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3 1 / 숲 속의 마녀 리제에게 (3)
* * *
(3)
머리가… 아프다. 지끈거린다.
묵직하고 뭉툭한 돌로 두개골을 짓누르는 듯한 두통이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신경을 좀먹는 것만 같았다. 욱신거림은 등으로 뻗쳐나가, 마나맥에 한데 고여 단단한 돌처럼 뭉쳤다.
“으으으… 머리, 아파.”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이런 숙취 같은 느낌을 받는 건 불합리하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눈동자 위로 밀어올리고 나자, 겨우 등에 닿은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솜을 채운 침대 위였고, 천장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여긴 또 어디…야?”
나무로 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약품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공기에 매캐하게 섞여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성대하게 발정해버려선, 루시탄을 거의 덮치다시피…
“정신이 드셨습니까.”
“으왁?!”
식은땀이 찔끔 날 정도로 놀랐다. 다른 것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누군지는 전혀 모르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경계해야 할 상황인지.
“…누구…?”
“그건 제가 물어야 할 게 아닌지요. 당신들이 오염시킨 마나 간헐천의 관리를 맡은 몸이니까요.”
“아, 그건….”
변명의 여지, 없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오염이라고 말하면… 확실히 오염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거.
그 뒤로 몇 번이고 발정난 원숭이마냥 해댔으니까. 그러다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만 건가?
남의 눈에 닿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 음.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질 못해서, 나도 모르게 좀… 열중해버리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그런 마음이,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변명처럼 주섬주섬 말을 주워섬기다가 쓸데없는 말까지 나오려 해서 황급하게 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게 아직도 온천의 영향이 남은 건가? 그러다가 뒤늦게, 진즉에 생각했어야 할 것이 떠올랐다.
“루시탄은?! 그, 나랑 같이 있던 걔….”
“…그 남성분이라면 다른 방에서 따로 쉬고 계십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아직 자고 있다고…?”
그건 좀 이상하다. 내가 정신을 잃은 건 마나맥에 과도하게 마나가 쏠려 일종의… 부정맥을 일으킨 것이라면, 루시탄까지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문제의 낯선 인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뜨거운 온천에서 몇 번씩 교합하면 남자 쪽은 으레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아이고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아직 저 온천 관리인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눈을 깜빡이면서 그제야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수은을 굳혀 만든 듯한 은회색 눈동자와 대리석처럼 흰 살결. 그리고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등을 덮어 바닥에까지 이르렀다. 아름답지만, 비인간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어떤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여자, 혹시…
“그러니까… 그쪽 이름을 좀 물어도 될까?”
“저는 ‘리제’라고 불러주십시오. 저의 정체를 의심하고 계시군요. 생각하시는대로, 저는 골렘입니다. 이 온천의 관리를 위임받았습니다. 가급적 외부인에게 본 사유지가 알려지지 않도록, 그리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저의 직무입니다.”
역시 골렘이었다.
나름대로 골렘술에 이래저래 공부를 했다보니 어딘지 미심쩍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랬을 줄이야. 완성도 굉장한데 어이.
그나저나 그녀… ‘리제’의 말대로라면 이상하다.
나나 루시탄은 꽤 쉽게 온천을 찾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걸까.
“그러니까… 나는 로제이아라고 해. ‘가시의 마녀’로 통하지. 그런데 당신… 그러니까, 리제 씨 말대로라면 좀 이상하네. 난 여길 어렵지 않게 찾았거든.”
“그건 제가 은폐 결계를 잠시 풀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리제의 수은 같은 눈동자가, 한쪽에 세워둔 지팡이를 향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은회색 눈동자에 어떤 감정 같은 것이 어린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 게 아니다. 내가 부리는 골렘, 웬즈데이와 즈왈트도 그런데, 새삼스럽게 다른 골렘에게 깃든 인간성에 놀랄 게 아니지.
“손님께서 제 주인님의 지팡이를 갖고 계셨으니까요.”
“설마, 그럼 당신….”
저 지팡이의 주인이라고 하면 희대의 골렘술사라고 불리는 ‘벤 가브롤’을 말한다.
그럼 리제는 그 벤 가브롤이 만들어낸 골렘이란 말야? 저 완성도도 간신히 납득이 갔다.
“저는 벤 가브롤 주인님이 만들어낸 ‘재생형(Regeneration) 골렘 카드몬 모델 003호’입니다. 주인님께서는 저를 리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온천은 주인님의 연구동 중 하나로서, 평소에는 외부의 손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부득이 온천을 통한 유지보수가 필요한 주변분들을 위해 가끔 개방할 뿐이죠.”
리제의 얼굴에 조금 수심 같은 것이 드리웠다.
“방문해주시는 주변 분들에게는 비밀을 지켜주십사 신신당부했었는데…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것 같아서 조금 곤란해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할지 고민하던 차에… 손님께서 방문하셔서.”
가브롤의 지팡이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루시탄의 머쓱해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단 얘기인데. 그건 좀 아쉬우면서도… 끄응. 복잡한 기분이었다.
“…어흠. 남의 온천을 그렇게 막 쓴 건 사과할게. 나도 모르게 조금… 어떻게 되어버렸나봐. 이해해줘.”
“그럼 제 쪽에서 여쭤도 되겠습니까? 손님께서는 어떻게 주인님의 지팡이를 갖고 계신 것인지요?”
“…음…. 이름을 알려나 모르겠네. 대마법사 술라라고 알아? 그분께 받았어.”
리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의외의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모르는 눈치도 아니었고.
리제는 조금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기억을 더듬듯이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되풀이했고, 조금 조급증이 도질 것 같이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그 지팡이는 주인님께서 말년에 만드신 완성품 중 하나로서,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용이신 술라 님에게 맡기셨습니다. 제 기억과 일치합니다.”
“잠깐, 용이라고?”
술라가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건 본 적 있다.
하지만 리제는 마치 술라의 정체가 사실은 드래곤이고, 오히려 인간의 모습이 위장이라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리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했다.
“네. 술라 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주인님과 교류하던 사이였습니다. 제 기억상으로는 약 70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주인님께서 타계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그 지팡이를 맡기셨어요. 저는 주인님께서 타계하신 후에도 유언을 받들어 이 온천을 관리하고 있었고요.”
70년… 그게 어떤 시간인지 잘 체감이 되지 않았다.
옛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70년이 지나도록, 그 주인이 사용하던 온천을 관리하는 이 골렘은 어떤 생각으로 오늘까지 살아온 걸까.
그제야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라든지, 방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 골렘은 벤 가브롤이 생전에 사용하던 그대로… 아마 오늘까지, 먼지 하나 남지 않도록 당연하다는 듯이 관리해왔던 걸까.
사람이 아니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멈추지도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아무 고충을 털어놓지 못했겠지. 아니, 고충이라는 것을 느끼긴 했을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얼른 떠올리지를 못했다.
심지어 제 몸에 입혀진 옷조차도 원래 자신이 입고 있었던 남루한 로브와 옷이 아니다. 새로 지은 듯 튼튼하고 깨끗한 로브와 옷이었다.
“…그럼, 정비 같은 건 어떻게?”
겨우 물음을 짜낼 수 있었다.
아무리 훌륭하게 만들어낸 골렘이라고 해도 보수정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70년이나 단독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구동계는 닳을 것이고, 순환계라든가, 마력 회로라든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필요한 게 있을 것이다. 필요한 마나는 온천에서 조달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도… 아무리 골렘이라도, 혼자 70년이나 보낼 수는 없다.
“술라 님께서 1년마다 한 번씩 방문해주셔서 정비해주셨습니다. 아마 친우의 묘지를 관리해주는 기분이 아니실까 추측했습니다만.”
내가 그녀의 주인이라든지 그런 입장은 아니지만…
그 지팡이를 맡은 시점에서 ‘수고했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런 말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제이아 님.”
이쪽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감정을 읽기 무척 곤란한 수은색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리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골렘술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주인님의 연구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어…?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아마 술라 님께서도 이런 날을 예상하시고 로제이아 님에게 지팡이를 넘겨드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결코 타인과 쉽게 공유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학파나 내제자, 혹은 자식에게만 평생의 연구를 물려주고, 이어가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자신의 학파를 가진 헤카이트 당주는 말할 것도 없고, 케라우노스 같은 연구자와는 거리가 먼 마법사도 양자를 잔뜩 들인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史)에 남을 정도로 이름을 널리 떨친 골렘술사의 연구를… 생판 남인 내가 감히 들여다봐도 되는 걸까? 그저 우연한 기회로 그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손에 넣었을 뿐인 내가?
리제는 처음으로 살짝 입가에 웃음을 보였다.
“제게는 꽤 낯선 개념입니다만… 저는 이 상황이 운명이라는 개념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웃음은 무척이나… 쓸쓸하게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