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3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6)
* * *
(6)
꽃가루는 불똥이 되어 사방으로 튀고, 폭발은 빠르게 걷혀갔다.
단 냄새와 탄 냄새, 양자가 기묘하게 섞인 매캐한 냄새가 코를 스치면서 흩어져간다.
조마조마함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생각보다 화력이 강했다.
조금 다치게 만드는 것까지는 각오했지만… 설마 그 이상의 사태가 벌어진 건 아니겠지?
죽었…다거나?
“…에이, 설마.”
슬그머니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를 어질어질하게 채우던 꽃가루는 폭발에 휩쓸려 흩어져가고,
모락모락 연기만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즈왈트의 등이 보였다.
인간의 살갗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은
흙과 모래, 바위로 이루어진 몸이라 이 정도 폭발에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즈왈트의 겉면을 코팅하듯 감쌌던 흙 사슬이 오히려 폭발로부터 즈왈트를 지켜준 갑옷 역할을 해 주었다.
탄화하여 흩어져버리는 고치 안쪽에서 걸어나온 즈왈트는…
뭐 원래부터가 좀 겉이 검은 편이었으니 뭔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괜찮아?”
“문제 없다.”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숨이 나왔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기도 하고, 팔을 돌려보기도 하는 걸 보면 정말로 괜찮은 모양.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연기가 걷혀가는 너머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물론 페리링도 무사했다.
그래도 나름 독하게 먹고 짜낸 비책이었는데, 페리링도 즈왈트와 똑같은 방법으로 파훼했다.
바로 앞에 돌벽을 세워 화염이 비껴가도록 하여 폭발을 무효화시켰다.
로브 끄트머리가 조금 그을린 것 같은 것이,
내게 짜낸 술수가 페리링에게 가한 대미지의 전부였다. 이제 어쩐다.
“로즈 씨… 꽤 성대하게 해 주셨네요.”
하지만 페리링 본인에게는 아무 피해를 입히지 못했을지언정,
페리링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직, 빠직, 빠직…
마치 공간 그 자체가 조각나 깨져가는 것처럼, 칠이 벗겨지듯이 풍경이 일변하고 있었다.
즉각 이해가 갔다. 그런가, 이 복도에 설치된 주문이 폭발에 휩쓸려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마치 내 커스터마이징 룸과 같았던 폐쇄영역이 벗겨져 간다.
뭔가 숨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일대의 마나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풀려난 것 같다.
페리링이 유능한 마법사인 건 인정하지만, 공간 자체를 장악할 정도의 실력을 길렀다고…? 단 1년 만에?
“너야말로 꽤 터무니없는 짓을 해줬잖아, 페리링.
날 가두려는 것치곤 꽤 호화스러운 주문을 쓰고.”
“로즈 씨는 언제든지 그 묘한 공간으로 도망치실 수 있으니 말이에요.
가둬두려면 이 정도의 밑준비는 해둬야 했어요.”
“대체 왜 나를 그렇게까지 가두고 싶은 건데. 너 그쪽 페티쉬였어?”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페리링은 잠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해졌다가,
몇 초쯤 지나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아, 아닌데요?! 아니거든요?! 이런 때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로즈 씨?!”
“…주인….”
알아,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주인이라는 거.
하지만 쟤를 흔들어놓으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하고 무슨 수라도 써야지.
그러지 않으면 이 앞을 지나갈 수가 없을 거라고.
갑작스러운 어택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던 페리링이었지만
금방 동요를 거두고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얼굴에서 표정을 가라앉혔다.
이쪽도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일단 골렘술을 응용하여…
바닥에 흩어진 모래와 바위에 지팡이를 겨누었다.
파스스스, 소리와 함께 유도에 따라 떠오른 흙먼지가
내 제어에 들어온 마나와 응집되어, 폴암(Polearm)의 형태를 띠었다.
얼마 휘두르지 못할 임시 무기이긴 하지만 일단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둔하고 무겁군.”
“시끄러워. 난 대장장이가 아니란 말야. 불만 있으면 맨손으로 싸우던가.”
하여튼 내 골렘들은 왜 한 마디도 내 말에 고분고분하지가 않은 건지.
익숙하지 않은 듯 창자루를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 끄트머리를 페리링을 향해 겨눈 즈왈트는 그대로 자세를 낮췄다.
아까의 일도 있고 하니, 달려드는 데에는 신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좋은 자세이긴 한데…
‘이제 어쩐다.’
페리링이 장악하고 있던 폐쇄공간이 깨졌다.
어느 정도 마나맥의 마나만이 아니라 주위에 도는 마나도 조작할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그래도 여전히 전력은 이쪽이 불리하다.
이 아슬아슬한 간격을 조금 더 파고들 수단이 필요하다. 머리를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긴장감에 빠르게 뛰려는 심장도 진정시켰다.
초조해하지 마, 긴장하지 마, 그리고 생각해.
어떻게 이 앞으로 돌파해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라고.
일단… 페리링을 조금 흔들어야 한다.
조금 더 격하게 흔들 수 있어야 빈틈을 파고들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도리가 없어.
무슨 말이든 해, 무슨 말이든 하라고.
“페리링, 너는 왜…”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뇌에서 생각이라는 게 얼어붙어,
혀로 전달되지가 않는 답답한 느낌에 발끝이 지그시 바닥을 눌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저 녀석이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까?
차라리 뇌를 거치지 않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내뱉어야 하려나?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없이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네게는 나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게 팍팍 느껴져.
하지만 그건 비단 너와 내가… 서로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냐. 그런 느낌이 든다고.”
오해 없으시길. 그렇고 그런 의미 아니다.
“대체 네가 내 앞을 막아서게 된 이유가 뭐야? 단순히… 네 스승, 술라가 시켜서야?”
페리링이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이름에 결국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조차도 아직도 긴가민가한 상황이니까.
설마하니 그 대마법사가 이 일련의 소동을 뒤에서 주도한 흑막이라는 내 추측은
아직까지는 나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 추측은 점점 무게가 실려가는 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페리링이 내 앞을 막아섰다는 사실이
이미 내 추측에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힘차게 부정했지만, 결국 페리링은 또다시 침묵을 택했다.
다만, 이라고 뭔가 항변하려던 것을 꾹 삼키고는 이쪽을 노려보았다.
결국 내 말은 오히려 페리링이라는 고슴도치가 더 가시를 세우게 만드는 정도밖에는 될 수 없었나보다.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더 강하게 경계했다는 건
내 말이 어떤 식으로든 녀석의 심경에 동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자며,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난… 여길 지나가야겠어. 네가 뭐라고 하든 말야.
하다못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면, 날 조금도 설득할 수 없다구, 페리링!”
강행돌파한다!
지팡이를 든 채로 뛰기 시작했다. 페리링도 즉각 맞섰다. 날 절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겠다는 결의가 단단하게 느껴져왔다.
마치 벽과 같았다. 층층이 쌓아오른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이 이상은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는 듯 완강하게 버텨섰다.
페리링도 더 이상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빛이여aotrom / 화살이 되어라saighead]!
페리링의 주위에서 빛줄기가 소용돌이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빙빙 돌아가던 빛의 소용돌이가,
그 말 그대로 화살이 되어 쏘아져왔다.
“Emeth!”
이쪽도 지팡이를 겨누며 시동어를 외쳤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않아도 상관없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돌조각들이 자그마한 방패가 되어 떠올랐다.
빛의 화살이 날아드는 것을 막아낼 정도면 된다!
퍼석, 하고 급조한 골렘 방패를 손쉽게 뚫어버리고 네 발의 마력탄이 어깨와 무릎을 스쳤다.
찌릿한 고통이 발목을 붙잡았다. 걸음이 느려져서는 안 돼.
손안에 숨겨두고 있던 씨앗을 입에 던져넣고는 그것을 그대로 이 사이로 지그시 물었다.
아주 조금 새어나온 씨앗의 성분이 고통을 잠시 마비시켰다.
하지만 아직 한 발이 남았는데…
이건 좀 크다! 노골적으로 주위의 마력을 살라먹으며
부풀어오르는 빛줄기가 마치 별처럼 내게로 쏘아져온다.
휘둘러졌다.
한발 먼저 몸을 날린 즈왈트가 급조한 폴암을 마력의 화살을 향해 휘둘렀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이 폴암에 부딪힌 순간, 일어난 폭발이 무기는 물론 즈왈트의 어깨까지 바스스 흩어놓았다.
“저런 걸 나한테 쏘려고 했다고?! 너무하네!”
“제대로 맞출 생각은 없었다고요!”
“그걸 어떻게 믿어?!”
“저를 못 믿으신단 거에요?!”
크게 파고들어간 어깨를 감싼 채 유치하다는 표정을 지은 즈왈트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페리링을 향해 뛰었다. 조금 있다가 고쳐주면 되잖아, 고쳐주면!
“그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로즈 씨…!”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나쁜 것처럼 들리잖아?! 날 막고 있는 건 너라고, 페리링!”
한발한발 가까워질수록 초조해하는 페리링은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인지 지팡이를 공중에 띄운 채 영창을 읊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마력이 그 마력핵에 모여들면서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 단 한 번으로 날 무력화하려는 게 분명하다!
‘순순히 당해줄까봐…!’
영창은 생각보다 빨랐다.
앞으로, 세 걸음 정도면 더 가면 될 정도의 거리만 남겨두고
페리링의 주문이 한 박자 먼저 해방되었다.
[벼락이여Dealanach]!
신의 창처럼 내리꽂히는 벼락이 내 바로 앞을 찢어놓았다.
커다랗게 파인 구멍. 불쑥불쑥 솟아난 뾰족한 돌들이 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무저갱이 입을 벌린 것 같았다.
날 맞히려는 게 아니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이를 악물고 커스터마이징 룸을 불러냈다. 주변이 검게 칠해지면서 공간의 제약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앞으로 뛰쳐나가는 내 몸은 바닥을 찢어놓은 균열과 장애물을 그대로 유령처럼 통과해 앞으로 페리링까지 한 발만 남겼다.
커스터마이징 해제.
어차피 이 능력으로 도망쳐봤자, 페리링을 따돌리지 못하면 계속 추적당할 것이다.
페리링을 여기에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돼. 마음을 독하게 먹고 손을 뻗었다.
큰 주문을 해방한 탓일까, 페리링이 어어, 하고 손쉽게 로브 자락을 잡혔다.
“페리링, 혹시… 처음이라면 미안해!”
“네?!”
그대로, 페리링의 입술을 제 입술로 눌러버린다.
잇새에 머금고 있었던 씨앗을 혀로 밀어 넘겨주자,
페리링은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꼴깍 삼켜버리고 말았다.
“크읏, 로즈 씨… 대체 무슨, 끄으…?!”
빠르게 효력이 돌아 잠시 비틀거리던 페리링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정신을 잃은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볼이 조금 달아올라 뜨거워진 가운데
입술을 살짝 닦았다. 일단… 어떻게든 되긴 했는데.
‘그 와중에… 으, 부드럽잖아. 설마 첫키스는 아니었겠지.’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란 년은 대체 뭐 하는 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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