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2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1)
* * *
(1)
숨이 뜨겁다.
자신이 흘린 피가 뜨겁다. 몸이 끝모르게 뜨거워져가만 간다. 마치 혈관을 지나는 피가 모조리 불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창을 쥔 손에 감각이 점점 두절되어간다. 대장장이 센이 벼려준 갑옷이 피에 젖었다.
하지만 상대… 마검을 쥔 검사는 생채기조차 입지 않았다. 그 칼에 달라붙은 피는 모조리 카르티의 것이었다.
“…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칼날에 엉겨붙은 피를 촤악, 하고 털어내면서 마검사, 발스턴이 귀찮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물론 카르티도 로제이아에게 들었던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대마법사 케라우노스의 양자… 라고 했지. 그의 전위를 맡고 있다고 들어서 한껏 기대했건만 참 실망스럽군.”
“네놈 같은 악당한테서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하악, 하악, 하악…
빌어먹을. 숨이 정돈되지 않아. 머릿속도, 뱃속도, 가슴속도 뜨거워서 미칠 것 같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그런 거 아닌데. 어떻게든 숨을 되돌리려 애쓰면서 발을 조금 넓게 벌리면서 자세를 낮췄다.
“넌 그 여자에 대해 뭘 알지?”
“뭐?”
“그 마녀에 대해 뭘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로제이아, 로제이아.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로제이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무척이나 드세고, 매사 무대포인데다, 오지랖이 심하고,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녀석이 있다는 것.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
“그 녀석에 대한 얘기 따윈 몰라. 그렇다고 네놈의 입에서 듣는 것도 별로 마땅찮은데. 왜, 갑자기 손이 아니라 입이 심심해졌냐? 아, 좋은 칼 두고 입 아프게 뭘 떠들어? 들어와!”
“…그 계집과 연관된 이들은 하나같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군.”
탄식하듯한 말과 함께 발스턴이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던 칼끝을 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순간, 찌릿하게 위험신호가 몸을 움직이게 했다. 생각하기보다 먼저 움직인 몸이, 칼의 진로에 창날을 부딪히게 만들었다.
“큿…!”
찌릿찌릿한 독기가 창대를 타고 손에 감겨붙었다. 손 끝에 감각이 없었던 것은, 독이 번져서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검으로 무슈마헤트를 조종하면서, 그녀의 독을 한껏 빨아들인 것이겠지.
“대체, 어디서 그딴 잡검을, 손에 넣은 거냐고…!”
“흠. 내가 어떤 자들과 손을 잡았는지 듣지는 못한 건가?”
“걔가 말한 ‘복음회’인가 하는 놈들이라는 건 알아!”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창을 크게 휘둘러 칼날을 떨쳐내고는, 발끝이 용의 비늘을 딛었다. 내뻗으면서, 화살처럼 쏘아냈다.
그딴 거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
그냥 네놈을 내 창으로 쑤셔버리면 그걸로 족해!
“네 생각이 네 창에 그대로 드러난다. 넌 그 여자와 날 대면시키고 싶지 않은 게지.”
“알면, 그냥 그 칼로 네 배때기를 스스로 쑤셔버려주는 게 어때?”
“사양하지. 난 이 칼로 그 계집의 배를 가르길 원하니까.”
“그렇게 둘 것 같냐!”
양손으로 창을 굳게 움켜쥐고, 연거푸 찌르기를 꽂아넣었다.
온몸의 힘을 창 끝에 집중시켜서 내쏜 혼신의 찌르기가 아홉 번, 발스턴의 실루엣을 찔러냈지만, 그는 마치 미리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번번이 창날을 피해냈다.
“생각이 많으면 몸은 둔해지지. 그럼 무기는 더더욱 둔해진다. 그런 둔해빠진 공격으로는 내 그림자조차 맞히지 못한다.”
“닥쳐, 빌어처먹을 자식아!”
“그 계집의 재주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투구의 슬릿 사이로 숨을 툭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를 피부로 느껴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의 분개가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너 지금 날 비웃었냐?!”
“비웃을 만도 하지. 계집 주제에 계집한테 흑심을 품고. 그 계집이 어떤 계집인지도 모른 채.”
“계집계집 시끄럽네, 개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지껄엿!”
찌르기가 먹히지 않으니, 창대를 크게 휘둘러 쓸어내리듯 타격을 가했다.
칼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눕혀서 후려치는 창대를 받아내고, 그렇게 잠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손목이 시큰하도록 밀어붙이는 힘을 그대로 받아내기는, 이럴 때는 길이가 긴 만큼 불리했다.
“그 계집은 창녀다. 레짐이라는 마을을 아나? 그 항구도시에서 술에 절은 해적, 도박꾼, 뱃놈… 그런 이들의 욕망을 다리 벌려 받아내고, 씨를 받는 대가로 돈을 받아내서 연명하던 천한 계집이란 말이다. 상대가 사람이든 오크든 트롤이든 가리지 않아. 누가 알겠나? 짐승과도 몸을 섞었을지. 심지어….”
발스턴의 투구 사이, 아주 약간 벌어진 슬릿 사이로 경멸의 눈빛이 지나갔다.
“왕자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나와도 동침했었고 말야.”
“이 개자식아아아아악!”
마치 검을 휘두르듯, 머리 위로 창을 들어올렸다가 내려치는 커다란 동작.
하지만 그런 분노에 몸을 맡긴 공격이 발스턴에게 맞을 리도 없었다. 오히려, 카르티의 텅 빈 빈틈을 보이는 꼴이었다.
발스턴은 그 빈틈을 놓아줄 정도로 관대하지 않았다.
푸우욱… 스걱! 카르티의 흉갑을 관통하여, 칼날이 왼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등으로 빠져나오면서, 뜨거운 감각이 폭발하듯이 타올랐다.
“아둔한 놈. 그딴 천한 계집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았다.”
단숨에 즉사했을 거라고 생각한 카르티의 손이 발스턴을 콱 붙들었다. 쿨럭, 하고 입가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숙였던 얼굴을 들면서, 바들거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카르티는 웃고 있었다.
“…잡았, 다, 이… 빌어처먹을 새끼, 야!”
화르륵.
어깨 흉갑을 붙든 손에서 불길이 일었다. 불길은 카르티의 손에서부터 팔로, 그리고 얼굴과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발스턴의 눈이 좁혀들었다.
“…스킬인가.”
검을 뒤로 빼내었다. 고기나 뼈가 걸리는 감촉은 없었다.
지금의 카르티는 말 그대로 불길이었다. 창을 쥐고 갑옷을 입은 불꽃으로 화해, 서 있었다.
우루 늪지에서 거의 죽었다 살아났었을 때… 카르티의 스킬, ‘블랙스미스’는 2단계의 개방을 맞이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녀석이 창녀든, 아니든… 왕자와 붙어먹든 나랑은… 나랑은 상관없어!”
죽을 뻔했던 것이 비단 우루 늪지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대마법사 케라우노스의 전위로서 죽음의 위기를 숱하게 헤쳐온 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이었든, 아니면 누군가의 안배에 의한 필연이었든… 카르티의 스킬은 우르 늪지에서의 임사체험으로 진화했다.
“질투 따위 같은, 네놈이 생각하는 더러운 흑심이 아니라고!”
말하길, ‘홍련의 권화(아그니스트라)’.
분노의 고함을 열풍처럼 외치며, 창에까지 불꽃을 두른 카르티가 달려들었다.
발스턴은 침착하게 칼을 앞으로 뻗어 갑옷 사이의 빈틈을 꿰뚫었다. 물론 그 빈틈이 빠짐없이 채운 불꽃을, 검으로 벨 수 있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발스턴이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그대로 마검에 힘을 불어넣어, 검풍으로 불꽃을 흩어내려 했다.
“네놈이… 뭘 알아! 난 그 녀석에게 빚을 졌어, 난 그 빚을 갚고 싶은 것 뿐이라고!”
퍼엉, 하고 공기가 폭발하면서 카르티의 왼쪽 어깨 부위의 불길이 파열했다.
그대로 내리그으면서, 바람을 부른 칼날로 불길을 흩어내려는 칼질과, 그의 투구 슬릿 사이, 왼쪽 눈을 후벼파는 창날이 교차했다.
“카학!”
“끄… 네, 년…!”
피해는 양자에게 동등했다.
좌반신의 불길이 흩어져버렸고, 발스턴의 깨진 투구 사이 슬릿에서 피가 터져올랐다.
“헤, 헷… 어떠냐. 네놈이 잡아먹은 그 녀석의 눈 값… 내가, 대신… 받았다!”
“…네년마저 날 비참하게 만드는가.”
으드득… 증오에 찬 소리가 투구 사이에서 울렸다.
발스턴은 이제 거추장스럽기만 한 투구를 벗어버리고, 분노와 화상에 일그러진 얼굴로 카르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년과… 그년의 주위에 모여드는, 들개 같은 무리들. 내 충의, 내 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그 창녀 계집을 증오한다, 저주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악마에게라도 몸을 바치리라!”
“개소리 집어쳐, 네 녀석이 그 녀석에게 손대게 놔둘 것 같냐!”
카르티가 이를 갈면서 달려들었다. 이제 어차피 저 녀석은 싸울 수 없다.
눈을 창으로 뚫어버린 이상, 저 상태에서 멀쩡히 칼을 휘두를 순 없다. 그런데…
“으아아아아아아아!”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 발스턴에게서 뿜어져나왔다. 입이 아니라 전신으로 외치는 듯한 저주의 울림에 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카르티의 몸에서 불길이 씻겨져갔다. 그 몸은 스킬을 시전하기 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뭐… 야. 왜? 아직 더 싸울 수 있는데….”
갑자기 왜 스킬이 중지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다만 이유모를 불길함만이 가슴 속에서 술렁거렸다.
“하, 하, 하… 봐둬라, 빌어먹을 걸리버들. 다른 세계에서 온 기생충들아… 이게 너희들의 ‘힘’의 정체다. 너희들의 힘으로, 너희들 걸리버들을 전부 죽여주겠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발스턴의 행동은 그야말로 광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상했지만, 두근거리는 불안감과 함께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우루 늪지. 키메라. 상대를 잡아먹는 것으로 그 힘을 취하던 괴물…
발스턴이 칼을 높이 쳐들고, 그것을… 창에 꿰뚫린 자신의 눈구멍에 푸우욱 밀어넣었다.
“뭘 하려는 속셈이야, 이 개자식아!”
“크하하, 하핫, 핫, 핫! 무슈마헤트여, 아이를 잃어버린 어미여, 그 아이를 일그러뜨린 힘으로…!”
한쪽 손으로는 칼자루를 움켜쥔 채, 내뻗은 다른 손에 검붉은 액체가 담긴 수정 약병이 돌연 나타났다. 안에서 어지럽게 기분나쁜 기척이 웅얼거렸다. 저건… 설마?!
발스턴은 그것을 자신의 머리 위에 끼얹었다. 콸콸콸… 막을 새도 없이, 찢겨진 상처에, 눈구멍에, 콧구멍과 입에, 귀에… 검붉은 액체가 스며들었다.
“빌어먹을… 모든 증오스러운 걸리버들을, 집어삼켜…!”
콰득, 콰득, 콰득.
뭔가가 그 뱃속을 짓이기고, 두들기고, 휘젓은 끝에 찢겨져나왔다.
그 순간, 발스턴은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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