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3 1 / 숲 속의 마녀 리제에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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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중을 받는 건 익숙하다.
당연하다. 왕자니까. 그는 이 나라 알트슈타인의 둘째 왕자였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일거수일투족 자질구레한 일을 시중받는 것이 당연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그의 곁에는 철저하게 교육받은 시녀들이 온종일 따라붙어 아무리 사소한 일까지 왕자 대신 손을 움직였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그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머리가 트인 후였던가.
그래서 그런가.
눈을 떠도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조용한 침대라는 상황은 그에게 제법 특별한 감상을 선사했다. 루시탄은, 그다지 푹신하다고 할 수 없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한번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갖다 놓은, 조금 미지근해진 물로 마른 목을 축인 뒤 숨을 내쉬어도, 그 숨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로즈?”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그는 물잔 옆에 메모 한 장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루시탄은 손을 뻗어 메모를 읽어보았다. 동글납작한 글씨체로 대강의 사정이 적혀 있다. 여기가 어느 마법사의 고택이고, 자신은 그 마법사의 연구를 견학하고 있으니 대충 쉬고 있으라는 내용이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2년쯤 여기 살았으면 슬슬 여기 글씨도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긴 한데.
“…하여간. 제멋대로인 여자라니까. 흠….”
크게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않고, 루시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천이 딸린 숨겨진 저택이라면 적어도 물이 궁하진 않겠지. 일단 몸을 한번 더 씻고, 천천히 저택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정신을 깨우는 데에 더운물보다는 찬물이 더 반가울 것 같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 그대로면 더운물에서 서로 몸을 탐하던 게 떠올라 입가가 자꾸만 느슨하게 풀리고 마니까.
[일어나셨습니까? 손님.]
듣기만 해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딱딱한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소리를 낸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느릿하게 유리구슬 같은 눈을 나무로 된 눈꺼풀이 위아래로 깜빡거리고, 달칵거리는 턱도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인… 인형 하나가 문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아니, 인형이라기보다는… 인형사도 없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선 골렘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한순간 루시탄은 무례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여기가 남의 집이고, 또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그의 불쑥 튀어오르려던 생각을 가로막았다.
대화가 성립하긴 할까. 골렘이 듣지 않는다면 골렘술사가 대신 들을지를 생각했다.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일단 미지근한 물로 적신 탓에 목소리는 한결 편하게 나왔다.
“안녕하시오. 이렇게 잠자리를 내어주어서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겠소. 내 일행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준 점 또한 감사를 표하리다.”
루시탄의 푸른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간소한 세간살이였고, 특별히 높은 신분의 사람이 기거할 만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평범한 농부가 사는 곳일 리도 없었다. 저런 골렘을 부리는 이라면 일단 마법사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세상을 등진 은둔 마법사의 거처일지도 모르겠다고, 루시탄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는 편이 현명하다고 해야겠지.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면 감사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이 쪽으로 오시지요. 갈아입을 옷은 거기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쉽게도 주인은 부재중인 모양이다. 골렘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깨끗하게 새로 지은 옷 한 벌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햇볕에 말린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새 옷은 튼튼하고도 질겼다. 다행한 일이다. 그가 입고 있던 옷도 물론 왕자를 위해 지어진 옷이니만큼 고급이었지만, 베어링턴에서 미친 용, 무슈마헤트와의 싸움에 참여했던 며칠 동안 꽤 볼품없는 꼴이 되어있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주인님께서는 손님이 방문하시면 친절하게 맞이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주인이 부재중이라면 이 골렘들은 오롯이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모양인데, 마법에 문외한인 자신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골렘의 주인이라는 이는 상당한 솜씨를 가진 술사이다. 만약 만난다면 왕국에 초빙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형, 미하도르가 왕위에 오른다면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고용하든가.
새 옷을 걸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튼튼하게 지은 갈색 외투의 군데군데에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기하학적 문양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희미한 온기가 살갗에 스며드는 느낌이 몸 여기저기를 휘감았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지 않은 신세를 입은 것만은 분명하다.
“혹여 나중에라도 이 집의 주인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주인님의 이름은 벤 가브롤이라고 하십니다.]
벤 가브롤?
마법사라면 즉시 그 이름의 유래를 떠올렸을 것이나, 마법에 문외한인 루시탄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다는 정도의 감상을 어렴풋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이름만은 머릿속에 분명하게 새겨넣어두었다.
◆
보면 볼수록 놀라움의 연속이다.
돌 골렘들을 모아놓은 정원을 지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마법사의 연구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감각적으로는 지난번 베어링턴에서 그 변태 식물인간이 온갖 기괴한 표본을 모아놓은 역겨운 연구실과 비슷하긴 했다. 다만 열을 맞춰 안치되어 있는 것이 골렘이라는 게 달랐다. 적어도 보기에는 훨씬 낫기도 하고.
“…진짜, 골렘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네, 벤 가브롤이라는 사람은.”
마치 골렘 전시장 같다. 사방에 온갖 종류의 골렘이 가득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지는 몰라도, 생물을 재료로 한 골렘은 보이지 않고 무기물을 재료로 한 골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설마 이 골렘들 하나하나가 금으로 된 회로를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연금술을 연마했다거나, 아니면 골렘을 부려서 금광이라도 채굴했다면 필요한 금을 확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뭣보다 벤 가브롤이라는 사람이 골렘술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었다. 골렘의 발치마다 황동으로 된 명패가 있었다. 골렘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소중하게 보관했다는 것은…
“…마니아, 마니아의 영역이네.”
아니, 마니아라는 말도 부족하다. 골렘 덕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사의 갑옷부터 리제 같은 소녀형의 골렘, 혹은 단순한 돌 골렘, 우드 골렘…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골렘에 대한 애착이 가득한 마법사의 행복한 공간이었지만… 대체 이 위화감은 대체 뭘까.
돌 골렘, 강철 골렘, 흙으로 빚은 골렘, 대리석 골렘, 금이나 은으로 된 것도 있었고, 수은으로 된 것도 있다.
“이건 마치… 어떤 최적의 재료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험해본 것 같단 말이지.”
최적의 재료. 무엇을 위한 재료를 찾으려고 이렇게 수많은 골렘을 만들어본 걸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으음, 하고 찜찜한 신음을 한번 뱉고는, 천천히 가운데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로제이아 님.”
순간 등줄기에 오한이 일었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려 뒤에서 다가오는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생각한 그대로, 이 연구동을 관리하는 완전 자율형 골렘인 리제였다.
“어떠십니까? 조금 도움이 되셨습니까?”
“…아, 으응. 여러가지로 참고할 게 많을 것 같네.”
정말이다.
벤 가브롤의 골렘 연구실은 그야말로 집착과 애정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여기 안치된 골렘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을 정도의 완성도를 가졌다. 여기 있는 골렘을 전부 부릴 수 있다면 왕국이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벤 가브롤은 아마 여기에 만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집착에는 분명히 어떠한 동기와 이유가 있었다. 리제의 눈을 바라보면, 이 훌륭한 골렘으로도 메우지 못한 그 갈증이 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은, 제 쪽에서도 로제이아 님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게? 무슨 부탁인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울게.”
이런 연구동을 견학하게 해 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와야지. 양심이 있다면.
적어도 이 골렘은 날 이용하거나 속인 뒤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골렘이 그러겠어? 리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도저히 골렘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도록, 섬세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저는 주인님의 비원을 채워드리지 못한 미완성품입니다. 주인님께서는 평생 골렘을 만들어오셨지만… 그분께서 성취하려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연구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도 않으셔서, 알 수도 없습니다.”
리제는 골렘이다. 자율사고회로로 유사적인 사고를 하고, 그 사고에 따라 의사신경으로 된 연결망으로 몸을 움직일 뿐인 골렘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지나치리만치… 인간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는 술라 님께서 로제이아 님에게 그 지팡이를 맡기신 것에… 분명히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시다면 로제이아 님께서 주인님의 연구를 완성시켜주시길 저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분명 그렇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내 목을 틀어막은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리제와 눈이 마주쳐서일까, 아니면 그 목소리가 귀에 은은하게 스며들어서일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 생각을 목소리를 통해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리고,
이윽고 나 또한 이 만남을 어떠한 운명의 수렴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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