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2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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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한층 누그러진 방이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에서 이따금 불티가 튀곤 했다.
방 안에는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곤히 잠든 남자아이도 둘 있었다. 여자 한 명은 때때로 두 아기가 잠든 침대를 내려다보곤 했다.
“어머니…?”
루시탄이 옆에서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요람을 흔들고 있는 여자의 옆얼굴에서 그의 인상을 찾을 수 있었다. 화려한 금발과 조금 성격이 느껴지는 눈꼬리라든지. 푸른 눈동자에 갸름한 턱선을 물려받았구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셨는데….”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먹먹한 목소리가 겨우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루시탄은 제 가슴팍을 손으로 움켜쥐고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색마저 창백하게 질린 게… 무척 위태로워보인다.
“너… 괜찮겠어?”
“아, 어. 괜찮…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대도.
어깨를 쥐고 이쪽으로 살짝 당겨 조금 기대게 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아마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다. 저기 잠든 아이 중 하나가 만약 이 녀석이라면…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야, 로제… 저기 저 남자. 혹시나 하는데….”
카르티가 이번엔 내 어깨를 살짝 짚고 흔들었다.
가리키는 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이번엔 내 심장이 묵직하게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콧수염도 없고, 한 10년 정도는 젊어지긴 했지만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발스턴이다. 청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는 검을 옆에 찬 채로 말없이, 등을 보이고 있는 한 장년 남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저 뒷모습, 조금 낯이 익는데.
등을 보인 남자가 말했다.
[라파한 왕자… 둘째 형님께서 결국 돌아가셨다고?]
[예.]
발스턴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천천히 뒤돌아서는 그 얼굴을, 약 1년쯤 전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
루시탄과 미하도르의 아버지. 별로 좋은 아버지라는 인상은 내게 없었다.
이름은 분명 ‘울자크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였던가. 알트슈타인의 현 국왕이다.
미하도르라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데도, 루시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년 전의 사건을 벌인… 주범이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거칠까.
그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보다 젊었다.
[결국 그녀가 말한 그대로 되었어.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그녀?
누구를 말하는 거지…? 아니, 일단 지금은 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인지 생각하는 건 이 기억을 다 보고 난 뒤로도 늦지 않다.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먼저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이것으로 캐슬린의 말이 거의 전부 사실이라는 게 드러났군요.]
발스턴이 짧게 덧붙였다. 캐슬린. 캐슬린. 그 이름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직감적으로 발스턴이 말한 이름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캐스’임을 깨달았다.
카테르네가 죽으면서까지 내게 남긴 손톱자국이… 이렇게 이어졌다.
[울자크 왕자님. 하지만 아직 그녀의 말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왕자님.
아직 그는 왕이 아니었다. 루시탄의 얼굴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무척이나 쓴 약을 입에 넣은 것 같이, 안색이 파리했다.
때때로 루시탄이 짓는 무거운 표정이 디폴트인 것 같은 얼굴로, 발스턴의 말에 울자크가 침대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생각이 많아 보였다.
[엘레나. 당신이 생각하기는 어떻소?]
[전하.]
엘레나. 그렇게 불린 여자가 잠든 아이 둘의 이마를 매만져주고는 울자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 쪽이든 수심이 가득해서, 웃음이 없는 방이다. 발스턴은… 짜증나게 무게나 잡고 있고 말이다.
[어느 쪽이든 전하의 혈육임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루시탄의 어깨가 덜컥 굳었다가 풀렸다.
무엇인가 제 안에서 나름의 결론이 짜 맞춰지고 있는 것처럼.
아니, 나라도 알 수 있다. 저 두 아이 중 하나는… 울자크의 아이가 아니다. 바로 그 사실이 미하도르가 왕위 계승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원인이겠지.
[…두 아이 모두 전하를 닮았습니다. 그리 여겨주시어요. 형님의 일은 이제 전하의 손에서 떠났습니다.]
[그리하리다. 하지만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는군. 네 분이나 계시던 형님 중 두 분이 돌아가셨소. 언제까지 이런 골육상쟁을 계속 이어가야 할지….]
주군의 한탄에, 발스턴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얹었다.
위로라고 하기에는 다소 온기는 부족했다.
[하오나 이럴 때 캐슬린 같은 능력을 가진 이가 전하의 편에 있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만약 라파한 왕자의 군에 있었더라면 오늘 같은 승리는 있지 못했을 겁니다.]
[말을 조심하라. 발스턴. 적이었어도 그는 내 형님이셨다.]
[송구합니다. 전하.]
문득 궁금해졌다.
캐슬린은 저 남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았기에 협조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 미래를 읽는 예언의 능력을 이용해서 그를 왕으로 만든 것일까.
만약, 만약 그녀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면… 내 옆에 있는 이 소년은 자신이 부담스러워하는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좀 더 편안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와 만날 수는 없었을지도 몰라. 산다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러니까, 저게 왕자 나리의 아버지라 이거지? 그리고 저 아름다운 부인이 어머니이시고. 둘 중 왕자 나리는 어느 쪽이야?”
카르티가 한쪽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게. 침대에 누운 두 아이 중 어느 쪽이 루시탄인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내게는 이때의 기억 같은 게 없으니까… 너희도 아기 때의 기억을 갖고 있진 않을 것 아닌가.”
…어렸을 때의 얘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진절머리가 나서, 지금도 어렸을 때의 꿈이라도 꾸면 잠이 싹 달아난 채 깨어나곤 하니까. 끔찍하고 어두운 나날들이었다.
아무튼, 내 흑역사 따위는 지금 이 자리와는 상관없지.
스멀거리려는 옛날 일은 떨쳐내고, 여기에서 있었던 일에 다시 신경을 집중했다.
루시탄은 장본인이니까 어쩌면 냉정하게 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으으음. 왕자 나리는 둘째라고 했으니 좀 더 어린 쪽이겠네. 그럼… 이 쪽인가? 이 쪽 아이가 좀 더 작달막하니까 말야.”
카르티가 침대 쪽으로 다가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 안을 내려다보았다.
루시탄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루시탄은… 뭐라고 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구태여 우리 둘을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쪽?”
“좀… 귀엽네. 루시탄 주제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너희들.”
루시탄이 겨우 피식 웃으면서 결국 다가왔다. 제 어렸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아마도 루시탄일 것 같은… 조금 더 작은 쪽의 아이와, 그보다 조금 더 덩치가 있는 큰 쪽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시탄… 그러고 보니 너 형이랑 몇 살 차이랬지?”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지.”
그럼 미하도르는 나보다 한 살 위일 것이다. 내가 이 녀석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기억하니까. 확실히,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그 정도 나이 차이가 있는 꼬맹이들로 보였다.
“그럼 역시 이 작은 쪽이 너야?”
“아니.”
엥?
뭔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카르티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루시탄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작은 쪽이… 미하도르라고?
“…잠깐. 잠깐. 이쪽이 네 형이라고? 두 살 터울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
카르티가 몹시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흔들고는 잠든 아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심코 뻗은 갈색 손끝이 유령처럼 아이의 몸을 슥 통과했다.
“형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다더군. 그래서 동생인 나보다도 몸이 약하고 작다고 했어.”
…으으음, 그럼 좀 이상한데.
어떻게 그렇게 폭풍성장한 거지? 내가 기억하는 1년 전의 미하도르는 분명 누가 봐도 루시탄의 형이라고 여겨지는 미남자였다. 그렇게 말하니 루시탄이 조금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네 형이 너보다 잘생긴 건 사실이잖아.”
“형만한 아우 없어서 미안하게 됐네.”
토라지긴.
뭐 아무튼. 바깥의 사정은 참 심각하게 흘러가는데, 남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이 이렇게 유유자적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수소문을 해서, 치유 능력을 가진 걸리버를 찾았다고 들었어. 그렇게 궁에 오게 된 게 바로…”
“로젤라이란 말이지….”
그렇게 눈이 맞아서, 약혼자가 되고…
결국 로젤라이는 발스턴의 손에 죽었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 남긴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다.
발스턴이 개자식인 건 로젤라이를 죽인 탓도 있다.
루시탄은 그걸 알지 않기를 바라건만.
[울자크 전하!]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잇고 이어지는 동안, 다른 쪽의 문이 열렸다.
숨이 턱에 닿은 병사 한 명이 뛰쳐들어와 울자크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루시탄과 나, 카르티는 어딘지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뛰어들어온 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면, 그건 여기에서부터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프레드릭 님께서…!]
프레드릭?
자신이 알고 있는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이다.
루시탄도 잘 알고, 아니 이 나라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을 찾는 쪽이 더 드물겠지.
칼 프레드릭 바츠. 국왕을 수호하는 ‘매의 기사’이자 이 나라 최강의 검사.
다음 울자크가 내뱉은 한 마디는, 충격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했다.
[‘형님’께서 어떻게 되셨단 말이냐!]
루시탄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