”

슬슬 특기라고 하기도 민망하게 되어버린 주문, 「장미여왕의 포옹」을 시전했다.

가브롤의 지팡이에서 마력핵이 빛난 순간, 옅은 땅울림이 성내에 퍼져갔다.

“어…?!”

사방에서 굵직한 가시덩굴이 두서없이 뻗쳐올랐다.

덩굴이라기보다는 가시나무에 가까운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내뻗어 말미잘들을 잡아챘다.

순간 다른 주문을 썼는지 헷갈렸을 정도다. 뭐야, 왜 이래?!

“뭐, 뭐야?!”

“왜 네가 놀라는데…?!”

호기롭게 계단을 내려가 달려들었다가,

갑작스럽게 솟구치는 가시덩굴 탓에 난간을 붙잡은 루시탄이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뭐, 황당하기로 치면 루시탄이 더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잘됐다!

에이, 오히려 잘 됐다고!

“그대로 내려가! 뛰어내려!”

지팡이를 들어올리면서 외치자, 루시탄이 아주 잠시 망설이다 싶더니

이를 으득 물고는 무너지는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뒤를 따라 뛰어내리면서 주문을 전개한다.

지팡이를 내뻗은 벽에서부터 뻗쳐나온 덩굴이 뛰어내리는 우리 몸을 받아내었고,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지하까지…

“그런데… 로제. 이거 어떻게 멈출지도 생각했겠지?”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래, 넌 늘 그렇지.”

늘 그렇지는 않거든?!

체념한 듯이 중얼거리는 루시탄의 말에 발끈한 것도 잠시,

점점 더 빠르게 가속도가 붙어 아래로 미끄러지는 데에 나도 슬슬 불안해진다.

정말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빈대떡처럼 납작해져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오늘따라 어쩐지 주문이 잘 받으니까… 이렇게라도 해볼 수밖에!

눈 딱 감고 주문을… 아니, 이 상황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냥 냅다, 마력핵에 때려넣은 마나를 풀어놓았다. 어두컴컴한 지하, 그 바닥에 덩굴들이 얽혀드는 것을 상상해서…

“먹… 혀라!”

가브롤의 지팡이, 그 마력핵 바로 앞에 펼쳐진 마법진에서부터 사방팔방으로 덩굴이 뻗쳐나갔다.

담쟁이덩굴처럼 질기고 튼튼한 덩굴이 그물처럼 뻗쳤다.

급조한 주문으로 두 사람분의 무게를 완전히 받아낼 수 있을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겠다.

다만 눈을 꽉 감고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데…!

“끅…!”

튕겨나가서, 나뒹굴었다.

조금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어떻게든 지하층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너, 은근히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만은 인정하겠는데.”

“그야 뭐, 재능의 차이지.”

“그렇다고 네 무모함이 늘 어떻게든 될 거라고는 생각 말라고….”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몸을 일으킨 루시탄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살았으면 된 거잖아, 살았으면.

“배부른 소리 마. 거기서 발목 잡혀서 미적거렸으면 어떤 꼴을 당했을지 안 봐도 뻔해.”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주문의 영향으로 옅게 빛나는 전이 마법진은…

다행히 방금 전 그 난리통에서도 일단 무사했다. 적어도 한 번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마법진, 술라가 만들었던 게 아닌가?”

“그렇긴 한데… 즈왈트가 먼저 썼을 때는 제대로 전이한 것 같아.

그 사이에 뭔가 수작을 벌여놓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

불안 요소는 있지만,

지금은 이 전이문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썩은 동앗줄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다. 손을 뻗어 루시탄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가 아니라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아서. 슬쩍 손에 감겨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자.”

자, 그럼 저질러볼까.

천당이든 지옥이든, 일단 저지를밖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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