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3 2 / 골렘에 진심인 마법사 벤 가브롤에게 (5)
* * *
(5)
내 입에서는 이미 말이 튀어나왔고, 돌이킬 수 없었다.
루시탄은 늘상 얼굴에 엷게나마 그려 붙이던 미소마저 잊었다.
“너….”
지금 나는 이 녀석의 상처를 후벼파는 말을 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 상처는 잘못 아물은 상처다.
환부를 덮은 살점이 검게 물들어 곪아버렸다면, 그걸 째서 썩은 피를 터뜨리고 제대로 새살이 돋게 해야 한다.
“…왜 그러지? 어제 술은 마시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다 하고. 아무래도 전이 마법은 처음이라 피곤했던 게….”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내 질문에 똑바로 답해.”
너스레를 떨며 빠져나가려는 루시탄의 어깨를 붙잡고는 추궁했다.
삐걱거리며 마음이 엇나가는 것 같았다. 엇나간 마음의 뾰족한 부분이 서로 긁혀서, 균열을 내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에, 엇나감은 가속했다.
원망이었다.
처음으로 날 바라보는 눈에 원망이 어렸다.
“…이제와서, 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다 지난 일이야. 전부 끝난 일이라고.”
“네 안에서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잖아. 너 스스로 납득하질 못했잖아. 네 과거, 로젤라이, 네 형, 네 아버지, 전부. 아니면…”
이 말을 하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불안과 그럼에도 여기에서 이 말을 해야 한다는 만용이 팽팽하게 부딪혀댔다. 와르르 무너진 것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지난번, 발스턴의 과거를 마주했을 때 이 녀석의 눈을 잊을 수 없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떠는 아이 같은 그 눈.
그 이불 밖으로 끌어내는 게 내 역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평생 도망칠 셈이야? 평생 그렇게 피해만 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후회할 셈이냐고!”
“결국 너도였던 것이냐?!”
단언컨대,
루시탄이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것을 들은 적이 없다.
항상 침착하게 있으려던, 어른이 되려던 그의 내면은 상처와 멍자욱으로 가득한 소년이었다. 그 소년다운 마음을 처음으로 엿보았다.
“너도, 내게 접근해왔던…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냐? 날 충동질해서 왕좌에 올린 뒤 너는 왕비라도 되고 싶었던 거냐? 아니면, 왕위에 흥미 없는 나 대신, 이 나라를 네가… 여왕 노릇이라도 어떻게 해보고 싶었느냐고!”
“그럴 리가 있어, 이 등신 같은 새끼야!”
마주 소리쳤다.
밖에서 누가 듣든 말든, 내가 왕자에게 불경을 저지르든 말든, 루시탄의 위치가 어떻든 말든, 그딴 건 엿이나 처먹으라지!
“난 그딴 엿이나 까잡수는 게 아니라… 네 얘기를 하는 거야, 네 얘기! 네가 병신같이 속앓이하는 꼴을 내 눈으로 본 이상… 널 내버려 두는 빌어 처먹을 새끼들 대신에 나라도 나서서 오지랖 좀 부려야겠다고! 네가 그냥 한번 보고 말 사이면 내가 이런 말도 안 해, 난, 나 이상으로, 널… 신경 쓰고 있는데!”
숨이 턱 막혔다.
하아, 하아, 하아… 내쉬고 들이마셔도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혈관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아드레날린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것은 루시탄도 마찬가지.
다만 녀석에게는 이제껏 살면서 그랬던 적이 아마 없을 것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호흡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력질주한 망아지처럼 헐떡이고, 손이 불쌍할 정도로 바들거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듯한 눈에는 분기와 애처로움이 일렁였다. 지금만은 그 손을 그냥 놓아두어야 했다. 그 눈을 못 본 척해야 했다고.
“너만은… 너만은… 난 너만은 그래도 믿었어, 네가 걸리버라서가 아냐, 넌… 넌 내가 처음으로 가장 개인적인 이유로 필요로 했던 사람이야. 아버지한테 반항하기 위해서도, 형을 위해서도 아니라… 그런데, 내가 널 로젤라이의 대신으로 보았다고? 그건…”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어리광 부리지 마!”
또다시 도망칠 길을 찾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곤란한 자리가 있으면 피한다. 피할 수 없으면 피할 길을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정면으로 맞서는 녀석이, 유독 이 화제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네 가장 개인적인 문제에 언제까지 눈을 돌릴 순 없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루시탄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제껏 그를 둘러싼 이들은, 예를 들어 발스턴, 니이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이나 이익을 위해 루시탄이 더 높은 위치에 서길 바랐다. 그런 이들만을 보아왔다면, 마치 눈의 양옆을 가려놓은 말처럼 시야가 좁아지는 건 당연하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난… 난 널 아직도 모르겠어. 너라는 여자가 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넌 대체… 너야말로, 대체 널 움직이는 욕망의 근원이 뭐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어째서… 어째서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난 도저히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루시탄의 눈에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과 혐오, 그리고 인간불신이 어른거렸다.
그건 마음에 든다. 나부터도 사람 잘 안 믿는다. 하지만 믿은 사람에게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성미라고.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이 나라의 둘째 왕자 나리는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내게 호의를 베푼 만큼 난 반드시 그걸 돌려줄 거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죽은 첫사랑을 붙들고 망령처럼 사는 건 절대로 용납 못해. 난 욕심 많아서, 내 남자가 언제까지나 죽은 여자 무덤가를 기웃거리는 건 죽도록 싫어. 네 그림자를 붙잡는 건 사양이야.”
차라리 살아있으면 머리카락이라도 뜯으면서 대판 싸우고 그러고 말겠지!
로젤라이에게는, 그래, 나도 신세를 많이 졌다. 인간적으로 호감은 간다. 가엾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답도 없는 형제, 아니 그 아버지까지 온 집안 문제에 끼어들어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
루시탄은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다. 애당초, 로젤라이에게 루시탄은 사랑하는 사람의 남동생일 뿐이었는데.
“이젠 너도… 그 여자를 보내줘야 할 때라고! 네가 왕자라고, 네가 책임질 필요가 없는 죽음에 얽매이지 마!”
“죽음에 얽매인다? 바로… 바로 그 죽음에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왕가의 책무란 말이야!”
루시탄이 분에 못 이겨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것 그대로 보이는 건 오늘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래,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한다.
나부터도 견디지 못하겠다. 이 녀석의 해묵은 상처를 후벼파는 건 오늘로 끝내고 싶다.
“모든 왕족은 신민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어, 내가 그녀를 기억하지 않으면 로젤라이는… 정말로 허무하게, 덧없이, 그저 왕가의 더러운 사정으로 살해당한 게 된다는 걸 모르겠어?!”
“변명하지 마….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는 걸 거부했으면서 네 허무한 죄책감에 죽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란 말야.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라면 너희 아버지고, 그 사람을 기억해야 할 사람은 네 형이야. 내 눈에 너는 지금 네 형을 질투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
“난 형을 질투하지 않았어!”
루시탄이 내 어깨를 짚었다. 힘주어 쥐었다.
녀석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내 멱살을 쥐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려고, 녀석은 자기 자신의 검은 감정과도 싸우고 있었다.
이 녀석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면,
이 녀석의 상처를 제대로 낫게 해야 한다면,
이 녀석의 위로해야 한다면,
그건 내 몫이어야만 해.
형의 여자이자 이미 죽어서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로젤라이가 아니라.
“내가 형을 질투했다고?!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내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형에게 돌려주기 위해 널 찾았어,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옆에서 전부 봐온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게 네가 네 형에게 지운 빚이야? 네 형의 자리를 되찾아주고, 네 형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줬으니까, 네 마음 한켠 어딘가에 죽은 여자를 담아도 된다고? 웃기지 마!”
으득, 이를 깨물고 손을 당겼다.
루시탄의 멱살을 붙들고, 녀석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강하게 부딪혔다.
외눈과, 떨리는 파란 눈이 서로를 강하게 인식하여 쏘아보았다.
“날 봐!”
하아, 하아… 숨이 부족하다.
하나밖에 없는 내눈으로도, 녀석이 동요하고 있는 게 보인다.
내가 얼마나 녀석의 마음 한곳을 찔렀는지는 모른다.
“지금 네 옆에 있는 건… 로젤라이도, 니이냐도, 발스턴도 술라도 아닌 나라고! 넌 네 형이 아니야, 나도 로젤라이가 아니야, 질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돌아보지 마, 도망치지도 마!”
루시탄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궁지에 몰린 루시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내 마음을 흔든다.
“너만은… 너만은 날 다그쳐서는… 안 돼….”
“…그럴 수 없어, 루시탄. 다른 모든 사람이 널 용인해도, 나만은 네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질타할 거야. 억지로 당겨서라도, 네 미래가 망가지지 않게 할 거야.”
“잔인한 여자… 잖아, 너.”
“이제 알았다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말하지 마.”
어깨를 짚은 루시탄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었다.
힘없이 떨어져가는 손에 문득 가슴이 쓰렸고, 세게 잡혔던 어깨가 뜨겁게 욱신거렸다.
천천히 팔을 뻗어 녀석의 등에 둘렀다. 까닭없이, 눈에서 물기가 넘쳤다. 목은 메이지도 않았는데.
“루시탄. 더 이상 눈 돌리지 마. 제대로… 제대로 맞서. 네 아버지, 네 형…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전부 마무리해야 해. 도망쳐온 만큼, 되돌아가서 맞서. 네 과거와 싸워.”
“…전혀 봐주질 않는구나. 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
“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가 퇴로를 막고 있을 거야. 각오해.”
루시탄의 팔이 천천히 등에 감겼다.
꽈악 당겨오는 그 무게감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녀석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하게 하겠어.
절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