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3 3 / 왕국의 그림자에 숨은 그 용에게 (1)
* * *
(1)
“죄송합니다. 로제이아 님. 만나실 수 없습니다.”
“아니, 대체 왜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선제후 각하의 명령입니다. 모쪼록 양해해 주십시오.”
상황이 참 우스워졌다.
루시탄은 속알맹이야 어찌되었든 ‘전하’ 소리를 듣는 신분인데,
‘각하’ 칭호를 듣는 선제후에게 마치 새장 안의 카나리아처럼 억류당하고 있다니.
문을 지키고 선 병사의 얼굴을 쏘아봐도 그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가두었을 뿐…
‘…은 개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어 마법을 풀어놓았다.
이래봬도 난 식물계 흑마법사다. 환각, 환취, 환시, 환청 등은 기본이지.
지팡이를 꽉 움켜쥐는 것에 병사 둘이 일순간 경계의 빛을 띠었지만 미안하게도 이미 늦었다.
제대로 주문이 들었는지, 병사 둘의 눈에서 의식이 사라져 초점 없이 멍하게 흔들렸다.
비켜, 하고 한마디 차갑게 내뱉자 병사들은 영혼이 없는 좀비처럼 무력하게 물러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대학 도서관 같은 풍경이 눈을 채운다.
3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찬 수많은 책장.
그리고 그 책장에 한 권어치 공백도 없이 들어차 있는 책들에 다소 압도될 것 같았다.
사서가 없다는 문제는 있을 수 있겠지만, 사서를 맡아도 될 만큼 한가해보이는 녀석이 있으니. …물론 지금 얼굴을 맞대는 게 영 껄끄러웠다.
“들어왔으면 기척이라도 내지 그래.”
창가의 자리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가한 녀석이 얼굴을 들었다.
연금당한 것치고는 무척이나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라, 무슨 얼굴을 하고 녀석을 봐야할지 고민했던 게 다소 바보같이 느껴진다.
“좋아 보이네.”
“온종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얼굴 근육이 뻣뻣해지는 건 둘째치고, 누가 들어와서 보면 또 잔소리를 할 것 같아서.”
“헤에. 그 한가한 누군가가 대체 누구려나.”
언제나와 같은 서로 독소 어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일단 눈에 들어오는 책장에서 책을 아무거나 한 권 손에 잡히는 대로 빼냈다…
‘상실의 땅 발굴사’라. 꽤 전문적인 제목을 가진 책도 가지고 있잖아.
“그래서. 그건 그렇다치고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지키는 자가 있었을 텐데.”
“뭐, 아저씨 둘이서 지키고 있더라고… 근데 잘 얘기하니 문 열어주던데.”
“언제부터 얘기라는 단어에 이렇게 수상한 뉘앙스가 있었던 건지.”
이런 말이 있다. 개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고.
루시탄은 딴지 한번 걸 시간에 그 말의 의미를 좀 새겨둘 필요가 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나 좀 설명해 봐.”
“그게 일단 명목상은… 그론 선제후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이 서재에 갇힌 신세야.”
선제후가 얼마나 높은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자를 함부로 잡아가둘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 점을 지적하자, 루시탄은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였다.
“그론 선제후는 겉보기에는… 호감을 사기 어렵다는 건 인정하지만 교활하고 정치 감각이 탁월한 인사지.
누군가에게 얕잡아 보인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 말은, 너와 선제후, 성격 나쁜 사람들끼리 뭔가 작당해서 일을 꾸미고 있단 얘기야?”
“성격 나쁘다는 말을 굳이 붙여줘서 고마워.”
루시탄은 입꼬리를 한번 일그러뜨려 비릿하게 들어올렸다가,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다시 내렸다.
대체 무슨 책이길래 사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렇게 코를 박고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책이길래 사람이 오거나 말거나…”
“선제후가 개인적으로 작성했다고 하는… 아버지의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한 기록.
내가 왕궁에서 읽었던 것과는 몇 군데가 달라서, 확인차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던 참이야.”
“흐응….”
그러니까, 이 녀석은 아마 선제후와 짜고 이 방에 일부러 들어왔다는 게 되나?
하지만 왜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거지?
루시탄은 자신과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더니, 빈 낱장의 한 귀퉁이를 북 찢어냈다. 뭔가를 슥슥 적어 내밀었는데…
‘선제후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성 지하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꿈에 나올까 봐 겁나는 인간 말미잘들. 그리고 그 너머에 방치되어 있던 용의 허물.
분명 연관점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는 그 관계성을 이어줄 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
이 녀석이 갑자기 필담으로 이 얘기를 전해왔다면…
내가 여기에서 이 말에 대해 놀라거나 깊게 생각하는 티를 내면 녀석의 의도가 말짱 도루묵이 되겠지.
‘대체 누구에게?’
‘아직은. 선제후도 그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못했다. 입막음을 당한 것인지, 파악을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별 것 아닌 잡담을 이어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내용을 정리해 필담을 이어간다.
어쩐지 스파이 기분이라, 꽤 두근두근하는데.
‘실은 이쪽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어. 이 성의 지하에…’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간략하게 축약해서 전달했다.
여백이 모자라잖아… 페르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빽빽하게 글씨를 채워넣은 쪽지를 눈으로 훑은 루시탄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성 지하에 대해서는 이쪽에 당시의 건축 기록이 있을 것 같다. 한번 찾아보지.’
‘무리하진 말고. 저번처럼 또 험한 꼴 당할라.’
‘누가 할 소린데.’
일단 필요한 사항은 전달했다.
이 이상… 여기에 머무르는 건 조금 위험하겠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섰다.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꼬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써본다. 잘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누가 직접 듣고 있지 않으니, 들킬 걱정은 좀 적으려나.
“…뭐 책에 빠져 사는 것도 좋지만, 적당적당히 해 둬. 일단 가서 내 일 볼 테니까… 넌 너대로 책이나 실컷 읽어두라고.”
이 정도 얘기해뒀으면 의도를 알아듣겠지.
녀석은 이 서재에서 할 수 있는 조사를 하고, 난 나대로 발로 뛰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조사한다. 일단… 이 방침으로 가면 되겠지.
‘가는 것모다 골치 아픈 일만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엮여서… 대체 언제쯤 맘편히 살 수 있을까.’
어째 가는 곳마다 골치 아픈 일만 이어져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서재를 나섰다.
뭐 다행히도 문을 열자마자 창이 들이밀어지는 사태는 없었고, 아직 제정신을 가누지 못한 병사 둘이 멍청한 얼굴로 창을 들고 있었다.
‘일단 침입이 들키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인가?’
요행인지, 방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일이 시끄럽지 않게 되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환영할만한 일.
‘일단 해야 할 일은….’
어딘가 방해가 들어오지 않을 만한 조용한 공간에서, 용의 허물에 대해 조사해보는 것.
이 허물의 주인 되는 용의 기억을 추출해낼 수 있다면, 이 성에 얽힌 사건의 핵심에 단숨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선제후의 성 지하에 그런 굴이나, 괴물들이 즐비한 것도 이상하고.
그러고 보니 루시탄은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지. 아마 브레스의 기억을 읽었을 때, 뭔가를 짚어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알지 못하는, 본인만이 아는 어떠한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복도를 걸으면서 머리를 식히고, 차근차근 일련의 사건을 하나씩 연결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지만… 일단 될 수 있는 대로 정리해보자.
먼저…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지?
‘일단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 [왜 국왕이 왕세자가 아니라 차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공작을 벌였는가]인가.’
명목상으로는 왕세자, 그러니까… 미하도르의 와병.
무슨 병인지는 절대로 세간에 공표할 수 없는 와병으로 인해 왕위 승계가 불가능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예전에 ‘그’의 기억을 들여다봤을 때.
국왕은 그녀를 목졸라 죽이려 했고, 그 자리에 발스턴도 있었다.
죽은 발스턴에게 뭘 알아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지만… 최초의 의문이다. 왜 국왕은 성녀 로젤라이를 죽이려고 했던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현 국왕, 루시탄의 아버지… 울자크 왕이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분명 추문이 될 만한 게 있었을 것이다.
로젤라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울자크 왕은 로젤라이가 아는 그 사실이 왕세자가 아는 것을 두려워했다.
로젤라이는 그날 죽었지만, 여전히, 혹시라도 왕세자가 그 사실을 아는 건 아닐지를 두려워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단 얼개는 맞아.’
루시탄이 한 말. 왕위 승계 과정에 대한 기록이 왕궁의 기록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정도면, 분명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을 터.
‘그리고, 그론 선제후.’
그론 선제후는 루시탄이 증언하기로는 선왕 시절부터 선제후 자리를 지켜왔고,
다른 선제후들이 몰락하는 과정에서도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선제후라고 했다.
이 성에 얽힌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그론 선제후의 입신(?)은 그의 개인적인 역량 이외의 어떠한 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아마 그건 지하의 용 허물과 결코 무관하지 않…
“잠깐, 잠깐 기다려. 이건…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잖아. 설마, 설마.”
생각이 입을 타고 돌연 새어나왔다.
있다. 있다. 있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이 한 명 존재한다.
선왕, 혹은 현왕 대에 이르러서까지 왕과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론 선제후와 어느 정도 선이 닿아 있고, 무엇보다 용과 관련이 있는 자.
루시탄과 미하도르, 로젤라이. 그들에 얽힌 사연에 대해 알 수 있고,
발스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정말로 그건 말이 안 돼.”
“…죄송해요, 로즈 씨.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시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잠시만 주무시면 되니까요.”
“…?!”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잊을까, 그 목소리.
돌아본 내 눈에 가득히 들어온 것은, 정신을 잃게 하는 빛 한 줄기. 그것이 마법 반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몇 번째인지 모를 어둠에 떨어지면서,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의심이 확신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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