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3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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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다리는 시간은 유독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시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면 더더욱.
“역시 잘 안 됐나…?”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지표라고 한다면 결국 창문 너머의 풍경 정도. 동쪽 산꼭대기 언저리쯤에 떠 있던 해가 이제는 조금 더 높이 솟아오른 것으로 봐서는… 대략 두어 시간 정도 지났는가 하고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막아놓은 거냐고, 진짜… 아, 답답해 죽겠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마나맥이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 했던 어설픈 낙관도 빗나갔다.
마치 몸속에 박힌 결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감촉에 이대로 굳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천천히 의식을 더듬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면서… 혈류, 신경, 근골을 하나하나 되짚어간다.
초조해하지 말자, 초조해하지 말자.
지금 이 상황에 정신까지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활로는 분명히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주문 따위는 없으니.
‘내 마법 실력으로는 그 녀석이 건 주문을 깰 방도가 없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녀석이 나보다 술사로는 몇 단계는 위니까.
‘그렇다고 공략이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만.’
마법으로 안 된다면… 스킬로는?
그 녀석에게 내 스킬은 미지의 변수이다.
그것까지 계산해서 주문을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즈왈트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일단 할 수 있는 건 차근차근 하나씩 해둘 수밖에 없어.’
가만히 있는 건 아무래도 내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좋아, 꽤 오랜만의 커스터마이징이다. 어디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몸을 훑어내려간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다. 웬즈데이가 없어서 그런가. 정신을 집중한 공간이 마치 어둠 속에 나 혼자 누운 채로 덧없이 부유하는 것 같았다.
옅은 잠에 든 것처럼 누운 몸을 내려다본다. 유체이탈하는 것 같은 감촉은 늘 그렇듯이 서늘했다. 영혼의 시야로 들여다보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다.
‘양쪽 손발목과… 명치, 뒷목, 이마, 정수리. 그리고… 배꼽.’
어슴푸레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고리가 얼핏 눈에 띄었다. 내 마법으로는 건드릴 수 없는 주문이 사슬처럼 내 몸의 여기저기를 옭아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몸에 걸어놓은 주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정체를 알았으니 남은 것은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뿐.
신체에 밀접하게 고착된 주문이니만큼, 신체를 조작하면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시험해볼 가치는 있겠지.
‘커스터마이징 개시.’
일단 가능한 사이즈를 줄여보는 방향으로 해 볼까.
어차피 신체의 크기를 조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렇게 정교하게 구축된 주문일수록 상정하지 않은 변수에는 취약한 법이다.
예상대로, 신체에 고착된 마나의 흐름에 변화가 있었다.
근골과 혈맥, 신경의 구조에 변화가 일자… 주문을 이루는 마나의 흐름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삐걱거리면서 엉켜들고, 미세하게나마 균열이 가는 것이 보였다. 일단 성공… 인가?
커스터마이징을 끝내고, 원래 몸으로 되돌아…
“끅…!”
의식을 몸에 되돌리자마자 몸 안쪽이 뒤틀리는 듯한 감촉에 잇새로 신음이 튀어올랐다.
내 몸에 건 주문이 엉키면서, 억지로 틀어막은 마나맥에서 마나가 새어나온다.
이건 마치 고장난 수도꼭지를 억지로 뒤틀어서 여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한번 물이 새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듯이, 틈바구니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 마나가 주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학, 끅…! 진짜, 만나면… 한대, 때려줄…!”
물론 그 과정이 별로 순탄치는 않다는 게 문제지.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근육통이 얼얼하게 몸을 짓눌렀다. 내장이 꼬이는 것 같다. 바닥에 대고 속을 게워냈다. 나오는 게 없는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
“끄윽…!”
뒷목에서부터 등골까지, 뜨거운 쇠를 댄 것 같은 통증이 내달렸다. 이윽고 물꼬가 완전히 뚫려, 마나맥에 건 주문이 버티지 못하고 깨진 순간 온몸에 새로 피가 도는 것 같은 감촉이 되살아났다.
“하아, 하아, 하아….”
천천히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눈앞이 아찔하게 일그러진 채 어질어질한 시야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길 기다리자, 아주 조금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몸에 힘이 빠져서 휘청이고 있어서 그런가?
“…휴우….”
겨우 몸에 감각과 활력이 돌아왔다.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세우면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까처럼 정전기 같은 방어에 닿지 않을 거리까지 손을 뻗어서는, 마나를 흘려보낸다. 벽을 타고, 문틈을 타고 덩굴처럼 침투어가는 마나를 통해 술식의 구조를 파악한다…
‘…이건 참 귀찮을 정도로 섬세하게 짜 놓은 술식이네.’
이 공간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주문은 정밀회로에 버금갈 만큼 치밀하게 구축되었다.
이래서야 즈왈트가 외부에서 찾고 있다고 치더라도, 이쪽과 접촉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싶을 정도다.
‘인식 방해, 공간 단절, 감각 왜곡… 삼중으로 걸어놓은 술식의 중심부는….’
하지만 지나치게 정교한 술식은 외부가 아닌 내부 구조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다. 틈바구니로 밀어넣은 마나를… 씨앗의 형태로 응축시켰다. 그리고 구상한다. 그 씨앗이 마력 가득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좋아. 되고 있어.’
술식의 중심부, 구축된 회로에 동력을 공급하는 부분에 씨앗을 끼워넣었다. 뿌리를 내린 씨앗이 움트면서 싹이 발아한 순간, 회로 각부에 전달되는 마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주인, 물러서라!]
머릿속에 즈왈트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즉시 몸을 뒤로 빼자마자, 문이 그대로 밖에서부터 무엇인가에 부딪혀 넘어갔다.
“무사한가?”
아마 밖에서 문을 어깨로 들이받아 부순 것 같다.
주문을 흐트러뜨린 순간,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이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한 거겠지.
즈왈트에게서 지팡이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어떻게든 된 것 같네…. 잘 안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나 골렘은 할 일을 한 것이다. 대략적인 위치라도 즈왈트에게 전하지 못했더라면, 주문의 자기수복 기능에 의해 변수에 대처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무사해.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빠져나가자구.”
주문이 깨진 것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은 주문을 깬 사람이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술자도 알게 된다. 그 녀석은 아마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여기서 멍하니 있다가는…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다고.’
나도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 한둘 정도는 있다.
일단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다.
즈왈트를 대동한 채 복도를 뛰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루시탄부터 빼내야 하나?
‘하지만 방향을 모르겠다고….’
가뜩이나 처음 와 보는 성이다. 여기에서 루시탄이 있는 서재 같은 방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일단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는 복도의 장식물을 눈으로 알아볼 수밖에 없겠는데… 이어지는 복도에 위화감을 느낀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주인, 이건 혹시…”
즈왈트가 조금 침통하게 읊조렸다.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저 구불구불한 수염을 가진 초상화는 아까도 봤었지. 걸음을 세우고, 지팡이를 바닥에 댔다. 잠시 정신을 집중한 끝에…
“…다람쥐 쳇바퀴냐고.”
공간과 공간을 이어붙여서 결과적으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도록 만들어놨다.
설령 문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곧바로 다음 술식이 발동하도록 조치해놓은 것이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술식은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또각, 또각, 또각…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은 짧고, 지팡이를 무의식적으로 짚은 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했다.
“…로즈 씨라면 혹시 그 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로즈 씨는 악운에 강하니까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마법사는 조그마한 몸집에, 푸른 머리카락을 구불거리면서 흘러내렸다.
챙이 넓은 모자. 옹이나무 지팡이. 모자 아래 안경. 드러낸 뾰족한 귀.
안경알 안쪽의 눈동자는… 유감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짐작하신 그대로에요. 로즈 씨. 이 영역을 구성하는 술식은 스승님께서 손수 구축하신 거에요. 방에서 빠져나오신 것처럼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만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입술을 깨물고, 수개월 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페리링….”
“오랜만이에요, 로즈 씨.”
페리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한 걸음을 딛었다. 내디딘 발밑에, 태양과 달을 중심으로 별자리가 이어진 마법진이 빛으로 엮였다.
“…난 너하고만큼은 싸우고 싶지 않아.”
미련 섞인 말을 하면서도, 나도 마법사로서 전투 태세에 임했다.
가브롤의 지팡이를 페리링에게 겨누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몸에 도는 마나의 흐름을 지팡이 끝으로 모으면서 언제라도 주문을 풀어놓을 수 있기를.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해해달라고는 안 하겠지만… 로즈 씨는 지금 움직이시면 안 돼요. 부탁이니까, 잠시만 제가 하자는 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를 알려준다면 생각해볼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페리링과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페리링을 어떻게든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이 상황.
“…그럼 하는 수 없어. 내게도 할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물론 페리링도 망설이지 않겠지.
그렇게,
누구도 원하지 않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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