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27화 (127/157)

〈 127화 〉 2 ­ 11 / 친애하는 내 친구 카르티에게 (4)

* * *

(4)

그게 아마 대략 반년쯤 전이었던가.

우루 늪지에서 돌아온 후 가졌던 뒤풀이 자리는 다소 허무하게 파했다.

느탈리 4년산의 독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로제이아가 한 잔 만에 쓰러져버린 탓이다.

아니, 한 잔이 뭐야. 그냥 한 모금이었지.

“어떻게 술 한 잔을 못 이기나 그래… 아니, 그런데.”

술에 취해 늘어진 사람의 몸뚱이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훨씬 무겁다고 알려져 있다. 즉 업었을 때의 무게가 액면가보다 훨씬 더 나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내가 업어야 하는데?!”

케라우노스의 수양딸이자 전위인 카르티는 늘어진 로제이아의 몸을 들처업은 채로 낑낑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머리가 세 개쯤 더 커 보이는 대마법사는 옆에서 걸음을 옮기며 유유자적한 기색이었다.

“아니, 다 큰 처녀를 내가 업는 건 좀 모양새가 그렇잖아. 같은 여자끼리 수고 좀 하시지.”

“마법사잖아! 그… 마법으로 붕 띄워서 어디 좀 눕히면 될 일을 왜 굳이 나한테 힘쓰게 하는 건데?!”

“아, 그게 말이지. 나도 꽤 취해서 지금 마나맥이 좀 꽐라가 되놔서 말야. 수고 좀 해 다오. 킥킥.”

“뻥 치시네!”

술기운 같은 건 이미 그의 몸 안에서 작용한 전격 마법으로 인해 이온 단위로 분해되어버렸을 것이다…. 뭐, 그런 원리까지는 몰라도, 카르티는 제 양부가 마음만 먹으면 술기운을 확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끅… 아, 으. 왜 이렇게 무거워, 이 계집… 애. 학, 학, 학….”

“여자애를 업고 학학거리지 마. 수상하게 보인다.”

“그렇게 보는 건 댁뿐이야…!”

자주 신세를 지는 여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익숙한 주인이 접시를 닦다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턱짓을 했다. 깊이 묻지 않는 건 고맙지만… 동시에 뭔가 오해를 산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좀 있었다.

“그럼 난 늘 쓰던 방으로 갈 테니까, 아가씨는… 흐암, 알아서 재워.”

“진짜 도움이 안 돼…!”

끙끙거리면서 계단을 올라, 늘 빌리곤 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여관이라기보다는 반쯤 자기 방 같은 느낌이라,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늘어진 로제이아를 침대에 털푸덕 던지듯이 눕히고는, 카르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면서, 하아… 숨을 겨우겨우 내쉬었다.

“아… 젠장, 씨발. 목 타….”

탁자에 놓인 물을 집어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조금 술이 깨는 것 같다. 휴우… 한숨을 내쉬곤 몸에 걸쳤던 외투를 벗고 나자, 차갑게 식은 밤바람이 겨우 살에 눌어붙은 땀을 식혀주었다.

“…나도, 물.”

“으악!”

깜짝이야!

카르티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잔을 쥔 그대로 튀어오를 듯이 반응했다.

겨우겨우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고, 몸을 돌려보니… 죽은 듯이 누워있던 로제이아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멍하게, 카르티를 바라보고 있더랜다.

“야… 젠장, 존나 심장 튀어나올 뻔했네. 놀라게 하지 마. 깼으면 좀 말이라도….”

“물….”

집요하게 물을 요구하는 로제이아에게 마시던 잔을 내밀자 로제이아는 멍한 눈 그대로 잔을 받아 꼴깍, 꼴깍 삼켜갔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한 두마디 꿍얼거린 뒤 다시 자리에 푹 누웠다. …태평한 모습에 한숨이 났다.

“야, 너 그대로 잘 거야? 정신 차렸으면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자든가.”

“귀찮… 아.”

그냥 내버려두면 귀찮아서 정말로 그냥 자버릴 것 같은 태도에 한숨이 났다.

그러든가, 말든가. 조금 숨을 느리게 쉬면서 잠드는가 싶더니만, 이내 로제이아의 팔이 위로 올라갔다.

“…더워… 카르티, 내 옷 좀….”

“진짜 손 많이 가는 여자네.”

투덜거리면서 카르티는 몸을 일으켰다. 찬물에 잠시 물러갔던 술기운이 훅 하고 끼쳐와서 걸음이 잠시 비틀거렸다. 로제이아만큼 완전히 술에 녹아버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카르티도 그 나름대로 제법 취한 상태였다는 걸 본인만 잊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 올라가 로제이아의 로브 끈 매듭을 풀어내는 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게 기묘하게 열받았다. 으씨, 하고 투두둑 하고 끈을 힘으로 끊어버리자 그녀의 앞섶이 확 젖혀졌다.

“우왓… 미, 미안.”

까만 색에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 그리고 브래지어에 감싸인 뽀얀 살결에 카르티는 잠깐 놀랐다. 반이 넘게 감고 있던 눈인 그대로, 몸을 일으킨 로제이아가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마저 벗기라는 뜻… 인 것 같다.

될 대로 되라지.

팔을 로브 소매에서 빼내고, 그 아래 겉옷도 벗겨내고 나자, 상반신이 푸르스름한 어둠과 흔들리는 촛불 사이에서 보랏빛 회색을 띠었다.

“즈왈트 형씨는? 아직도 네 속에 들어있냐? 야… 정신 좀 차려 봐. 내 말 알아들어?”

카르티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만약 로제이아의 안에 있는 즈왈트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꽤 쪽팔리는 일이 아닌가. 다행히 로제이아는 잠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갑옷에 돌아간 것 같은데. 으으응….”

후우, 후우… 덥다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 로제이아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카르티는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남은 물을 삼키고는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표정이 왜 저렇게… 야리꾸리해, 저 여자.

“더, 워…. 너무, 더워….”

어째 상태가 심상치 않다. 드러난 몸 위로 땀방울이 배어나오고, 발산되는 열을 못 이겨 어깨가 바들거리고 있다. 게다가… 핏줄을 따라 옅게 빛알갱이 같은 게 배어나오고도 있다.

‘혹시…?’

문득 로제이아의 등 뒤를 살핀 카르티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눈에 확실하게 띌 정도로 마나맥이 맥동하면서 온몸의 혈관을 따라 마나를 보내고 있다. 아마… 우루 늪지에서의 싸움이 부른 여파가 아직도 식지 않은 것이겠지.

“야, 너… 괜찮아? 좀 상태가 이상한데….”

마나맥이 부정맥 현상을 일으키는 건 몇 번 본 적이 있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양동생쯤 되는 마법사가 간혹 이런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지. 주로 아버지, 케라우노스에게 조금 과하게 마법 수업을 받은 날.

문제는 가라앉히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란 것이다.

잉여 마나를 전부 주문으로 쏟아부으면 가라앉는 타입도 있고, 부족한 체력을 식사로 보충하는 경우도 있고 그냥 두면 빠르게 진정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해야 하지?

“으으으응.”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조금 더 가쁘게 숨을 내쉰 로제이아가 붕 뜬 눈으로 카르티를 바라보았다. 조금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주륵, 턱을 타고 흐르는 게… 묘하게, 관능적이다.

진정하자, 진정해.

분명 마음에 드는 녀석이지만… 카르티는 이 묘한 상황이 가슴이 조금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숨을 깊게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아, 진정했다.

두서없이 뛰려던 심장이 슬그머니 제 템포를 되찾자, 카르티는 숨을 후욱 내쉬고는 돌아앉아, 몸을 희미하게 떨고 있던 로제이아의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야, 너 그거… 어떻게 하면 가라앉냐? 보아하니 밤새 끙끙 앓게 생겼는데 나도 잠 좀 편히 자게….”

로제이아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여닫히는 눈동자에 너울거리는 게 뭔지 카르티도 뒤늦게 깨달았다.

검고, 으슥하고, 눅진눅진한 욕구로 눈을 번들거리며, 속옷만 걸친 몸뚱이가 가늘게 달싹이는 소리를 냈다.

“…진짜 골치 아픈 여자네.”

이런 케이스도 물론 안다. 그래, 정확하게는 모르지는 않은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장으로 카르티가 로제이아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야, 너… 진짜, 이 일은 기억 못 해야 해, 알아들어? 이건 진짜… 불가항력이야. 너나 나나 진짜, 오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으으으으응….”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두서없이 로제이아의 어깨가 흔들렸다.

발갛게 물든 뺨과, 쏟아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조금 강한 인상의 얼굴이 흐트러진 것을 깨닫자, 카르티는 머릿속 심지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의 진짜 얼굴, 본 적이 없다. 처음 본 그 얼굴에… 뭔가 자물쇠가 툭 끊겨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 녀석, 임자도 있는 여자야. 이건 이 녀석을 탐내는 것도 아니고, 그 뭐냐…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래, 이건 구호조치다. 의료조치다. 필사적으로 카르티는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로제이아의 어깨를 짚은 채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저항 없이,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냐고. 아오… 진짜. 그 영감탱이, 이렇게 될 줄 알고 나한테 떠넘긴 거야? 젠….”

명색이 대마법사인 케라우노스쯤 되면 이 여자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곤란한 상황이 되자 수양딸에게 떠넘기고, 잽싸게 튀어버렸다. 나중에 한 방 먹여줄 거라고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제 옷을 벗어 맨살결을 드러냈다. 짙은 갈색의 거친 살결을 옷깃 사이로 드러내면서, 카르티는 문득 제 심장 소리가 무척… 시끄럽다고 생각됐다.

“아, 진짜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냐고.

맨살결을 드러낸 그대로 이불 안에 몸을 밀어넣으면서,

카르티는 깊이 탄식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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