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19화 (119/157)

〈 119화 〉 2 ­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3)

* * *

(3)

일단 눈앞에 짙게 깔린 어둠을 나아갈 수밖에 없다.

등불을 들자 안에서 술렁거리는 푸른 불빛이 길을 비추었다. 발밑만을 겨우 밝히는 미약한 빛이라도, 지금은 이 작은 등불뿐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반딧불이 같은 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추는 어둠에 의지해 천천히 발을 떼었을 때,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어둠 속 풍경을 어디에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 모를 푸른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그리고 밤의 어둠이 내려앉아 회색조로 보이는 궁전. 어디였더라, 여기가.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 어디였더라, 여기가….”

“남의 집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지 그래.”

집에 일일이 이름 붙은 게 더 이상하거든.

아니, 그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난 루시탄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았다.

등불을 들어 올리니, 푸르스름한 불빛이 녀석의 얼굴을 비춰서 한층 더… 호러스러웠다.

“…눈부신데.”

“아니, 설명부터 하라고.”

뚱한 표정이 된 루시탄에게서 등불을 내리자 녀석은 눈을 한번 비비고는 입을 열었다.

루시탄이 들려준 바깥 상황은 꽤… 충격적이었다.

“이게 현재 상황이야.”

“아이고, 골치야….”

드래곤이 쳐들어온 이상의 난장판이 벌어졌다니.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게 차라리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

“웬즈데이… 무모한 짓이나 벌이고 말야.”

“그야 널 닮아서 아니겠어?”

“네이, 네이. 늘 무모한 짓이나 벌이는 여자가 바로 나….”

루시탄의 힐난에 너스레로 넘기려고 했는데, 평소처럼 이죽거리는 대사가 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돌려보니, 무척이나… 굳은 표정을 한 녀석이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

“왜 그렇게 봐?”

“무모하다는 걸 알면 조금… 그런 점을 고칠 생각은 없는 거냐, 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 일단 일을 수습할 생각을 하는 게 먼저 아냐? 왕자 나리.”

“난 왕자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왜 갑자기 이렇게 골이 났어?

루시탄이 화를 내는 얼굴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이 죽을동 살동 발버둥치고 있으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좀 도와주라고.

“알았어, 알았어. 적당히 할 테니까 이번만은 좀 도와줘. 안 그래도 이런 데 계속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슬슬 어딘가 맛이 갈 것 같았거든. 와준 건 고맙게 생각해. 그런데 대체 어떻게 왔어?”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사과도 조금 건성건성 나올 수밖에 없다.

루시탄은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미간에 골을 깊이 패고 있었지만, 어쨌든 한숨을 쉬어서 불편한 감정을 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대마법사 헤카이트의 주문으로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어. 바깥 상황은 일단… 말한 대로. 지금은 외부에서는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안에서부터 공략해보자는 계획이지.”

“헤카이트 당주가… 그렇다고 해도 당장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가 않단 말이지.”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흔들었다.

“내가 가진 건 이것뿐이고. 이걸로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슈마헤트가 준 건 이것 뿐이야.”

“무슈마헤트가?”

그러고보면 루시탄은 정작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

이번엔 내가 설명을 할 차례인가보다. 또 화나게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게… 무슈마헤트와 거래를 했거든. 그 녀석의 아이… 라고 지가 멋대로 생각한 용의 심장을 돌려주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짓겠다고. 그런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틀어졌어.”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또다른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빛무리로 일렁이더니 이내 아는 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센이 새로 단련해준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카르티가, 정신 세계의 감촉을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한바퀴 돌아봤는데, 특별히 단서가 될 만한 건… 요, 로제.”

“요, 내 친구 카르티. 이렇게 살아서 보니 좋네.”

주먹을 맞대고 아직 서로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가볍게 자축했다.

사실 이 상황이 ‘살아있다’라고 말하긴 미묘하지만. 일종의… 유체이탈 상태인 거 맞지?

“그래. 카르티 씨. 그쪽이 이렇게 되기 직전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었지. 이 무모한 녀석이 알아듣게 한번 더 말해주지 않겠어?”

루시탄의 말에는 가시가 돋쳤다.

아니, 내가 무모하게 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미 충분히 아는 녀석이 저러니까 슬슬 나도 부아가 치밀려고 하는데.

“나도 본대로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말야. 그, 발스턴이라는 자식이 마검으로 자기 상처를 푹 쑤셔버리니까… 거기서 뭔가 더럽게 징그러운 게 꾸물거리면서 기어나왔단 말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자기가 본 게 얼마나 끔찍하고 역겹게 생겨먹었는지를 카르티는 열심히 어필했다.

…꽤 그로테스크하다는 건 알겠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

아니 그보다 왜 하필 눈이야, 발스턴 그 자식은. 내 눈 하나를 해 먹더니 그게 얼마나 빌어먹게 아픈지 알고 싶었나?

“뭔가 좆됐다 싶어서, 로제 니 몸을 챙겨서 부랴부랴 튀었지. 그 괴물 자식이 쫓아오는 건, 웬즈데이가 막아줬고.”

“덧붙여 헤카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웬즈데이는 그… 네가 소환한, 샤무 뭐라고 하는 그 마물의 힘을 폭주시켜 지금 서로의 힘이 동등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그 괴물이 우위를 점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도 하더군.”

“샤무라마트야. 좋아, 다 좋은데….”

왜 여기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이름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분명 블라우로제 별궁이었지. 루시탄이 갖고 있는 궁궐이자, 성녀 로젤라이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

여기는 대체 누구의 정신 속이란 말야? 설마, 발스턴 그 개자식의?

“…으음. 나도 왜 여기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어.”

“여기가 대체 어디기에?”

그러고보면 카르티는 모를 만도 하지.

“블라우로제 별궁이야. 이 녀석의 집이지.”

“사실 내 집이라는 감각은 별로 없지만. 일단 좀 뒤져보자고. 대체 왜 여기가 나타났는지도 나도 알고 싶으니까.”

집주인(?)인 루시탄이 앞장섰고, 나와 카르티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 정원에서부터 궁궐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정원의 푸른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본관 정문의 문이 저 스스로 소리도 없이 열렸다. 푸른 어둠이 걷히면서, 안에 걸린…

“어라?”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다.

분명 여기에 로젤라이든, 아니면 루시탄의 할머니인… 으, 이름이 생각 안 나.

아무튼 그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았나?

“뭐야. 왜 초상화가 없지? 그, 있었잖아. 너희 할머니이든, 로젤라이든….”

“엘레오노레 라이산더 알트슈타인 팔케. 그러게.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은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일이….”

초상화가 없어서 무척이나 허전한 정문을 지나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예전에도 이렇게나 을씨년스러웠나…? 마치 막 지은 것처럼 휑하게 비어있는 벽면에 아무 미술품이나 장식품이 없는 것이, 알고 있는 장소인데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로젤라이의 일기장을 매개로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봤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제대로 궁궐다운 화려한 모습이었던 기억이지만, 여긴 마치 이제 막 지어진 것 같은… 그런 스산함만이 감돌고 있잖아.

“집 좋구만. 왜들 그런 얼굴이야? 난 이런 집에서 좀 살아보고 싶네.”

“대마법사 케라우노스가 가난한 생활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은데.”

“그 영감은 집이 큰 걸 별로 안 좋아해. 밤중에 시장하거나 술 한잔이 고플 때는 식당이 가까운 편이 좋다나.”

식당과 가까운 곳에 방을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뭐, 케라우노스 씨의 가치관이야 그렇다치고, 일전에도 올랐었던 계단이 보이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루시탄은 표정을 지운 듯이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슬슬 녀석도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한 모양이다.

“루시탄, 여긴 아무래도….”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일단 왜 여기인지 좀 들여다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야, 니들끼리만 알아들을 말 하지 마. 난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따돌릴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뭐.

일단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여전히 미술품 하나 걸려있지 않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을 관리하는 하인이나 메이드도 보이지 않는 이 성에 대체 그 녀석은 무슨 기억이 남아있는 거지?

“저 방이었던가?”

결국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어, 여러 가지로 기억이 남아있는 그 방 앞에 섰다.

미하도르와 로젤라이의 기억을 보았던 그 방. 즉, 로젤라이가 발스턴에게 죽임당했던 그 방이다. 내 몸을 쓴 로젤라이가… 이 방에서 미하도르와 생애 마지막 재회를 했었던가.

음, 그 때 얘기는 안 할래.

기억이 애매하기도 하거니와, 루시탄이 들으면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들어가 볼까?”

“아니, 잠깐…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막상 루시탄은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해보였다.

손으로 얼굴을 짚고는 후우, 후우… 조금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숨을 내쉬면서 다른 손으로는 문고리를 짚은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건 역시…. 그 녀석의 기억이었던 건가? 대체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그 자식은….”

무엇이 이 녀석을 이렇게 동요하게 했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여기는 발스턴의 기억이 틀림없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다르기에, 아마 로젤라이가 죽는 순간의 장면을 보진 않겠지만….

어쩌면 그보다도 더 지독한 과거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흠칫 몸을 떨게 했다.

그 순간의 루시탄의 푸른 눈을 보았다.

“야, 너… 무리하지 마. 조금 심호흡하고. 생각 좀 가라앉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이제껏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그 비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대와는 별개로, 두려움 또한 있겠지.

나는… 그렇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다.

“…괜찮아. 이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가 있다면, 그 자식이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정도는 값싼 대가지.”

루시탄은 조금 짐을 덜어낸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직도 미련스레 쥐고 있는 문고리에 손을 마주 겹치곤 시선을 주고받았다. 서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찰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마치 시간을 십수 년 전으로 되감는 듯한, 오래된 녹슨 문고리가 맞물렸다.

이 너머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그래.

“여신만이 아시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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