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18화 (118/157)

〈 118화 〉 2 ­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2)

* * *

(2)

여기는 무슈마헤트의 정신 속이다. 바닥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발밑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호한 감각 속에서, 진동만이 또렷했다.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밖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나? 무슈마헤트!”

아니, 바닥만이 아니다.

지금 이 정신공간 전체가 전율하듯이 흔들리고 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아마 내게 반가울 만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무슈마헤트,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나의 아이를 일그러뜨리고, 나의 정신을 좀먹은 이들이 나의 육신을… 힘을 빼앗고 있다.]

“뭐?!”

설마 발스턴이 밖에서 무슨 짓을 벌이기라도 한 거야?!

카르티… 그녀의 안위가 걱정된다. 카르티가 당하기라도 했다면… 발스턴, 그 자식을 맨손으로 생명력을 빨아내 죽이고 말 것이다.

괴로운 듯 읊조림이 희미하게 전해져왔다.

지금까지 이 나라 전체를 공포로 떨게 하는 이의 목소리치고는, 너무도 흐릿하다.

[지금은 나의 심장을 촉매로…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의식을…]

“그거,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라는 뜻이지?!

무슈마헤트의 의식이 점점 가물거리면서 울리는 소리마저도 그나마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시간이 없다. 마녀여. 육신을 빼앗겨버리면… 네가 말한 가능성도 시험할 수 없게 된다. 그리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당신, 버틸 수 있겠어?! 날 내보내 줘, 어떻게든… 내가 밖으로 나가서 막을 테니까!”

[…그건 어렵겠구나. 이미 네 마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악이 태동하고 있으니.]

“드래곤이 아니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얘기할 순 없어?!”

무슈마헤트의 사념이 잠시 울림을 멈췄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사역마를 불러내려 하는 것이다. 아니, 사역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인즉, 그저 그건 ‘마(?)’ 그 자체. 네가 그랬던 것처럼….]

샤무라마트. 지금은 웬즈데이가 제어하고 있는 사역마를 떠올렸다.

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89위의 마왕, 그중 하나를… 그것도 아주 일부만 소환하고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내 힘에는 벅찼었다.

그런 것이 하나 더… 아니, 어쩌면 내가 소환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힘으로서 불러낼 속셈이라고 생각하면 육체가 없는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아니, 일단 침착하자.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봐도 허둥지둥해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일단 이 공간을 빠져나가서 대책을 강구해야…

“…내보내 줘, 웬즈데이!”

일단 지금 이 정신세계에서 내 영혼을 현세의 몸과 이어주고 있는 건 웬즈데이다.

내 말이 들리는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웬즈데이? 왜 그래, 밖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너에게 나의 힘의… 일부를 맡기겠다. 네가, 어딘가에 있는 마의 중추를…]

문득 손에 묵직한 감각이 있었다. 들어보니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는 등불이 잡혀 있었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고?

“무슈마헤트?”

…큰일이다. 더 이상 무슈마헤트조차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아예 무슈마헤트의 의식 자체가 이 영역에서 사라진 것 같다. 정말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하는 수 없어.’

나갈 수도, 밖의 상황을 파악할 수도 없다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등불을 들었다. 한 발짝 내딛고 나니 단단한 바닥의 감촉이 새삼 느껴졌다.

마음 단단히 먹자.

너무 자주 붙들리긴 하지만,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나.

“상황은?”

드래곤, 무슈마헤트와의 싸움이 아주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무슈마헤트는 활동을 멈췄고, 그 머리 위에서 돌연 나타난 이형의 마물에 의해 무슈마헤트의 전신이 집어삼켜졌다.

거기에 더하여… 지금은 그 이형의 존재를 또다시 갑작스레 출현한 나무가 감싸서, 지금 베어링턴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는 상황이다.

열 개의 가지를 뻗은 나무는 또다시 열 개의 뿌리를 박은 채 어떤 마법과 스킬로도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왕자, 루시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는 그런 내용이 쓰인 보고서를 받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영병들이 총동원되어서 나무 주변에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영병들의 지휘를 루시탄이 맡아 베어링턴 외곽을 방어하는 사이 알트슈타인 최강의 검사, 칼 프레드릭 바츠 경은 모험가들과 함께 일선에서 드래곤과의 전투를 치렀었다.

“바츠 경,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베어링턴 밖에 출몰한 몬스터들은 이제 격퇴되었다고 들었네만.”

비록 검으로는 적수가 없는 경지에 이른 바츠 경이라고 해도, 드래곤과의 전투는 나이를 먹은 그에게는 꽤 벅찬 일이었다. 온몸이 피와 피로로 물들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만… 르누레르 숲의 늑대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루시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는 그는 몹시도 동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있어야 할 얼굴이 하나 없다. 설마 하는 낭패감이 얼굴에 스쳤다.

“…그 아가씨라면 돌아오지 않았네.”

한발 앞서 루시탄의 동요를 눈치챈 바츠 경이 짧게 덧붙였다.

루시탄은 그렇습니까, 하는 말만 내뱉곤 입을 다물었지만 바츠 경은 그를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었다. 어둡게 변하는 얼굴색이, 그 여자가 루시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읽어낼 수 있을 만큼.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았었죠. 각오했습니다.”

“아… 저기 말야.”

듣기 곤혹스럽다는 듯이 갈색 얼굴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대마법사 케라우노스와 함께 다니던 전사였던가. 오늘 싸움에서도 활약했었다고 들었다.

“아직 안 죽었거든, 걔.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

“걔가 그렇게 쉽게 죽을 녀석도 아니고.”

카르티의 말을 받은 것은 루시탄도 잘 아는 와인빛 머리카락의 마녀, 키르케였다.

자랑하는 와인색 풍성한 머리카락도 오늘은 치장할 틈조차 없어서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서 인상이 한층 와일드해졌다.

“몸 쪽도 정신 쪽도 일단은 건재하다고.”

“낭보이긴 하지만… 어떻게 확신하지?”

“그건 솜씨 좋은 치유사가 설명해주겠지.”

키르케의 배턴은 이제 치유 전문 마법사인 페리링에게로 넘어갔다.

오늘 페리링은 후방에서 다른 치유사들과 함께 부상자의 치유에 전념했다. 전투 마법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목숨을 건진 모험가들에게는 이미 성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나.

“오늘 싸움에 나서기 전에 여기 계신 다른 분들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드렸어요. 술라 스승님께 배운 주문인데, 딱 한 번 죽음에 임박하면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주문이에요.”

“아하. 그래서 내가….”

발스턴이 제 목숨을 제물로 바친 후에 나타난 알 수 없는 마물에게 로제이아의 몸이 공격당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앞을 감싸고 나섰을 때 그녀의 몸과 함께 이 자리에 뿅 하고 돌려보내졌었다.

“…그건 어디 영체가 다른 곳에 있어도 소용이 있는 마법인가?”

“일단 어느 쪽이든 완전히 죽는 순간 주문이 발동했을 거에요. 하지만 로즈 씨의 몸에는 아직 그 주문이 남아있죠. 그렇다는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안에서 나올 수도 없는 모양이고요.”

조금 침울해진 페리링의 어깨를 카르티는 한번 토닥이고는, 루시탄을 보았다.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넌 그런데도 그 녀석이 죽었다고 단정부터 지은 거냐고.”

“…판단이 일렀던 건 인정하지.”

어흠, 하고 조금 가라앉으려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알트슈타인에 봉직하는 대마법사 중 한 명, ‘횃불의 마녀’ 헤카이트였다.

“문제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요. 저 나무를 그대로 둘 순 없어요. 지금은 어찌 된 노릇인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하지만… 뭔가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요.”

“아예 불태워버리는 건? 헤카이트 당주님,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아?”

“…로제이아까지 불태워버려도 좋다면 말이에요. 사매를 조금 아낄 생각은 없나요. 입장상 당신은 그녀의 언니라고요, 키르케.”

키르케의 한 마디에 헤카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힐난했다.

“역으로 그 나무에 붙들려있는 거라면… 나무를 불태워버리면 해결되지 않나 하고 생각한 거라고요.”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짙은 갈색 남자, 즈왈트가 묵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문 채로 무척 우울한 낯빛이었다.

“…나는 알 수 있다. 저 나무는… 나와 같이 주인을 섬기는 골렘인 ‘웬즈데이’가 만들어낸 것이다. 저 나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나무가 억누르고 있는… 더 끔찍한 무엇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골렘이란 말야, 저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래.”

키르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헤카이트는 잠시 턱을 손으로 짚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드래곤과 싸우면서 강대한 마의 기척을 느꼈어요. 그 존재가…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이고, 만약 로제이아가 가지고 있는 ‘가브롤의 지팡이’를 사용해서 주문을 사용한 거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네요.”

“헤카이트. 그대가 생각하는 그 강대한 마의 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도 말해주시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을 대변해서 바츠가 부연 설명을 요구하자,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도 꺼림칙하다는 듯이 입술을 조금 다 앙다문 채 부르르 떨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냈다.

“89위의 마왕 중 한 기, 샤무라마트에요. 온 세상에 존재하는 얼굴들을 백 개의 가면으로 갈무리해서 그때그때 다른 얼굴과 모습을 바꿔치기해서 인간들을 현혹하는 ‘허영의 장미’라고 불리죠.”

“이야, 그거 딱 로제…”

눈치 없이 던진 키르케의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별로 곱지만은 않은 시선이라, 키르케는 조금 주눅든 낌새였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미 또한 아니었다.

“…이아 맞잖아. 왜들 그렇게 보는 거냐고, 대체.”

“키르케는 나중에 그 주제로 논문을 제출하도록 하고요.”

“너무해?!”

난데없이 떨어진 헤카이트의 한 마디에 키르케가 펄쩍 뛸 듯이 억울해하는 것을 무시하고, 헤카이트는 말을 이어갔다.

“일단 외부에서 손을 댈 수 없는 이상, 내부에 들어가있는 로제이아를 돕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겠어요.”

헤카이트가 손을 까딱이자 물결친 공간 속에서 두 개의 가죽신이 툭, 떨어졌다.

로제이아가 신고 있던 것과 같은 물건이다. 다른 게 있다면 사이즈 뿐이다.

“그런 이유로, 안에 들어가서 로제이아를 도우러 나설 분은 있으신가요?”

“말할 필요도 없지. 내가 가겠어.”

헤카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첩하게 나선 카르티가 몸을 일으켰다.

페리링이 먼저 나서려 했지만 선수를 놓쳐, 망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 기회는 한 번 남았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고 결연한 표정이었지만…

“나도 들어가게 해 주시죠. 헤카이트 당주.”

페리링의 의자를 또 한발 먼저 뺏은 사람은…

루시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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