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30화 (130/157)

〈 130화 〉 2 ­ ? / 너와 떠나는 도피길

* * *

(?)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카르티의 목소리가 빠진 자리는 꽤 티가 나서, 여관으로 가는 사이에는 조금 쓸쓸해졌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후련했다.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그나마 기운차게 떠들어대는 웬즈데이의 토크조차, 평소보다 조금 기가 죽었다.

카르티를 일방적으로 견제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웬즈데이조차 내심 카르티를 좋은 녀석이라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알 수 있다고.

웬즈데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일부러 나라도 쓸쓸함을 달래려 너스레를 피웠다.

“뭐어…. 이제 짐 싸서 여길 떠나기만 하면 될 일이야.”

골치 아픈 일은 전부… 아니, 거의 다 마무리했다.

끝내 매듭짓지 못한 일들은 남은 이들이 맡아 끝내겠지.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여기에는 없지 않을까.

베어링턴. 이 도시에서 좋은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억에는 좀 오래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여관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루시탄?”

“조금 오래 걸렸네.”

마치 어딜 갔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투라서, 조금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루시탄은 피식 웃고는, 다가와서 웬즈데이와 즈왈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자네들은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어? 로즈를 빌리고 싶은데.”

“…저기 말이지요, 왕자 전하? 장미 씨를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은 전부 왕자님이 물고 오…”

“그러지.”

부루퉁해져서는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웬즈데이는 즈왈트가 즉각 격리. 그녀의 입을 막고는 여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짐 정리라도 해 두라고 사념 보내놔야지.

루시탄은 웬즈데이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는지, 쓴웃음 짓고 있고.

그야 뭐, 어찌 됐든 이 녀석과는 질긴 인연이 되어버렸지.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의 얼굴은 남자의 태가 났고,

덧붙여서 지친 기색도 묻어나왔다.

“너야말로 여기 있어도 돼? 이번 일 뒤처리 때문에 한동안 영주성에 잡혀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한가하신가 봐, 왕자님.”

“보나마나 바츠 경이 그렇게 말했겠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도 지겨워서 빠져나온 참이야. 앉혀놓으면 보기 좋은 장식품 노릇도 오래는 못 할 노릇이거든.”

어지간하면 허세로라도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이 녀석이 진저리를 칠 정도면 정말 못 해먹을 노릇이긴 했나보다.

그야 당연히 이 녀석도 이 녀석 나름의 위치에서, 제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기탄없이 등을 팡팡 두들겨주는 건 아마 나 정도일 테고.

“흐응. 고생하네, 루시탄. 성격에 안 맞는 왕자 노릇 실컷 하느라고.”

뭣보다 발스턴의 기억을 들여다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것인데다, 멀쩡한 척하고 있는 얼굴이 무지하게… 꼴받는다. 이 녀석이 괜찮은 척 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다고 해 주길 바라는데.

“어째 평소보다 더 말에 독이 올랐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이 머리 좋은 녀석이 슬그머니 내뱉은 가시를 못 알아챘을 리도 없다.

가끔 그 괜스레 아닌 척 눈치 빠른 것도 좀 눈꼴시리고. 얄미운 녀석 같으니.

허세에는 허세로 돌려주는 게 내 방식이다.

“그래? 평소대로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그 표정이나 풀든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 하고 있다고, 너.”

내가… 그런 얼굴 하고 있었나? 그런 자각은 없었다.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얼굴을 만져봐도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거기가 아냐, 여기.”

루시탄의 손끝이 뻗어와 미간을 쿡 찔렀다.

이상하게도, 잔뜩 패여있던 골이 그 손가락 끝의 감촉에 풀렸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못 당하겠네, 정말로.

“…그렇게 티가 나?”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네 그런 얼굴.”

“그렇게 네 앞에서 계속 찌푸리고 있었다니.”

“그럴 만한 일이 많긴 했지.”

어쩌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처럼 술 한 잔 푸면서 풀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는 법이다.

이 녀석에게도, 고충을 푸는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모를 뿐.

한 마디쯤 반격하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부터 반격할지 생각하던 차에, 루시탄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내가 맞춰볼까? 내가 지난번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뭐… 반쯤은?”

반박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순순히 수긍했다. 반만.

나머지 반은 내 일 때문에 우울해져 있었던 것이니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라곤 못 하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만큼 심각하게 있을 생각도,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거든.”

“그렇게 말해도 돼?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바츠 경이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데, 저번처럼.”

저번… 어느 여관에서의 기억에 조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그 기색을 감추려고 일부러 짓궂게 웃었다. 루시탄은 어깨를 넉살 좋게 으쓱였다.

“그럼 잡혀가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말해 봐. 네가 가져오는 제안은 늘 골치 아픈 일뿐이라서, 받을지 어떨지는 고민 좀 해봐야겠지만.”

아니, 거기서 샐쭉한 척하지 마. 사실이 그렇잖아.

이 녀석과 얽히면 머리 아픈 일이 바닥에 떨어진 과자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줄줄이 딸려온다. 하지만 묘하게도, 결국 이 녀석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되는 게 우스운 노릇이지.

“선제후의 초대 따위는 무시하고, 나와 같이 그냥 떠나지 않겠어?”

가볍게 말했지만, 루시탄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마음이 먼저 알았다.

그래서 바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점을 찍듯이 한 번 더 단서를 두었다. 즉, 루시탄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였다.

“너와 나, 둘이서만.”

둘이라니. 늘 쉴 새도 없이 돌아가던 머리가 잠시 멈췄다.

이 녀석은… 정말로. 대책 없는 녀석이다.

“…선제후라는 사람은 되게 높은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의 초대를 그냥 그렇게 멋대로 무시해도 되는 거야? 아무리 네가 왕자 나부랭이라고 해도.”

“나부랭이라니… 죄를 지어서 잡혀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네 이야기가 궁금해서 부르는 거니까. 뭣보다….”

어깨를 붙잡혔다. 녀석이 내비친 약간의 이기심이 그 어깨를 욱신거리게 했다.

웃지도 않은 주제에, 그의 말에 조금 입가가 바들거리려고 한다.

“그 사람에게 널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뭐야. 본심이 그쪽이었어?”

“반쯤은.”

되돌려주기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피식 웃고는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조금 자신이 없었다.

“그 선제후라는 사람에게… 확인하고 싶은 거 많잖아.”

“…그런 건 다른 방법으로도 알아낼 수 있어. 조금 번거롭기야 하겠지만.”

괜찮은 척하긴.

아마 지금도 당장 달려가서 캐묻고 싶을 거면서.

“너 말야….”

바츠 경, 선제후라는 사람, 그리고 아버지인 국왕에게 확인하고 싶을 게 산더미일 텐데도, 아닌 척한다. 이 허세는 진짜 못 고칠 병이라도 되는 건가.

“무리하진 말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늘 진심이라는 건 네가 잘 알잖아.”

아니, 모르는데. 적어도 지금만은 그래 보이긴 하지만.

나중에 이 녀석은 이때의 진심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겠다.

내 선택에 따라서는 그 후회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적어도 같이 후회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뭐 좋아. 일단 네 제멋대로의 장단에 맞춰줄게. 하지만 떠난다니, 어디로?”

조금, 아니…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었던 루시탄은 내 말에 겨우 긴장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빳빳했던 표정에 생기가 돌아오고, 잔뜩 굳었던 어깨에도 힘이 풀렸다.

“아직 아무것도 생각해두지 않았어. 아니, 더 솔직해질까. 난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야.”

“그건… 너답지 않은데.”

“지나치게 무모한 누구 때문에 몸 사리는 법을 배웠다고 해야 하나. 무르고 싶어졌어?”

설마.

피식 웃고는, 손을 뻗어서 루시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주 희미하게, 미세하게, 잡지 않고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땀에 젖어 떨고 있는 손.

그 손가락이 구부러져서 내 손을 마주 쥐어왔다.

단단하게 여물은 손가락은 이제 원하는 것을 움켜쥘 정도로 강하게 억세어졌다.

“그 말은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뜻이잖아. 나도 그편이 더 좋아.”

어디에라도.

그 말에 문득 루시탄이 웃었다.

만족스럽고, 순진하면서도, 이 녀석 특유의 짓궂음이 강하게 배인…

내 마음에 들어온 그 웃음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맞닿았을 때에는 눈이 살짝 감겼다. 그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 이 녀석과 함께.

지금은 그저, 그 사실만을 약속처럼 가슴에 남기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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