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3 2 / 골렘에 진심인 마법사 벤 가브롤에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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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루시탄과 서로의 감정을 격렬하게 부딪친 뒤, 만 하루가 속절없이 흘렀다.
서로 품고 있던 생각을 남김없이 토해낸 발로인지, 곧바로 루시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서로에게 몹시도 불편했다.
그래서 전날 저녁 시녀에게 부탁해서 따로 방을 마련해달라고 했고, 급하게 마련된 작은 방에서 맞이한 아침은 무척… 개운치가 않았지.
루시탄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지금 그러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일어났는가, 주인.”
별로 정겹지는 않은 아침 인사를 무뚝뚝하게 건네는 즈왈트를 올려다보았다. 즈왈트에게 부탁해 루시탄이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볼까도 한번 생각해봤지만… 생각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즈왈트는 커다란 흑갈색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왕자는 선제후라는 자를 만나러 간 모양이다만.”
“…즈왈트, 독심술이라도 할 줄 알았어?”
“아니, 하지만 지난 밤에 그렇게 다투고 난 다음이니, 당연히 왕자의 안부가 궁금할 것 같아서 미리 알아봤다.”
이래서 눈치 빠른 골렘이란.
괜히 죄없는 즈왈트를 한번 째려보고는 테이블에 작게 차려진 식사를 바라보았다. 잠든 사이에 차려놓았나…? 테이블에 앉아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튀긴 빵을 조금씩 잘라 먹으려니… 냅킨에 싸인 무엇인가에 손이 닿았다.
“…뭐야, 이거. 열쇠… 잖아? 즈왈트, 이거 네가 놓은 거야?”
“아니, 난 모르겠다만….”
냅킨 안에는 조악하게 원본을 본뜬 듯한 놋쇠 열쇠가 싸여 있었다. 열쇠만으로 어떻게 알아, 라고 생각했던 차, 열쇠를 감싼 냅킨에도 뭔가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대강의 길을 표시한 약도 쪽지도 함께.
‘지하로. 혼자 가지 말 것?’
…뭔데, 이거. 조금 당혹스럽고 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나한테 이런 걸 보냈지? 이 성에는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은밀하게 보낼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호기심이 부글거리긴 하는데… 지난번에도 괜히 호기심에 혼자 다녔다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헛기침을 한번 하곤, 멀뚱히 서 있는 골렘에게 시선을 옮겼다.
“…즈왈트, 네 생각은 어때?”
“주인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추천할 수는 없다.”
“그렇… 겠지, 응.”
무뚝뚝하게 답하는 즈왈트. 혹시 이 열쇠, 누가 가서 놓았는지도 봤으려나? 한번 더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물어봤지만, 그는 시녀가 식사를 차리는 것만 봤을 뿐 그 열쇠에 대해서 아는 건 없다고 대답했다. 잠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지만… 지금은 루시탄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일 다른 동기가 필요했다.
“가 보자.”
“…나쁜 버릇이 또 도졌나.”
웬즈데이도 그렇고, 즈왈트도 그렇고…
통 고분고분한 맛이 없다. 정말. 한번 홱 쏘아보자 눈을 피하면서 얼버무리는 건 웬즈데이랑 똑같다. 골렘끼리 너무 친한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아무튼, 지팡이를 챙기고 방을 나섰다.
누가, 무슨 의도로 그런 메시지를 내게 몰래 보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궁금한 것을 절대 참지 못하는 사람을 고른 것이라면, 정말 사람을 잘 골랐다는 칭찬 한 마디는 해두고 싶다.
“…즈왈트. 일단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걸 챙겨둬. 혹시 모르니까.”
“무기를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동감이긴 한데… 너, 나 찔리라고 한 말이지? 그거.”
“찔리기는 하나?”
즈왈트는 방에 장식된 커다란 미늘창을 쥔 채 궁시렁거리며 뒤를 따라왔다.
그래도 지난번 그 사건에서 배운 게 있다면, 어지간해서는 혼자 행동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즈왈트는 호위로서는 믿음직스럽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큰 도움이 되겠지.
“이상하군.”
“뭐가?”
“사용인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약도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내내, 사방을 빈틈없이 경계하던 즈왈트가 예리한 곳을 툭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찔렀다. 그제야 즈왈트의 말대로, 마치 누군가가 사용인들을 치워둔 것처럼, 지하로 향하는 내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성… 모겐슈테른에 온 것부터, 이 열쇠를 보낸 자가 꾸민 게 아닐까?
하지만 대체 누가?
‘또 터무니없는 일에 말려드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슬슬, 터무니없는 위험한 일에 머리부터 들이미는 버릇은 좀 고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발을 멈추지를 못하니 원. 아무리 생각해도…
“난 오래 살 팔자는 아닌가 봐.”
“조금 몸을 사릴 줄 모르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너랑 웬즈데이는 좀 한 번이라도 주인 기분을 맞춰줄 순 없어?”
자의식이 너무 강한 골렘에 대해서도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몇번째인지 모를 투덜거림에 한 번을 더 추가하고는, 일단 무턱대고 아래로 내려간 끝에… 자물쇠로 굳게 잠긴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여기겠네.”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쇠사슬이 칭칭 둘러친 데다 두꺼운 자물쇠로 잠겨 있는 문은, 꽤 오랫동안 열지 않은 것처럼 녹슬었다. 솔직히 만지고 싶지 않을 정도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찰칵,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잠금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풀렸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자물쇠에서 쇠사슬이 뒤따라 바닥에 떨어지고, 별로 만지고 싶지 않은 생김새의 문은 즈왈트가 커다란 손으로 밀어서 열었다.
“…고마워. 으음… 잘 안 열리네. 오랫동안 닫혀 있기라도 했나?”
“아무래도.”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바닥에 붙어있다시피 했던 문이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면서 밀려났다. 후두둑, 녹더미가 떨어졌다.
“즈왈트, 뒤를 봐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앞장서지 않아도 되겠나?”
“네가 앞장서면 앞이 전혀 안 보일 것 같다고.”
지팡이의 마력핵에 마나를 부어 넣어 빛이 어리게 한 뒤, 아래로 통하는 지하 계단을 따라 걸었다… 슬슬 지하실에 염증을 느낄 정도인데. 익명의 제보자는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톡 하고 가볍게 밀었다고, 호이호이 순순히 여기까지 좋다고 온 나도 나지만.
“함정이라면 제대로 걸린 거지, 뭐.”
“자각은 있다니 다행이군. 장족의 발전이다.”
“아, 시끄러워.”
얼마쯤 계단을 내려간 끝에, 단단한 돌바닥이 발끝에 닿았다.
일단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복도를 거슬러 나아간 끝에 나타난… 수정으로 된 거대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손으로 밀어봐도 열리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즈왈트, 이거 좀 열어봐.”
“음.”
즈왈트가 나서서 힘껏 문을 밀어봐도 열리지 않는다.
물리적인 잠금이 아니라 마법적인 봉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떻게 해야 열 수 있을까. 천천히 문의 위쪽부터 아래쪽까지 빛을 비춰보았다. 수정 문의 표면에 어슴푸레하게, 돋을새김 같은 것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단편적으로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는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눈을 찌푸리고, 가능한 하나하나의 상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머릿속에서 형상을 짜맞춰야 했다. 외우는 것은 나름 자신 있지만, 이건 좀…
수정 문의 상부에는 문의 좌우로 날개를 펼친 용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유난히 강조한 용의 옆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 같은 것이 문의 중앙, 커다랗게 파인 홈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하단부에는 불타는 지상의 모습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어딘지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조각이다. 설마, 베어링턴의 풍경을 묘사한 것은… 아닐테고.
‘잠깐, 설마…?’
무슈마헤트가 내게 건넸던 녹빛 브로치가 생각났다.
로브에 채워둔 브로치를 풀어서, 홈에 가까이 닿도록 들어올렸다. 브로치에서 비취색이 어른거렸고, 금색 테두리에서 빠져나온 녹빛이 홈을 채웠다.
쿠르르르릉…
수정으로 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좌우로 벌어져, 열렸다.
마치 오래된 신전의 회랑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선제후의 성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었을 줄이야.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자고?”
“주인과 나만으로 감당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선제후라는 자와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어떤가?”
즈왈트의 말은 사실 정론이다.
아무리 봐도, 이 앞의 광경은 나나 즈왈트의 힘만으로 어떻게 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성의 주인, 그론 선제후의 손에서 해결될 것 같았으면 과연 익명의 제보자(?)는 굳이 이 성에 처음 온 나에게 은밀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택을 했을까?
헤카이트 당주 왈,
호기심은 마법사를 죽이는 독이긴 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없는 마법사는 죽은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했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조금만 들어가 보자. 정 위험할 것 같으면 그때 도망치고.”
“주인은 가끔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없다는 게 흠이지.”
“잔소리는 웬즈데이만으로 충분하거든.”
또각, 유난히 크게 울리는 회랑에 첫 발을 내딛는 소리가 커다랗게 사방에 반향하여 울려퍼졌다. 회랑 양쪽으로 도열한 거대한 조각상들은 아주 오래된 시대의 전사나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빳빳하게 만드는 긴장감에 숨을 들이마시면서,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일단… 저 너머 보이는 아치형 기둥 너머의 공간을 살짝 엿보는 정도로만 하자구.
그 정도라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않겠지? 아마도.
즈왈트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오래 살 팔자는 아닌 것 같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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