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49화 (149/157)

〈 149화 〉 3 ­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3)

* * *

(3)

의식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짜증을 느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나는 뭐 기절의 신에게 사랑받고 있기라도 한 거냐고.

“목숨 붙어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나도 이럴 때 보면 안전불감증이야, 진짜. 그 녀석 뭐라고만 할 수가 없다니까.”

목소리는 제대로 나온다.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고, 마나맥도 문제 없다.

슬슬 이런 꼴도 이골이 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을 정도가 되었다.

달갑지 않지만, 일단 살아있다는 게 어디일까.

“…좋아. 팔다리 전부 멀쩡해. 그럼….”

몸이 일단 멀쩡하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 확인할 것은 장소.

경험상 이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고 보면 전혀 모르는 곳에 있을 때가 많지만, 이번에는 과연 어떨지.

“여긴… 아직 그 성 어딘가… 려나?”

객실이라는 게 전부 생긴 게 거기서 거기라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일단 원래 있었던 그론 선제후의 성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무겁게 걸린 가위눌림에서 풀려난 기분으로 저릿저릿한 몸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아직도 몸이 저려….”

감각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다. 특히 마나맥이 강하게 억눌려서

오랜만에 마법사가 되기 전의 무력감이 되살아났다.

그 정도로 기죽지는 않는다. 마법 못 쓸 때에도 이런 경우에 어떻게든 대처했었다고.

조금 흔들거리는 걸음을 옮겨,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고리를 가볍게 쥐려고 손을…

“…윽!”

빠직, 하고 정전기라도 통한 듯한 찌릿함이 손가락에 스쳤다.

순간적으로 손을 떼지 않았다면 꽤 호된 꼴을 당했겠지. 저릿한 둔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몸에 후유증이 남은 것 같지도 않고, 손가락 끝에도 이럴다할 열상은 없었다.

‘하여튼. 정말 물러터졌다니까.’

그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지.

꽤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날 다치게 하는 건 싫다는 의사가 팍팍 전해져 온다.

마법사들은 대개 인성이나 도덕 기준의 어딘가를 엿 바꿔먹은 족속들인데,

이 녀석만은 여전히 그 사람 좋은 면을 전혀 잃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 골렘으로 만들만한 것도 없고, 지팡이도 없고….’

이 객실은 이제 완전한 밀실이나 다름없다.

창문과 방문을 손으로 건드리려 할 때마다 정전기 같은 감각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마나를 억지로 끌어모아 막처럼 두르고 열려고 해 봐도,

나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마나에 휩쓸리듯이 마력이 끌려가 버린다.

자석 앞의 철가루 같다고 할까.

뭔가 억지로 골렘으로 일으키려고 해 봐도,

이 방 안의 물건들은 뭐 하나 빠짐없이 그 녀석의 제어하에 있는 것처럼 내 주문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가브롤의 지팡이가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그조차도 지금 내 손에 없고.

“그래도 아직 체크메이트는 좀 이르지.”

체스판에 남은 기물이라곤 킹과 퀸, 그리고 나이트 정도인 것 같지만,

그 나이트를 간과하면 안 된단 말이지.

“즈왈트가 과연 내 상황을 알아차려 줄 수 있을지가 관건일 텐데….”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다.

무슈마헤트의 독을 먹인 씨앗은 지난번에 꽤 써버린데다…

이런 곳에서 써버리면 성장이 멈추질 않고

그대로 그론 대영주의 성을 녹빛 창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런 짓을 벌였다간 내 목부터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건 가급적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는 게 좋겠다.

‘그럼 어디 보자. 그 외에 내가 가진 수단이라면….’

내 몸뚱이와 내가 가진 스킬 정도.

내 마나맥은 지금 꽉 조여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주변에 유동하는 마나조차도 내가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다. 진퇴양난에 배수진이라니.

“…어라?”

조금 낙담하고 있으려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나가 내 몸속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비어져나왔다.

분명히 내 몸 어딘가에서 나왔는데도 마나맥에서 발현된 게 아니다. 몸속을 돌고 있던 것도 아니다.

“뭐야… 뭔데, 이거?”

…마치 날 도와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상이었지만,

일단 썩었든 아니든 동앗줄을 잡을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동앗줄, 마나는 너무나 미약해서 훅 불면 꺼져버릴 것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지.

“…될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흉내 정도는 내 봐야지.”

마법, 그리고 스킬.

양쪽을 융합해서 사용한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시너지가 대단하다.

이 한 줌 미약한 마나에 내 스킬, ‘튜닝’을 사용해보자.

마나에 내 의사를 담고, 빠르게 날아갈 수 있는 속도를 부여한다.

누굴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담고, 나와 즈왈트가 연결된 링크를 학습시켰다.

수 초의 시간 동안… 아주 자그맣지만 형태 없는, 이른바 마나 골렘이 완성되었다.

순수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에너지 의식체가 이리저리 형태 없는 몸을 움직이며 태동하다가…제 할 일을 시작했다.

그 녀석이 덧씌워놓은 공간과 공간의 틈바구니에 파고들어,형태 없는 몸을 우겨넣으면서 멀어져갔다.

“…일단 저 녀석이 잘 해내길 바랄 수밖에.”

석재, 목재, 골재… 이런저런 것들로 골렘을 구축해봤지만 순수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골렘이라.

과연 저 마나뿐인 에너지 몸뚱이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즈왈트에게 닿을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불어넣은 의식이 변질되지 않고 무사하길 바랄 수밖에.

나와 즈왈트 사이의 링크에 끼워넣었으니 길을 잃는 일은 없을 테지만…

‘뭐든 그렇게 잘 될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이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했다.

남은 것은… 몸을 쉬이면서, 여차할 때 움직일 수 있도록 마나맥을 뚫어놓는 것이려나.

“그나저나… 그 녀석, 많이 늘었네.”

물론 마법사로서의 경력은 나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길고,

성실하고 착한 성격이라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요컨대 이건 그 녀석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면서도 남을 상처입히지 않게 하기 위한 녀석 나름의 싸우는 방법이라는 게 된다.

그 녀석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조금 환멸을 느끼고 만다.

나는 남들에게 꺼려지는 마법을 부리는 흑마법사, 마녀니까.

나라면 그 녀석의 어설픈 면을 파고드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

‘…뭐,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온건하게 해야겠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나는 이 세계에서 약자다.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그냥 내 손에 조금 벅찬 일들만 연거푸 쏟아져서 짜증이 날 뿐인데.

“남말할 처지가 못 된다니까, 진짜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싸우는 한 방법. 그렇다면 어쩌겠나, 기다려야지.

천천히 의식을 제 아래 무의식으로 가라앉히면서, 머릿속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뭘 해야 할지를 고민해봐야겠지.

여기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를 찬찬히 궁구해보도록 하자.

“…조금 진정하고. 찬찬히 다시 생각해보자고.”

너무 급격하게 생각이 기울어질 때에는, 그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를 면밀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루시탄은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했다.

프레드릭 알트슈타인 팔케와, 칼 프레드릭 바츠의 관계성은 다시금 돌이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름과 연령 정도다.

그나마도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정도로 남겨둬야겠지.

‘어차피 허언, 망상, 광언이라면…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맞지 않으면 그걸로 그만.

맞는다면…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한다.

물론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은 아니기에, 얼굴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만약 프레드릭 알트슈타인 팔케가 정말로 칼 프레드릭 바츠라면….’

분명 무엇인가 단서가 있을 것이다.

몸을 일으켜서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루시탄은 자신이 지금 어느 쪽을 바라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단서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서가 나올지도 모름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형….’

미하도르는 늘 좋은 형이었다.

아버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공공연하게 차기를 강권당하는 동생에게

‘늘 좋은 형’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철이 들고 나서 겨우 깨달았다.

자신이 그 유혹을 뿌리쳐서일까, 아니면 이미 진즉에 포기했기 때문에 달관한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지금도 섣부르게 판단할 수가 없다.

책장을 더듬어가던 손이 이윽고 한 권의 낡은 책을 손에 쥐었다.

이 책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생각을 반쯤 진실로 확정시키는 것이었지만,

루시탄은 이제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해야 할 일, 맡게 될 역할을 깨달았다.

‘…결국엔 나도 발스턴 놈과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네.’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만약 자신이 우려한 대로의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루시탄 알트슈타인 팔케는 형, 미하도르 알트슈타인 팔케를 왕으로 세울 것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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