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3 1 / 숲 속의 마녀 리제에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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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는 리제의 만류에 일단 오늘은 이만 지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그 기나긴 계단을 다시 걸어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다. 지상과 지하를 잇는 도르래 장치는 그다지 미덥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떠셨습니까?”
“…음… 벤 가브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골렘에 진심이었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
리제는 은근슬쩍 자신의 창조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희대의 골렘술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솜씨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함이 없긴 했으나… 그보다는 그 정열과 집념, 아니 좀 더 속되게 말하자면 망집에 가까운 골렘에 대한 열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부터가 궁금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문득 리제의 얼굴을 보았다.
요모조모 훑어봐도 사람으로 보일 뿐, 골렘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이다. 그 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웬즈데이와 즈왈트도 가능한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어보려고 애쓴 결과물인데 리제에 비하자면 말 그대로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 두 녀석, 뭐 하고 있으려나. 분명 내 욕하고 있겠지, 휴.”
헤카이트 당주에게 보내서 당분간 그쪽 일을 도우라고 했으니 별일이야 있으랴만, 즈왈트야 고분고분하게 내 말에 따라줄 것이라고 쳐도 웬즈데이는… 솔직히 걱정된다. 그 녀석, 무슨 일이라도 벌이지 않을지 원.
“두 녀석…이라니요?”
“내 골렘 얘기야. 스승님의 탑에 두고 왔거든. 내 나름대로는 공들인 녀석들이긴 한데, 리제 씨에 비하자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
“그런가요…? 꼭 만나보고 싶네요.”
리제의 감정표현은 꽤나 절제된 구석이 있어서 가끔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예의상 하는 말인지 구별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떨는지. 일단 빈말로만은 보이지 않지만… 막상 웬즈데이나 즈왈트를 보인다고 생각하면 마치 과제를 제출하는 것 같아서 그다지 자신감은 들지 않았다.
덜컹, 하고 도르라 장치가 멈추자, 지열과 다소 매캐한 냄새가 감돌던 공기가 아니라 신선한 땅 위의 공기가 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가능한 한 깊게 그 차가 식은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내리자, 도르래 장치의 비밀이 눈에 들어왔다. 쇠사슬을 굳게 당기고 있는 두 기의 골렘이라니. 이 집은 뭐든 골렘이 다 하는구만.
“꽤 오랫동안 깨우지 않았던 터라서, 제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알 것 같네….”
아마 주어진 간단한 명령만 이행할 뿐인 골렘이겠지만, 지하실을 오르내릴 때마다 이 골렘을 작동시키느니 리제는 그냥 자기 발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가보니 당연히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벌써 저녁입니다. 시장하실 텐데,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가시죠.”
“하나부터 열까지 신세지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이거.”
“손님에 대한 접대는 제 일이기도 하기에. 마음쓰지 마시길.”
리제의 권유에 따라 식당으로 가는 내내, 지하의 연구동에서 보았던 골렘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갖가지 금속과 석재, 나무… 오늘은 그 세 가지 재료를 사용한 골렘들을 상대로 어떤 실험을 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눈치챘지만, 결국 벤 가브롤이 찾고자 하는 재료는 어떤 것이었을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그렇게 생각과 생각이 꼬리는 잇는 사이, 리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식당 안에는 이미 선객이 먼저 와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시녀 골렘들의 접대를 받으며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느긋한 얼굴이 하나.
“…팔자 좋네, 너. 아예 휴가 나온 얼굴이고.”
“휴가라. 크게 다르지도 않잖아?”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렇다.
시녀 골렘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고, 어쩐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접대에 버벅거리는 나를 보며 루시탄이 키득거렸다. 한 대 맞는다, 너.
“지하에 내려갔다고만 들었어. 이 친구들은 그다지 말주변이 좋지 못해서 그 이상은 듣질 못했거든. 뭐, 다행히도 별일 없었던 모양이지만.”
“별일 없긴 했는데… 넌 별로 걱정 같은 건 안 한 모양이네? 야속하게 말이야.”
“글쎄, 날 대하는 걸 보면 네게 험하게 굴지는 않을 거라는 정도는 유추할 수 있으니까.”
자기중심적인 녀석 같으니. 조금 걱정해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도끼눈을 뜬 채 접시에 놓인 닭고기를 칼로 슥슥 썰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씹히면서 혀끝에 야들야들하게 살결이 풀려간다. 제대로 조리된 닭고기 맛은 꽤 만족스러웠다. 나중에 레시피라도 좀 배워가야겠다고 무심코 생각할 정도로.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이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될런지요?”
가볍게 서로 얕은 독설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서 있던 리제가 괜한 소리 한 마디를 툭 던지자, 루시탄이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맑은 파란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쪽이… 그러고보니 골렘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는 이가 있던데, 그쪽을 말하는 모양이군? 관계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물어도 좋을까? 대답을 하기 전에 말야.”
리제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살짝 떠보는 특유의 느낌으로 루시탄이 슬그머니 묻자, 리제는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주인님께서는 제게 리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덧붙여서 저는 ‘아가씨’가 아닙니다. 아가씨는 주인님의 따님을 말하는 것이죠.”
아가씨… 라.
뭔가 아주 조그마한 퍼즐 피스 한 조각이 손끝에 닿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아니, 손끝에 닿은 건 루시탄의 손이었구요. 루시탄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 손을 꽈악 쥐었다.
“그래, 반가워. 리제 씨. 나와 이 여자는, 보시다시피 이런 사이지. 온천을 관리하는 입장이었다면 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을 게 아닌가.”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두 분의 관계를 유추했습니다. 실례했군요. 방을 하나로…”
“아니, 아니…. 방은 지금 그대로도 좋으니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녀석,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한숨 한번 푹 내쉰 뒤, 타는 목을 물 한잔으로 달랬다. 아니, 넌 왜 아쉬운 눈으로 보는 건데. 손을 뻗어 녀석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리제는 거의 표정 변화가 없는 게,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그러지 말고, 괜히 방을 두 개 써서 여기 관리하는 이들이 번거롭게 하지 말자고.”
답지 않게 추근거린다… 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시탄이 슬쩍 눈짓을 했다. 엉큼한 의도… 가 없을 리는 없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민망해져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럼 그렇게 부탁할게. 내 짐은 내가 알아서 옮길 테니까, 그… 침대 두 개 있는 방 있으면.”
“침대 하나 있는 방으로도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거든, 이… 자식아.”
‘왕자 자식아’라고 할 뻔한 걸 잽싸게 왕자 부분을 삼켜버리고 뒷말만을 되알지게 내뱉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싱글거리는 저 녀석의 속은 아직도 다 모르겠다니까, 정말로.
다만 리제는 그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별 감흥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서… 침대가 하나인 방과 둘인 방, 어느 쪽으로 준비해드릴지요?”
…저 골렘,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루시탄의 의도는 리제나 다른 골렘들이 듣지 않는 은밀한 장소를 원하는 모양인데. 얼굴이 더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게다가 슬슬 손 좀 놓아주지 않으려나.
“…그럼 하나짜리로.”
“알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준비시켰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하는 리제의 반응에 잠깐 벙쩠다. 아니, 니들 나 모르게 짠 거 아냐?! 루시탄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몹시도 귀에 거슬려서, 탁자 아래에서 녀석의 발을 쿵 밟으려고 했지만 저 눈치 빠른 녀석이 순순히 밟혀줄 리가 없어, 발을 탁 뺀 그 자리만을 허무하게 즈려밟았을 뿐이다.
아무튼, 식사가 끝난 뒤 리제가 안내한 새 방으로 이동했다.
먼젓번 방보다 넓고 바닥에는 푹신하게 밟히는 융단이 깔렸다. 고풍스러운 벽난로에서 난롯불이 타고 있어 훈훈한 공기인데다, 탁자에는 술과 글라스까지. 아마 내가 뭔가 대답하기 전부터 준비해놨을 것이란 의혹이 솔솔 피어난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
넌 좀 사양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거냐고.
게다가 노골적인 더블베드에 한층 더 민망해졌다. 할 말은 없지만… 분명 할 말은 없지만!
“그럼 저는 이만. 혹시 온천을 이용하고 싶어지시면 제게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만 온천에서 지나친 행위는…”
“아니, 아니. 또 쓰러질 것 같으니까 안 할 거야. 걱정 말고 가 봐.”
사실 지금도 이 두 녀석에게 놀림당하는 것 같아서 막 쓰러질 것 같고 그럴 지경이다. 리제는 즐기는 것인지 사무적인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태도를 견지한 채 방을 나섰다.
“…그럼… 왜 굳이 이렇게 일을 꾸몄는지 얘기나 들어볼까. 왕자님.”
리제의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그제야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한층 낮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루시탄도 문 쪽을 잠시 응시하더니, 역시나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넌 별일 없었다고 했지만, 난 역시 이 집이 어딘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의심 많은 성격이니 그럴 법도 하겠지.
“정신이 들고 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주겠어?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이 녀석은 의심이 많긴 하지만, 아무나 맥없이 의심하는 성격 또한 아니다. 수상하다고 생각했다면 필경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터이다. 침을 꼴깍 삼키고는, 천천히 기억을 오전으로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에서 수상한 냄새를 맡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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