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54화 (154/157)

〈 154화 〉 3 ­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8)

* * *

(8)

중앙 홀로 바쁘게 달려가면서 어쩐지

이 성 안에서 무엇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곳곳에 쓰러진 병사들과 사방에 낭자한 핏자국.

이제는 나름대로 익숙해져서, 피칠갑이 된 벽을 보고도

그 벽에 기대어 쓰러진 시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별로 뿌듯하지는 않다, 정말로.

“바로 이 층이야. 분명 이 층 어딘가에 그론 선제후의 집무실이 있을 거야.”

“…그래, 말 안 해도 여기인 거 알 것 같아. 병사들이 무더기로…”

계단을 딛고 올라서자마자 로비에 숱하게 병사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병사만이 아니다… 전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마저

그 갑옷째로 베여 쓰러진 것을 보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무슨 전쟁이라도 벌어진 거야?”

“아니, 이건 전쟁이라고도 할 수 없지. 단 한 명이 벌인 짓이니까.”

루시탄이 감정을 꾹 억누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녀석은 벽에 기대어 죽은 시신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어깨를 긋은 칼자국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비스듬하게 잘린 갑옷 사이로 지나치리만치 깔끔하게 잘린 상처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선명했다.

“…한 명이라니, 마법사면 몰라도 칼 한자루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그런 사람을 딱 한 명 알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일어선 루시탄이 이쪽을 바라보고는 손을 뻗어서 내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무슨 짓이냐며 겸연쩍어하기엔, 녀석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있어. 그나저나 네 그 골렘 친구는 어디에 갔어?”

“…잠깐 다른 일을 보냈어. 그러니까 대체 누군데, 그 사람이?”

“너도 잘 아는…”

서두를 꺼내던 루시탄이 뒤돌아보았다. 내 손을 놓고,

빠르게 검을 뽑아 겨눈 뒤 그대로 뒤돌아본 쪽을 향해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찌른 칼날과 부딪힌 무엇인가가 쨍강, 하고 쇠 부딪히는 소리만 뒤늦게 들었을 뿐이다.

이를 악문 소년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굳어졌다.

강하게 발을 앞으로 딛으며, 커다랗게 내지른 칼날이 허공을 베자 루시탄의 얼굴에 낭패감이 드리웠다.

단 일 합이었는데, 루시탄의 이마에 벌써 땀방울이 흥건하게 송글거렸다. 녀석은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칼날이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극도의 긴장감에 가늘게 떨고 있는 손이 칼날에까지 번지면서 불안한 듯 칼날이 후들거렸다.

내 눈으로는 움직임을 쫓아갈 수조차 없었던 적이 루시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럴 만한 상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프레드릭 뭐시기 영감님… 이잖아.”

왕실을 지키는 친위대장인가 하는 그 사람.

루시탄에게 얼핏 듣기로는 알트슈타인에서 검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매의 기사’라던가 하는 거창한 이명까지 달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베어링턴에서 무슈마헤트와의 싸움에도 참가했던 사람이고.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저 영감님?”

“…아직 뭐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온화해 보였던 사람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사방에 널린 병사들의 시체를 쌓아올린 장본인이 그라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녀석은 손에 쥔 검을 다잡았다.

나와는 달리…루시탄은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로즈, 저걸 봐.”

가볍게 턱짓하는 루시탄의 시선을 따라갔다. 프레드릭 경…의 손에 쥐어진 검의 모습이 낯이 익는다.

어디서… 어디서 봤더라? 잠시 기억을 쥐어짜내어서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발스턴, 그 자식이 쓰던 거잖아 저거?!’

지난번 베어링턴에서 무슈마헤트를 제뜻대로 조종하던 발스턴이 들고 있던 검과 똑같았다.

검이라기보다는 마치 검의 모습을 한 악마와도 같이 사악한 물건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저 검을 왜 프레드릭 경이 들고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검에게 뭔가 영향을 받아 저렇게 되어버린 것이라면 그나마 조금은 납득이 간다.

‘납득을 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진 않지만…!’

루시탄의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지팡이를 다잡았다.

이제 어쩌면 좋지? 저 검을 빼앗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하지만 저 괴물 같은 사람한테서 검은 대체 어떻게 뺏을 건데?!

머릿속에 생각이 이리저리 범람하며 휩쓰는 것을 초조해하면서 머릿속으로 술식을 되뇌었다.

틀렸어, 뭔 수를 써도 먹힐 것 같지가 않아.

‘뭔 수를 쓰거나 말거나 일단 사람 같지가 않아… 엄청나게 분위기 잡네, 저 영감님.’

발스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박감에 숨을 조금 깔딱거리면서 천천히 주문을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그나마 지금 루시탄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만약 지금 달려들기라도 했다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경.”

루시탄이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담은 듯이 그를 불렀다.

까칠하게 메마른 목소리는 갈라진 채로 안타까움이 강하게 묻어났다.

녀석은 한동안 저 사람에게서 검을 배웠다고 했다.

왕궁에서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었다고 하고,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아마 루시탄일 테지.

“설마 당신까지 이 판에서 일개 체스말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 당신은 의식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루시탄의 말이 조금 더 이어졌다.

말을 잇는 도중 고개를 약간 돌리고 눈동자를 맞추면서 입모양으로만 뭔가를 말한다.

시간을 끌려는 걸까. 일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녀석에게 맞출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부터 단단히 해 두기로 했다.

내게 필요한 게 시간이라면, 녀석은 1초라도 그것을 벌어주려고 하고 있으니까.

일단 마음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면 뭘 해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긴장하지 마, 초조해하지 마.

“…난 당신이나, 아버지나 그자의 뜻대로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이 비정상적이고 광기어린 판에서 난 빠지겠다고.

로젤라이, 그리고 캐슬린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저 녀석까지 전부 다 죽어야 당신들 속이 편해진다면,

절대 당신들 속이 편하게 두진 않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들었네, 너.”

이죽거리면서 한마디 보탰다.

이쪽을 째려보는 시선에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이럴 때일수록 그 뭐냐, 긴장을 푸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니까. 정말이다.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프레드릭 경? 그론 선제후는 어떻게 했습니까?”

“…….”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인지,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프레드릭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답답해하고 있었지만, 루시탄은 얼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짝 세웠던 검을 천천히 앞으로, 그리고 비스듬히 기울였다.

녀석이 직접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문득 나보다 조금 어린 소년의 등이, 내가 알던 것보다 아주 조금 넓어진 것처럼 보였다.

“…열신이시여.”

루시탄이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언제나 약삭빠르고 제 잇속을 챙길 생각을 하는 녀석이

신에게 기대는 말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녀석의 성기사 수행은 그저 핑계만은 아니었다는 듯

몸에 옅게 빛무리 같은 것이 감돌기 시작했다.

내 역할을 이해했다. 녀석이 프레드릭 경과 검을 섞는 사이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저 검을 프레드릭 경에게서 떼어놓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저 괴물같은 영감님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겠어. 진짜 어쩌다가 또 일이 이렇게 된 건데!’

그냥 만사 다 제쳐두고 이번에야말로 느긋하게 여행이라는 걸 좀 즐기고 싶었는데

왜 가는 곳마다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트러블이 잇따르는지,

여신에게 항의 좀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말!

‘찌질하게 투덜대봤자 소용없긴 한데,

이렇게 투덜대지라도 않으면 억울해서 살겠냐고 이런 불공평한 처사!’

으득, 이를 깨물고는 주문을 준비하면서… 언제라도 마법을 풀어놓을 수 있도록 전신을 긴장시켰다.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루시탄의 발끝이 지그시 바닥을 디뎌 제 몸무게를 그 발끝에 실었다.

순간, 화살처럼 빠르게 루시탄의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비스듬이 겨눈 검을 찌르는 자세로 변경하여, 프레드릭의 몸통에 군더더기 없는 찌르기를 꽂아넣으려…

“…!”

지이이익, 루시탄의 몸이 가볍게 밀려났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아,

빈틈을 찾아 찌르기는 커녕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 자신이 루시탄의 빈틈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도, 루시탄이 칼을 찔러넣은 순간

그 끄트머리에 정확하게 제 칼끝을 내질렀던 것으로 보였는데…

아니, 그 짧은 순간 그렇게 정확하게 한 점만을 칼끝으로 맞춰냈다고?! 사람 맞아?!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Shooting!”

지팡이를 뻗으면서, 가득히 불어넣었던 마력을 풀어놓았다.

불어넣은 마나는 지팡이의 마력핵 안에서 탄환의 형태로 변해,

루시탄을 쫓으려던 프레드릭 경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멈추질 않아…!’

발끝, 어깨, 머리.

정면에서 쏟아붓는 마력탄을 아주 조금 몸의 궤적을 비트는 것만으로 피해내는 프레드릭 경의 무위는

내 어이를 가볍게 날려버릴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총알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쳐내거나 방어 주문을 써서 막아내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보고 피하는 건 내 자존심이 살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의도치 않은 정신공격에 마력탄을 잠시 멈추고, 조금 큰 주문을 준비하기로 했다.

‘…!’

그리고 프레드릭 경의 발이 앞으로 크게 나와 바닥을 디뎠다.

마치 내가 초조함에 못 이겨 큰 주문을 준비할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다행인 건…

“프레드릭 경, 멈추십시오!”

잠시 몸이 굳었던 루시탄이 앞으로 달려들어 프레드릭 경의 검을

제 검으로 멈춰세울 수 있었다는 것. 마법사에게 전위라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어쩌지?!’

공략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만이 초조하게 흘러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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