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2 11 / 친애하는 내 친구 카르티에게 (6)
* * *
(6)
교훈. 술은 조심하자.
비싸고 독한 술일수록 더 경계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사실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카르티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민망해지는 후유증이 있으니까.
물론 웬즈데이는 신나게 놀려댔다.
“장미 씨는 진짜로 죄 많은 여자네요. 가는 곳마다 사람을 하나씩은 홀리고 다니고. 대체 비결이 뭘까요?”
“사람이 착하잖아.”
“죄가 많은데 사람이 착하다는 말은 좀 모순되지 않은가?”
…바로 눈앞의 사람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그중 둘은 내 사역마면서 말이지.
“그 얘기는 끝! 아주 그냥 사람 놀리는 데 재미가 들렸지, 니들 다.”
“당연하죠. 장미 씨 놀리면 얼마나 재밌는데요.”
넌 나중에 두고 보자.
이를 부드득 갈고는 웬즈데이를 쏘아보았다.
눈을 홱 돌리고 모르는 척하는 게 굉장히… 작위적이다. 젠장, 누가 만든 골렘인지 귀엽게 만들어놔서 화도 못 내겠네.
“그건 그렇고… 무슈마헤트는 어떻게 됐어?”
“아, 나도 못 봤어. 그 안에서 빠져나온 다음에 바로 정신을 잃어서.”
카르티가 적절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발스턴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후 바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부 마무리가 나 있었지.
코앞에서 보고 있었을 웬즈데이가 뭔가를 알려나.
키에리의 상태가 호전된 것을 보면 분명 일이 해결된 것만은 분명한데.
“그러고보니 웬즈데이… 너도 괜찮아?”
“장미 씨가 걱정을 다 해 주시고…. 가끔은 험하게 부려먹혀서 재수없다가도 이럴 때 다시 반한다니까요.”
“너 평소에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
어이가 없어서 이마에 딱밤을 한 대 튕겨주고는, 웬즈데이가 상황을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고, 꽤 리얼하게 술기운 섞인 탄성을 내뱉은 웬즈데이가 기억을 더듬듯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저도 사실… 제대로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요. 장미 씨가 불러낸… 어… 이름이 뭐랬죠, 그거?”
“샤무라마트.”
89위의 마왕 중 하나, 샤무라마트.
‘무가치’와 ‘허위’를 관장하며, 갖가지 아름다운 꽃의 형상으로 희생자를 불러들인 뒤 힘을 대가로 영혼을 취한다는 악마의 이름이다.
“딱 장미 씨네요.”
“너 진짜 슬슬 그렇게 계속 기어오르면 그 몸 뺏어버린다.”
“잘못했어요.”
요즘 들어 점점 대놓고 기어오른단 말야.
언제 한번 정말로 기회를 봐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또 다짐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왕급의 사역마를 소환할 줄은 몰랐지. 이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거 아냐? 로제 너.”
“그만둬. 대마법사라니, 헤카이트 당주님이나 술라 님과 같은 반열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걸.”
손을 휘젓고는, 그때의 오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스턴의 눈앞이었고,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상황이었는데… 그 절체절명의 사실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오싹한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일이 기적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살아서 술을 마시면서 회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음… 그게, 장미 씨, 아니죠. 루시탄 왕자님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서 그 빌어먹을 수염 자식을 결국 완전히 죽여버렸을 때, 수염 자식이라는 묘판(??)을 잃은 마물은 역소환되어버렸단 말이죠? 결국 그 마물은 뭐였을까요?”
발스턴이 소환하려 했던 마물… 제 몸을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소환하려 한 마물.
무슈마헤트를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공허한 눈’ 고르기아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89위의 마왕 중 하나의 힘이 담긴 마검을 손에 넣은 뒤 일련의 음모를 꾸몄다면… 역시 배후는… 또 그놈들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아직은 추측의 단계이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지만.
“아무튼… 그 마물이 역소환된 다음에 샤무라마트도 사라졌어요. 그건 아마… 음… 흥미를 잃어서가 아닐까요? 마왕끼리 만나면 어느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싸운다고 들었는데.”
동족끼리 너무 정 없는 거 아닌가?
카르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이상하잖아. 남은 쪽도 사라지는 거야?”
“글쎄요, 소환한 건 제가 아니라서….”
셋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나도 몰라. 그렇게 봐도 모른다고.
“뭐 샤무라마트가 역소환된 다음에 저는 자동으로 제 몸으로 튕겨나갔고… 그 드래곤 아줌마도 풀려나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전해달라는 게 있었는데.”
“전해달라니, 나한테? 왜 그런 걸 지금까지 말 안 했어?”
“말할 기회가 없었단 말이에요.”
볼멘소리를 부루퉁거리는 웬즈데이에게서 받은 것은… 녹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무슈마헤트가 나한테 줬다고?
“이건… 브로치잖아. 이게 뭔데?”
“저도 몰라요. 갖고 있으면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거라고 주고 가버렸어요.”
“아니, 설명서라도 좀 주던가….”
브로치의 가운데, 섬세하게 세공된 커다란 에메랄드 안쪽에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무엇인가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 주위로도 녹색으로 반짝이는 비취가 그 색을 뒷받침했다.
테두리는 은은한 금색이었고, 만듦새가 훌륭해서 값이 좀 나갈 것 같긴 한데…
“…마법적인 기척이 느껴지는군. 주인에게 사죄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그 드래곤은?”
“글쎄… 드래곤의 생각이라는 게 그렇게 기특한 구석이 있긴 할까. 뭐, 주는 거니 사양은 않겠지만. 어때, 어울려?”
일단 로브 앞섶에 브로치를 채운 뒤 세 명에게 묻자, 그들은 그다지 성의있다고 할 수는 없을 태도로 대충 끄덕였다.
“보석이 날개네요.”
“뭐…어. 난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장신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차라리 욕을 해, 너희들.
그러니까 액기스만 정리하자면… 마왕 둘은 사라져버렸고, 무슈마헤트도 떠나버렸다는 얘기가 되나. 난 득템한 셈이고. 뭔가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고생을 했는데 그냥 비싼 장신구만 얻은 거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부아가 치민다고.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지.”
쯧쯧, 하고 카르티가 혀를 찼다.
그래, 나 욕심 많다. 맥주잔에 남은 마지막 맥주를 한숨에 삼킨 뒤, 안주로 나온 개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다 마셨으면 슬슬 일어서자고. 난 스승한테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카르티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아쉬운 듯이 투덜거렸다.
그러고보니 카르티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꽤 오랫동안 같이 길동무를 해왔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건 좀 섭섭한데.
“센 씨한테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말야. 언제고 갚을 날이 있으려나.”
“스승이 그런 걸 깊게 생각하진 않을 텐데… 뭐, 꼬박꼬박 잠자리 값을 받았다며? 너무 그렇게 부담 가지지 말라고.”
생각해보면 정말 센 씨나 늑대원숭이와도 신세를 많이 졌다.
늑대원숭이는 악연으로 만났지만, 마지막 싸움까지 기꺼이 어울려줬고, 센 씨도… 정말 여러가지로 날 도와줬지.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술집을 나와 익숙한 길거리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화제가 하나씩 떨어질수록, 어쩐지 카르티와도 이렇게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센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서, 카르티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난 그래도 너랑 다니면서 무척 즐거웠다고.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기도 했고… 뭐, 사실 여기서 널 따라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카르티의 처음보는 울적한 얼굴은, 그녀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티는 다소 건방지지만, 그래도 쾌활하게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
“그래도 언제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그때는, 너무 독하지 않은 술이나 한 잔 하면서 회포를 풀자고.”
그러니, 나도 웃을 수밖에 없다.
팔을 벌려서, 카르티를 품에 끌어당겨서 그 온기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조금 뜨겁고,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따끈한 열기를 나눠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봐, 카르티.”
“잘 지내라.”
손을 흔들면서, 카르티는 센의 대장간 쪽으로 멀어져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뱉어냈다. 여기에 서 있다간 자기도 모르게 센의 대장간 쪽으로 발길을 향할 것 같아서, 무겁게 끌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이제 여기에서의 일은 전부 끝났다.
“우리도 슬슬 가야지.”
“그냥 그렇게 보내도 괜찮으셨던 건가요?”
“…글쎄, 한번쯤 붙잡았어야 했을까?”
확신은 서지 않는다.
붙잡았더라면 카르티와 같이 여행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 걔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내가 붙잡는 것도 모양새가 나지 않잖아.”
“장미 씨는 참 솔직하질 못하다니까요.”
“뭐래. 요즘 너무 기어오른다, 너.”
웬즈데이가 말한 그대로, 솔직하지는 못했다.
마음이 잘 맞는 녀석이었다. 재밌고 좋은 녀석이었다.
그렇게 좋은 녀석을 또 만나기는 어렵겠지. 그런 녀석과 같이 여행을 이어가는 것도,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르티는 그 자신이 선택을 했다. 아마 자신의 앞날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걸 붙잡을 수는 없지.
“자아, 그럼… 이제 정말로 가자구.”
마지막 미련을 시선에 실어, 센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골목을 한번 바라보았다.
안녕히, 친애하는 내 친구 카르티.
언젠가 너와 다시 만나 나눌 이야기가, 무척 상쾌할 수 있기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