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3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5)
* * *
(5)
마법사의 대결이란 강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다지 강하지도 않고, 수수한 마법사거든.
가능한 빠르게 매듭을 지어주겠어.
“즈왈트, 페리링을 붙잡아!”
골렘은 이럴 때 쓰려고 애써서 소환한 거지.
즈왈트에게 가능한 마나를 가득히 부어넣으며 지시를 내렸다.
내 지시를 받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달려나가는 커다란 등은 늘 믿음직스러웠다.
다치지 않고 페리링이 주문을 사용하기 전에 제압하면, 그걸로 상황은 끝…
[붙들어라dal gafael / 사슬이여cadwyn / 땅으로부터daear / 오라Cynyddu]
네, 전언 취소.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지팡이를 겨누어 즈왈트의 몸을 흙으로 된 사슬이 칭칭 동여매었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사슬은 즈왈트의 완력에 손쉽게 부서졌으나,
그 위에 덧대듯이 몇 겹이나 더 솟아나 마치 기어코 누에고치처럼 묶어버리고야 말았다.
손을 툭툭 터는 페리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라서 더 열받는다.
“즈왈트…!”
너무 쉽게 당해버렸잖아, 너!
조금 기막혀하고 있으려니 페리링은 안쓰럽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면서도 재차 지팡이를 겨누었다.
오싹한 느낌. 몇 번이나 겪었던 위기감에 서둘러 주문을 쥐어짜냈다.
페리링이 저 정도의 술사로 성장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더더욱!
페리링의 조그맣고 귀여운 연분홍빛 입술이 벌어졌다.
마력이 준동함에 따라, 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발밑에서 마법진이 펼쳐져가면서, 희붐하게 마력광이 일렁였다.
즉, 일났다는 얘기다.
[붙들어라Cuingealachadh / 사슬이여slabhraidh / 바람으로부터ghaoth / 오라thigibh]
주변을 둘러싼 공기에 마나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내 주위 몇 곳의 지점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공기가 페리링의 유도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사슬로 짜여갔다.
페리링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와 페리링의 마법 실력을 재자면, 대충 고양이와 개 정도의 차이려나.
골렘술사가 맥없이 골렘을 잡혀버렸으니, 일단 반은 먹히고 들어가는 건데!
궁여지책으로 하나 남은 눈에 마나를 돌리자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조금도 안 봐주네…!”
“봐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로즈 씨.”
그대로 있다가는… 즈왈트처럼 도롱이가 되어버리고 말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숨을 내쉬고는 미리 짜둔 주문을 그대로 풀어놓는다.
나도 그대로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상황에서도 허세는 잊지 않았다.
“나중에 우는소리나 하지 마!”
번듯하게 지어진 성에 좀 미안하지만… 이 복도 조경을 새로 해야 할 거야!
자, 꽤 오랜만에 간다. 다소 오랜만인 포옹이긴 한데 걸리면 좀 아플 거야!
"「장미여왕의 포옹」!"
복도 바닥을 뚫고 치솟아오르는 우악스러운 가시덩굴 무리가 페리링을 둥글게 에워쌌다.
내 장기 중 하나인 「장미여왕의 포옹」이지만, 그다지 재미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공격마법이 그다지 장기가 아닌 페리링이 돌파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을걸!
물론 내 쪽을 구속하려는 주문에도 어떻게든 대처해야겠지만!
수단을 아낄 때가 아니다. 전력전개로 간다.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벗어내었다.
'노신왕의 각인안(오딘즈 스페어)'이 실로 오랜만에 풀려나, 시야가 한순간 일그러졌다.
안구에 격통이 일었다. 가라앉기까지 몇 초가 필요하지만, 그럴 시간조차 지금은 아깝다.
'젠장!'
제멋대로 움직이는 왼쪽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면서, 주변 마력의 준동을 포착했다.
‘1시 방향, 7시 방향, 9시 방향, 그리고 바로 뒤!’
안통은 머릿속을 깊게 누르는 두통으로 옮아갔지만,
몸에 은근하게 남아있던 나른함을 없애기에는 오히려 좋아.
이를 악물고 욱신거리는 두통을 억지로 무시했다.
덮쳐드는 바람의 사슬들을… 몸을 굴려 피해내는 사이, 페리링을 감싸는 덩쿨들은…
[적을nàmhaid / 태우라losgadh / 불의teine / 망토여cleòc]
좋아, 역시 조금도 재미를 보지 못했어! 딱 예상한 그대로야!
고기 굽는 데도 쓰기 어려울 것 같은 숯덩어리가 되어 흩어져버리는 장미여왕의 포옹은
오늘도 누군가를 포옹하는 데 실패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름값 좀 해 주라, 제발!
“공격 마법을 다 익히고 말야!”
“이 정도는 방어 마법의 범주일 텐데요, 로즈 씨.”
공격적 방어도 결국엔 방어 마법의 일종으로 치려나 보다, 이 녀석.
페리링이 다칠 거라든지, 어떻게 해야 붙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싹 머리에서 비우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기려면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란 말야.
‘많이 변했네… 뭐, 그만큼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
스승을 잘 만나서이려나, 어찌됐든 마법사로서 일취월장을 한 것을 보면 괜히 내가 뿌듯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금 그 상대로 싸우고 있지만 않다면!
“피어라!”
숯이 된 가시덩굴에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주문을 풀어놓았다.
산불이 휩쓸고 간 숲에서도 다시금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거뭇거뭇하게 물든 표면에서 싹이 터오르고, 노란 꽃봉오리가 빠르게 피어올랐다.
꽃봉오리가 열리자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기에 페리링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번졌다.
‘번번이 허탕을 치는데 주문을 개량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는 마법사라고 취급받기 십상이라고.’
열린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뿜어내는 향기에는 가벼운 환각과 수면 효과가 있다.
적어도 주문 영창에 집중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겠지. 사방을 둘러친 꽃가루에 포위된 페리링은 잠시 숨을 멈췄다.
칼날처럼 위로 솟구치는 폭풍은 마치 용오름 같아서,
스멀거리던 꽃가루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젠장, 개선점이 하나 더 늘었다.
“로즈 씨, 제대로 해주세요.”
“죽을힘을 다해서 제대로 하고 있거든?!”
한 마디로 속 긁는 건 하나도 안 변했네!
조금 분통을 터뜨렸지만, 진짜 하나하나 내가 내는 수를 가볍게 파훼해버리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견실한 수법이다.
꼼꼼하게 내가 내는 수의 약점을 파악하고,그 약점을 돌파해 공략을 무위로 만든다.
실로 성실하고 꼼꼼한 마법사 페리링답다고, 이 상황에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이 뿌듯해할 때가 아니라니까!’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서,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는 숨을 골랐다.
나야 꽃가루에 나름대로 내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페리링이 흩어놔서 사방팔방에 뿌려놓은 꽃가루가 자욱하게 낀 저 복도에
굳이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는 않다. 여기까지는 일단 상정한 그대로이다.
슬쩍 복도 안쪽을 살핀다.
여기저기 흩뿌려놓은 꽃가루가 사방의 벽에 달라붙었다.
뿌리를 내리고, 주변의 농밀한 마나를 먹어치우며 꽃으로까지 피어났다.
하늘거리는 노란 꽃잎. 지금도 꽃가루를 슬슬 흘리면서, 내 준비는 진행되고 있다.
탁, 탁. 아주 옅게 불씨를 튀기면서.
덕분에 사방에 핀 노란 꽃들이 내뿜는 꽃가루는,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자욱해졌다.
화분증 있는 사람은 모쪼록 가까이 가지 않기를. 아니, 화분증이 없다고 해도 가까이 다가가기 싫겠지만.
‘조금만 더….’
페리링은 천천히, 바람을 둘러 꽃가루로부터 몸을 지키면서 다가오고 있다. 결코 빨리 쫓아오지 않는다.
어차피 페리링으로서는 나를 다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를 될 수 있는 대로 상처입히지 않고 제압하려는 생각이겠지.
물러, 무르다구.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 마법사로서의 각오는 덜 되었다.
안됐지만 난 나쁜 흑마법사니까. 그 방심을 최대한 이용해주지 않으면
페리링을 이길 수 없다.
‘조금 더… 시간을 끌까.’
밑준비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복도에는 페리링과 여전히 꼼짝도 않고 있는 즈왈트뿐.
준비한 방책을 펼치려면, 아직 좀 더… 준비가 필요해.
“…Emeth!”
시동어를 외친다. 골렘을 깨우는 시동어에, 복도를 둘러싼 돌들이 반응해서 흔들렸다.
가브롤의 지팡이, 그 마력핵이 내 마나를 삼켜 빛나면서 바닥에서 임시로 짜낸 조잡한 돌 골렘을 불러냈다.
3기,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워낙 급조한 골렘이니 복잡한 명령은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가라!”
전진 앞으로! 내 지시를 알아들은 3기의 돌 골렘이 최선을 다해,
하지만 보는 이는 속터지게 만드는 속도로 페리링을 향해 나아갔다.
2기만 나란히 서도 복도를 꽉 메워버릴 만큼의 크기였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을 터.
페리링은 잠시 멍하니 다가오는 골렘을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지팡이를 들었다.
3, 2, 1. 보이지 않는 바람에 꿰뚫려, 3기의 골렘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젠장, 아무리 급조한 엉터리 골렘이라고 몇 초조차 제대로 못 버티는 거냐고…!
혀를 쯧 차고는, 페리링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골렘의 잔해를 눈으로 확인했다.
즈왈트와… 저 골렘들. 저 정도라면 대충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준비는 얼추 갖춰졌다.
‘좋아, 재주껏 다치지 말라구.’
주변에 자욱한 꽃가루.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골렘 잔해들.
일단 상황은 갖춰졌다. 해 볼까.
“…Shooting!”
지팡이에 장전한 마력탄을 꽃가루 자욱한 복도로 내쏘았다.
아주 기초적인 공격 주문. 그저 마력을 탄환의 형태로 가공해 내쏠 뿐인, 살상력을 기대할 수 없는 주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력을 막의 형태로 만들면, 초짜 마법사라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페리링도 당연히 알고 있다.
주위에 두른 바람의 수호만으로도, 마력탄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페리링은 내가 단순히 발악적으로 마력탄을 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모양이었다.
지팡이를 들어 막을 펼쳤고, 막에 부딪힌 마력탄이 작게 폭발을 일으켰다.
‘됐어!’
불꽃이 튀기자, 주변의 꽃가루들이 즉시 반응했다.
꽃가루 중에는 인화성 물질을 잔뜩 포함한 종류도 있었다. 불씨에 반응한 꽃가루가 팽창하고,
사방팔방에서 일기 시작하는 이상징후에 페리링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세워, 페리링에게 겨누고,
마치 어디의 카우보이를 따라하듯이…
“Bang!”
손가락으로 총을 쏘듯한 제스처와 함께, 사방팔방에서 간헐적으로 일던 폭발이 이내 하나로 엮였다.
꽃가루 분진 속에서 터져나오는 폭발이, 그럴듯한 폭염으로 비화했다.
그 일대를 그을리듯 삼켜버리는 모습에, 오히려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다.
…설마 이 정도에 죽거나 하지는 않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