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3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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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 자신을 잃은 듯 휘둘러오는 칼날이 쉴새없이 번뜩였고,
루시탄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칼끝을 힘겹게 걷어내고 있었다.
칼날이 서로 얽히고, 긁으면서… 튕겨나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녀석의 몸에서 가느다란 칼자국이 얕은 피에 젖은 채 늘어만 갔다.
‘으, 어떻게 해야…!’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중간하게 붙어있는 상황이라,
그 사이에 끼어들 수도, 주문을 쓸 수도 없었다.
프레드릭은 몰라도 루시탄까지 다치게 하면…
“하아압!”
다소 무리하게 큰 동작으로, 루시탄이 칼을 내려쳤다.
호를 그리며 떨어지는 그 참격을 프레드릭은 한 번 발을 튕겨,
수면을 향해 던진 조약돌처럼 가볍게 물러서는 것으로 피해냈다.
“하아… 하아….”
양손으로 칼자루를 다잡은 루시탄의 안색은 꽤 파리해져 있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들었고, 얼마쯤은 바닥에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런데…
‘뭐야, 쟤…’
웃는 건가…? 뭔가를 짚어냈다는 것처럼 입가를 바들거리면서 일그러뜨린다.
오기에 받쳐서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대충 제 뜻대로 일이 되어간다는 때 저렇게 웃곤 하는데.
“로즈.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여긴 내게 맡기고 그론 선제후가 무사한지 봐줘.
그 사람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좀 많으니까, 아직 안 죽었으면 어떻게든 살려내고.”
“…난 치유사가 아니라 흑마법사인데. 아니, 그보다 내가 지금 여길 어떻게…”
치유 마법은 교양 정도로밖에 배우지 않았고, 그나마 제대로 쓰지를 못한다.
그보다 이 자리에서 내가 빠졌다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구경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됐으니까, 하자는 대로 한 번쯤은 해 줘, 진짜.”
…늘 생각하지만 저 녀석은 진짜 입 때문에 크게 엿먹을 일이 있을 거다.
반질반질한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반박할 만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를 않는다는 게 더 짜증이 치솟았다.
“너… 죽기만 해 봐.”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가능한 안 죽을 테니까, 빨리 가 봐.”
한 마디도 안 지는 얄미운 녀석. 숨막히도록 대치한 두 사람을 두고 이를 으득 문 채로 뛰쳐나갔다.
프레드릭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움직인 순간, 루시탄의 손이 움직였다.
이번엔 내려쳤던 자세에서 검이 위로 솟구친다.
당연히, 크게 한 발자국 물러섰던 프레드릭에게 그 칼이 닿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
프레드릭의 입에서 약간의 놀람이 담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발끝 한 치 앞, 바닥이 크게 패여 돌 파편이 튀어올랐다.
“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는 생각할 틈이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잠시 그의 주의가 흐트러진 지금이 기회인 건 확실하니까.
이를 악물고 프레드릭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달려간다. 대충 제일 큰 문이 집무실이겠지!
등 뒤에서 다시 날카롭게 치솟는 금속음이 어깨를 파들거리게 만들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목에 힘을 준 채로 내달려 그 큰 나무문을 밀었다.
잠겨있지는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잠금이 통째로 베여버린 것 같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욱…!”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또다시 피냄새가 훅 코에 끼쳐왔다.
순간적으로 부풀어오른 역겨움에 입을 막고 배를 붙든 채 부르르… 몸을 떤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짙은 피냄새는
사방에 아무렇게나 베여 쓰러진 시체들에게서 퍼져오르고 있었다.
미묘하게 더운 공기와 피냄새는 정신을 잃기에 적당한 조건이다.
‘선제후인가 하는 그 사람도 벌써…!’
“이쪽, 이쪽이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쌓인 시체 너머에서 어깨를 두들기듯이 들려왔다. 목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마처럼 살찐 키 작은 남자가 날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있는 용기를 전부 쥐어짜낸 것처럼 공포에 몰렸지만,
적어도 아직 그의 몸에 죽음에 이를 만한 이렇다할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뚱뚱한 몸의 주위에 푸르스름한 막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어떠한 보호 마법을 쓴 것이 아닐까. 그의 목께에서 푸르게 빛이 넘실거리는 아뮬렛이라든지.
“선제후 각하?”
“그 목소리는… 아, 로제이아 님이신가?
그렇다면 왕자 전하께서도 무사하시겠군.
오오, 여신이시여. 감사를….”
아니, 감사는 나한테 해야지.
시체가 나뒹굴지 않은 곳을 겨우겨우 밟아서 선제후에게로 다가갔다…
피가 고이지 않는 곳까지는 바랄 수 없는 꼴이었다.
바닥의 카펫은 피를 먹어서 눅눅했고 벽 또한 피가 성대하게 튀어서 굉장히…
참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니. 이게 다 그 사람, 칼 프레드릭 바츠, 그가 혼자 한 일이라고? 정말로?
아무튼 구석에 몰려 겁에 질린 선제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살에 묻히다시피 한 작은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바츠 경이 여길 이렇게 쑥대밭으로 만든 거죠?”
“아니… 이건 바츠 벌인 일이 아니오. 칼 프레드릭 바츠 경…
그가 여기에 쳐들어온 것으로 봐서는, 역시 왕자님께서는 아셔야 할 것을 아신 게로군.
바츠 경은 입막음을 하러 온 거요. 그의 명령을 받아서.”
그… 입 안에 쓴맛이 번졌다.
그가 누구인지는 이미 짐작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동안 있었던 일의 배후가 그 사람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터였다.
그에게 적지 않은 신세를 졌었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은 데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내게는 보호 마법을 시전해주는 아뮬렛이 있었소.
칼 프레드릭 바츠가 날 죽이지 못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지.
허나 프레드릭이 날 죽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친히 날 불태우러 올 것이오.”
“…대체 당신… 아니, 선제후 각하와… 술라는 무슨 관계에 있었던 거죠?”
결국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밀어내었다.
알트슈타인의 세 명의 대마법사 중 한 명. 궁정마법사로서 오랫동안 왕실에 봉사했고,
‘용으로 변신할 수 있는 대마법사’로 존경받으며 크든 작든 이 나라의 마법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
하지만… 동시에 이 나라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면서 일련의 모든 일을 뒤에서 꾸민 자.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용, 술라.
“그는… 70년쯤 전에 갑자기 나타나 조부와 계약을 맺었다고 들었소.
내 아버지는 이 땅을 차지하길 원하셨고, 그는 계약대로 조부께서 이 땅을 얻도록 도왔소.
하지만 그 대가로 조부와 그 핏줄이 대대로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요구했지.”
70년 전이라고…? 뭔가 가물가물하게 짚이려고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70년 전,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지?
“그는 이 성의 지하에… 자신의 둥지를 세웠소. 그대도 아마 보았을 것이오.”
“그럼 그 지하로 통하는 열쇠를 보낸 건 역시 선제후 각하셨군요.”
“그렇소… 이제 굴종은 지긋지긋하니까. 베어링턴에서 용을 물리친 왕자님과 마녀님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그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소.”
무모한 계획이다.
계획이라고 하기도 허술하다.
그는 베어링턴에서의 일을 전해듣고 실낱같은 희망을 쥐어 지금의 상황을 꾸민 것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발톱으로 이 나라를 통째로 움켜쥔 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체… 언제부터?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이 나라를 농락한 거죠?”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지금의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게 되신 매사냥 전쟁에 개입하면서부터요.
울자크 폐하께서도 분명 내 조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에게 이용당하신 것이 틀림없소.
허울 좋은 궁정마법사 자리를 차지하여, 이 나라의 뒤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얼굴을 감싸쥔 그의 손 안에서
중얼중얼, 내게 전하는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새었다.
이제까지 다른 이들의 앞에서, 특히 루시탄의 앞에서는
세상만사에 초탈한 듯한 모습을 보여왔던 술라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조종하고 있었던 거요. 모든 것을 전부 다 말이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대체 왜? 뭘 바라고요? 술라의 힘이라면 그런 귀찮은 짓 따위 하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걸 훨씬 쉽게…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런 빌어먹을 상황 같은 거 벌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그 영감한테는!”
울분이 받친다. 이 세계에 와서 루시탄과 엮였던 내내,
사실은 그 사람 좋은 늙은이처럼 행세하는 그 용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 도는 피가 한순간 거꾸로 방향을 튼 것 같았다. 그만큼 화가 났다.
무슈마헤트에게는, 베어링턴을 습격해서 나를 죽이려 했던 그녀의 동기는
그 분노의 대상이었단 나조차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용이기 이전에 자신이 가슴으로 품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미쳐버린 어미였다.
하지만 대체 술라는? 그 자는 뭘 바라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벌였단 말이지? 대체 무엇 때문에?
“…모르오, 나도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짓을 벌여왔는지 아는 바가 없소.
인간은 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그저 용의 원대한 시야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오,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떠한 이유가 분명…”
갑작스럽게 말을 멈춘 그론 선제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몰아쉬더니, 서둘러 목에 걸고 있던 아뮬렛을 풀어 내밀었다.
“…가져가시오!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왕자 전하와 함께 이 성에서 빠져나가시오,
그… 그가 왔소! 난 알 수 있소, 그가 온 것을 알 수 있단 말이오!”
“술라가?”
그가 왔다는 생각에 두 가지 감정이 정면으로 부닥쳤다.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이겨낼 수 없는 이에 대한 두려움이다.
만약 그와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될까. 죽을까? 아니,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이 그론 선제후와 칼 프레드릭 바츠와 같이…
그의 장난감이 되는 결말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나와 루시탄, 우리 둘 모두에게 그 운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에서 아뮬렛을 받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대체 어디로…
‘갈 곳은 거기밖에 없어…!’
이를 으득 깨물고는 그론 선제후의 집무실을 나섰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아까부터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집무실을 나와, 고개를 돌린다.
한 명은 서 있었고, 한 명은 주저앉아있었다.
선 자의 손에는… 용을 조종하는 마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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