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42화 (142/157)

〈 142화 〉 3 ­ 2 / 골렘에 진심인 마법사 벤 가브롤에게 (4)

* * *

(4)

결국 아무도 그다지 바라지 않았던 아침이 찾아왔다.

리제는 간밤에 술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그저 술라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전이 마법진이었다.

“모겐슈테른으로 통하는 마법진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편리한 주문이긴 하지만 아무 때나, 또 아무데서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쪽에서도 마법사가 호응해줘야 성공적으로 전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튕겨나갈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주문인 것이다.

그론 선제후가 초청을 했으니 아마 마법사가 대기해있겠지만 왜 그렇게 우리를 불러내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그 이유까지는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응답이 왔습니다. 전이하시려거든, 이 안으로.”

“여러 가지로 고마워, 리제. 다녀올게. 웬즈데이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여러가지로 많이 가르쳐 줘.”

“네, 로제이아 님. 다녀오십시오. 웬즈데이 님은 제 쪽에서 잘 접대하겠습니다.”

웬즈데이를 남겨놓은 것은 일종의 연락책이다. 웬즈데이 본인은 그다지 마뜩찮아하는 눈치였지만. 모겐슈테른 성으로 전이하는 건 나와 루시탄, 즈왈트 정도였다. 술라는 같이 전이하지 않고 여기에서 전이 주문을 유지한 뒤, 곧바로 떠난다나.

“야속하겠네. 리제.”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뜻을 설명해주기도 전에, 바닥에서부터 뻗쳐올라온 빛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약 5초 후, 마치 엘리베이터가 예정된 층수에 도착한 것처럼 빛이 다시 바닥으로 꺼져들자… 눅눅한 습기가 감도는, 본 적 없는 돌로 된 공간으로 주변이 변해 있었다.

놀라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전이 마법, 번거로운 만큼 편리할지도 모르겠는데.

“루시탄 왕자 전하. 그리고 가시의 마녀 로제이아 님 되십니까?”

“그렇다.”

흔하디흔한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신원을 확인했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루시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탄의 덤 취급인 나는 그냥 입다물고 있기로 했다. 마법사는 내 등뒤에 선 즈왈트를 한번 올려다보곤, 조금 겁이라도 집어먹었는지 물러났다.

“저기, 저 덩치 큰 분은…?”

“호위다.”

“아, 그렇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선제후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론 선제후. 어떤 인물일까.

적어도 지금까지의 품평이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여색을 밝히고 끈질긴데다 음습한 타입인 것 같은데… 대부분의 악평이 루시탄에게서 비롯된 걸 생각하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돌로 된 지하실에서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과하게 사치를 부린 것 같지 않고, 그저 위엄을 세우는 정도의 장식이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장식이 갑옷과 도끼창, 그리고 영웅심을 불러일으키는 테마인 것을 보면 그런 쪽의… 애호가인 것 같기도 하고.

“그론 선제후는 옛날부터 꽤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지. 서부 사수지에 나라를 세운 일곱 영웅이라든지, 여신이 된 전사 그람 아인하르트의 이야기라든지.”

루시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택의 정원에는 청동상이 있었다. 온몸에 갑옷을 입은 전사의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단정한 얼굴에서… 무엇인가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잠시 기억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포기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선제후와의 대면이니까. 창가를 지나쳐 이윽고 유난히 커다란 문 앞에 이르러, 조금 긴장감이 뒤늦게 찾아왔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는, 시종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끼이이이… 열리는 문 너머.

가장 먼저 무거운 존재감을 가진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알트슈타인의 상징인 매의 머리가 장식된 팔걸이가 인상적이었다.

그 팔걸이에 손을 얹고,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댄 남자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의자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왜소했다.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 붕 뜬 채 허우적거렸다.

마치 살덩어리 풍선 같은 남자였다. 얼굴이, 몸이, 손가락이, 모든 것이 지방이 들어차 둥글었다. 살에 파묻힌 듯 오밀조밀하게 얼굴 한가운데 모인 이목구비는… 빈말로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구성을 하고 있었다.

그론 선제후… 가 그라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셈이었다.

“오호…. 왕자 전하. 드디어 와 주셨군요. 왕자님께서 와주시길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선제후 각하.”

뚱뚱한 남자와 루시탄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그가 그론 선제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얄팍한 실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애쓰며 일단 예의를 갖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제후 각하.”

“안녕하시오. 그쪽의 숙녀분이 ‘가시의 마녀’ 로제이아 님이시겠군. 모겐슈테른 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모습은 다소 비루할지언정, 그의 말투는 비루하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았다.

정갈하게,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예의를 갖춘 그론 선제후는 둥글둥글하고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자기보다 키가 작은 남자를 보는 건 아이들을 빼면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자 한 것은… 베어링턴에서의 영웅적 활약에 대해 선제후로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가능하다면 왕자 전하의 지인분들을 더 많이 초청하여 커다란 연회를 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왕자 전하의 지인분들은… 연락이 쉬이 닿는 분들이 아니더군요.”

…뭐, 이해한다. 다들 한 개성 하는 사람들이라.

베어링턴에서의 일이 끝나자마자 다들 자기 갈 길을 찾아 떠나버렸지.

루시탄은 점잖게, 그론 선제후의 칭송을 사양했다.

“선제후 각하께서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지만 저는 그저 이름만 내걸었을 뿐, 베어링턴을 지키는 데 앞장섰던 건 이 사람과 그의 친구들입니다. 그 점을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제게도 귀가 있고 눈이 있습니다. 왕자 전하. 왕자 전하의 공도 결코 작지 않음을 이 사람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만약 왕자 전하께서 입신양명에 뜻을 품고 계시다면, 이번 일로 충분히 이름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요.”

루시탄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나조차도 느낄 정도였는데, 루시탄이 그론 선제후의 말에 섞인 불온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왕위 계승 건으로 그 홍역을 치렀던 루시탄에게 곱게 들렸을 리가 없는데.

그론 선제후, 과연 알고 말한 걸까 아니면 모르고 말한 걸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선제후 각하. 저는 왕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이 나라는 국왕 폐하와 왕세자 전하께서 잘 이끌고 계십니다. 제가 구태여 나서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을 잃거나 하지 않겠죠.”

“물론 그렇습니다, 왕자 전하. 왕세자 전하께서도 몹시 든든하시겠지요. 아우님께서 형님의 전정을 빛내는 데 이렇게 발벗고 나서주고 계시니 말입니다. 핫하하.”

…뭐냐 이 분위기.

둘 다 웃고 있는데, 그 이외의 다른 이들은 절대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둥글둥글하고 짜리몽땅하면서도 비루해보이는 생김새의 그 남자는…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허, 이거 참. 이렇게 초청해두고서는 너무 무례가 심했군요. 왕자 전하. 그리고 가시의 마녀님. 부디 이 모겐슈테른 성에서 푹 쉬시길 바랍니다. 듣자하니 가시의 마녀님께서는 걸리버이시라지요? 가능하면 이 사람에게 그동안 마녀님께서 겪으셨던…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루시탄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내 앞을 슬쩍 막아섰다.

마치 그론 선제후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이 싫다는 것처럼.

“정말 그렇습니다, 선제후 각하. 이 사람도 저도 그동안의 여행으로 무척 지쳐있죠. 방을 마련해주시겠습니까? 조금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자, 방을 안내해드려라.”

뜻밖에 다소 강경하게 나오는 루시탄의 요망대로, 시녀가 소개해준 방으로 들어섰다.

왕궁의 루시탄의 방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방으로 안내되어, 가장 먼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푹신한 이불이 반가웠다. 리제의 집에 있던 것보다도 더 푹신푹신해서, 거짓말 조금 보태서 구름 위에 누운 것 같았다.

“너도 이제 알겠지? 그런 사람이야.”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루시탄은 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 경우에는… 워낙 첫인상을 조져놔서 그런지, 그 정도면 사람됨 자체는 무난한 게 아닌가, 하는 감상을 느꼈었다.

루시탄은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잘 생각해보라고. 예를 들어, 바츠 경의 얼굴로 아까와 같은 말을 했다고 상상해봐.”

“예시가 바츠 경이야? 루시탄, 너 은근히 바츠 경 좋아하더라.”

“아무튼.”

내 놀림을 일축하고는 루시탄이 채근해온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루시탄에게 입신양명을 권유하는 바츠 경이라… 그런 장면을 상상해보니 튀어나온 내 감상은,

“백수 아들을 채근하는 은퇴 직전 아버지 같은데.”

“왜 그렇게 돼. 난 백수가 아냐.”

백수 후보 루시탄은 진저리를 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론 선제후.

“그론 선제후는 아버지 이전 왕부터 페랄 주를 다스려왔던 사람이야.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과정은… 그다지 순탄하진 않았다고. 그 격랑에서 다른 선제후들이 갈려나가는 와중에도 제 자리를 유지한 사람이지. 만만히 보지 마, 그 인간은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권좌의 냄새를 잘 맡는다고.”

루시탄은 노이로제를 일으킬 것처럼 말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권좌에 염증을 느끼는 건 역시…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너, 역시….”

이 말을 꺼내도 될까, 하고 조금 망설였다.

이 말은 루시탄의 속을 까발리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이 답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 녀석을 믿고 싶었으니까.

“…네가 그렇게까지 이런 화제를 싫어하는 건 역시 로젤라이 때문이야?”

루시탄이 이쪽을 홱 소리가 나도록 바라보았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버림받은 듯한 표정. 아니, 자신이 무엇인가 버려선 안 되는 것을 내버린 뒤, 그걸 갑작스럽게 규탄당한 표정이다. 이 말을 꺼낸 순간, 그것만으로 그를 상처입혔다는 자각은 분명히 있었다. 아니, 그 정도의 각오는 했다. 각오했다고.

하지만 분명히 해 둬야만 한다.

난 로젤라이의 대신이 아냐.

넌 네 형의 대신이 아냐.

나는 오늘 밤 그 답을 원해.

나는 너를 믿고 싶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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